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부슬 고운비가 내린다. 차를 팽개치고 걷고 싶은 길, 님 아니 놈이 동행했더라도 가슴을 열고 속내를 노출하고픈 길이다. 고요한 산사 진입로는 언제나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걷고 싶지만 시간의 노예가되어 스스로를 구속하는데 익숙해졌다. 자승자박 ㅎㅎ 결자해지라 했던가?
재미있는 것은 일주문에도 보개산 각연사라고 현판을 걸었지만 각연사 주위에는 보개산이 없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처음부터 보개산은 존재하자 않았고 각연사를 둘러싼 칠보산, 보배산, 덕가산이 보개와 같다하여 보개산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에 소재한 각연사의 창건에는 현재까지 두 가지의 이설이 전한다. 하나는 신라 법흥황 때에 유일대사에 의해 창건된 되었다는 설과 또 다른 하나는 신라말 경순왕시기에 경순왕의 원찰로서 통일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다.
각연사의 창건 및 연혁과 역사적인 사실이 부합되는 것은 오히려 통일대사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대웅전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각연사는 신라말 경순왕의 원찰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찰 본 역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는 통일대사탑비에 따르면 통일대사라는 분은 이 시기에 활동했던 승려였다. 따라서 창건 기록과 통일대사의 활동시기가 비교적 일치하고 있다. 또한 비로전 내에 걸려있었다던 “연풍군 장풍면 태성동 독점원 보개산 각연사 삼세여래 급 관음보살 개금기”에서도 각연사는 통일대사가 창건했다고 하고 있다
대웅전.여기도 불사가 한창이다. 한가한 답사객을 시기하는지 지붕 기와를 교체하는 인부는 마치 내게 퍼붓기라도 하듯이 흙을 마구 흘려내렸다. 나도 성질 많이 죽었다. 연식이 사람을 젊잖게 하는가보다. 예전에 창녕 관룡사 공사하는 인부가 주련을 마구 걷어내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싸움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즐겁게 특히 절집공사는 정성스럽게 돈독한 신심을 가지고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간을 협간에 비해 약간 크게 간살이 했으나 그 크기는 크지 않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했고 민흘림이 보이며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구미 수다사 대웅전처럼 창방하부 문벽선에 연꽃이 만개해 있다. 기능적인 부재가 아니라 장식용 이다
빗살 창살문이며 어간의 좌우에 위치한 기둥 상부에는 용머리 모양을 조각해 반야용선을 표현했다.
석가여래를 주불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로 봉안되어 있다.
범종각. 안개에 싸인 산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각연사는 종각과 최근의 요사만 제외하고 대웅전 비로전이 진입 방향 즉 일주문으로 바라보지 않고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가람배치의 예는 청도 운문사가 대표적이며 기가 빠져나가는 풍수형국을 비보하기위한 방책인데 각연사는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다. 그나자나 범종각이 왜 2칸 전각이지?
어지럽게 놓인 각종 석조부재. 수많은 대중이 거처했던 대가람의 흔적이다. 다른 절집의 활용책을 벤치마킹하여 다양하게 빛을 내었으면 좋겠다. 그중에서도 비록 공덕과 노력 비용 시간이 더 소요되어도 새로히 조성하는 탑,석등 등의 부재로 사용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렇게 제자리를 떠나 계단으로 조성한 현실이 안타깝다.
비로전 상량문에 의하면 비로전은 1655년, 1899년, 1927년에 각각 중수한 바가 있다고 한다. 낮은 기단이 이채로운 비로전은 정,측면면 3칸으로 어칸과 협칸의 너비가 같다. 공포는 다포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전각의 비로자나불을 촬영할려고 기다려도 밖의 인기척에도 아랑곳 않고 독송은 끝나지 않는다. 불상을 향해 삼배를 올리고 입정 자세로 기다려도 기다려도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 얼마나 지났을까? 꿈결을 스치듯 "처사님. 사진 촬영하세요"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다시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
스님 얼굴에 병색이 뚜렷했는데, 하루바삐 완쾌되기를 빌어 드리겠습니다.()()()
비로전은 옛부재들이 많이 보여 흐뭇하다. 주초에는 쇠시리가 있고 고맥이 까지 고식의 모습이 남아있다.
각연사 비로자나불. 완전한 모습의 불상으로 9세기에 유행한 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불 일 것이다 상호는 원만하고 삼도가 보이며 우견편단 법의는 무릎까지 섬세하게 흘러 내렸다.
광배는 주형거신광배이며 9기 화불이 새겨져 있다. 광배 중앙의 화불 3기는 창녕 관룡사 입구 사리마을, 성주 심원사, 성주 금봉리 비로자나,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 광배에서도 볼 수 있다.
"대좌는 평면이 팔각 지대석위에 위에 하.중.상대석의 순서로 정연하게 놓여 있다. 팔각의 하대석에는 안상을 장식하였고 4면의 안상 안에 향로를 배치하고 2면에는 꽃무늬만을 조각하였으며, 다른 2면에는 2좌씩의 비천상을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연화대석의 8판 연꽃이 새겨진 여덟 모서리에는 각각 산형문의 귀꽃을 조각하고 상면에는 둥글고 모난 굄을 마련하여 굄돌을 받치고 있다. 굄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그 윗면에도 둥글고 모난 굄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전체에 웅장한 구름 무늬를 굵게 새기고 7면에는 각기 중앙에 짐승의 얼굴을 조각하였으며, 한 면만은 연꽃 봉오리를 장식하였다.
짐승의 머리는 그 형태가 상하로 또는 좌우로 향하는 등 각양각색이며, 모두 날카롭고 사나운 표정이다. 상대석은 원형으로 그 밑의 중대석과 하대석 평편 팔각의 각 모서리를 죽인 형태이며, 아랫면에는 낮은 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보면 조성연대는 신라 하대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가장 뛰어난 조각품 중 하나이다."...전통사찰정보
운무에 드리워진 저기 저산에도 옛님이 계시지만 적석리 소나무를 찾아 헤매었고, 비로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어 다음에 인연을 짖기로 했다. 다만 우리 옛님들의 후일 답사를 위해 산속의 님들을 문화재청에서 모셔오니 참조바랍니다.
석조 귀부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세웠다고 하나, 〈각연사대웅전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로전 대들보에서 발견된 묵서에는 고려 혜종(943∼945)년간에 중수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 전기의 승려인 통일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비로, 각연사 동남쪽의 보개산 계곡을 따라 1㎞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대사는 고려 전기에 중국유학을 다녀온 이로, 그가 왕실에서 불교의 교리를 강의하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당대의 문장가였던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다. 거북받침돌은 등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로 바뀌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오면서 나타나게 되는 양식상의 특징이다. 비몸에 새겨진 글씨는 해서체인데, 원래 새겨진 3,500자 가운데 현재는 대부분이 깍여 260자 정도만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머릿돌의 네 면에는 4마리의 용을 웅장하게 새겨 놓았는데, 그 용들이 머리를 들어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받도록 하였다. 원래의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몇 안되는 석비중의 하나로, 고려 광조 9년(958)에 건립되었다. 받침돌에 새긴 거북머리의 양식상 변화나 각 부분에 새긴 조각수법은 당시 석비의 우수함을 잘 보여준다. 각연사(覺淵寺)는 구전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514~519)때 유일대사(有一大師)가 세웠다고 하나, 조선 영조 44년(1768)에 기술된 (覺淵寺大雄殿上樑文)에 의하면 고려 태조부터 광종 년간(918~975)에 통일대사(有一大師)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비로전 대들보에서 발견된 묵서에는 고려 혜종(944~945)년간에 중수된 기록이 보인다.
각연사 통일대사탑비는 각연사(覺淵寺)에서 동남쪽에 보개산 계곡을 따라 1㎞쯤 떨어진 산 중턱의 소나무가 우거진 평탄한 대지에 북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약 1m정도 높이의 석축위에 조성되어 있다. 탑비는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이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지대석 위에 귀부를 놓고, 귀부 등에 비좌(碑座)를 얹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우고, 상부에 이수를 장식하였다. 화강석으로 된 귀부는 배면 전면에 걸쳐 아무런 장식이 없는 편장(偏長) 6각의 귀갑문을 조각하였고, 귀두(龜頭)는 용두(龍頭)화하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귀는 작고 눈은 둥글고 크며 안상(顔相)은 험상궂다. 귀부의 등에 얹은 비좌는 양옆에 안상(眼象)이 있고 윗면에는 복련(伏蓮)을 새겼다. 비신은 높이 258㎝, 폭 128㎝, 두께 25.4㎝로, 비문은 정해서(正楷書)로 46행 48자, 3,500여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마멸되어 260자 정도의 명문(銘文)만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비문에는 '弟子大德釋聰訓 忠原府上聰 釋訓又 同下聰 釋桂茹 同釋三曉 直歲僧 處直 典座僧 處緣院主僧 聰禮 內儀 省令 匡謙內奉省令 俊弘 侍中 仁奉' 등 건립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朝鮮金石考에 실린 비문내용에 의하면, 통일대사의 속성은 김씨로 선조는 계림인(鷄林人)이며, 고려초에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왕실에서 불법의 진리를 강론하는데, 대사의 법문을 듣고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대사가 입적하자 고려 광종이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한림학사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여 탑비가 세워진 것이다. 김정언은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전남 광양 옥룡사 동진대사탑비(958년)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이수는 높이 110㎝, 폭 175㎝, 두께 76㎝로 아래면에 2단의 받침을 두었고 앙련을 새겼다. 이수의 사면에 조각된 네 마리의 용은 웅장한 느낌을 주며, 중앙에 보주를 장식하고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안으로 향하여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원위치에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석비로, 화강암으로 조성한 귀부와 비신, 이수 등 각부의 양식수법은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초기에 걸친 작품을 잘 보이고 있는 고려 초기의 우수한 석비이다. 이 석비는 당시 유명한 통일대사(通一大師)의 부도탑비로서 건립연대는 고려 제4대 광종 9년(958)으로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부도
2008.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