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東印度會社)는 대항해 시대에 유럽 여러 나라들이 인도 등 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세운 회사였다.
이름은 무역 회사지만,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완전 독점하고, 회사 영토 내에서의 사법 및 치안권은 물론, 제한적인 외교권 및 군사행동권까지 갖고 있는 사실상의 총독부였다. 특히 회사의 수장이 식민지 총독을 겸하였으므로 현대의 무역 회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많이 알려진 것은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 1600년 설립)지만, 이후 덴마크, 포르투갈, 프랑스, 스웨덴도 비슷한 이름과 성격을 가진 동인도 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2년 후에 다시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1602년 설립)가 규모면에서 훨씬 컸다.
일본은 이들을 모방하여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부산에 세웠는데, 나중에 조선총독부에 흡수된다.
1) 영국 동인도 회사(英國東印度會社, 영어: East India Company)
(1600년~1708년 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 1708년~1873년 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칙허 회사이다.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설립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56년의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있은 뒤에 찰스 2세 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런던에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본사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어,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국의 작가 가일스 밀턴의 저서인 《향료전쟁》에 자세히 나와 있다.)
1801년부터 1858년까지 쓰인 영국 동인도회사의 기.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이외 강제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 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고, 1765년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어 인도의 정치 권력자·영토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초창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쟁보다 무역 자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1600년 설립된 이후 1세기 동안 이사회는 "우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이다"라고 강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도와의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가 주요한 활동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무력으로 충돌했다. 프랑스는 세포이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을 정규군으로 수용하여 전투능력을 증대하면서 영국보다 우위를 점했다. 175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를 수용했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두 나라는 각각 10,000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력(대부분 인도인들이었다)을 인도해안에 배치했다.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1759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직원을 베이징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재위: 1735년 ~ 1796년)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하고 광주항만 개항을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公行)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1780년대부터 청나라와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광둥 무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공행(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상인의 무역을 제한했다. 또한, 무역 기간이나 물품도 통제하여 유럽 상인들이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다.
1680년대 국왕이 회사에 대하여 징병권, 사관임명권, 교전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보강되었다. 경쟁 상대인 신동인도 회사를 합병하고, 로버트 클라이브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 이양 등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그 책임을 물어 회사 운영을 정지시켰고, 인도 통치의 기능을 모두 빅토리아 왕에게 헌납하도록 한 다음, 동인도 회사를 1874년에 해산했다.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 영어: Dutch East India Company)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네덜란드에서인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위해 1602년에 세운 칙허 회사이다.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며, 처음으로주식을 발행한 최초의주식회사이기도 하다.
조선을 방문한서양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헨드리크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어 일한 선원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
네덜란드 상인은 동인도 물산을 리스본에서 발트해 상품과의 교환으로 획득하고 있었는데, 에스파냐의 압력으로 물러나게 되자, 동인도와의 직접무역의 기운이 높아져 먼저 1594년암스테르담에 원국(遠國)회사가 설립되었으며, 그 후 동종의 회사 설립과 합병과정을 거쳐 1600년 암스테르담에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연달아 홀란트 등에 약 10개의 동인도 기업회사가 난립했다. 이 때문에 각 기업간의 불이익이 초래되었고,에스파냐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통합이 필요하게 되어 의회의 요구에 따라 동인도 무역의 여러 회사는 160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통합되었다.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본부
16세기에는 향료무역을 경영한 포르투갈인이 몰루카 제도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16세기 말 네덜란드 상인이 자와 섬의 반탐에 상관(商館)을 열고 개척의 기초를 이룩했다.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자 이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정부는 1602년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동양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자카르타)에 총독정청(總督政廳)을 두어 포르투갈, 영국 세력을 쫓아내고, 17세기에는 동양무역에 우월적 지위를 확립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하였다.
일본무역을 사실상 독점하여 당시 국제 결제 수단이었던 은화의 수입원을 마련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동양 국가들 간의 국제 무역 또한 장악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전교를 하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는 달리,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를 탄압하던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를 유일한 거래상대로 여겼다.
점령지역에서는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여 많은 수탈을 행했다. 자와(자바섬)의 토후(土侯)를 지배하고,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을 값싼 월급으로 고용했으며,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상품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남방의 향료, 커피, 쪽(藍), 설탕의 획득에는 원주민의 봉건적인 공납(貢納)이나 약탈이라고 보는게 정확할 정도로 매상(買上)을 강요하였고, 가장 중요한 정향(丁香), 육두구(肉荳?)는 생산지를 한정시켜 노예재배제(奴?栽培制)를 실시하였다.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조선소 (1750)
회사의 번영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세계적 지위의 상징이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과의 대립에서 점차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영국 세력에게 압도(壓倒)되어 1799년 동인도회사는 해산, 네덜란드 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때, 자와는 영국에게 점령되어 래플즈에 의해 식민정책(植民政策)의 대개혁이 단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다시 네덜란드의 통치가 시작되어 강제재배제(强制栽培制)가 시행되었다. 즉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번영과 경제적인 회복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뉴기니, 발리, 보르네오, 수마트라 등이 네덜란드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 말부터 원주민의 자각이 높아져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가, 전후 원주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 덴마크 동인도 회사(덴마크어: Ostindisk Kompagni)는 중상주의 정책추진으로 아시아를 향한 덴마크의 근대무역을 위해 1612년에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4세의 특허장에 의해 설립된 동인도 회사이다. 영어로 Danish East India Company라는 덴마크 동인도회사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특허회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인도를 향해 6척의 덴마크 무장상선과 군함, 그리고 1척의 네덜란드 호위함이 스리랑카를 향해 떠났다. 1620년 인도 동남부 탄조르왕국에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코로만델 해안의 트랑케바르(Tranquebar)에 단스보그(Dansborg)항을 건설했다. 그리고 인도의 덴마크 통치자 오페르호프트(Opperhooft)가 머물렀다.
1620년 덴마크인 Ove Gjedde에 의해 세워진 단스보그(Dansborg)항의 모습
덴마크 동인도회사는 인도와의 무역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무역에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해군력이 약한 무굴제국의 상선들을 약탈하였다.
영국이 네덜란드에 의해서 동남아와 일본에서 쫓겨날 즈음, 전성기 동안이었던 덴마크 동인도회사는 스웨덴 동인도회사와 함께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더 많은 차를 수입했고 그 중 90%를 높은 가격에 매각할 수 있었던 영국에 밀수출했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 동인도회사가 약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짧은 전성기가 끝나면서 덴마크 동인도회사는 그 존재성을 빠르게 잃었고 1729년에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30년 아시아회사(Asiatisk Kompagni)라는 이름으로 재설립되었다. 또한 이 회사는 1732년 왕립 특허가 수여되어 희망봉 동쪽에서의 모든 덴마크 무역을 40년 동안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40년 뒤, 1772년 이 아시아회사는 독점권을 잃었고 1779년 덴마크령 인도는 왕령식민지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초창기인 18세기말, 덴마크는 서인도의 버진제도, 황금해안의 기니아, 코로만델 해안의 트랑케바르를 다스리는 제국이 되어 있었다.
또한 덴마크는 74문의 함포와 무장한 3급 전열함 이상의 대형 군함을 13척이나 보유하고 있으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전쟁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덴마크는 나폴레옹의 속국이 된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의 산물을 군함의 호위까지 받으며 네덜란드로의 수송을 통해 이득을 챙겼고, 이는 영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영국은 덴마크가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영국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1801년, 1807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해군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공격했다. 특히 1807년에는 14,000여 개의 다양한 미사일로 코펜하겐을 폭격했다. 1807년 코펜하겐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서유럽 국가 중 하나였던 덴마크는 상선과 군함을 포함한 모든 함대를 잃었고 헬골란트섬을 영국에 양도해야 했다.
덴마크는 결국 인도 본토와 덴마크령 황금해안에 남아 있었던 덴마크 정착지를 1845년과 1850년에 각각 영국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4) 대항해시대를 연 해상제국의 선두주자 포르투갈
동양의 향신료, 정확히 말하면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는비단길을 거쳐 서양에 알려졌다. 그 후 1500년대 초반 포르투갈 사람인 ‘바스쿠 다 가마’가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 남단을 돌아 인도양으로 항해하는데 성공하면서부터 대항해의 시대가 열렸다.
포르투갈은 이 인도 항로의 개척을 통해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해상제국의 선두주자가 되어 향신료 등의 동방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차지했다. (콜럼버스 역시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이어 스페인이 그리고 또 다시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대항해시대의 주축이 되었다.
서양인들을 사로잡은 향신료는 후추와 함께 정향 그리고 육두구였는데, 그중에서 정향과 육두구는 기록에 의하면 1512년 포르트갈 인들이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에서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丁香(정향), 못 丁(정)에 향내 香(향)인데, 그렇게 이름이 붙은 까닭은 말린 꽃봉오리가 마치 못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달콤 매콤한 맛의 정향은 고대로부터 동서양 공히 대표적인 묘약으로 알려졌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이미 책을 통해 鷄舌香(계설향), 즉 ‘닭의 혀’란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고위 관리들이 황제를 알현할 때 구취를 없애느라 이것을 입에 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중세 이슬람 국가에선 이것을 먹으면 불로장생하고 백발을 막는다고 생각했으며, 옛날 이집트에도 이미 서기 176년에 도입되면서 몇 백 년 뒤에는 지중해 전역에 알려졌으며 유럽에는 8세기경에 소개되었다 한다.
가격이 워낙 비싸서 ‘검은금’이란 별칭을 얻을 정도였던 정향은 부패방지와 살균력이 뛰어나서 우리 역시 예로부터 귀한 수입 약재로써 ‘동의보감’에도 그 처방이 나와 있다.
오늘날에도 정향은 오향장육만이 아니라 서양음식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후추는 인도 전역에서 났기에 그런대로 쉬웠으나 정향과 육두구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딱 한 군데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가 유일한 산지였다.
이에 돈벌이에 혈안이 된 포르투갈 인들은 몰루카제도를 강점하고 나서 정향과 육두구 무역을 독점했다. 이 바람에 몰루카 제도는 서양인들에게 ‘향료 섬(the Spice Islands)’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먼저 아시아의 바다로 진출해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던 시절, 일본과도 교역을 시도했다. 그 결과 火繩銃(화승총)이 일본에 전해졌으니 1543년의 일이었다.
화승총은 일본 사무라이들의 전쟁 양상을 일변시켰고, 나아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끌고 우리 한반도로 쳐들어왔으니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눈독을 들이던 네덜란드인들은 급기야 1605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몰루카제도를 강탈하는데 성공했다. 또 독점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정향이 혹시라도 다른 지방에서 재배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가며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오늘날 정향은 몰루카 제도만이 아니라 스리랑카와 아프리카 동해안 일대에서도 소량이긴 하지만 생산이 되는데 이 지역은 모두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으니 결국 영국인들이 확산시킨 것이다.
유럽 각국들은 모두 아시아의 바다와 섬 그리고 그 연안에서 나는 후추와 정향, 육두구를 얻고자, 영국은 1600년, 네덜란드는 1602년, 덴마크는 1616년, 프랑스는 1664년에 저마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결국 우연한 경로를 통해 상호 경쟁하는 가운데 변모해간 이 유럽의 동인도 회사들이야말로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작이었고 서구 열강에 의한 세계 지배의 첫 걸음이 되었다.
음식 맛을 내고 몸에 좋고 향신료를 얻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훗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들어내었고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으며 또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을 통해 오늘날 글로벌 최강자 미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군사력이나 무력이 아니고, 이념이나 사상, 종교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이익을 얻어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인 ‘무역’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원동력이었다.
처음부터 서구 열강들이 인도와 아시아를 점령해서 노예로 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시아의 바다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단지 인도와 아시아에 향신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동방의 섬 몰루카 제도에서 신비의 향신료를 가져다 팔아 엄청난 이익을 본다는 사실을 알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부유한 상인들이 출자를 해서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영국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아래 영국 무역상인들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지만 여러 면에서 영국은 아직 네덜란드의 맞수가 아니었다.
동인도회사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이었다. 상인들과 무역업자들은 먼 바다로 항해는 큰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독점권을 따냈다. 정부는 세수가 대단히 컸기에 독점권을 부여했다.
무역이란 거래 조건이 맞으면 서로 장사가 잘 되지만, 어느 한 쪽에게 그렇지 못하면 어느 순간 해적으로 돌변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대포와 총칼 등으로 무장을 하고 거친 바다를 항해했다. 동인도회사들은 무역을 위한 군사력을 지닌 무력집단이었다. 당시에는 국제연합도 국제법도 없었으며, 오늘날의 인권의 개념도 없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납치하여 아메리카 등지에 노예로 팔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처음 한 일은 바로 1605년 포르투갈인들이 오랫동안 차지했던 몰루카 제도를 강탈한 일이었다. 그리고 몰루카 제도의 섬 중에 하나인 자바섬의 ‘반튼’이란 곳에 상관을 개설했다.
이어 1619년에는 오늘날 자카르타에 대규모 본부를 두고 포르투갈 세력은 물론 경쟁상대인 영국마저도 멀리 ?아버린 뒤 근 한 세기 동안 아시아 무역에 있어 우월적 지위를 확립하였으니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일본과의 무역도 독점했다. 이로 인해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은 네덜란드에 蘭學(난학)이 문물의 대표 주자로 소개되었다.
이에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서서히 세계로 진출하여 서양문물을 접하고 배우기 시작했으니, 일본이 한·중·일 삼국 중에서 먼저 혁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개신교를 포함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천주교와는 달리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고,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를 유일한 무역상대로 인정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 밀려서 몰루카제도의 향신료 무역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이에 영국은 인도에 힘을 집중시켰고 결국 인도를 차지했던 것이다. 대영제국의 번영에 있어 인도야말로 결정적인 보물창고였다고 할 것이다.
5) 프랑스 동인도 회사(프랑스어: La Compagnie Fran?aise des Indes Orientales, 영어: French East India Company.)는 1604년에 프랑스인이 인도·동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무역을 관리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1664년 장바티스트 콜베르에 의하여 재편성되어, 인도 동해안의 찬데르나고르, 퐁디세리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때에는 뒤플렉스의 지휘 아래 영국을 압도, 지배지의 인구는 3천만에 달했다.
뒤플렉스 소환 후 7년전쟁 때에는 원조한 토후(土侯)가 영국에 패하여(플라시 전투) 이후 세력을 잃고 1769년에 해산했다.
회사는 해체되었지만, 찬데르나고르, 퐁디세리 등의 무역항들은 1949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유지한다.
루이 14세의 재정장관이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설립한 프랑스동인도회사는 프랑스 상인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얻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콜베르는 많은 상인들에게 가입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프랑수아 샤르팡티에를 설득하여 프랑스인들이 금·후추·계피·목면을 외국상인들로부터 사들여야 하는 이유를 들어 이 회사에 참여할 경우 가져올 이득에 관한 강력한 선전문을 쓰도록 했다.
루이 14세는 119개 시(市)에 편지를 써서 상인들에게 이 회사에 기부하는 문제를 토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인들은 이를 얄팍하게 은폐된 세금징수 조치라고 여기고 가입권유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1668년경 동인도회사의 가장 많은 액수를 투자한 사람은 왕 자신이었고 회사는 그의 통제를 받았다.
이미 설립된 네덜란드동인도회사와의 끊임없는 경쟁속에서 프랑스동인도회사는 번번히 네덜란드인들에게 시달리고 물품을 몰수당하기까지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시장개척에 나섰다.
이 회사는 1670~75년의 짧은 기간 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1680년경에 이르자 수익을 거의 올리지 못하고 많은 선박들은 수리를 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1719년 프랑스동인도회사는 짧은 기간밖에 존속하지 못한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에 흡수되었다.
이 회사는 심각한 재정적 파탄을 가져온 재정장관 존 로의 재정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뒤이어 1720년에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붕괴했을 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뒤 이 회사는 프랑스인도회사라는 명칭으로 재조직되었다.
6) 스웨덴 동인도 회사(스웨덴어: Svenska Ostindiska Companiet)는 1731년에 민간 회사에 의해 설립된 스웨덴의 동인도 회사이다. 회사조직의 중심이 된 사람이 스코틀랜드 사람이나 네덜란드 사람이었기 때문에 엄밀히 스웨덴 동인도 회사가 아닌 측면을 가진다.
본거지는 예테보리이며, 주로 중국 청나라와의 무역을 중시했다. 당시 스웨덴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의 식민지 전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스웨덴 동인도회사 배들은 1731년부터 1813년까지 132번이나 아시아를 항해했는데, 이중 세 번을 제외하고 모두 광저우가 목적지였다.
1743년 3월, 스웨덴 동인도회사 소속 범선 예테보리호가 선원 141명에 몰래 숨어든 남자아이 셋까지 포함하여 144명을 태우고 스웨덴을 떠났다. 폭풍우와 해적의 습격, 전염병을 이겨내고 18개월 만에 목적지 청나라의 무역항 광저우에 도착했다. 이들은 뭍에 상륙하여 당시 유럽인들이 선망하던 차와 도자기, 비단을 사들였다.
예테보리호의 광저우행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위험한 항해였으나 대가는 달콤했다. 예테보리호가 중국에 한 번 다녀오면 이윤이 스웨덴 1년 국민총생산액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예테보리호는 불행했다.
1744년 9월, 예테보리항 1km를 채 남겨놓지 않은 곳에서 암초를 들이받고 700t의 화물과 함께 침몰했다. 스웨덴은 1980년대 들어 예테보리호를 발굴했고 1994년 예테보리호를 복원했다. 2006년 7월, 예테보리호는 260여 년 만에 다시 광저우를 방문했다. 개혁·개방의 길을 달리는 중국정부가 예테보리호의 귀환을 성대하게 환영했다.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東印度會社)는 대항해 시대에 유럽 여러 나라들이 인도 등 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세운 회사였다.
이름은 무역 회사지만,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완전 독점하고, 회사 영토 내에서의 사법 및 치안권은 물론, 제한적인 외교권 및 군사행동권까지 갖고 있는 사실상의 총독부였다. 특히 회사의 수장이 식민지 총독을 겸하였으므로 현대의 무역 회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많이 알려진 것은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 1600년 설립)지만, 이후 덴마크, 포르투갈, 프랑스, 스웨덴도 비슷한 이름과 성격을 가진 동인도 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2년 후에 다시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1602년 설립)가 규모면에서 훨씬 컸다.
일본은 이들을 모방하여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부산에 세웠는데, 나중에 조선총독부에 흡수된다.
1) 영국 동인도 회사(英國東印度會社, 영어: East India Company)
(1600년~1708년 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 1708년~1873년 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칙허 회사이다.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설립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56년의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있은 뒤에 찰스 2세 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런던에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본사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어,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국의 작가 가일스 밀턴의 저서인 《향료전쟁》에 자세히 나와 있다.)
1801년부터 1858년까지 쓰인 영국 동인도회사의 기.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이외 강제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 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고, 1765년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어 인도의 정치 권력자·영토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초창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쟁보다 무역 자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1600년 설립된 이후 1세기 동안 이사회는 "우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이다"라고 강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도와의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가 주요한 활동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무력으로 충돌했다. 프랑스는 세포이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을 정규군으로 수용하여 전투능력을 증대하면서 영국보다 우위를 점했다. 175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를 수용했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두 나라는 각각 10,000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력(대부분 인도인들이었다)을 인도해안에 배치했다.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1759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직원을 베이징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재위: 1735년 ~ 1796년)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하고 광주항만 개항을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公行)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1780년대부터 청나라와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광둥 무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공행(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상인의 무역을 제한했다. 또한, 무역 기간이나 물품도 통제하여 유럽 상인들이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다.
1680년대 국왕이 회사에 대하여 징병권, 사관임명권, 교전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보강되었다. 경쟁 상대인 신동인도 회사를 합병하고, 로버트 클라이브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 이양 등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그 책임을 물어 회사 운영을 정지시켰고, 인도 통치의 기능을 모두 빅토리아 왕에게 헌납하도록 한 다음, 동인도 회사를 1874년에 해산했다.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 영어: Dutch East India Company)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네덜란드에서인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경제적 진출을 위해 1602년에 세운 칙허 회사이다.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며, 처음으로주식을 발행한 최초의주식회사이기도 하다.
조선을 방문한서양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헨드리크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어 일한 선원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
네덜란드 상인은 동인도 물산을 리스본에서 발트해 상품과의 교환으로 획득하고 있었는데, 에스파냐의 압력으로 물러나게 되자, 동인도와의 직접무역의 기운이 높아져 먼저 1594년암스테르담에 원국(遠國)회사가 설립되었으며, 그 후 동종의 회사 설립과 합병과정을 거쳐 1600년 암스테르담에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연달아 홀란트 등에 약 10개의 동인도 기업회사가 난립했다. 이 때문에 각 기업간의 불이익이 초래되었고,에스파냐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통합이 필요하게 되어 의회의 요구에 따라 동인도 무역의 여러 회사는 160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통합되었다.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본부
16세기에는 향료무역을 경영한 포르투갈인이 몰루카 제도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16세기 말 네덜란드 상인이 자와 섬의 반탐에 상관(商館)을 열고 개척의 기초를 이룩했다.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자 이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정부는 1602년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동양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자카르타)에 총독정청(總督政廳)을 두어 포르투갈, 영국 세력을 쫓아내고, 17세기에는 동양무역에 우월적 지위를 확립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하였다.
일본무역을 사실상 독점하여 당시 국제 결제 수단이었던 은화의 수입원을 마련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동양 국가들 간의 국제 무역 또한 장악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전교를 하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과는 달리,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를 탄압하던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를 유일한 거래상대로 여겼다.
점령지역에서는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여 많은 수탈을 행했다. 자와(자바섬)의 토후(土侯)를 지배하고,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을 값싼 월급으로 고용했으며,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상품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남방의 향료, 커피, 쪽(藍), 설탕의 획득에는 원주민의 봉건적인 공납(貢納)이나 약탈이라고 보는게 정확할 정도로 매상(買上)을 강요하였고, 가장 중요한 정향(丁香), 육두구(肉荳?)는 생산지를 한정시켜 노예재배제(奴?栽培制)를 실시하였다.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조선소 (1750)
회사의 번영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세계적 지위의 상징이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과의 대립에서 점차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영국 세력에게 압도(壓倒)되어 1799년 동인도회사는 해산, 네덜란드 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때, 자와는 영국에게 점령되어 래플즈에 의해 식민정책(植民政策)의 대개혁이 단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다시 네덜란드의 통치가 시작되어 강제재배제(强制栽培制)가 시행되었다. 즉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번영과 경제적인 회복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뉴기니, 발리, 보르네오, 수마트라 등이 네덜란드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 말부터 원주민의 자각이 높아져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가, 전후 원주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 덴마크 동인도 회사(덴마크어: Ostindisk Kompagni)는 중상주의 정책추진으로 아시아를 향한 덴마크의 근대무역을 위해 1612년에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4세의 특허장에 의해 설립된 동인도 회사이다. 영어로 Danish East India Company라는 덴마크 동인도회사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특허회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인도를 향해 6척의 덴마크 무장상선과 군함, 그리고 1척의 네덜란드 호위함이 스리랑카를 향해 떠났다. 1620년 인도 동남부 탄조르왕국에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코로만델 해안의 트랑케바르(Tranquebar)에 단스보그(Dansborg)항을 건설했다. 그리고 인도의 덴마크 통치자 오페르호프트(Opperhooft)가 머물렀다.
1620년 덴마크인 Ove Gjedde에 의해 세워진 단스보그(Dansborg)항의 모습
덴마크 동인도회사는 인도와의 무역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무역에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해군력이 약한 무굴제국의 상선들을 약탈하였다.
영국이 네덜란드에 의해서 동남아와 일본에서 쫓겨날 즈음, 전성기 동안이었던 덴마크 동인도회사는 스웨덴 동인도회사와 함께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더 많은 차를 수입했고 그 중 90%를 높은 가격에 매각할 수 있었던 영국에 밀수출했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 동인도회사가 약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짧은 전성기가 끝나면서 덴마크 동인도회사는 그 존재성을 빠르게 잃었고 1729년에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30년 아시아회사(Asiatisk Kompagni)라는 이름으로 재설립되었다. 또한 이 회사는 1732년 왕립 특허가 수여되어 희망봉 동쪽에서의 모든 덴마크 무역을 40년 동안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40년 뒤, 1772년 이 아시아회사는 독점권을 잃었고 1779년 덴마크령 인도는 왕령식민지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초창기인 18세기말, 덴마크는 서인도의 버진제도, 황금해안의 기니아, 코로만델 해안의 트랑케바르를 다스리는 제국이 되어 있었다.
또한 덴마크는 74문의 함포와 무장한 3급 전열함 이상의 대형 군함을 13척이나 보유하고 있으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전쟁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덴마크는 나폴레옹의 속국이 된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의 산물을 군함의 호위까지 받으며 네덜란드로의 수송을 통해 이득을 챙겼고, 이는 영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영국은 덴마크가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영국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1801년, 1807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해군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공격했다. 특히 1807년에는 14,000여 개의 다양한 미사일로 코펜하겐을 폭격했다. 1807년 코펜하겐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서유럽 국가 중 하나였던 덴마크는 상선과 군함을 포함한 모든 함대를 잃었고 헬골란트섬을 영국에 양도해야 했다.
덴마크는 결국 인도 본토와 덴마크령 황금해안에 남아 있었던 덴마크 정착지를 1845년과 1850년에 각각 영국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4) 대항해시대를 연 해상제국의 선두주자 포르투갈
동양의 향신료, 정확히 말하면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는비단길을 거쳐 서양에 알려졌다. 그 후 1500년대 초반 포르투갈 사람인 ‘바스쿠 다 가마’가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 남단을 돌아 인도양으로 항해하는데 성공하면서부터 대항해의 시대가 열렸다.
포르투갈은 이 인도 항로의 개척을 통해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해상제국의 선두주자가 되어 향신료 등의 동방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차지했다. (콜럼버스 역시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이어 스페인이 그리고 또 다시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대항해시대의 주축이 되었다.
서양인들을 사로잡은 향신료는 후추와 함께 정향 그리고 육두구였는데, 그중에서 정향과 육두구는 기록에 의하면 1512년 포르트갈 인들이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에서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丁香(정향), 못 丁(정)에 향내 香(향)인데, 그렇게 이름이 붙은 까닭은 말린 꽃봉오리가 마치 못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달콤 매콤한 맛의 정향은 고대로부터 동서양 공히 대표적인 묘약으로 알려졌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이미 책을 통해 鷄舌香(계설향), 즉 ‘닭의 혀’란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고위 관리들이 황제를 알현할 때 구취를 없애느라 이것을 입에 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중세 이슬람 국가에선 이것을 먹으면 불로장생하고 백발을 막는다고 생각했으며, 옛날 이집트에도 이미 서기 176년에 도입되면서 몇 백 년 뒤에는 지중해 전역에 알려졌으며 유럽에는 8세기경에 소개되었다 한다.
가격이 워낙 비싸서 ‘검은금’이란 별칭을 얻을 정도였던 정향은 부패방지와 살균력이 뛰어나서 우리 역시 예로부터 귀한 수입 약재로써 ‘동의보감’에도 그 처방이 나와 있다.
오늘날에도 정향은 오향장육만이 아니라 서양음식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후추는 인도 전역에서 났기에 그런대로 쉬웠으나 정향과 육두구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딱 한 군데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가 유일한 산지였다.
이에 돈벌이에 혈안이 된 포르투갈 인들은 몰루카제도를 강점하고 나서 정향과 육두구 무역을 독점했다. 이 바람에 몰루카 제도는 서양인들에게 ‘향료 섬(the Spice Islands)’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먼저 아시아의 바다로 진출해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던 시절, 일본과도 교역을 시도했다. 그 결과 火繩銃(화승총)이 일본에 전해졌으니 1543년의 일이었다.
화승총은 일본 사무라이들의 전쟁 양상을 일변시켰고, 나아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끌고 우리 한반도로 쳐들어왔으니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눈독을 들이던 네덜란드인들은 급기야 1605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몰루카제도를 강탈하는데 성공했다. 또 독점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정향이 혹시라도 다른 지방에서 재배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가며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오늘날 정향은 몰루카 제도만이 아니라 스리랑카와 아프리카 동해안 일대에서도 소량이긴 하지만 생산이 되는데 이 지역은 모두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으니 결국 영국인들이 확산시킨 것이다.
유럽 각국들은 모두 아시아의 바다와 섬 그리고 그 연안에서 나는 후추와 정향, 육두구를 얻고자, 영국은 1600년, 네덜란드는 1602년, 덴마크는 1616년, 프랑스는 1664년에 저마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결국 우연한 경로를 통해 상호 경쟁하는 가운데 변모해간 이 유럽의 동인도 회사들이야말로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작이었고 서구 열강에 의한 세계 지배의 첫 걸음이 되었다.
음식 맛을 내고 몸에 좋고 향신료를 얻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훗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들어내었고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으며 또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을 통해 오늘날 글로벌 최강자 미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군사력이나 무력이 아니고, 이념이나 사상, 종교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이익을 얻어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인 ‘무역’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원동력이었다.
처음부터 서구 열강들이 인도와 아시아를 점령해서 노예로 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시아의 바다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단지 인도와 아시아에 향신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동방의 섬 몰루카 제도에서 신비의 향신료를 가져다 팔아 엄청난 이익을 본다는 사실을 알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부유한 상인들이 출자를 해서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영국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아래 영국 무역상인들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지만 여러 면에서 영국은 아직 네덜란드의 맞수가 아니었다.
동인도회사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이었다. 상인들과 무역업자들은 먼 바다로 항해는 큰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독점권을 따냈다. 정부는 세수가 대단히 컸기에 독점권을 부여했다.
무역이란 거래 조건이 맞으면 서로 장사가 잘 되지만, 어느 한 쪽에게 그렇지 못하면 어느 순간 해적으로 돌변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대포와 총칼 등으로 무장을 하고 거친 바다를 항해했다. 동인도회사들은 무역을 위한 군사력을 지닌 무력집단이었다. 당시에는 국제연합도 국제법도 없었으며, 오늘날의 인권의 개념도 없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납치하여 아메리카 등지에 노예로 팔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처음 한 일은 바로 1605년 포르투갈인들이 오랫동안 차지했던 몰루카 제도를 강탈한 일이었다. 그리고 몰루카 제도의 섬 중에 하나인 자바섬의 ‘반튼’이란 곳에 상관을 개설했다.
이어 1619년에는 오늘날 자카르타에 대규모 본부를 두고 포르투갈 세력은 물론 경쟁상대인 영국마저도 멀리 ?아버린 뒤 근 한 세기 동안 아시아 무역에 있어 우월적 지위를 확립하였으니 이로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당시 세계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일본과의 무역도 독점했다. 이로 인해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은 네덜란드에 蘭學(난학)이 문물의 대표 주자로 소개되었다.
이에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서서히 세계로 진출하여 서양문물을 접하고 배우기 시작했으니, 일본이 한·중·일 삼국 중에서 먼저 혁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개신교를 포함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천주교와는 달리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고,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를 유일한 무역상대로 인정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 밀려서 몰루카제도의 향신료 무역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이에 영국은 인도에 힘을 집중시켰고 결국 인도를 차지했던 것이다. 대영제국의 번영에 있어 인도야말로 결정적인 보물창고였다고 할 것이다.
5) 프랑스 동인도 회사(프랑스어: La Compagnie Fran?aise des Indes Orientales, 영어: French East India Company.)는 1604년에 프랑스인이 인도·동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무역을 관리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1664년 장바티스트 콜베르에 의하여 재편성되어, 인도 동해안의 찬데르나고르, 퐁디세리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때에는 뒤플렉스의 지휘 아래 영국을 압도, 지배지의 인구는 3천만에 달했다.
뒤플렉스 소환 후 7년전쟁 때에는 원조한 토후(土侯)가 영국에 패하여(플라시 전투) 이후 세력을 잃고 1769년에 해산했다.
회사는 해체되었지만, 찬데르나고르, 퐁디세리 등의 무역항들은 1949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유지한다.
루이 14세의 재정장관이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설립한 프랑스동인도회사는 프랑스 상인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얻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콜베르는 많은 상인들에게 가입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프랑수아 샤르팡티에를 설득하여 프랑스인들이 금·후추·계피·목면을 외국상인들로부터 사들여야 하는 이유를 들어 이 회사에 참여할 경우 가져올 이득에 관한 강력한 선전문을 쓰도록 했다.
루이 14세는 119개 시(市)에 편지를 써서 상인들에게 이 회사에 기부하는 문제를 토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인들은 이를 얄팍하게 은폐된 세금징수 조치라고 여기고 가입권유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1668년경 동인도회사의 가장 많은 액수를 투자한 사람은 왕 자신이었고 회사는 그의 통제를 받았다.
이미 설립된 네덜란드동인도회사와의 끊임없는 경쟁속에서 프랑스동인도회사는 번번히 네덜란드인들에게 시달리고 물품을 몰수당하기까지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시장개척에 나섰다.
이 회사는 1670~75년의 짧은 기간 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1680년경에 이르자 수익을 거의 올리지 못하고 많은 선박들은 수리를 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1719년 프랑스동인도회사는 짧은 기간밖에 존속하지 못한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에 흡수되었다.
이 회사는 심각한 재정적 파탄을 가져온 재정장관 존 로의 재정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뒤이어 1720년에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붕괴했을 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뒤 이 회사는 프랑스인도회사라는 명칭으로 재조직되었다.
6) 스웨덴 동인도 회사(스웨덴어: Svenska Ostindiska Companiet)는 1731년에 민간 회사에 의해 설립된 스웨덴의 동인도 회사이다. 회사조직의 중심이 된 사람이 스코틀랜드 사람이나 네덜란드 사람이었기 때문에 엄밀히 스웨덴 동인도 회사가 아닌 측면을 가진다.
본거지는 예테보리이며, 주로 중국 청나라와의 무역을 중시했다. 당시 스웨덴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의 식민지 전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스웨덴 동인도회사 배들은 1731년부터 1813년까지 132번이나 아시아를 항해했는데, 이중 세 번을 제외하고 모두 광저우가 목적지였다.
1743년 3월, 스웨덴 동인도회사 소속 범선 예테보리호가 선원 141명에 몰래 숨어든 남자아이 셋까지 포함하여 144명을 태우고 스웨덴을 떠났다. 폭풍우와 해적의 습격, 전염병을 이겨내고 18개월 만에 목적지 청나라의 무역항 광저우에 도착했다. 이들은 뭍에 상륙하여 당시 유럽인들이 선망하던 차와 도자기, 비단을 사들였다.
예테보리호의 광저우행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위험한 항해였으나 대가는 달콤했다. 예테보리호가 중국에 한 번 다녀오면 이윤이 스웨덴 1년 국민총생산액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예테보리호는 불행했다.
1744년 9월, 예테보리항 1km를 채 남겨놓지 않은 곳에서 암초를 들이받고 700t의 화물과 함께 침몰했다. 스웨덴은 1980년대 들어 예테보리호를 발굴했고 1994년 예테보리호를 복원했다. 2006년 7월, 예테보리호는 260여 년 만에 다시 광저우를 방문했다. 개혁·개방의 길을 달리는 중국정부가 예테보리호의 귀환을 성대하게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