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5:1~13)
갈멜의 부자 나발이 받은 은혜를 외면하고
다윗의 청을 거절한다.
갈멜은 자신의 행동을 세상 속에서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다.
먼저 세상의 왕인 사울의 대적자라는 프레임에 다윗을 갇히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지켜준 다윗의 도움 자체를 왜곡시키거나 희석시킴으로써
자신이 그들에게 잘 대해 줄 의무가 없다는 논리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다윗의 부하들의 행동에 문제가 없었음에도 꼬투리를 잡아
마치 부적절하고 거친 행동을 한 것처럼 할 수도 있다.
만약, 그와 친밀하고 호의적인 사람이 그의 논리를 잘 들었다면
그도 나발과 동조하여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대적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전지적 시점에서 분명 그것이 잘못된 과정 속에 있음을 우린 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는 다윗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이는 사울이다.
그러므로 사울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공의롭다.
더욱이 지금 폭력적이고 가해적 입장에 있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사울이다.
다윗은 자신이 보복할 수 있는 기회에서조차 사울을 존중하고 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부각되지 않는다.
사울에게 불리한 뉴스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논리들은 얼마든지 인간의 간약한 지혜로 가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결국 나발의 외적 행동이나 언사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의 마음의 중심과 동기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준용하여 진정한 공의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하고
세상의 권력과 자신의 재산, 이생에서의 안락한 삶을 위주로 추구하는 자이다.
그러니 다윗이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힘든 광야의 여정에 임하고 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입으로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든지, 특별히 말하지 않던지
우리가 사람을 바라볼 때 유의할 것은
하나님이 애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의 창조질서, 가치관, 세계관을
따르려는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최소한 그런 하나님의 원리, 즉 양심과 상식에 따르려는 가치관과 마음을 가진 자라면
하나님을 만났거나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원리를 한 가지로만 표현하면 그것은 '지고지순한 사랑, 절대적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가진 자라면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노력하기에
그가 처한 실제적 상황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비틀어지고 어그러진 상황과 마음과 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주로 힘 있는 이들이 욕심을 추구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 세상에서의 문제들을 그런 감수성을 가지고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리적인 것을 바라보고 어그러진 상황에 대한 치유와 회복을 등한 시 하는 것은
결코 중심이 바람직한 상태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리더십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