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육경(成武六景)
성
무현지(成武县志)의 기록에 의하면, 성무경(成武境) 내에 12승경(胜景) 있다. 그 중 6경(景)은 호성대제(护城大堤)의 경치
안에 자리잡고 있다. 6경은 수봉조훈(寿峰朝曛), 문산석조(文山夕照), 영호신연(映湖晨烟), 서포하화(西浦荷华),
안지추월(雁池秋月), 봉령춘운(凤岭春云)이라 불려진다. 이와 같은 승경들은 많은 자연경관과 인문경관이 일체되어 경치는 수려하고,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줄뿐만 아니라 전설이 많아 미묘한 운치가 넘치는 고도(古都) 성무(成武)의 매력을 증가시킨다.
수봉조훈(寿峰朝曛)
수
봉(寿峰)은 고도(古都) 성무(成武)의 동부에 위치해 있다. 호성제(护城堤) 내의 동대(东台)라고 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에 의해
대대(大台)라고 많이 불려진다. 현재 높이 8m, 총 면적 약 5000㎡으로, 산동성 제 2의 성급(省级) 문화재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대대(大台)의 역사는 유구하고, 풍부한 고대문화유적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문화는 3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룡산문화(龙山文化)부터 상주시기(商周时期)- 이 시기에 고대인이 물을 피하기 위해 높은 이곳에 집터를 건설하였다. 돌도끼,
패기, 도기, 골각기 등 원시시대 사람들의 생산, 생활도구가 겹겹이 두껍게 토양층 밑에 쌓여있다. 따라서 대대(大台)는 원시시대
사람들의 촌락유적이며, 또한 작은 토산의 생성 원인이기도 하다.
2. 전국시대(战国)부터 진한시기(秦汉时期)- 이 시기에
대대(大台)의 촌락유적을 공동지대로 전환하였다. 이곳에 비교적 많은 진한시기(秦汉时期)의 석실과 벽돌무덤이 매장되어있다. 때문에
대대(大台)는 고대 무덤군 유적이라 할 수 있다.
3. 남북조시대(南北朝)부터 명청시기(明清时期)- 이 시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이용하여 규모가 비교적 큰 사원과 관광성격의 시설을 건축하였다. 구현지(旧县志)의 기록에 의하면
<당건원우상(唐建院于上), 고갈유존(古碣犹存)>이라 써있다. 따라서 이곳을 사원 유적이라 부를 수 있다.
문산석조(文山夕照)
현
도(县城)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면적 약 3000㎡으로 높이 8m의 작은 토산으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능묘이다. 원내
사계절 내내 송백이 푸르게 뒤덮고 있어 마치 고대에 건설된 조상의 영정을 모신 제단처럼 우뚝 서있으며, 엄숙하고 경건하다.
이곳은 현(县) 중요 문화재보호지역의 무정산(文亭山)유적이다.
영호신연(映湖晨烟)
성무(成武) 로서남(鲁西南)
황하(黄河)의 충적평야에 위치해 있다. 고대 이래 황하는 여려 차례 범람 하여 이미 4m이상 침적되었다. 성무(成武)는 일찍이
제방을 건설하여 홍수를 막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오래된 도시이고, 전체도시의 보호와 제방 내에 비교적 적은 토사를 침적 시키기
위해 제방 안과 밖의 지면을 3m 이상 격차를 두게 하였다. 높이 15700m의 도시보호를 위한 제방 내에 물결이 넘실거리는
1만무(亩)의 호수를 형성하였다. 현도(县城)의 동편에 건설된 삼면이 물로 에워쌓인 연루수반청(烟楼水半城)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처럼 도시보호 제방은 홍수를 막기위해 이와 같은 큰 분지를 형성하여, 물이 고이면서 호수가 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까지 보존된 호수에 인접한 도시는 중국에서 매우 보기 드문 곳이다.
서포하화(西浦荷华)
고대 제방
내의 성서(城西)는 홍수의 증감이 많아 통속적으로 서호(西湖)라 불리었다. 호수는 많은 연뿌리를 생산한다. 연뿌리는 주민에게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경치와 많은 경제 효익을 제공하며, 현지인에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제공한다. 연꽃은 환경오염을
발생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깨끗하며, 향기롭다. 이곳에서 직접 연꽃을 감상하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
안지추월(雁池秋月)
구
현지(旧县志)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도사 주관(周贯)이 현도(县城) 남문 밖 동쪽의 지방[현재 서회관(西会馆)옛터 부근]에서
도를 닦았다. 그는 네모난 연못을 파서 수로와 연결하여 통하게 하였다. 그는 나무를 이용하여 기러기를 만들어 연못 안에 넣었어
오랜 시간을 거쳐 나중에 나무 기러기는 날개가 생겨 하늘로 날아갔다. 이 전설과 기록의 일부 내용은 황당무계하다. 그러나 고대의
성무(成武) 도시호수와 기러기 연못(雁池) 부근의 수역은 넓고 끝이 없다. 이곳은 어류가 많고, 수초도 무성하여 일찍이 백조류의
철새가 서식하는 지역이었다.
봉령춘운(凤岭春云)
고도(古都) 성무(成武)의 남문을 이전에 의봉문(仪凤门)이
불렀다. 이 이름은 하나의 전설에 의해 생겨났다. 남문 밖에 고지가 있다. 그 고지에는 벽오동과 고목이 무성하고 고대 오색봉황의
서식지였다고 전해진다. 그 고지가 봉령(凤岭)이다. 이후 황하(黄河)의 제방이 자주 터져 강물의 범람으로 홍수로 피해를 입는다.
홍수를 저지 방어하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은 고개에 제방을 건설하였다. 봉령(凤岭) 또한 제방과 합쳐서 제방의 일부가
되었다. 대략 현재의 남제촌(南堤村) 서쪽 약200m의 제방에 위치해 있다. 봉황(凤凰)은 전설 속의 새이다. 어째서
성무(成武)에 머물렀을까? 그것은 아마도 성무(成武)의 고대 호수에 인접한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적지않은 희소한
물새와 각종 철새가 이곳의 서식지에 잠시 머물렀다.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운 조류와 이전에 보지 못하였던 새를 봉황이라 불렀을
것이다.
주소: 가택시(菏泽市) 성무현(成武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