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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월) 새벽에 잠이 깨어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8시 반에 딸의 차를 빌려 함부르크로 출발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타고 한참 달려가는데 저 멀리서 검은 연기가 계속해서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렇게 검은 연기가 나는 걸 보니, 필시 어디서 큰 불이 난 게 분명했다. 독일에서는 집에 불이 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난민들이 늘어나면서 신나치주의자들이 난민들이 모여 사는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이 몇 년 전에 있어 독일 사회가 아주 시끄러웠었다.
‘도대체 어느 집에서 불이 나나?’ 이러며 달리다가 보니, 우리와 반대방향 고속도로 한쪽의 큰 트럭 한 대에서 불이 세차게 올라오는 거였다. 그 뒤로는 모든 차들이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그 트럭 때문에 반대방향 고속도로에 차들이 밀리며 엄청 막히기 시작하는 거였다. 워낙 불길이 거세서 차량에 비치된 개인용 소화기로는 어림도 없었다. 모두들 소방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고속도로가 편도 4차선으로 총 8차선이 되는 데 건너편 트럭의 불이 얼마나 강한지, 내가 창문을 닫고 3차선으로 달리는데도 닫힌 창문을 통해 전해져오는 뜨거운 열기가 확~! 느껴졌다. 갑자기 소름이 돋으며 옛날 생각이 났다.
고등학생 시절, 집이 부천이고, 학교는 강남구 청담동이라 거리가 굉장히 멀었다. 그래서 후암동의 어느 독서실에서 오랫동안 자취를 한 적이 있었다. 독서실이니 침대가 있을 리 만무했다. 공부하다가 졸리면 책상에 엎드려 자고, 밤에는 자기 집에 돌아간 아이들의 의자를 모아 거기에 담요를 깔고 자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낌새가 좀 이상해 눈을 뜨니 독서실 창문이 훤하면서 불길이 보였다. 깜짝 놀라 “불이야~!” 소리를 지르고는 거기서 자는 너 덧 명의 아이들을 깨워 짐을 챙길 여유도 없이 급히 밖으로 뛰쳐 나갔다. 독서실 건물이 4층이라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대피해 보니, 불은 독서실이 아니라, 바로 옆 건물의 지물포에서 난 불이었다. 비닐 장판과 벽지가 가득한 곳에서 불이 났기 때문에 불길이 굉장히 거셌다. 주인은 조금이라도 건질 것을 건지겠다고 불이 붙지 않은 다른 쪽에 들어가 벽지와 장판을 꺼내려고 애를 쓰고 독서실에서 지내던 몇몇 학생들도 젊은 혈기에 주인을 돕겠다며 건물 한쪽에 들어가 둘둘 말린 벽지와 장판을 꺼내던 일이 있었다. 그때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 깨달았다.
하여간, 고속도로 한 복판에 터키계 운전자로 보이는 남자가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데 마음이 안 됐다. 물론 보험처리가 되겠지만, 혹시라도 일이 잘 못 되면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불 때문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함부르크를 향해 계속 달렸다.
함부르크는 독일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라 차가 많았지만, 내비게이션 덕분에 큰 불편함 없이 목적지에 잘 도착해 권사님을 만나 잠시 담소하고는 바로 점심 식사하러 나갔다. 무얼 드시겠냐고 해서 한식집으로 가자고 했더니 <한미>(Hanmi)라는 한식당으로 인도하셨다. 내 생각에 한미는 아마도 '한국의 맛'(韓味)이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인 듯했다. 먹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다 먹을 수는 없어 이 식당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음식이 뭐냐고 물었더니 ‘육개장’과 ‘오징어 볶음’이란다. 어느 걸 선택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육개장을 선택했고, 권사님은 오징어 볶음, 아내는 불고기가 나오는 백반을 시켰다. ‘한국도 아닌 독일에서 만든 육개장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약간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식사를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주문한 음식이 나와 한 입을 딱! 먹는데 우와~!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육개장을 이렇게 맛있게 먹기는 거의 처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어디를 구경하고 싶냐는 말에 <엘프필하모니>(Elbphilharmonie)를 구경하자고 했다. 엘프필하모니는 항구도시 함부르크에 흐르는 엘베 강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음악당 이름이다. 원래 항구도시라면 바닷가에 있어야 하는데 함부르크는 엘베 강에 세워진 도시다. 그렇다고 해서 바다가 없는 건 아니다. 강을 따라 조금만 나가면 바로 북해로 연결된다. 처음에 함부르크 시에서 건축을 결정했을 때부터 천문학적인 비용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래도 예술의 도시 함부르크를 만들고자 하는 일념으로 건축을 밀어붙여 시작을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 거의 중단 위기까지 몰렸었다. 애초부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데다가 갈수록 늘어나는 건축비 때문에 부자 도시 함부르크가 빚더미에 올라앉을 거라는 둥 별별 얘기가 다 나왔는데 막상 짓고 나니 세계적인 명물이 되어 지금은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함부르크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거기는 입장료를 내지 않고 무료로 입장권을 받을 수 있어 누구든 입장이 가능하다. 물론 음악당 안에만 못 들어갈 뿐 음악당 건물의 외관을 걸어다니며 구경할 수 있다. 우리가 가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는지 정말 대단했다. 입장권을 받아 곡선으로 휘어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아래 그림을 보면 하얗게 휘어진 곡선이 보일 텐데 그게 에스컬레이터다. 엘프필하모니에서 내려다보는 함부르크 시내의 전경과 엘베 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했다. 워낙 함부르크는 북해의 바람이 직격탄으로 불어오는 지역이기도 하고 또 건물 높이 올라온 터라 바람이 강했지만, 구경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서 한참동안 시내경치를 구경하고 잠시 쉴 겸 까페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한참을 얘기하다가 집에 가자고 하여 권사님 집으로 가서 또 차를 마시며 얘기하다가 시계를 보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권사님은 자기 때문에 일부러 먼 길 오셨다며 선물을 주셨는데 선물에 봉투가 있어 “어? 이게 뭔가요?”라며 물었더니 자동차 기름 값이란다. 식사 대접도 받고 선물도 받았는데 기름 값까지 준비해 주셔서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우리도 선물을 준비해 갔지만, 받은 게 더 많았다. 나중에 한국에 오시면 그때는 우리가 받은 원수(!)를 갚겠다고 인사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함부르크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다가 갑자기 첼레(Celle)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첼레는 오래된 건물이 많은 작은 도시로 유명하여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여보! 첼레에 잠깐 들렀다 갈까?” “거긴 왜요?” “나도 안 가봤는데 유명한 관광지야.” “그래요? 그럼 그러세요. 이렇게 가다가 들를 수 있을 때 들러야지 언제 우리가 일부러 여기에 올 수 있겠어요?” “그렇지? 그럼 방향을 틀자!”
이러고는 방향을 틀어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왔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왔어도 첼레까지 가려면 국도로 40km는 더 달려야 했다. 첼레에 가보니 아주 조용한 도시로, 구시가지는 대부분이 1600년도에 지은 건물로 즐비했다. 장난감 같은 건물이 양쪽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데 집 하나하나가 역사가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의 층이 나누어지는 곳마다 성경말씀을 써놓기도 하고, 유명한 글귀를 써놓기도 했다. (첼레의 집들) 건물 구경만 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낮에 그렇게 잘 먹고, 첼레에서 슬근슬근 걸으며 구경하는 데도 그게 운동이 되는지 배가 고팠다. ‘어느 식당에 저녁을 해결할까?’ 찾아보던 중,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터키 식당을 찾아 되너(Döner)를 사서 먹었다. 그런데 식당 주인이 양고기를 너무 많이 주어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았다. 처음에 받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만 시켜 나눠 먹어도 되었을 뻔 했다’고 후회를 하며 차를 몰아 집으로 달렸다. 중간에 정체구간이 생겨 내비게이션이 국도로 가라고 알려주기에 국도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피곤이 몰려왔다. 편하게 차를 타고 다녔어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내일은 파더본(Paderborn)이란 도시에 가야 할 일정이 있어 무조건 잠자리에 들었다. 8월 13일(화) 독일을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온다. 아침을 먹자마자 쾰른에 있는 교회 장로님들에게 감사의 문자를 했다. 그리고는 운동 삼아 딸의 자전거 타고 산책길에 나섰는데 갑자기 비가 후둑후둑 내려 다시 돌아왔다. 집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점심으로 닭개장과 중국음식 찹수이를 먹고 파더본으로 갔다. (파더본 대성당)
독일은 일반적으로 도시의 한 가운데에 대성당이 있다. 파더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내를 다니며 구경하다가 예수회 소속의 마르크트 교회(Marktkirche)를 구경했다. 겉보기에는 그냥 수수한 교회라 ‘구경할까, 말까?’ 하다가 ‘에이,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해 보자!’ 하고 들어갔다가 그만 헉! 하고는 숨이 멎었다. 그 이유는 금박으로 치장한 제단 때문이었다.
(마르크트 교회의 전경과 내부) 예수회는 스페인에서 태어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신부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교육을 통해 개신교를 대항하려고 만든 가톨릭 교단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서강대학교가 예수회에서 세운 대학교인 건 여러분도 잘 아실 테고...
파더본이 큰 도시가 아니라서 한나절이면 대충 구경할 수 있다. 거기서 노이하우스 성(Schloß Neuhaus, 노이하우스는 ‘새로 지은 집’이라는 뜻)으로 가다가, 아편 진통성분의 모르핀을 발견한 세르튀르너 흉상을 봤다. 평소에는 법학이나 의학 계통은 아예 관심이 없었는데 문득 의학자의 흉상에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갔다.
(세르튀르너 흉상) 파더본에서 구경을 잘 하고 이번에는 데트몰트(Detmold)로 향했다. 그 이유는 거기에 굉장히 큰 동상인 <헤르만 기념상>(Hermannsdenkmal)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자료에 의하면, 헤르만은 독일의 영웅으로 게르만 부족을 이끌고, A.D. 9년에 로마 군대를 격파했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헤르만 기념상) 직접 가보니, 산 위에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이 동상은 현재 독일에서 가장 높은 인물상이라는데 동상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의 길이가 무려 7m란다. 재미있는 것은 이 동상을 만든 사람이 에른스트 폰 반델(Ernst von Bandel)인데 그는 공사 기간 내내 근처에 움막(Bandel-Hütte)을 짓고 살았으며, 완공식 이듬해인 1876년 사망했단다. 정말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반델과 그가 거처하던 움막) 동상 구경을 하고 데트몰트 시내로 향했는데 어느 순간 도로가 이상했다. 독일의 도로는 모두 아스팔트로 되어 있는데 유독 우리가 달리는 구간(약 30여 분)은 시멘트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도로 부근에 독일 군인들이 대포나 총으로 사격훈련을 하는 곳이 있단다. 그래서 무거운 군수물자의 이동 때문에 시멘트로 깔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데트몰트 시내에는 헤르만 동상의 신발만 따로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다. 마침 어느 독일 남자가 신발상 옆에 서 있어서 신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쉽게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아 달려가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독일 남자는 나를 보고는 내 맘도 모른 채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래서 내가 “이 신발상이 얼마나 큰지 비교하려고 하는데 미안하지만, 당신이 다시 옆에 서 있을 수 있겠나요?”라며 부탁을 했더니 “아, 그런 거였나요?” 하고는 사진을 찍도록 서있어 주었다. (친절한 어느 독일인)
시내 구경을 하고 배가 고파 그곳에서 유명하다는 태국 식당을 찾아 갔으나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가란다. 하는 수 없이 데트몰트에서 제법 잘 나간다는 독일 식당을 찾아가서 맛있게 먹었다. 독일의 날씨는 여름이라고 해도 하루 종일 쌀쌀해서 밖의 온도는 16도를 맴돌았다. 한국 같으면 상상도 못할 온도다. 한 여름에 낮 최고 온도가 16도라니! 두 도시를 한꺼번에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추신: 지난번에 독일 화장실 영상을 올리려다가 잊어버리고 못 올렸는데 이글을 쓰면서 기억이 나서 여기에 올려본다. 독일의 거의 모든 화장실은 유료이며 어린아이들만 무료다. 그런데 여기 동영상에 보면 어린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 모양의 구멍(?)이 있다. 여기를 통과할 수 있는 아이는 무료고, 그렇지 않은 아이는 돈을 내야 하는데 뭐 사람의 마음은 어디나 비슷한 것 같다. 독일에서도 좀 큰 아이도 허리를 숙여 들어가고 심지어 청소년도 맘놓고(?) 들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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