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씨의 치매 노모 모시기
언제부터인지 모릅니다. 치매 관련 뉴스를 접하는 마음이 전 같지 않습니다. 지난주 가수 이특씨 가족의
비보를 들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전 같으면 “안됐네!” 하고 지나갔을 텐데, 어느새 그 상황에 자꾸 저를 대입시킵니다. 일흔 넘은 노부모를
떠올리고, 30년 후 저와 아내가 겪을지 모를 일을 상상합니다.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깨끗하게 가고 싶다”는 어른들 말씀이 새삼
사무칩니다.
치매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꺼내 듭니다. ‘똥꽃’(그물코
출판사)이란 책입니다. 책은 전북 장수군 덕유산 자락 산골마을에 사는 농부 전희식(56)씨와 치매를 앓는 아흔 넘은 노모 김정임 할머니의 행복한
치매 투병기입니다. 2008년 출간된 이 책은 모자가 치매와 투병한 1년간의 기록을 담았습니다. 최근 출판사에 확인해보니 김 할머니는 그때보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답니다.
어머니의 짓무른 사타구니
2003년쯤의 일입니다. 서울 형님댁에 사는 어머니 김씨가 문안 인사 온 전씨에게 부끄러운 고백을 했습니다. “오줌 누는 데가
따갑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는 기저귀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저귀를 찬 뒤 고통과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날 전씨는 어머니 사타구니가
헐어 있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나머지 삶을 이런 식으로 이어가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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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를 앓고 있는 김정임 할머니가 직접 농사일을 하고 있다.
덕유산 숲 속에 10년간 버려졌던 빈집을 찾아 수리하고 노모와 함께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습니다. 치매 노인이라면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집안에 가둬두기 십상인데 산속이라니요. 남자가 노모와 살기 위해 처자식과 떨어져 살기로
결정한 것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당시 결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귀도 먹고 똥오줌도 잘 못 가리는 어머니가 계실 곳은 결코 서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더구나 사시사철
두평 남짓한 방에서만 지내면서 밥도 받아먹고 똥오줌도 방에서 해결하는 것은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여든여섯 노쇠한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파란 하늘도 보여 드리며 나무, 비나 눈, 구름도 보여 드리려고 한다.… 어머니가 크고 작은
산새들이 처마 밑까지 와서 노닥거리는 것도 보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말. 산 속 집밖에 눈이 내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눈이 다 내리네. 이기 몇 년
마이고.” 눈은 해마다 내리지만, 방안에만 있던 어머니는 그간 눈 구경을 못했습니다. 아들은 “세상 참 좋아졌네. 눈 내리는 것도 다 볼 수
있고”라는 어머니 말에 가슴이 아파집니다.
진달래가 핀 봄날, 어머니가 사고를 쳤습니다. 어머니가 대소변을 옷에 지린 걸로 모자라 마루와 방 여기저기 칠갑을 했습니다.
구석에 숨어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가는데 눈이 마주쳤습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눈빛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눈빛에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읽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안으면서 이렇게 장난을 쳤답니다. “어무이, 똥박사. 어무이 똥대장”. 그제야 어머니는 안심을 했는지 자기가
겪은 일을 털어놓더랍니다. “허연 도포를 입고 삿갓을 쓴 염감태기들이 셋이나 와서는 말이다.” 환각입니다. 저승사자를 봤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다 변을 지렸다고 하더랍니다.
어머니를
기저귀에서 해방해 드리다
노인이 대소변을 지리면 기저귀를 채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씨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어머니의 생리적 욕구가
발동하는 시간을 파악해 미리 화장실로 모셔 가는 거지요. 그러면 기저귀 차는 치욕도 안 겪고 사타구니가 짓무르는 아픔도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는 어머니는 앉아만 있기 때문에 땀 흘릴 일이 없습니다.
‘옷에 오줌을 싸는’ 시간을 노트에 기록해보니 물을 마신 뒤 아주 일정한 주기로 소변을 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때맞춰
화장실로 모시고 가서 용변을 보게 했습니다. 물론 가끔 실수를 하지만 어머니를 기저귀에서 해방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전씨는 어머니는 기저귀만
벗어 던진 게 아니라 그걸 차고 있음으로써 느낀 수치심까지 벗어던졌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인제 다 키웠지? 오줌도 혼자 다 누고”라고
웃습니다. 다만 새벽에도 어머니가 오줌 누는 시간에 맞춰 미리 일어나야 하니 한꺼번에 두 시간 넘게 잘 수 없었답니다. 몸이 무겁고 눈이
충혈되더랍니다.
그냥 시간 때우는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일거리라야 어머니가 잃어버린 보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목표는 청국장 만들기. 하룻밤 콩을 물에
불린 뒤 어머니에게 보여 드렸습니다. 전씨는 이제 삶을 차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결정하는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서
물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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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걸린 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하는 아들
그런데 예상 외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삶아라”가 아니라 “가서 삶자”였습니다. 시키지 않고 어머니 스스로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걷지 못하는 어머니는
앉은뱅이걸음으로 부엌 문턱을 넘었습니다. 복사뼈가 문턱에 걸려 피가 나는데도 아들 도움 없이 스스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텃밭에 물을
주고 산뽕나무로 뽕 차를 만들고, 고추와 상추 모종에 직접 물을 줬습니다. 보통 치매환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데, 전씨는 뭔가를 하도록
일감을 줬습니다.
아들이 마련해 준 일거리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은 어머니는 이제 아들에게 화도 냅니다. “나 일 시켜 쳐막을라꼬,…이노무 일 몸서리가 난다”면서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리 자식 욕을 하면서도 일을 붙들면 끝날 때까지 놓지 못하고 밤샘도 불사할 기세가 된다는 겁니다. 왜그랬을까. 그녀에게 일은 하기 싫지만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하는 인생의 짐입니다.
젊은 날 8남매를 두고 남편이 세상을 뜬 후 김씨가 치러낸 악전고투 같은 노동의 기억이 그녀를 일에 메어놓으면서 동시에 일을
혐오하게 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렸을 적 어머니가 사나흘 밤을 새우고 코피를 흘리며 잠든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제 기억의 앞뒤가 사라진
어머니는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를 꺼내 보며 노동을 저주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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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꽃
아들은 그 저주를 통해
어머니가 평생 마음속에 억눌렀던 감정을 발산하고 응어리를 푼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정신이 온전했을 때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입니다.
그러니 치매 노인의 분노는 어찌 보면 치유의 과정입니다.
치매 어머니, 아들을 위해 다시 밥상을 차리다.
어머니 김씨는 시골로 들어가기 10년 전 겨울 눈밭에서 미끄러져 골반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수술을 했지만 그 후 방에 들어앉아
남이 해주는 밥만 먹었습니다. 여기에 치매가 겹쳤고 귀까지 거의 먹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산속에서 생활을 시작한 후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산에
들어간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어머니는 “수제비를 해먹자”고 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가 한 번 해보시겠는가”라고 묻자 김씨가 선선히 “그럴까?”라고 화답했습니다. 모든 과정을 어머니가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밀가루며 물을 준비하는 것은 아들 몫입니다. 어머니는 반죽만 했습니다. “호박 이파리 따다가 비벼 먹으면 맛있다”고 말한 쪽은
어머니였고, 그 말에 따라 이파리를 따온 쪽은 아들입니다. 그 이파리를 끓는 물에 넣는 것만 어머니가 했습니다. ‘어머니가 차린 밥상’에서
아들은 수제비 세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 밥상은 어머니가 산에 들어와 스스로 하기 시작한 모든 것의 정점이었다고 전씨는
썼습니다.
치매에 걸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할머니가 아들의 세심한 배려에 힘입어 삶의 보람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감동적입니다. 혹시 이특씨 가족도 이렇게 했다면 비극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처럼 자식이 치매 부모를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갈 결심을 할 수 있을까요.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치매 노인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유익하고 알찼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치매에 대해 몰랐던 여러 가지를 배우고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치매 노인을 무조건 가두는 것은 목숨만 붙은 채로 사람을 죽이는
짓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치매노인에게도 삶의 질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는 점도 깨닫게
됐습니다.
< 옮겨온 글 >
김태훈 문화부 차장E-mail : scoop87@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