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이 내용을 부풀리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실록이 없는 사실을 창작해서 쓰지는 않는다. <고려사>, <태조실록>, <태종실록>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가장 실제적으로 파헤친 이덕일님은 그의 역사특강 <정도전과 그의 시대>에 이어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을 집필하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성계의 집안은 대대로 원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 자신 조차 원나라에서 태어났고 21살 고려에 정계 입문할 때까지 뼛속 깊은 원나라 사람이었다.
동북면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사병을 가지고 있었던 이성계 집안은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민심이 떠난 고려 정부가 제어할 수 없었다. 당시 중앙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정부군은 전무한 상태였다. 군사전(田)으로 병역을 하는 군인들에게 돌아갔던 혜택을 권문세족들이 모두 빼앗아 갔기 때문에 더이상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을려고 했다. 이제 이성계는 어떤 누구의 견제도 없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왕권을 찬탈할 수 있었다.
마침,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 중의 하나였던 정도전이 이성계의 책사 역할을 함으로써 문무가 갖춰진 확실한 진용이 꾸려지게 되었다.
반면, 친원 세력이었던 최영은 검소한 생활과 청렴한 공직 자세로 수 많은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지만 정치적 판단의 실수(요동 정벌)로 실각하게 된다. 신진사대부의 핵심이었던 정몽주는 친명 세력으로 이성계, 정도전 등 혁명세력과 함께 했으나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국을 주도하려고 하다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를 당한다.
다소 우유 부단한 결단력을 지닌 이성계가 개국 시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었던 정도전과 같은 지식인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방원 같은 결단력을 지닌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명 세력이었던 이성계나 정도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사대주의 사관에 묻힌 인물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급격한 정세에 개국한 조선이 안정기에 도달할 때까지는 명나라와 전쟁을 피해야했기 때문에 선택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인조 반정 후 무조건적인 사대는 아니었다는 점을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친명파인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이성계와 함께 추진할 때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정도전을 살해한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를 맞이한 태조 이성계와 왕위를 이어 받은 태종 이방원은 팽팽한 대립관계를 유지한다. 유학을 신봉한 이방원으로서는 부모인 이성계를 어찌 할 수도 없었다.
왕권 강화의 정책으로 태종 이방원은 악역을 자처했다. 국가의 재원을 확보하고자 종부법을 통해 천민이 양민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으며 외척세력과 공신세력들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심지어 이복동생도 과감히 내친다.
태종 이방원의 왕권 강화 기틀은 고스란히 세종에게 이어져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 피우게 한다.
조선은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두 그렸습니다. 어진을 그리는 도화서의 화가에게 지방의 현감 벼슬을 주기도 했습니다. 중인 신분으로 지방관까지 나갔으면 꽤 출세한 셈이죠.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리는데,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이 되었습니다.(39~40)
고려 말 권문세족들이 남의 토지를 침탈하면서 심지어 1품 벼슬아치도 토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총리가 봉급을 받지 못할 정도니 군인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군인전이 사라지니 군사들도 사라졌습니다.(66)
이성계에게 더욱 유리했던 것은 여진족, 즉 만주족과 몽골족이 이성계에게 가담했다는 점입니다. 이성계가 살던 함흥에는 달단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달단은 몽골족을 뜻합니다.(67)
만 8년 동안 천민들이 많이 사는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귀양 살다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던 정도전만큼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속속들이 알던 지식인을 찾기는 힘들었습니다. (79) 이성계는 대포지 소유자였으면서도 '모든 토지를 몰수하고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자'는 '계구수전' 방식의 혁명적 토지개혁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을 버려야 큰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작은 기득권에 연연하는 사람은 딱 그 정도 크기밖에 되지 못합니다.(80)
원라나는 왜 약화되었을까요? 인구에 비해 통치 지역이 너무 넓었다는 점과 라마불교를 너무 깊게 신봉했다는 점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라마불교는 평생 한 번은 승려가 되어야 하고, 집안 남자 한 명은 승려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적은 인구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면서 이런 계율을 가진 종교가 국교가 되다 보니 급속도로 세가 약화된 것이 중요한 요인입니다.(85~86)
사대주의란 타인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타인이 주가 되고, 자신이 객이 되는 것을 주객전도라고 합니다. 주객전도를 객반위주라고도 하는데, 객이 거꾸로 주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을 채 극복하지 못하고 무조건 서양 것을 높이는 현상 등이 모두 청산되어야 할 사대주의입니다.(99)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고 모든 중신이 몸을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제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집권 노론은 당수 이완용을 중심으로 당론 차원에서 나라를 팔아먹었습니다. 고려 말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한말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이 이완용입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목적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103~104)
한 조직을 이끌어나가려면 공부는 필수입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따위의 인식으로 성공한 군주는 없습니다. 공부가 부족하면 최소한 공부에 밝은 신하를 왕사로 모시고 경청하기라도 해야 성공한 군주가 될 수 있습니다. 시류에 따라서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지식인 말고 세상의 잘못된 부분을 아파하는 진짜 지식인을 왕사로 모셔야 합니다. 광범위한 독서와 사색이 있어야 전략적 목표가 보이고, 이를 성공시킬 전술이 눈에 보이는 법입니다.(121)
국왕이라는 자리는 그렇지 않아도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서로 가까이 하려고 온갖 꾀를 다 내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나 지금이나 최고지도자의 자리는 이런 점에서는 고독해야 합니다. 국사는 광범위하게 여론을 수렴하고 논의해야 하지만, 함께 즐기고 노는 것은 극도로 자제해야 합니다. (122)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에는 찬성하고 조선 개국에는 반대한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몽주에게는 논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유학은 일종의 이념이었습니다. 유학은 잘못 이해하면 중화사상으로 변질됩니다. 정몽주는 명나라를 사대의 대상으로 높였습니다. 그래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요동정벌에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에 찬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왕조의 국체를 바꿀 생각은 없었습니다. 상호 모순되어 보이지만, 정몽주에게는 모순이 아니었습니다. 상국인 명나를 공격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국왕은 다른 왕씨로 교체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고려라는 왕조의 국체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147)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세웠다는 한사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민사학은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위치를 평양 중심의 한강 이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고대 사료를 찾아보면 모두 요동에 있다고 나옵니다.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고대 사료는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를 해석할 때는 많은 사료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습니다. 한쪽의 사료만 보지 말고 다른 쪽의 사료도 봐야 합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그 시대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164)
태종은 능력만 있으면 신분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한미한 출신의 박자청을 정2품 공조판서에까지 등용한 것도 태종이고, 동래의 관노였던 장영실을 특채한 인물도 태종입니다. 태종은 능력만 있으면 신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임금입니다.(219)
세종은 양반 사대부들의 편을 들어서 종모법으로 환원했습니다. 세종은 재위 기간 중에 잘한 정책도 많습니다만 이 부분은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222)
태종은 무예도 강했지만,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한 문사답게 부단하게 독서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공한 군주, 성공하는 리더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부단한 독서입니다. <태종실록> 2년 6월 조는 "상이 매일 청심정에 나가서 독서하는데, 덥거나 비가 오거나 그치지 않았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종 3년 9월 조는 "상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독서하는 엄한 과정을 세웠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독서와 사색은 리더가 시대를 읽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태종은 그래서 특히 역사서와 경서를 열심히 읽었습니다.(236~237)
태종이 충녕을 선택한 이유는 독서가였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개국은 말 위에서 하지만 수성은 도서관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군주입니다. 양녕이 말 위의 사람이라면 충녕은 책상 위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태종은 독서인이라는 이유로 충녕을 선택한 것입니다. (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