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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배려의 철학, 구례 운조루(雲鳥樓)
이장희 추천 0 조회 46 14.04.01 17: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배려의 철학, 구례 운조루(雲鳥樓)

 

 


 

여행을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을 가게되는 경우가 있다.

새해 첫 나들이로 지리산 화엄사를 참배하고, 19번 국도를 따라 박경리선생 "토지"의 흙냄새를

맡으러 평사리바쁜 걸음을 옮기다가, 우연히 눈에 띈 길가의 푯말을 보고 "저게 여기에 있었나?"

하고 반갑게 한 달음에 달려간 곳이 있어 하는 말이다. 

 

호남의 대표적인 명가 고택중 하나인 운조루(雲鳥樓)다. 
외지 사람들은 운조루(雲鳥樓)라 부르고 마을 사람들은 아흔 아홉 칸 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적으로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인 운조루(雲鳥樓)는

그 이름을 도연명(陶淵明)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 온 것이라 한다.

 

無心以出岫 倦飛而知還 (무심이출수 권비이지환)

구름은 무심히 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다 지친 저 새 돌아올 줄을 아는구나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또는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의미다.

 

 

                  

 

               운조루는 대구의 동구 입석동 출신인 입향조 류이주(柳爾胄, 1726~97)가

               삼수 부사를 지낸 뒤 풍수적으로 길지(吉地)임을 확인하고 들어온 땅으로,  

               그의 말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예전에는 대문위 중간 가로보에 호랑이뼈를 걸어 두었으나 절도를 당한 후,

               지금은 말뼈로 대신했다고 한다.

               유이주는 문경새재에서 호랑이를 채찍으로 때려잡은 장사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은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6년만인 1782년 유이주가 용천(龍川)부사로 있을 때

완성했다. 179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막상 운조루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행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마굿간 등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 대문 동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서 옛날

에는 이곳으로 안주인이 입했다.

 

 


 

 

 솟을대문 왼쪽 행랑채 첫 방(털복숭이 개가 누워 있는 방)이 입장권을 파는 곳이다. 이 곳은

1,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누추한 몰골로 누워있는 녀석에게 아는 척을 해 보았으나,

추운 날씨탓에 매표인이 벗어 놓은 털신에 코를 박녀석은 미동도 하지않고 ,귀찮다는 듯

눈동자만 위로 들어 바라보고는 이내 얼굴을 파묻는다.

 

 

 

 

 

 큰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

곳간채로 통하는 길은 경사로를 만들어 바퀴달린 수레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운조루의 큰 사랑채 누마루.

 

 

 

 

누마루 밑의 농기구. 세월의 깊이만큼 굴러 다녔을 갈라지고 깨어진 나무바퀴다.

저런 수레바퀴의 모습을 보면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이 노자(老子)가 던진 열한번째 화두다.

어쩌면 운조루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온 "나눔과 베품"의 철학일 지 모른다.

 

                            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차지용)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鑿戶爽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착호상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고유지이위이. 무지이위용)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바퀴통이 텅 비어 있음으로써 수레의 쓰임[用]이 있게 되고,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이 비어 있음으로써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되며,
                            문을 내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방이 텅 비어 있음으로써 방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언가[有]가 이롭게 되는 것은
                            그것이 텅 비어 있을 때[無]이다.

 

텅 비어 있음의 아름다움..,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의 가득한 충만.........

그렇다. 하나의 바퀴통과 그릇과 방이 텅 비어 있을 때 그 각각의 것의 온전한 쓰임[用]이 있게

되듯이, 우리 자신도 그렇게 텅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으며, 비로소 진정

으로 가득할 있다. 또한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다.

 

 

 

 

 

 

들어온 이후 내내 보이던 외국 관광객이 언제 들어갔는 지 큰 사랑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저 친구 사진도 열심히 찍더니만 신발을 신은 채로 저렇게 돌아다닌 모양이다.

여기는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곳인데 제 나라 문화재에 가서도 저러고 다니는지........

관리상 허점이 없다 못할 것이다. 신을 벗고 오르라는 안내문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큰 사랑채의 바람막이벽 한 편에는 입향조 류이주의 8세손, 시인이자 공학박사인 전북대학교

건축학과 유응교(柳應敎)교수가 그의 자작시"운조루"와 "운조루의 정신"이란 글귀를 붙여 놓았다.

 

 

                                           -  "운조루의 정신" 요약 -

 

1) 나눔과 베품의 적선정신-타인능해(他人能解)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백미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독을 두어, 마개를 열어 쌀을 빼다가

    끼니를 해결 할 수 있게 하였다.

2) 분수에 맞는 생활정신-수분실(隨分室)

    아들이 기거하는 누마루에 수분실이라는 현판을 걸고 세상을 살아갈 때 항상 자신의 분수에

    맞는 생활태도를 갖도록 하였다.

3) 시조 일만 여편을 지은 풍류의 정신

4) 여인들을 위한 공간을 따로 건축 할 정도로 남녀평등의 인간존중정신

5) 3대에 걸친 농가일기와 생활일기를 써온 기록을 남기는 정신

6) 선정을 베푸는 정신

7) 수원 화성을 축조한 건축을 사랑하는 정신

8) 절개를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

9)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도정신

10) 겸애(兼愛)의 정신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여 밥짓는 연기가 멀리 보이거나 퍼지지 않게 굴뚝을 낮게 하였다.

 

 

                  

  

 

안채는 큰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안주인이 거처하며 자식들과

며느리가 산다. 부엌과 찬칸, 곳간, 대청마루가 ㅁ자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 공간은 여인네와 아이들의 공간이고 그런 공간은 그 집안에서 가장 아늑한 느낌을 준다. 
         

       곳간에서 안주인이 머물던 곳을 바라본다. 사랑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처음엔 안주인이 사용하는 작은 대문이 동북 방향으로 있었다고 한다.
         궁궐은 아니니 바깥바람 구경도 못할 일은 없었겠지만 이 작은 안마당에서 꽃을 가꾸고 계절을
         실감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붙박이로 사는 토박이들은 사는 동네 밖을 모른다.


      배추모종 사러 동지들 데리고 문척 육묘장 가는데 이 엄니들이 문척교(섬진강가의 다리 중 하나)
         를 처음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차로 5분 거리다. 또 내 밭고랑 만드는 것 도와주신 아주머니

         들께 냉장고의 시원한 물 한 그릇 대접하면서 “당물샘 물이요” 했더니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차로 3분 거리에 있다.


         그래 어쩌면 이곳의 대부분의 여인들은 쌍계사의 벚꽃과 다압마을의 매화 길과 월계마을의 산수유 
         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서울서 시간과 돈을 내어 여기까지 내려와서 산행하고 구경하고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참 허탈하기도 한 사실이다.
         지리산?  이곳 아주머니들이 열이면 열 한사람은 올라가지 않았다. (운조루 홈피에서 옮긴 글)

 

 

 

 

 

운조루의 현판은 이 곳 안채에 걸어 두었고 대청마루벽에는 민화가 걸려있다. 

안채는 닫혀 있는 구조이기도 하고 모든 곳으로 통하는 집안 소통의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거주하고 있는 운조루 사람들의 주요한 살림공간이기도 하다.

조용히 들어가보니 두런두런 이야기소리가 안방에서 흘러나온다.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게 오목조목 잘 꾸며진 곳이다. 술을 저장하는 술곳간도 이곳에 있다하나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이라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고택을 방문하다보면 어떤 곳에서는 자기들의 생활모습이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꺼리는 집이 있다.

싫어하는 내색이 완연한 주인장의 얼굴을 마주하며 구경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곳은 입장료를 받고 있지만, 주인장과 관람객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생활공간과 관람공간을

구분하고 관리한다면,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찬찬히 둘러 볼 수 있을 것 같다. 

 

 

 

 

 2층은 한옥에서, 특히 가정집에서는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후원 담장안의 우물위에 우물정(井)字 모양의 돌을 깍아 올려 놓았다.

이 집이 갖고있는 "배려의 철학"중 하나는 굴뚝이다. 굴뚝 높이는 1m가 채 되지 않는다.

굴뚝 높이를 세 자 이상 올리지 않아 밥 짓는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한 것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시절 큰 집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한 설계자 류이주의 혜안이었을 것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굴뚝이 높아야만 연기가 잘 빠진다. 굴뚝이 낮으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연기가 잘 빠지지 않아 불편하다. 운조루는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매우 '럭셔리'한 고급주택이다.

         집안에 은빛으로 빛나는 섬진강과 호쾌한 들판을 구경하기 위한 전망대인 '누마루'도 3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굴뚝은 채 1m도 안 된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땅바닥으로 깔린다. 안채에는

         굴뚝이 아예 없고, 마루 밑의 축대 사이로 연기가 빠지도록 되어 있다. 연기가 밖으로 새지 않고,

         집 마당 안에서 흩어진다. 집안 식구들은 이 연기를 들이마셔야 하니까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기가 밖으로 잘 나가지 않도록 단속한 이유는 무엇인가.

         주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그 집 굴뚝에서 연기가

         펑펑 나오면 '저 집은 또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먹는구나!' 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배고픈 시절에

         부잣집 굴뚝 연기는 위화감 조성의 원인이었다. 위화감을 주지 않으려고 굴뚝을 낮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조용헌살롱 발췌)



 

 

 

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만나게 되는 아랫 사랑채는 큰 사랑채인 운조루에 잇대어 ㄱ자형으로 대문

쪽으로 뻗어 있고 이곳에도 누마루가 있다.


귀래정(歸來停)이라고도 하고 농월헌(弄月軒)이라고도 불렀다는데 현판은 극성스러운 절도범들

때문에 따로 보관을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큰 도둑을 만나 귀중한 자료들

을 도난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 닦는다는, 신독(愼獨)의 도리와 상통하는 암수재(闇修齋)란

현판에 논어(論語)학이편(學而篇)을 써서 주련으로 달아 놓았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

 

 

 

 

                  

 

            227년 동안 지탱해온 목재들이다. 속살 말간 아랫 사랑채 누마루의 난간

                사이로 큰 사랑채를 잇는 곳간채가 보인다.

 

 

 

 

                  

 

               곳간채에는 독특한 모양의 쌀뒤주 하나가 있다.

               이 집의 진면목을 알게하는 가장 대표적인 물건이다.

               경주의 최부잣집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상생과 배려의 철학"이 담긴 물건이다.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1.6m높이의 원통형 뒤주이다.

               이 뒤주의 하단부에는 특이한 장치가 있다.

               가로 5cm, 세로 10cm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마개를 열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와서 쌀을 퍼갈 수 있는 뒤주인 것이다.

 

 

 

 

                  

 

               이 집안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기 위한 용도의 뒤주였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을 지나가는 과객들도 조금씩 쌀을 가져가곤 하였다.

              

               이 뒤주에 들어가는 쌀의 용량은 두 가마 반.

               하단부의 ‘타인능해’ 마개를 옆으로 돌리면 쌀이 나오도록 되어 있다.

               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의 양은 보통 1~2되 분량이었다고 한다.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몽땅 가져가는 양심불량은 드물었다고 한다.

               가난하였지만 불문율과 염치가 살아있는 사회였다.

 

               운조루에서 지은 1년의 수확물중 약 20%를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지출하였다고 한다.

              

               만석의 농사를 지은 경주 최부잣집이 1/3을 가난한 이들에게, 1/3은 과객

               의 대접에, 나머지 1/3을 자신들의 생활에 쓴 것과는 규모의 차이는 있으

               나 주변을 배려하고 책임지는 따뜻한 마음에는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이 집의 주인은 월말에 쌀뒤주를 체크했다.

               만약 쌀이 남아 있으면, “덕을 베풀지 않았다는 증거이지 않느냐! 당장에

               이 쌀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줘라. 항상 그믐날에는 뒤주에 쌀이 없게

               하라!”는 당부를 며느리에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동학과 여순반란사건, 6·25 좌익들의 주 활동 공간이 지리산 노고단이다.

               빨치산이 활동한 시기에는 토벌군과 빨치산을 아침저녁으로 번갈아가며

               맞이해야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도 있었다.

 

               그 노고단 밑에 자리잡은 운조루가 험한 풍파에도 보존될 수 있었던 원인은

               쌀뒤주에서 나온 인심이 주변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축쳐진 어깨에 감당키 어려운 삶의 무게를 지고, 해거름에 밟은 긴 그림자에

                빨간 멍이 들도록 저 문밖을 서성이며 망설였을, 이 땅의 불쌍한 민초들

                군상(群像)의 실루엣이 환영처럼 피어 오른다.

 

                이것이 어디 기억너머 옛날만의 일인가......

                불과 수십년 전에도 있었던 가까운 어제의 일이고, 저 문고리를 만지작

                거려야 되는 오늘의 상황일 수도 있다.

                먼 내일을 바라보며 희망으로 살아가는 오늘이지만, 불확실한 내일을 맞이

                해야 할 작금의 형국에, 열린 저 문처럼 마음을 열어 따스함으로 그 속을

                채워 놓아야 하리.......

 

                운조루를 돌아서는 내 어깨위로 부서져내리는 1월의 차가운 햇살이

                닫힌 내 가슴을 데우고 있다.....................

 

 

                                 ※ 자료참고:http://www.unjoru.com/ (운조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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