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
세계지도에 보일 듯 없는 듯한 나라 대한민국!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기까지 이승만이란 청년이 없었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된 영화 ‘건국전쟁’!
진실을 알게 된 감동의 눈시울이 주루룩~
끝났는데도 일어설 수 없는 정말 몇 년 만에 느껴 본 놀라운 감동이다.
여기저기 훌쩍거리는 소리와 박수를 치면서 영화가 끝났다.
나라를 세우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고독한 삶을 사신 그분께
뒤늦게라도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수년 전,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전 대통령 이승만 별장을 둘러본 적이 있다.
검소한 다소 초라한 그분의 별장을 견학하고 받은 감동의 몇십 배다.
노인이 아닌 청년 이승만을 그곳에서 첨 본 것이다.
정치에는 전연 관심이 없는 무식쟁이로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무관심과 모르쇠로 살아온 것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한아름 감동으로 지인 모든 분께 ‘건국전쟁’ 영화를 보라고 권하는 톡 손길이 분주하다.
이 영화를 만들어주신 분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아래 내용은 한국문화안보연구원 김명수 (육사 31) 박사가 일목요연하게
국부 이승만의 일생과 업적을 재조명하여 요약정리한 것을 소개하고자 옮겨 적는다.
이승만 대통령은 선구자, 선각자, 예언자, 애국자, 불세출의 영웅, 위인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라는 말로 그를 추억하고 있다.
1875년 3월 26일 전주 이씨 후손으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
1895년 구한 말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던 중 독립협회에 참여함.
1897년 만민공동회에서 조선이 군주국에서 공화정으로의
체제변화를 주장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됨.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집요한 구명운동에
무기징역 형으로 감형,
1904년 6년 만에 석방된 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6년 만에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을 이수한 천재,
1910년 일시 귀국하여 YMCA 간사로 있다가 다시 도미하여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이주민이 가장 많았던 하와이에 정착하여
육영사업에 매진.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초대 대통령으로 옹립.
1922년 다시 도미하여
1930년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적극적 외교활동을 함.
1945년 해방 후 40년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1948년 초대 대통령이 되어
1960년까지 12년간 재임하였다.
소련 주도의 한반도 공산화를 막고
1948년 건국하였으며,
20대 청년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립정신’ 책을 집필할 정도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국군통수권자로서의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음은
오랜 미국 생활을 통해 쌓은 미국 내 인맥을 동원하여 UN 참전을 이끌었다.
주요업적으로는
1> 조선왕조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꾸어 건국(자유민주 시장경제)
2> 국가보안법 제정
3> 토지개혁으로 공산화 방지, 경제발전 도모
4> 국군통수권자로서의 탁월한 리더십 발휘
5> 평화선 선언 (6.25 전쟁 중인 1952년 1월 18일 해안으로부터 60마일 이내는
우리 영토임을 미국 등 연합군의 승인을 받음으로 오늘날 독도는 한국 땅)
6> 6.25 전쟁 중 일본군과 대만군 주둔과 지원을 거부
7> 성공적인 휴전협정 하여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여
1953년 휴전 이후 대북전쟁 억제와 안정적인 안보환경 보장
8> 교육정책을 확립하였다.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민중을 계몽시켰으며
미국 하와이에 최초 남여공학학교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였다.
이승만은 4.19 의거 발생 시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으니
나는 성공한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일주일 뒤 자진하야 하는 선진정치문화를 남기셨다.
대한민국여성 독립운동가인 김활란 여사는 “이승만은 미국의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1960년 4.19 의거 후 하야 일주일 뒤 하와이로 출국하여
5년 뒤 1965년(90세) 해외에서 영면한 후 국립묘지에 안장.
그의 교육정책으로 최고의 수혜를 본 저로서는 몇 십 배의 감동이다.
개명하신 부모님 덕분이기도 하지만 ...
1959년 대학에 입학한 기쁨도 잠깐,
1960년 4월 19일 영문도 모른 채 거대한 줄이 된 데모꾼의 일원이 되어
온천장에서 서면까지 행진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은(?) 데모꾼으로서 행진했던 그 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