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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龍王의 雲과 雨
復次佛子야 譬如阿那婆達多龍王이 興大密雲하야 徧閻浮提하야 普霔甘雨에 百穀苗稼가 皆得生長하며 江河泉池가 一切盈滿이니 此大雨水가 不從龍王의 身心中出이로대 而能種種饒益衆生인달하야 佛子야 如來應正等覺도 亦復如是하사 興大悲雲하야 徧十方界하야 普雨無上甘露法雨하사 令一切衆生으로 皆生歡喜하야 增長善法하며 滿足諸乘하나니 佛子야 如來音聲이 不從外來며 不從內出이로대 而能饒益一切衆生이니라 是爲如來音聲第七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마치 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용왕이 크고 촘촘한 구름을 일으켜 염부제를 두루 덮고 단비를 내리면 모든 곡식의 싹이 잘 자라고 강과 내와 샘과 못이 모두 가득 차니라. 이 큰 비는 용의 몸이나 마음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지마는 능히 여러 가지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느니라.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도 또한 그와 같아서 크게 자비한 구름을 일으켜 시방세계에 가득하고 위없는 감로의 법비를 널리 내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환희심을 내고, 착한 법을 증장하며, 여러 가지 승(乘)을 만족하게 하느니라.
불자여, 여래의 음성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지마는 능히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하느니라. 이것이 여래 음성의 일곱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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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龍王)의 운(雲)과 우(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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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아주 환희로운 음성이 들리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곡식 같은 것이 메말라 있다가 비가 오면 얼마나 환희용약하겠는가?
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불자야
비여아나바달다용왕(譬如阿那婆達多龍王)이 : 마치 아나바달다용왕이
흥대밀운(興大密雲)하야 : 큰 구름을 일으켜서
변염부제(徧閻浮提)하야 : 염부제를 두루 덮고
보주감우(普霔甘雨)에 : 단비를 내리면, 감로비를 내리면
백곡묘가(百穀苗稼)가 : 모든 곡식의
개득생장(皆得生長)하며 : 싹이 자라고 백곡묘가가 개득생장이라, 싹이 잘 자라고
강하천지(江河泉池)가 :강과 내와 샘과 못들이 강하천지가 바짝 말라있다가
일체영만(一切盈滿)이니 : 전부 다 가득 찬다.
중생심보로 무자비하게 살면서 쥐어짜도 물 한 방울도 안 나오다가도, 이렇게 화엄경 한 번 듣고 나면 그래도 집에 갈 때까지는 좀 촉촉해서 며칠까지 효과가 있다. 화를 안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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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우수(此大雨水)가 : 용왕제를 지내듯이 용왕이 큰 비를 내리는데, 이 큰 비는
부종용왕(不從龍王)의 : 용의
신심중출(身心中出)이로대 : 몸이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용의 몸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용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용하고는 상관도 없다.
모든 법은 무엇으로써 생겨지는가?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서 모든 인연이 생겨지는 것이고, 한 생각이 꺼져버리면 모든 인연이 꺼져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인연법, 인과법이 아니다. 해탈법이다. 불교는 인과를 잘 알아서 해탈로 가자고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큰 비는 용의 몸이나 마음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지마는
이능종종요익중생(而能種種饒益衆生)인달하야 : 능히 여러 가지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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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천궁게찬품에 보면 ‘약인지심행(若人知心行)이 보조제세간(普造諸世間)이라, 시인즉견불(是人則見佛)하야 요불진실성(了佛眞實性)이다’라는 게송이 나온다.
약인지심행(若人知心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지(知) 안다, 마음의 씀씀이가
보조제세간(普造諸世間), 널리 모든 세간을 짓는다.
모든 세간을 무엇이 짓는가? 심행이 짓는다. 마음 쓰는 대로 짓는다. 금그릇이 되든지 은그릇이 되든지 질그릇이 되든지 플라스틱 그릇이 되든지 자기 마음 쓰는 대로 그릇이 지어지는데 어떤 사람이 약인지심행 하면, 자기의 마음이 모든 것을 짓는 줄 알아버린다면
시인즉견불(是人則見佛), 그 사람은 어떤가? 시인은 즉견불이라. 바로 견성성불이다. 그래서
요불진실성(了佛眞實性), 바로 부처님의 진실한 심성을 이해할 것이다.
그다음 대목은 여러분들도 알고 저도 아는 그 구절이 나온다.
심부주어신(心不住於身), 마음은 몸에 있지도 않고
신역부주심(身亦不住心), 몸은 또 마음에 있지도 않다.
몸은 마음에 있지 않고 마음은 몸에 있지 않는데 야마천궁게찬품에 유심게가 있잖은가.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하는 그 유심게 바로 앞 게송이 이 게송이다.
‘마음은 몸에 있지않고, 몸은 마음에 있지 않다.’
19권 야마천궁게찬품에서 찾아보시기 바란다.
유심게 앞 구절도 중요하고 유심게도 중요하다.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바로 앞에 ‘마음은 몸에 있지 않다. 몸은 또 마음에 있지 않다.’그러나 ‘이능작불사(而能作佛事)로다, 몸과 마음이 서로 어울려 편안하게 불사를 잘도 짓는다’
들리는가?
사람들이 옛날부터 무선통신을 했다.
전화기만 대단한 줄 알지만, 사람들은 옛날부터 무선 통신을 했다.
그래서 ‘이능작불사(而能作佛事)로다, 자재미증유(自在未曾有)로다, 자유자재한 것이 이것보다 더 희한한 게 없다. 불가사의하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도 : 여래 응공 정등각 부처님께서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흥대비운(興大悲雲)하야 : 큰 자비의 구름을 일으켜
변시방계(徧十方界)하야 : 시방에 가득하고
보우무상감로법우(普雨無上甘露法雨)하사 : 위 없는 감로법비를 내린다.
앞에서 구름이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여래의 청정법신, 여래장법신을 보여준다는 말씀이라고 설명했었다. 청량스님의 소초(疏鈔)에 보면 그렇게 나온다.
여기 ‘비가 내린다’라는 것은 구름이 올랐다, 비가 올랐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구름은 우리 법신을 비유한다. 법신에서 비를 내린다는 것은 곧 법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먹고 우리 마음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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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 영(令) 뭐뭐로 하여금, 일체중생,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개생환희(皆生歡喜)하야 : 모두가 환희심을 내고
증장선법(增長善法)하며 : 증장선법이라.
마음에 환희심이 났다고 하는 것은 고락에 매이지 않는 것이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괴로운 탐진치가 일단 또그닥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환희심이 돋았다.
환희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원효스님의 의견을 들어서 말씀드리겠다.
생환희(生歡喜)라, 환희심이 딱 돋았다. 그것을 일단은 우리가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환희지가 되면 뭐가 오느냐? 오온개공(五蘊皆空)이 오기 때문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지수화풍이라든지 조작된 의식에 대해서 자기가 매몰되지 않는다. 그래서 말초 신경에도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이 일단 환희심이다.
그것이 딱 체득되면, 밭에서 잡초를 확 다 뽑은 것과 같다. 그러면 곡식이 잘 자란다.
잡초가 무성하거나 황무지 같은 데는 곡식 씨앗을 아무리 뿌려놔 봐야 자라지 않는다.
우리가 오온개공의 환희심을 증득하지 못하고는, 본래 마음을 아무리 닦고 싶어도 닦을 재주가 없다.
그래서 초발심자경문에서는 사마타 참선하는 방법의 첫 번째 조건으로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은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라고 하였다. 악한 벗을 멀리 하는 그 일이 잡초제거다.
‘친근현선(親近賢善)하야’ 그것이 바로 내 마음에 돋아난 선법이다. ‘친근현선하야 수오계십계등(受五戒十戒等)하야’ 계정혜를 통해서 호미질하고 낫질하고 잘 캐서 무명 잡초를 제거해버려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말도 삼가고, 먹는 것도 삼가고, 행동도 펄쩍펄쩍 뛰는 것이라든지, 음식도 맛있는 음식 맛없는 음식을 골라 먹고 편식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한다. 편식은 다 집착이고 편집증이다. 너무 맛이나 냄새에 예민하지 말아라, 굳이 제가 견강부회해서 설명했다.
원효스님께서는 ‘환희(歡喜)’라고 나오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라고 박아버린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즐겁고 고생스럽지 않다.
증장선법(增長善法)하며 : 선법이 그대로 증장하게 되어 있다.
만족제승(滿足諸乘)하나니 : 만족제승이라. 일체 중생이 모두 자기 깜냥껏 환희심을 내고, 자기 깜냥껏 좋은 일을 한다.
제승에는 소승 중승 대승도 있지만 졸승도 있고 아주 조잡한 것들도 있고 별별 것이 다 있지 않은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라고 하는 것이 밖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안에서 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능엄경 같은 데도 밖에 오는 것도 아니고 안에서 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뭔가? ‘본래 없다’ 는 것이다.
무거무래(無去無來)다.
법문도 인연 따라서 있는 것이지, 법문 자체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다 자비로운데 더이상 자비의 구름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비도 내릴 필요도 없다.
그냥 가만 놔둬도 잘 사는데 중생들이 너무나 허덕거리니까 하는 수 없이 대자비의 구름을 일으켜야 되고, 감로비를 내려야 한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서로가 법문을 할 필요가 없는데, 중생 때문에 할 수 없이 법문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화엄경을 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해야된다.
만족제승이라, 만족제승을 화엄경의 시각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각득기소(各得其所)라고 한다. 전부 다 깜냥껏 잘 맞춰서 살아야 된다, 다 필요하다, 이런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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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음성(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은
부종외래(不從外來)며 : 밖으로부터 오지도 아니했고
부종내출(不從內出)이로대 : 부처님의 음성은 안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이능요익일체중생(而能饒益一切衆生)이니라 : 능히 일체중생을 요익하게 한다. 그래서 능엄경 첫 구절에 아난존자가 발가벗고 잡혀와서 부처님께 꿇어앉아서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니 마음이 어디 있어, 나를 뭘로 봐?”
부처님이 이렇게 얘기했을 때 아난존자가 고백을 한다.
“부처님, 마음은 재내(在內) 안에 있습니다.”
“아니다.”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재외(在外) 밖에 있습니다.”
“아니다.”
“마음을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은 잠근(潛根), 눈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니다.”
“장암(藏暗), 심장이 있는 데 여기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니다.”
“아 참 어중간한 데 중간(中間)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중간하게 대답하지 마라.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여기 합쳐지고 하는 데 수합(隨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니다.”
에라이 모르겠다.
“무착(無着)에 있습니다.”
“뭐가 무착이야, 허공을 한번 돌아봐라.”
지금 여기서도 이렇게 보면 노랗네, 빨갛네, 사람이 크네, 작네, 잘생겼네,못생겼네가 확 들어온다.
한순간도 집착하는 바가 없는데 무슨 무착이냐? 입만 떼면 거짓말을 했다고 확 찝어버렸다.
그래서 칠처징심에 재내(在內) 재외(在外) 잠근(潛根) 장암(藏暗) 수합(隨合) 중간(中間) 무착(無着) 일곱 가지로 대답을 못하고 사약장(四若章)을 들어서 또 대답을 못하였다.
팔환변견(八還辨見)에 가서도 명(明), 암(暗), 통(通), 옹(擁), 연(緣), 완허(頑虛), 울발, 제(霽), 밝고 어둡고 통하고 막히고 요동치고 고요하고 이런 것하고 마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것은 있다가 없어졌다가, 없어졌다 생겨지는 것들이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없다’ 는 것이다.
본래 없다는 건 아예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진공(眞空)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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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재미없고 저 혼자 재미있다. 원래 공연하는 사람이 재미없고 관중이 재밌어야 되는데 저는 희한하게 저 혼자 재밌고 여러분들은 재미가 하나도 없다.
스님들께서 이렇게 한숨을 푹 쉬고 있다.
그래도 이것이 신기하지 않는가? 우리가 다 아는 글인데 다시 확인할 수가 있다.
‘불자(佛子)야 여래음성(如來音聲)이 부종외래(不從外來)며 부종내출(不從內出)이로대 이능요익일체중생(而能饒益一切衆生)이니라’
사실은 강의를 안 하고 저는 간경만 했으면 제일 좋겠다.
간경을 하면 피리에 붙인 청이 떨리는 것처럼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눈이 그냥 환희로와서 눈물이 막 내비치고 그런다. 그런데 여러분들 보니까 퀭하니 듣고 계신다. 경전은 6번 기타 줄이 울리듯이 감동스럽게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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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여래음성제칠상(是爲如來音聲第七相)이니 : 이것이 여래의 음성의 일곱째 모양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들은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하느니라.
아. 龍王의 降雨
復次佛子야 譬如摩那斯龍王이 將欲降雨에 未便卽降하고 先起大雲하야 彌覆虛空하야 凝停七日하야 待諸衆生의 作務究竟하나니 何以故오 彼大龍王이 有慈悲心하야 不欲惱亂諸衆生故로 過七日已에 降微細雨하야 普潤大地인달하야 佛子야 如來應正等覺도 亦復如是하사 將降法雨에 未便卽降하고 先興法雲하야 成熟衆生하사 爲欲令其心無驚怖하야 待其熟已然後에 普降甘露法雨하야 演說甚深微妙善法하사 漸次令其滿足如來一切智智無上法味니라 佛子야 是爲如來音聲第八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마나사(摩那斯)용왕이 비를 내리려 할 적에 즉시에 내리지 아니하고, 먼저 큰 구름을 일으켜 허공을 가득 덮고 7일을 지체하면서 모든 중생들이 하던 일을 마치도록 기다리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큰 용왕이 자비한 마음이 있어 모든 중생을 괴롭히지 아니하고자 7일을 기다려서 미세한 비를 내려 땅을 널리 적시느니라.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도 그와 같아서 장차 법의 비를 내리려 하되 곧바로 내리지 아니하고 먼저 법의 구름을 일으켜 중생을 성숙하게 하느니라. 그들의 마음에 놀라움이 없게 하여 성숙됨을 기다려서 감로법의 비를 널리 내려 매우 깊고 미묘한 좋은 법을 연설하여 여래의 일체 지혜의 지혜인 위없는 법의 비 맛을 점점 만족하게 하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음성의 여덟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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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龍王)의 강우(降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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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야
비여마나사용왕(譬如摩那斯龍王)이 : 비유컨대 마치 마나사용왕이
장욕강우(將欲降雨)에 : 장욕(將欲) 장차 뭐뭐 하고자 한다. 강우 비를 내리려고 할 적에
미변즉강(未便卽降)하고 : 미(未) 아직 뭐뭐하지 아니했다. 변(便)자는 ‘ 즉시에’ 라는 뜻인데, 그럴 때는 편자로 읽어서는 안되고 변자로 읽어야 된다.
‘편리하다, 방편이다’ 할 때는 편자로 읽어야 되지만 ‘곧’이라고 할 때는 변자로 읽는 것이다.
한문은 음에 따라서 동음(同音)은 동의(同意)라, 이음(異音)은 이의(異意)라, 발음을 달리하면 뜻이 달라진다.
마나사용왕이 비를 내리려 할 때 즉시에 내리지 않는다.
왜 즉시 안 내리느냐? 자비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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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기대운(先起大雲)하야 : 먼저 큰 구름을 일으켜서
미부허공(彌覆虛空)하야 : 가득할 미(彌)자, 아미타불 미자, 미부(彌覆) 가득히 덮었다. 허공을 가득 덮어서
응정칠일(凝停七日)하야 : 이레 동안 가만히 새까만 먹구름을 덮어서 있다가
대제중생(待諸衆生)의 : 모든 중생들이
작무구경(作務究竟)하나니 : 하는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준다. 비를 확 내려 버리면 얼른 떠내려가서 죽어버릴까 싶어서, 가만히 기다려 줬다가 작무(作務)가 구경(究竟)하면, 완성되고 난 뒤에 비를 내리는데
하이고(何以故)오 : 그게 무슨 까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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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대용왕(彼大龍王)이 유자비심(有慈悲心)하야 불욕뇌란제중생고(不欲惱亂諸衆生故)로 과칠일이(過七日已)에 강미세우(降微細雨)하야 보윤대지(普潤大地)인달하야’
그렇지 않은가. 경전을 읽으니까 간질하지 않은가?
아주 간절하기도 하다. 간절해서 간질간질한가?
미세하게 중생이 다칠까 싶어서 철사 같은, 밧줄 같은 빗줄기를 내리는 것이 아니고, 사부작하게 보슬비부터 내린다. 촉촉하게, 오죽했으면 제가 별명이 보들스님이다.
피대용왕(彼大龍王)이 : 그 용왕이
유자비심(有慈悲心)하야 : 자비한 마음이 있어서
불욕뇌란제중생고(不欲惱亂諸衆生故)로 : 중생을 괴롭히지 아니할 요량으로
과칠일이(過七日已)에 : 7일동안 딱 기다렸다가
강미세우(降微細雨)하야 : 가랑가랑한 가랑비, 미세한 비를
보윤대지(普潤大地)인달하야 : 땅에 적신다.
중생들을 점차 적셔서 성숙시키고자 한다.
아레에 제가 사는 곳에 장대 같고 우박 같은 큰비가 내리니까 상추밭 상추잎이 다 빵구가 나고 녹아버렸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없고 골치 아프다.
작은 데부터 적셔서 크게 크게 키워나가고 점차 원만해지게 하는 것을 지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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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도 : 여래 응공 정등각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그와 같아서
장강법우(將降法雨)에 : 장차 법우를 내리려고 할 때
미변즉강(未便卽降)하고 : 곧바로 내리지 아니하고, 곧바로 사람한테 법을 안 쓴다. 선사들도 그랬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말로 해줄 수도 없으니까 몇 번 좀 두드려 패기도 하고 또 한 3년 동안 물긷는 것을 시키다가 별 걸 다 시킨다. 클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선흥법운(先興法雲)하야 : 먼저 법구름을 일으켜
성숙중생(成熟衆生)하사 : 중생을 성숙하게 한다.
‘화엄경부터 일단 좀 봐라’ 이렇게 해놓고
위욕령기심무경포(爲欲令其心無驚怖)하야 : 그들의 마음에 놀라움이 없게 한다.
큰 법의 구름을 일으킨다는 것, 실제로 구름은 무엇을 머금고 있는가? 비를 머금고 있다. 비는 진리를 말한다.
구름이라는 방편에 비라고 하는 진리를 머금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구름이 물을 머금고 있듯이 우리 방편 속에는 뭐가 있는가? 말 속에는 뼈가 있다.
제가 이렇게 농담할 때는 왜 농담을 하겠는가?
‘스님들께서 어른스님 안 계시니까 재미없어 하시겠구나’ 그래서 할 수 없이 방편으로 한다.
저도 한 성격한다. 별로 이렇게 성격이 안 좋다.
그런데 서로 삐딱하게 해놓으면 골치 아프다. 90도로 붙여놓으면 골치 아픈 것이다. 여러분들께서 돌처럼 가만히 계시면 저는 문어처럼 유연하게 그 사이를 다녀야 한다. 그래야 문어 머리에 상처가 안 남는다. 문어까지 딱딱하면 돌에 부딪혀서 머리가 다 깨진다. 한 사람이 바늘처럼 푹푹 찌르면 한 사람은 솜처럼 살살 받아줘야 된다.
안 그렇겠는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내 강의 안 하려는데, 리액션도 없고 입만 투욱 이러고 계신다, 좋다, 나도 진도만 나가고 말지’ 이러면 서로 재미가 없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우리 선배스님들께서는 ‘니가 와 그라노?’ 이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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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대목 보겠다.
흔히 절에서 학인이 스승님한테 법을 묻는 것을 줄탁동시라고 한다.
요만한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부화를 하려면 달걀막이 있잖은가. 이것을 부리를 가지고 부리가 아니고 병아리는 주둥이라고 하는데 주둥이를 가지고 나가야 되겠다고 계란막을 뽁뽁 끊는다. 그걸 쫄쫄쫄해서 입구(口)자를 써서 쫄병할 때의 졸(啐)자를 쓰지 않는가.
절에서는 줄탁동시라, 줄줄줄줄 줄탁인데 원래 한문은 졸탁동시라고 한다. 중국 발음으로 하면 채탁동시다. 중국은 리을 기역 이런 발음이 없다.
우리는 기역 리을 비읍 발음이 있지만 중국어로 그것은 사성쯤 해서 발음이 없다.
여기에 병아리가 쫄쫄쫄 빻는 것을 졸(啐), 그리고 어미닭이 이렇게 쪼는 것은 무슨 소리가 나는가? 탁탁 찍어주니까 탁(啄) 그래서 졸탁동시(啐啄同時)다.
졸탁동시, 줄탁동시 지금 여기에 구름이 오르고 비를 내리는 건 뭔가? 졸탁동시라, 중생의 응기설법, 대기설법이다. 근기에 맞춰서 설법해준다.
그릇이 플라스틱 그릇을 하나 떠억 가지고 왔는데 용광로 물을 흠뻑 부으면 플라스틱 그릇이 녹아 버리지 담아낼 수가 있겠는가?
화엄경을 배울만한 사람한테 화엄경을 가르쳐야 된다.
그러니까 얼마나 재밌냐면, 제가 운문사에 가서 강의를 하면 행자님들도 들어와서 강의를 듣는다.
“재밌어요?”
하고 물으니 재밌다는 것이다.
얼마나 신기한지 강의하는 사람도 모르는데, 강의하는 사람도 모르고 듣는 사람도 모르면서 서로 재밌다니까 “이게 우리 불심입니다.” 하고 웃고 넘어간다.
정원수 이름을 다 알고 정원수를 좋아하는 것은 장사꾼들이다. 산을 지나가며 이름도 모를 꽃이라도, 또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아름답고, 박수치고 싶고’ 이런 것은 정말 좋은 것이다.
알아서 좋은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보고도 좋아하면 그때는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화엄경을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러니까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병아리가 딱 나오려고 하면 부리를 가지고 계란 껍데기를 ‘내 나간다’고 쫄쫄쫄, 그런데 나올 시간도 안 됐는데 어미닭이 성질 급해서 확 찍어버리면 달걀이 툭 터져버린다.
그런데 또 자기가 나올 시간쯤 됐는데도 병아리가 끊지 못하면 안에서 곯아버릴 수가 있다.
신심명에는 그런 대목을 ‘호리유차(毫釐有差)라도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고 해놓았다.
우리가 큰절에서 공양주를 하면서 가마솥 밥을 할 때, 냄새를 맡아보면 딱 알지 않는가.
적당할 때 불을 딱 빼야 뜸이 들지 조금 일찍 불을 빼어버리면 생밥이 돼버리고 만다.
저는 해인사에 있을 때도 통도사에 있을 때도 공양주를 좀 했다. 밥을 지을 때는 그 타이밍을 잘 맞춰야 된다. 뚜껑도 안 열고 탁 냄새를 맡아보고 맞춰야 된다.
불을 조금 늦게 뺐다가는 삼층밥 되고 밑에 다 타서 숯을 위로 얹어 놓아야 된다.
생밥이 될 때도 있고 삼층밥이 될 때도 있고 여러 가지 많이 해봤는데 그런 것을 요새 가만 생각해 보면 졸탁동시다. 절에서는 줄탁동시라고 했다.
*
대기숙이연후(待其熟已然後)에 : 성숙됨을 기다려서
보강감로법우(普降甘露法雨)하야 : 감로 법비를 기다려
연설심심미묘선법(演說甚深微妙善法)하사 : 매우 깊고 미묘한 좋은 법문, 선법을 연설해서
점차영기만족여래일체지지무상법미(漸次令其滿足如來一切智智無上法味)니라 : 점차 ‘영기(令其) 뭐뭐로 하여금’ 여래의 일체 지혜의 지혜인 일체지지의 무상미, 최고의 법미를 만족하게 하느니라.
그래서 입법계품 바시라선사(婆施羅船師) 편에 이렇게 나온다. 바시라선사는 중생들을 데리고 배를 안전하게 운행하면서 보물섬으로 데려간다. 보물섬에 데려가서는 어떻게 하느냐?
법을 연설해서 보물섬에 다 데리고 가서 보물을 잘 챙기게 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각자 보물을 만족하게 한 후에는 뭘 하겠는가? 자기가 사는 사바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이나 이런 데를 보면 감동스럽다.
우리가 보물을 다 챙겼으면 어디로 가야 되느냐? 중생들 속으로, 시장 바닥으로 같이 내려가야 된다.
뭐하려고 입산했느냐? 또 하산해야 된다.
명지거사(明智居士) 편에 보면 명지거사가 하늘을 우러러서 기도하니까 사람들한테 자기에게 필요한 생필품들이 다 가득히 채워진다. 그런 연후에 법을 설한다.
여기도 그렇게 되어있다.
중생들이 다 된 뒤에 법비를 내리고 법문을 한다.
우리가 축원할 때도 그렇게 했지 않는가.
사시축원할 때도 제일 먼저 중생들이 생멸이 없다 해놓고 생멸축원을 한다.
생축 먼저 하고 멸축, 망축을 한다.
‘재수대통하고 사업번창하고 자손창성하고 부귀영화 잘 누리고 앙고 시방해서 억원 억수로 원합니다. 성취하십시오.’
전부 다 잘 먹고 잘 살아라 해놓고, 그다음에 또 죽은 영가들을 전부 다 극락왕생 시켜놓는다.
화엄경에도 정확하게 그렇게 나온다.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걸 다 성취하게 해주고 그건 충분하게 만족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보안장자 편에도 나오고 명지거사 편에도 나오고 바시라선사 편에도 나오고 입법계품 뿐만 아니라 화엄경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도 그렇다.
배고플 때 빵 주고 목마를 때 물 주고 중생들이 좋아하는 것을 다 주고 난 뒤에 그다음에 법을 설할 때는 얼마큼 설하는가? 알맞게 조금만 설한다.
그러니까 안경이 필요한 사람에겐 안경을 주고, 먹고 싶은 사람에겐 먹을 것을 준다. 지금 배고파 죽겠는데 안경을 주고 그런 것도 안 된다. 딱 필요한 것만 주고 그다음에 법을 설할 때는 알맞게 조금만 설한다. 연후원(然後願)이다. 그러한 후에 법은 조금만 설한다.
사시축원도 생축하고 망축하고 제일 뒤에 뭘 하는가?
‘연후원(然後願) 항사법계(恒沙法界) 무량불자등(無量佛子等) 동유화장장엄해(同遊華藏莊嚴海) 동입보리대도량(同入菩提大道場) 상봉화엄불보살(常逢華嚴佛菩薩) 항몽제불대광명(恒蒙諸佛大光明) 소멸무량중죄장(消滅無量衆罪障) 획득무량대지혜(獲得無量大智慧)’ 한다.
실컷 중생들이 먹고 살고 극락왕생 다 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부처님을 만나든지 화엄보살을 만나든지 하는 것이다.
연후원 항사법계 무량불자등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화엄경에서는 제일 먼저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을 다 깨닫게 해주고 난 뒤에 그다음에 보현행원을 해야 된다’ 라고 한다.
잠깐 쉬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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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어떤 스님도 말씀을 주셨지만 사실은 공부하는 강의 보다 간경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저희 도반 스님 중에 제가 존경하는 스님이 있다. 송광사 강주도 오래 하시고 통도사 강주도 하시고 지금 동화사 율주로 계시는데, 스님은 간경을 오랫동안 하셨다. 20대 때 벌써 능엄경 같은 경우 열 권 능엄경 7만자를 다 붓글씨로 쓰기도 하고, 없는 돈에 오백 질 천 권을 찍어서 책을 보시하기도 하였다.
참 어릴 때다. 지금처럼 나이가 육칠십 이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도반스님들이나 저나 20대였다. ‘어린 애들끼리 어떻게 그렇게 살아왔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능엄경 열 권을 다 쓰고 하루에 14시간 15권씩 간경을 했다.나중에는 입천장에 혀가 닿아서 머리가 울린다고 했다. 그 스님이 능엄경 천 독을 했다는데 만 권을 읽은 셈이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저도 기신론을 마음 잡고 만 번 읽어보았다. 책을 오랫동안 그냥 읽고, 부처님 숨을 쉬고, 이것이 땅에 깊이 뿌리 박아서 결국 낙락장송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경전공부를 심어서 마늘 뽑아 먹듯이, 그저 1년 모작하듯이, 나락 뽑아먹듯이, 얍삽하게 갈짝갈짝 해서는 안된다.
논문 쓰고 이런 것도 훌륭하고 좋지만 그런 공부보다는 수행의 길로 왔으면 우리가 푹 익어가도록 심어서, 금생에 꽃이 한 번 필까 말까, 기대도 안 하고 묵묵히 나아가는 것이다. 우담바라는 삼천년 만에 한 번 핀다고 하는데 우리는 백 년에 피어도 좋고 안 피어도 좋다.
일반 곡식의 씨앗은 이삼 년이나 오육 년 묵어버리면 싹이 안 나지만, 진짜 연꽃을 피우는 연씨는 천년이 됐든 칠백 년이 됐든 다시 꽃을 피운다.
아라홍련이라고 아라가야의 700년 전 연꽃씨가 연꽃을 피운 사실을 우리가 확인해 봤잖은가.
그런 걸 보면 연꽃을 닮아가는 심정에서 내가 전생에서 해왔든지 금생에서 해왔든지 전생에 안 했으면 금생이라도 심어야 되고, 금생이 안 되면 또 다음 생에라도 해야 된다.
계속 이렇게 해놓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여기 문수강당에 모여서 공부를 하지만 강의하는 사람도 역할이 별로 없고, 듣는 사람도 개인적으로 별로 역할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회중이 모여 있다’라고 하는 사실이 먼 먼 우리 후대에 대장경을 한 질씩 남겨 놓는 턱이다.
오늘도 대장경 목판본 한 판을 새겨 놓은 것이다.
오늘 한 판 새겨 놓으면, 여기에 또 우리의 모습이 비쳐지고 비쳐져서 이어질 것이다.
요새 출가하는 사람들도 적은데 저 바깥자리까지 꽉 차서 모여야 된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더 모여야 된다.
사탕발림 하듯이 하는 것은 놔두고 그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푹 묻혀져서 익어져야 된다.
저는 늘상 참 복이 많다.
어른스님께 올라가면 화엄경을 직접 설명해 주신다. 올라가서 옆에 있으면 커피 한잔하면서 ‘그거 책 가져와 봐라. 이 뜻을 봐라. 좋제? 이세간품 이거 한번 봐봐라. 마음이 이렇게 잘 돼 있다’ 어른 스님의 단독 독강을 받는 것이다. 눈앞에서 그렇게 보고 듣고 하면 ‘아아 무슨 복인가’ 싶을 때도 있다.
나옹스님은 오죽했으면 조석 예불문에 뭐라 해놨는가?
화엄경에 나오는 구절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途)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
사람 모습만 보고 듣고, 이름만 들어도 훌륭하다고 했다.
그런데 화엄경을 보고 듣고 하면 굉장하지 않겠는가?
화엄경을 옆에서 보고 듣고 이렇게 배울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아마 우리가 이 세상에 보시하는 것 중에 문수강당에 와서 머리 숫자 채우는 것이 가장 큰 보시회향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짓고 아홉 번째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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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음성제팔상(是爲如來音聲第八相)이니 : 이것이 여래의 음성의 여덟째 모양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들은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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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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