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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18 - 1차대전후에 산산히 찓겨나간 영토와 튀르키예의 독립 전쟁!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등 협상국은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고 시도했으니...
세브르 조약을 맺어 수도 코스탄티니예 (이스탄불) 등 여러 지역을 점령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그리스가 아나톨리아로 진군해왔기 때문에 튀르키예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됩니다.
세브르 조약 대로 된다면 거대한 오스만 제국은 산산히 찓겨 나가니.... 유럽 영토에서는 이미 그리스등
여러나라가 독립해 나갔고 아프리카와 이집트 및 중동 지방은 모두 다 잃어버렸으며 남은 영토도
영국과 프랑스 및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독립하게 될 쿠르족의 나라에 대부분을
뺐기고 터키로 남는건 수도와 부르사에서 앙카라에 이르는 좁은 영토에 불과해 소국으로 전락합니다.
영국 육군 장교들과의 에피소드가 있으니..... 코스탄티니예 (이스탄불) 를 점령한 영국 육군 장교
들이 한 호텔에서 술을 마시는데, 케말을 보고 자신들의 테이블로 와서 한잔 하자고 권유했다.
그러자 케말은 "이곳은 우리 땅이오. 그러니 당신들이 내 테이블로 와야지."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에펜디 중장은 술탄 메흐메트 6세의 명령으로 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삼순 (Samsun) 항으로 갔으니, 케말 파샤가 맡은 임무는 오스만제국 술탄
에게 거역하며 소규모적인 저항을 벌이고 있던 군대의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 해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케말은 13세기에 교토 일왕 (천황) 군을 쳐부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에서
파견된 토벌군 사령관인 아시카가 요시아키 장군이 신발을 바꾸어 신었듯, 되려 휘하 병력
을 이끌고 토벌하려던 군대와 합류했으며 이스메트 파샤 대령도 그를 만나게 되면서 합류합니다.
케말은 영국등 협상국에 항복한 술탄 정부를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자 경악한 술탄 메흐메트 바히데틴은
궐석재판을 열어 케말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는데... 그러나 기울어진 제국군 상부의
힘은 그를 잡을 힘도 없었고, 여론과 많은 군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 그에게 합류하기에 바빴습니다.
7월 8일 케말 파샤는 이제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신하, 군인이 아닌 튀르키예
민주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했고 에르주룸 (Erzurum) 에서 공화국
대표자 회의를 가졌으며..... 8월에는 시와스 (Sivas) 에서 항전결의를 합니다.
1920년 4월 23일 케말 장군은 군사 요충지 앙카라에서 국민회의를 주최하고, 자신의 명성
과 국민 정부의 명분을 바탕으로 군의 지지를 확보했으니.... 우선 산발적인
전투로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군을 괴롭히니 그리스군은 케말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내륙으로 진공했는데, 하지만 그리스군의 역량 한도를 벗어나는 무리한 작전 이었습니다.
그리스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리만을 추구하고자 무리한 작전을 고집했고 13만에 달하는
그리스군이 파병됐으나 무리하게 전선을 넓히면서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가 없었으며,
튀르키예인들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그리스군을 괴롭혔고 많은
군대와 민병대가 손을 잡고 아르메니아군 및 프랑스군 등 다른 점령군들과 전투를 벌입니다.
한편 튀르키예 동남부의 도시인 아이은탑 (Ayıntab) 에선 프랑스 육군이 1년이나 압도적
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샤힌 베이 (Şahin Bey) 가 이끄는 300여명 터키 민병대가
11개월에 걸친 항쟁 끝에...... 자신들 보다 무려 12배가 많은 막강한 프랑스 육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또 보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프랑스 육군이 물러갑니다.
하지만 프랑스 육군은 다시 장비와 병력을 새로 보강하여 아이은탑을 재공격했고 결국
병력 수도 10분지 1에 무기와 총알도 부족해 압도적으로 밀린 상황에서 샤힌 베이
와 부하 의용병들은 모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젊은 시절 징병되어 사병으로 복무하긴 했지만 당시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던 샤힌 베이의
이 전투는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라고 할 수 있으니 뒤에 케말은 아이은탑 (안텝) 을
찬양하면서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가지(Gazi) 를 붙여서 지금의 “가지안테프” 시가 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군도 유수프 베야즈오을루 (Yusuf Beyazoğlu) 가 이끄는 민병과 터키군에 숫적 우세임에도
크게 밀려 되려 아르메니아군이 후퇴해야 했고 차례로 점령지를 다시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옛 아르메니아 수도 아니를 공격한 아르메니아군은 베야즈오을루가 이끄는 부대에 역습당해 2천명
의 아르메니아군이 죽었는데 아르메니아군 군이 1만 6천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결국 아르메니아와 프랑스군은 연전연패 속에 물러나야 했고 서쪽 카르스 지방을 지배하던 러시아군도
무사 캬즘 카라베키르 (Musa Kâzım Karabekir) 가 이끄는 민병대와 군인들에게
고전하면서 터키땅에서 물러서고 있었으며, 결국 홀로 남아 끈질기게 싸우던게 그리스군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부대가 맹활약한 가운데 케말 파샤는 그리스군과 총력을 다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1921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3주일 동안 밤낮없이 양군이 계속
전투를 벌인 사카리아강 전투에서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케말은 그리스군을 물리쳤으며
큰 피해를 입은 그리스군은 1922년 케말의 대공세로 점령지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런 연전연패 속에 협상국은 케말에게 전령을 보내 세브르 조약을 재수정하여 코스탄티니예와 타우르스
산맥 사이의 아시아 튀르키예를 보장할 테니 군대를 물러나게 하라고 했으나 당연히 케말은
거부했으니 그는 전령에게 세브르 조약의 전면 무효가 아니라면 제의 같은 건 집어치우라고 일갈합니다.
1922년 8월 30일 퀴타히아 (Kütahya) 근처의 둠루프나르 (Dumlupınar) 에서 그리스군을 결정적
으로 격파하는데,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 (Νικόλαος Τρικούπης) 중장이 이끄는 그리스군
19만 6천명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18만 터키군 및 민병대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300여명이 전사한 반면에 그리스군은 1만명이 넘는 전사자와 2천명이 넘는 실종자를 내고 참패합니다.
이날은 튀르키예에서 '승리의 날 (Zafer bayramı)' 이라 불리며 한국의 광복절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국경일이며 이후 국민회의군은 퇴각하는 그리스군을
추격한 끝에 그리스군의 본거지인 소아시아 서부 해안인 이즈미르 근처까지 진격합니다.
9월 이즈미르에 거주하던 튀르크인들이 대거 저항하면서 그리스계와 튀르크계의 충돌이 벌어
졌고 그리스군의 공격으로 많은 튀르크인들이 학살당하자 케말은 이스메트 파샤와
함께 이를 세계에 알렸으니 이 학살로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점령은 정당성을
잃게되었고 역습으로 오스만 땅에서 그리스계 주민들이 보복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후 1922년 11월 21일 스위스 로잔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고 이젠 케말 장군과
국민회의 측은 정당한 정부로서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게되었으며
더불어 케말 장군은 술탄을 추방했고 이로써 오스만 제국을 무혈로 멸망시켰습니다.
로잔 회의가 열리면서 전투는 휴전되었으며, 세브르 조약 완전 무효를 요구하는 케말과 국민회의
측 주장에 그리스는 반발했으나 프랑스와 아르메니아는 받아들이면서 물러서려고 했고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 다른 협상국도 전쟁을 지겨워하면서 터키에서 물러날 기회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트라브존을 비롯한 일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줄인다고 물러났으나 케말은
일절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그리고 1923년 2월 다시 전투를 재개했는데, 이미
그리스군은 사기를 잃고 점령지를 겨우 지키거나 아니면 물러서는 소극적 자세로
나섰고 반대로 사기가 충천한 국민회의군은 계속 그리스군의 점령지를 하나둘 탈환합니다.
결국 아나톨리아의 그리스군 거점이던 이즈미르를 탈환하고 그리스가 세브르조약으로 얻은 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1923년 7월 24일 마침내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고 로잔 조약을
새롭게 맺으며 전쟁은 끝났는데.... 독립을 약속받았던 "쿠르드족의 꿈" 은 새 조약으로 무산 됩니다.
이 전쟁의 승리로 튀르키예의 본토인 아나톨리아는 대부분 사수해 낼 수 있었으니
여기 까지만 해도 케말 파샤는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
것이며, 1923년 3월 24일에 발간된 타임지에 화제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직전에 케말은 동갑내기 장교 학교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와
갈등을 빚은적이 있으니, 엔베르는 튀르크인의 제국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야심에
젖어 있었고, 케말은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지금은 너무 위험하고 이르다고 반대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나톨리아에서 다시 힘을 찾으면서 여기서 시작하자고 되려
엔베르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이번에는 엔베르가
거부하고 떠났으며..... 결국 오스만 제국이 케말에 의하여 멸망하게 됩니다.
엔베르는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던 중앙아시아로 건너가 반러시아 이슬람 운동인 바스마치
운 동(Басмачество) 에 가담했으나, 오래가지 않아 그곳에 살던
튀르크인들과 갈등 속에 중앙아시아의 적화를 위해 남하해온 붉은 군대에 의해 사살됩니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을 포함하는 식의 다양한 문화의 집단을 아우르는 제국은
내재적 동질성을 지닌 근대적 민족국가와는 상충하는
것이었으므로 튀르키예인들의 국가라는 케말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케말의 외교정책은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고 2차 세계 대전의 참전도
거부하는등 튀르키예가 전쟁이나 외부의 간섭으로 국가 형성에 방해받는
사태를 방지하는 것을 지향했으므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분쟁을 야기하고
러시아 등의 반발로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 수 있는 정책에 찬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야 괵알프(Ziya Gökalp)가 제시하고 아타튀르크가 수용한 튀르크 민족주의는 "튀르키예
땅에서 튀르키예어를 사용하고, 튀르키예 문화 속에서 생활하며, 본인을
튀르키예인이라고 받아들이는 모든 남녀노소는 피부색, 인종,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튀르크인이다" 독일식 배타적 민족주의사상을 수용한 엔베르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이것입니다.
1923년 10월 29일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새로 성립된
튀르키예 공화국에서 케말은 공화인민당을 창당하고,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으니 1924년에는 1300여년간 지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미국인 교육개혁자인 존 듀이를 초빙해 자문을 얻고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 정착에 힘썼습니다.
1925년에는 모자 및 복식법을 통과시켜 구시대의 상징인 페스와 히잡의 착용을 금지시켰으며, 가족법을
통과시켜 스위스식 민법을 도용했고 달력법을 통과시켜 그동안 사용되었던 달력 대신 그레고리력
을 도입했으며..... 1926년에는 샤리아를 금지했고, 1928년 11월 3일에는 복잡한 아랍 문자
대신에 알파벳을 쓰는 라틴 문자를 채택하는 언어개혁법을 통과시키면서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B612 소행성을 발견한 튀르키예인 천문학자 이야기는 아타튀르크 개혁 제도를 모델로
쓴 것인데, 튀르키예 전통 복식으로 소행성 발견을 국제 천문학자 회의에 서 말하니 무시당한
학자가 11년뒤 서구풍을 강요하는 튀르키예 독재자 때문에 양복을 입고 같은 자리에 나와 이야기
하자 믿어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어린 왕자에서는 옷차림 따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풍자한 것입니다.
케말의 서구화 정책은 튀르키예를 이슬람권에서 가장 세속주의적인 나라로 만들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전통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 간에 충돌이 있었고 그 와중에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튀르키예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저서 '눈' 이 이 갈등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 입니다.
이러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발한 이슬람 학자들도 뒤에서 아타튀르크
를 흉보곤 했으며.... 이런 진영에서 아타튀르크는 그야말로 이슬람을 파괴하고 서구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여서 튀르키예의 이교도적 문화를 부흥시키려 한 악마 취급을 당합니다.
러시아로부터 카르스, 아르다한, 베숨주를 돌려받았고 1930년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으며
여군 사관학교를 인정하였고 미군이 선정한 20세기 세계의 명 조종사 100인에서
유일한 여군으로 들어간 사비하 괵첸 (Sabiha Gökçen) 공군대령이 바로
아타튀르크가 여군사관학교 공군부 수석으로 인정하고 양녀로 받아들였던 인물 입니다.
케말리 칼리프제도를 폐지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1922년에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면서 수도도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 에서 앙카라로 이전하니,
서아시아권의 이슬람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뭉치더라도 그저 이득에 따라
할 뿐이지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배신하거나 협조도 하지 않으니 제대로 뭉쳐질리가 없게 됩니다.
오스만제국 멸망과 이슬람권 분열은 국제무대에서 이슬람권의 추락을 의미하니아랍연맹과 OPEC, 이슬람
협력기구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득을 위해서 뭉친 연맹에 불과해 진정한 연합이 아니며 중동전쟁만
봐도 이슬람 국가들의 단합력은 형편없으며 이슬람권은 서구에 정치, 경제, 기술적으로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슬람권은 날이 갈수록 서구권과의 격차가 심해지며 열세인 형편인자라 튀르키예에서는 서구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이 커서 유럽이 두려워하던 오스만 제국을 동경하는 이들이 많으며 튀르키예 역사학계
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띄으며. 튀르키예 정부도 국가의 자존심을 세울때 내세우는 것이 오스만 제국 입니다.
그러나 과거 오스만제국시절 튀르키예에 지배받았던 시리아나 이라크, 요르단, 쿠웨이트, 레바논, 예멘,
이집트, 튀니지 같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 국가들에서는 오스만 제국을 싫어하니,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인들의 입지는 기독교를 믿던 그리스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같은 남유럽 민족들
보다 더 낮았기 때문으로 오스만 제국의 하렘 후궁들만 봐도 대부분이 유럽과 튀르키예 출신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계승하여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웠으나,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의 특성을
부정하고 세워졌기에 둘 사이의 연속성은 있더라도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무스타파 케말의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케말리즘 또는 '여섯 개의 화살' 은 공화주의, 민족주의,
인민주의, 국가 통제, 세속주의, 혁명인데 이 가운데 공화주의는 오스만 제국에 명백히
반대하는 것이고, 민족주의도 오스만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합니다.
또 모두는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민주의도 무슬림과 무슬림이 아닌 자(즘미)를 차별하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지배층이 이슬람을 믿었던데다 황제는 아예 칼리파이기도
했던 오스만 제국의 체제와 세속주의 역시 명백히 위배되니 물론 오스만 제국이 튀르키예 공화국의
전신인 것은 맞고 오스만 제국과 튀르키예 공화국의 관계는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오스만 제국 멸망 8년 뒤인 1930년에 무스타파 케말의 명으로 우편법 개혁이
단행되면서 공식화되었고, 쉴레이만 당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랍식 표기인 알
쿠스탄티니야 (al-Qusṭanṭīniyya) 의 튀르크식 발음인 코스탄티니예 (Kostantiniyye) 로 불렸습니다.
민족주의의 시대에 접어들어 그리스를 비롯한 피지배국들이 독립하던 시절에도 압뒬하미트
2세는 민족주의가 아닌 범이슬람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의 공용어를 아랍어로
정하고, 제국 내에 튀르크인 보다 수가 많은 아랍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기까지 했습니다.
아타튀르크 문서를 보면 당시에 대한 아타튀르크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이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초래하기도 했으니 분명한 건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민족주의적 핀트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다민족,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보편 제국이었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 내에서 거주하고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며, 튀르키예 문화 속에서 자랐으며
스스로를 튀르키예인으로 인식하는 자는 모두 튀르키예인." 이라는 케말리즘적 튀르크 민족주의의
정의를 최초로 내린 사람인 오스만 제국의 사회학자인 지야 괵알프는 자자계 출신이며,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가인 독립행진곡을 작곡한 메흐메트 아키프 에르소이는 알바니아계 출신입니다.
아타튀르크도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출신에다가 금발벽안의 백인의 외모를 하고 있으며,
그의 동료이자 공화국 2대 대통령으로 제임하는 이스메트 이뇌뉘는 쿠르드인,
3대 대통령인 젤랄 바야르는 불가리아계이니..... 여기까지만 보아도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인의 민족국가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원나라와 청나라가 이랬는데... 원나라 쿠빌라이의 경우 자국 한족들에게는 원나라
세조였고 몽골인들에게는 세첸 칸이었으며, 마찬가지로 홍타이지도 만주족에게는 고신 온초
활랴순 언두링어 한, 몽골족에겐 아구다 오루시옝치 나이람다구 복다 칸, 한족에겐 청 태종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