[내 인생의 맛] 가수 패티김과 평양냉면
"냉면 앞에서 전 언제나 혜자(본명)예요, 혜자"
정상 지키려 음식 절제해도 유일하게 마음껏 즐겨먹어
배불러 세 젓가락 남겼을땐 美공연 가서 속상해하기도
제가 데뷔한 게 1959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넘었지요. 그 긴 세월 무대에 서면서, 얼마나 아픈 채찍질이 필요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예요. 50년은 '패티김을 위해 견딘 혜자의 세월'이기도 해요. 제 본명이 혜자거든요.
정상의 자리를 위해 혜자가 절제하고 인내해야 했던 대표적인 것이 음식이에요. 미식가들만 음식을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저처럼 음식을 맘껏 못 먹는 사람들이 사실 머릿속으로 음식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죠. 음악에 나를 바친 이후론 하루하루 끼니가 나와의 전쟁이었어요.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요. 초콜릿 아이스크림 좋아하지만, 그거에 탐닉하면 패티김은 없는 거니까, 혜자는 참아야만 했어요. 가끔 유혹을 못 이겨서 입에 넣었다가도 뇌에서 바로 중지명령이 내려와요. 보통 여성분들도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특히 더 심했죠. 저는 패티김이니까요.
무대에 서서도 허기에 시달릴 때가 잦았어요. 배가 부르면 거북하니까 공연 3시간 전에는 식사를 했어요. 하루 2번 공연하는데, 2회 때가 되면 배에서 '허기 교향곡'이 얼마나 요란하게 연주되던지. 베토벤 '꽈과과광!'보다 더 웅장하게 '꼬르르륵' 울려요. 박자도 척척 맞지요. 아이고, 배고파, 꼬르륵, 어머나, 어쩌나, 꼬르륵. 어찌나 요란스러운지 그 소리가 청중한테 들릴까 봐 걱정이 될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땐 슬쩍 마이크를 올려 입 근처에서 멀리로 보냈죠. 겉으로 보기엔 우아하게 들어 올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허기를 감추려는 거였어요. 그럴 때마다 생각했어요. "혜자, 너 참 불쌍하다, 미안하다. 패티김을 위해서 네가 희생하는구나." 떠올린 건 팬들이었어요. 내 공연을 보고 감동받았다는 팬을 생각하면 견디게 되고 감사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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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릴 때부터 즐겨온 냉면을 마음 편한 음식으로 꼽는 패티김. 지난 19일 강남구의 한 냉면 전문점에서도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웠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그런 제가 맘을 풀어놓고 즐기는 음식이 딱 하나 냉면, 그중에서도 평양냉면이에요. 아버지는 함경도 출신, 어머니는 개성 출신이라 어릴 때 즐겨 먹었어요. 겨울에 동치미 국물에 국수 삶아서 한 그릇 뚝딱이었죠. 8남매가 모여 앉아서 냉면 먹고 다 같이 노래했어요. 목청 좋은 가족으로 동네에서 유명했지요.
어릴 때 즐겨 먹던 냉면을 특히 가슴에 남겨준 건 둘째 오빠예요. 날리던 신문기자였죠. 35년 전쯤으로 기억해요. 그때 내 노래 '이별'이 무섭게 뜰 때였어요. 여기서도 이별, 저기서도 이별이 들렸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한 달에 28일 일했지. 그 무렵에 미국 공연을 가게 됐는데, 둘째 오빠가 같이 밥 먹자고 불렀어요. 뭐 먹고 싶으냐고 해서 냉면을 댔지. 막내하고 같이 서울 근교 냉면집으로 갔어요. 판문점 근처였던가. 혜자는 꽁꽁 숨고 패티김으로 완벽하게 서기 위해 버티다가, 오랜만에 오빠하고 마주앉으니 마음이 저절로 풀어지더라고요. 상 위에 놓인 냉면이 유달리 더 당겼어요. 수수하고 슴슴하면서 밍밍한 국물을 정신없이 마셨죠. 허겁지겁 먹으니까 오빠가 놀렸어요. "야, 인마, 그렇게 맛있냐. 남들이 놀리겠다." 말은 무뚝뚝하게 했지만 속으로는 제가 안쓰러워보였나봐요.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는데 비행기 시각이 다가와요. 게다가 배도 불렀고요. 딱 세 젓가락이 남았는데, 아무리 기를 쓰고 먹으려고 해도 배가 불러서 안 되겠어. 아깝다 싶었지만 가게를 나섰죠. 문제는 비행기를 타고부터였어요. 오빠랑 같이 있을 때 그걸 끝까지 다 먹을 걸 하는 생각이 계속 나는 거였죠. 미국 가는 13시간 내내 '맞아, 다 먹을 걸 왜 남겼나, 왜 남겼나'.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도 냉면 세 젓가락이 생각났지 뭐예요. 오빠 얼굴하고. 잠이 깨도 냉면이 아깝고, 속상했어요. 아마 그 냉면이 내가 패티김이 되기 위해 참아온 모든 것에 대한 상징처럼 느껴졌나봐요.
그 후로도 먹으러 갔다 하면 냉면집이에요. 외국 가기 전에 먹고 도착해서 먹고. 냉면 그릇을 앞에 놓고서는 저는 편안한 혜자가 돼요. 그 면발이 제게는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위안 같다고나 할까. 다른 건 먹으면 혹시나 살찔까 봐 걱정되고 스트레스받는데 냉면은 안 그래요. 항상 내 속을 편안하게 채워주죠.
요즘에는 특히 음식을 더 철저히 가려 먹어요. 나이 드니까 살도 쉽게 찌고 잘 안 빠지고, 그러니까 당연히 더 긴장하고 더 노력하죠. 물론 힘들어요. 하지만 패티김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참고, 노력할 거예요. 제게는 언제나 오빠와 냉면이 있으니까요.
●패티김은…
1938년생. 고교 졸업 이듬해인 1959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를 시작했다.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찾다가 가수 패티 페이지의 이름을 따 본명(김혜자) 대신 패티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수많은 ‘최초’의 기록을 썼다. 광복 후 일본 정부가 초청한 최초의 한국 가수(1960년)로 NHK TV에 출연했고,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섰으며(1978년),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다(1989년). ‘도전’과 ‘승부욕’이 삶의 추동력이라고 꼽는다. 이번 여름에 행글라이더 타기에 도전할 예정.
●평양냉면은…
주 재료가 메밀… 함흥은 전분 1920년대 남한에 자리잡아
흔히 ‘물냉면=평양냉면, 비빔냉면=함흥냉면’으로 여기지만,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조리방법보다는 면의 종류에 따라 분류된다. 평양냉면은 메밀을 주로 쓰고, 함흥냉면은 전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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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심하면서도 은은한 맛이 일품인 평양냉면. /김성윤 기자 gourmet@chosun.com
조선의 세시풍속서인 ‘동국세시기’(1849)에는 ‘한겨울 음식으로는 평안도의 국수가 으뜸’이라는 부분이 있어 평양냉면이 겨울 음식으로 19세기 이전부터 사랑받았음을 보여준다. 평안도에서 메밀국수가 발달한 것은 논농사가 힘든 지역 특성 때문이다. 겨울에 해가 짧아 저녁을 이르게 먹었기 때문에 밤참으로 국수를 흔히 먹었다.
메밀로 만든 국수를 즐긴 것은 문헌상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냉면’이라는 단어는 조선 중기 문장가인 장유(張維·1587~1638)의 ‘계곡집(谿谷集)’에서 언급된다. 그는 ‘자장냉면(紫漿冷?b·자줏빛 육수의 냉면)’이란 시에서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뚫는다’고 묘사했다. 자줏빛 육수는 오미자즙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냉면이 남한에 자리 잡은 것은 192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낙원동과 광교 등지에서 냉면을 팔았다. 평안도 출신 문인 김남천은 1938년 조선일보에 실린 수필에서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면 차 대신 냉면을 먹으러 간다’고 썼다. 냉면은 6·25 전쟁 이후 월남민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퍼졌다. 불고기 1인분이 60원이던 1960년대 초반, 냉면 한 그릇이 35원으로 고급 외식 메뉴 중 하나였다고 한다(허영만 ‘식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