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윤(金富允)의 초명(初名)은 용성(用成)이고 토산군(兎山郡) 사람이다. 좌도지시위군(左都知侍衛軍)에 속하였다가 교위(校尉)에 보임되었다.
충렬왕(忠烈王)이 세자(世子)로서 원(元)에 갔을 때 김부윤이 호종하였는데, 비록 험난한 일을 당하더라도 절개를 지키며 바꾸지 않았으니 세조(世祖)가 그 명성을 알고서 무덕장군 정동행중서성이문소관(武德將軍 征東行中書省理問所官)을 제수하였다.
충렬왕이 즉위한 뒤 시종(侍從)한 공으로 철권(鐵券)을 하사하며 이르기를, “기사년(1269)에 과인(寡人)이 원에서 돌아오면서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林衍)이 난을 일으켜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수종신(隨從臣)들이 떨고 놀라서 대책을 세울 바를 모르고 있었으나 그대는 이해관계를 능숙하고 자세하게 진술하여 아뢰고, 과인을 곁에서 도와 원[天廷]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마침내 몽골 황제의 보살핌을 입고 군대를 청하여 고려[東]로 와 간신들을 죽이고 나라를 회복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내가 그대의 공을 가상하게 여겨 원조(元朝)의 제도 ‘공신(功臣)에게 비록 죄가 있더라도 10번 범한 연후에 〈죄를〉 한번 논하며, 자손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라는 것을 따를 것이다. 마땅히 짐의 뜻을 체득하여 더욱 마음과 힘을 다하고, 그대의 자손을 가르쳐 나라와 더불어 모두 기쁨을 누리라.” 라고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군부판서 응양군상장군(軍簿判書 鷹揚軍上將軍)에 제수되었고,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28년(1302)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가 죽었다.
〈김부윤은〉 성품이 공정하고 질박하여 화려하지 않았다. 일찍이 선군별감(選軍別監)으로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공정하였다. 아들은 김취기(金就起)인데 관직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