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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기 281- 중국 集安 광개토대왕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현재 중국 지린(길림)지안시 (集安市) 태왕진(太王镇)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비로 갔습니다.중국과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릅니다.
광개토대왕비로 가는 길에는 잘 다듬어진 정원에 작약꽃들이 만발하게 피어있었습니다.
414년 광개토와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가 6.39m 면의
넓이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1.46m지만 고르지 않습니다. 대석은3.35×2.7m
입니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습니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됩니다.또한 전한(前漢) 예서(隸書)의 서풍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됩니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까지 금나라 청의
봉금제도가 1880년대에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고,1888년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훼손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
습니다. 특히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조는 아직도 큰 논란거리가 되어있습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첫째
부분은 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이다.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은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입니다.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마지막 부분은 제3면 8행
부터 제4면 9행까지이다.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2년) 고구려 19대 왕입니다.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입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
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집니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광개토대왕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
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 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 國[岡]上
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卅有
九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
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 □城,力城,北豊,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
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
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
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
彡穰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 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
大臣十人 旋師還都八年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九年己亥 百
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
以□計.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5]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5]新□□□□其□□□□□□□言□□□□□□□□□□□□□□□
□□□□□□□□□□□辭□□□□□□□□□□□□□潰□▨▨▨ 安羅人戍兵.[5]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3][6] □國[岡]上廣開土境好
太王 □□□□ 寐錦□□僕 勾□□□□朝貢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
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
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
城 而餘[舉]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광개토태왕은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명의
백성을 392년9월에 되찾아오기도 합니다. 395년에는 염수(鹽水)[ 로 진출하여 거란족의
패려 (稗麗)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거란정벌(392년)과 광개토대왕의 능비정벌(395년)과 같은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398년 숙신을 정벌하여 동북 국경 지대를 안정시켰습니다
한편 광개토대왕은 모용씨(慕容氏)의 후연((後燕)과도 치열한 전쟁을 치렀습니다.400년
2월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때 후연왕 모연성(慕容盛)은 신성((新城)
과 남소성(南蘇城)을 공격합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보복전을 펼쳐 402년에 후연의 숙군성
(宿軍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404년에도 후연을 정벌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연군(燕郡)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연군은 지금의 베이징 근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 기록에 따라 베이징 일대까지 정복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木抵城)에서 격파하여 요동점령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또한 407년에는 5만 군대를 동원하여 후연군대를 격파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돌아오는 길에 후연의 6개 성을 점령하였다.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南燕)과 우호관계
를 맺기도 하였으며 그러나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 북연(北燕)을 건국
하자 408년에 우호관계를 맺으므로써 서쪽 국경을 안정시키기도 했습니다.
작약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작약은 한의학에서 많이 쓰이는 지통제로 부인과 질환에 자주
쓰이는 약재입니다.
손영기와 김정환이가 작약꽃과 같이 활짝 웃습니다.ㅎㅎㅎ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환도성(丸都城)은 서기3년(유리왕 22년)에 고구려 유리명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쌓은 성입니다. 현재 이곳 집안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며, 중국 지명으로는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도 불립니다.
이곳은 고구려 문물고적지로 한국에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말타는 전사의 그림
장수왕 (長壽王, 394년-491년)은 고구려의 20대의 태왕입니다. 광개토태와의 태자로 휘는
거련(巨連, 巨璉)이며, 《위서(魏書)》에는 이름이 연(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는 부련왕(夫連王)이라고 하며 98세까지 장수했기에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붙였습니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어갔으며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정책을 추진하고
중국의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통해 안정을 구가한 국왕입니다. 412년 음력10월에 광개
토태와이 죽자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고담덕(高談德), 그아들 장수왕은 고거련(高巨連), 장수왕의 아들이
고조다(高助多)입니다.그런데 고조다는 왕이 되지 못하고 고조다는 일찍 죽습니다.그러자
장수왕은 나의 장남이자 태자인 조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니 손자인 고나운(高羅雲)을
문자명왕으로 계승이 됩니다. 그래서 왕이 못되어 죽은 조다를 말하여 왕도 못된 조다가
"쪼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후로 제구실을 못하고 좀 어리석고 모자라는 사람을 쪼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다는 정치역량이 뛰어나고 왕이 될 자질이 충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장수왕름입니다.장수왕릉(長壽王陵)은 지안시(集安市)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입니다.흔히 장군총(將軍塚)으로 불립니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지고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미터 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입니다.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안쪽에는 항당이라고 불리우는 사당이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입니다. 이곳은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 인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며.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입니다.
산성을 그려놓은 것입니다.고구려의 성은 돌무지무덤과 함께 환인·집안 지역에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을 나타내는 구루(溝婁)는
구려(句麗)와도 일치하는 말입니다. 즉, 고구려라는 국가 명칭은 높고 큰(高) 성(句麗)을
뜻하며, 고구려에 있어 성이 갖는 문화적 의미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성은 위치에 따라 산성과 평지성으로 구분하며, 지금까지 알려진 160개의 고구려
중 약 85%가 산성으로 산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만주 일대 다른 종족 집단은 산성을
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성의 분포를 통해 고구려 영역의 대강의 범위가 추정 가능하기도
합니다
고구려는 본래 산이 많은 지역에 자리 잡았습니다. 첫 수도였던 졸본이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 지역 모두 공통적으로 산이 많은 지역에 있습니다. 산에 성을 쌓으면 적은 병력
으로도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우세한 적으로부터 쉽게 방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즉, 고구려의 산성은 산지 활동에 능한 고구려인 자신들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여 반대로
평지전을 위주로 하는 적의 약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산성 중심의 고구려 전술은 전투에서
큰 성과를 나타냈는데,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해 돌아와 재침공에 관한
회의를 했을 때도 신하들은 고구려 산성의 위력을 우려하여 반대했다고 합니다.
고구려 성은 지세에 맞는 성벽과 성문, 장대, 치와 성가퀴, 수원시설, 수구문과 배수구, 기타
건물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 성의 구조는 견고한 성벽을 쌓는 축성법과
더불어 고구려 성의 강력한 방어 체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성문은 외부와의 통로로 적의
공격이 집중되기 쉬운 곳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 주위의 성벽을
특히 높고 견고하게 구축했으며, 성문 주위의 성벽을 어긋나게 쌓거나 U자형으로 들여쌓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문 주위에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돌출시설인
‘치’를 두기도 했고, 성벽 위에는 아군이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해 활을 쏘거나 공격하던 시설인
성가퀴를 두었습니다.
장수의 전투 지휘소인 장대는 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정문 근처에 설치했으며, 성 밖을
감시하는 초소인 망대는 성벽 곳곳 전망이 좋은 곳에 설치했습니다. 장대와 망대 근처에서는
군사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발견되곤 합니다. 산 위에 위치하는 산성의
특성상 물의 안정적인 공급이 중요했기에, 고구려 산성의 경우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끼고
있거나 저수지와 우물, 혹은 빗물 저장시설이 빠짐없이 발견되는 것도 특징입니다. 또한
성벽이나 성문 아래 성 안의 물을 내보내기 위한 배수구도 설치되었습니다. 대형 산성의 경우
관청이나 일부 주민들의 일상적인 거주 공간도 마련되었습니다. 산성이기 때문에 완만한
산비탈의 경사면을 깎아 계단 형태의 대지를 조성해 건물을 축조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핑크아카시아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집안 일대에는 핑크아카시아 나무가 많습니다.
고구려의 성은 성이 들어선 지형에 따라 평지성과 산성, 그 둘이 혼합된 평양의 장안성
같은 평산성으로 분류됩니다. 고구려 성에서 평지성은 드문 편인데, 주민들이 집중된 도성
지역에 주로 평지성이 존재하며 대부분은 산성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지방통치 단위인
성은 구체적으로 산성을 의미합니다. 산성의 유형은 성곽이 위치한 지세에 따라 포곡식
(包谷式) 산성과 산정식(山頂式) 산성, 그 둘을 혼합한 복합식 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끼고 주위의 산능선에 성곽을 축조한 형태로 대체로 대형 산성이
이러한 지세를 이용한 경우가 많습니다. 포곡식 산성은 성 안에 넓은 평탄지를 확보하고 있어
병력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의 거주 공간이 마련될 수도 있었습니다. 산정식 산성은 산
정상부의 평탄면을 이용하여 주위에 성곽을 두른 형태로 집안과 환인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초기 산성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홀승골성을 비롯해서 흑구산성 등이 대표적인
예 입니다.
:산성을 쌓던 초기에는 돌을 주로 이용해 벽을 쌓았지만 점차 지세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에 따라 토성을 쌓거나 토석혼축성을 쌓았습니다. 토석혼축성은 고구려 성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순수 토석혼축법과 하단부와 석벽을
쌓고 상단부에 토벽을 결합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고구려 산성의 위치는 1. 반드시 강이나 하천 옆에 축조했는데, 강이나 하천이 성을 향해
공격해 오는 적을 막는 천연 장애물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시: 환인의 오녀산성
옆의 혼하, 집안의 환도산성 바로 옆 통구하와 근처의 압록강, 대성산성 남쪽 대동강, 동쪽
장수천, 서쪽 합장강, 태백산성 예성강, 장수산성 옆 재령강 지류)
2. 경제적 조건이 좋은 곳, 즉 큰 평야가 있고 인적 자원이 풍부한 곳에 위치했습니다. 이는
유사시에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고 성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시: 오녀산성 주위 환인평야, 환도산성 옆 통구벌, 대성산성 옆 평양 준평원)
3. 군대의 기동성, 이웃 성들과 긴밀한 협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교통 조건이 좋은 곳에
위치했습니다.
현재 만주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성을 주축으로 생각하면, 고구려는 요동에서 수도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에 따라 요동 반도 남단에서 북쪽 길림까지 이어지는 국경 지대의 방어성,
요동에서 도성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 구축된 중간 방어성, 그리고 도성을 둘러싼 최종
방어성으로 다중의 방어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천리장성’은 그 다중 방어
체계 중에서도 요동 반도 남단에서 북쪽까지 이어진 국경지대의 요충지에 구축된 성들을
말합니다.
고구려가 요동 평원을 모두 장악하기 전, 국내성을 도읍으로 삼고 있던 시기에는 국경으로
부터 왕도 국내성에 이르는 구간에 산성과 관애를 겹겹이 축조하였습니다. 국경선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외곽산성을 두고, 외곽산성과 왕도 사이에는 작은 산성과 관애를 배치했습니다.
외곽산성으로 고검지산성, 흑구산성 등이 있고 그 배후에 작은 산성인 마안산성, 건설산성
등이 위치해 있습니다. 기타 관애는 중간 방어선인 홀승골성, 패왕조산성에서 국내성에
이르는 4개의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국내성의 방어선은 최전선에서 2중,
3중으로 구축되어 있던 것입니다. 한편 국내성에서 요동 지역으로 나가는 출입구라 할 수
있는 신성이 마련된 뒤에는 환인 일대에서 요동으로 이어지는 2개의 교통로에 철배산성,
오룡산성, 구노성, 나통산성, 태자성 등을 축조하여 방어망을 구축했습니다
장수왕릉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석실의 위치는 높고 밑으로부터 3단째 단을 상(床)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상단의 상면(上面)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장방형의 거대한 1매의 천정석이 있으며, 연도
(羨道)는 서남방으로 있으며 천장은 큰 돌 3매로 되어 있습니다. 현실의 4벽은 6단으로 쌓고
각 벽의 위에는 굵고 모진 기둥을 옆으로 높여서 천정석으로 받치고 있습니다. 현실의
크기는 가로·세로의 높이가 모두 5미터 이상이며 상(床)으로 오기(基)의 관대(棺臺)가
있으며, 기단의 4주에는 넓이 4미터의 돌을 두르고 자갈로 채워져 있습니다. 4벽과 천장에는
본래 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전부 박락(剝落)되고 없습니다.
각 층의 외부에는 기와로 덮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모두 무너지고 잡초만이 무성합니다.
고구려의 문양인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문양에는 삼족오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의 간판이 고구려의 "태왕민속촌"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음식점 벽에도 고구려의 냄새가 물신납니다.
마지막날 식당에 도착하니 비가 억수로 왔습니다. 그래도 이번 여행은 날씨가 좋았습니다.
식당옆에는 농산품가게가 있어 많은 친구들이 목이버섯 능이버섯 차, 등 여러 물품을
구입했습니다.
식당에서 동문 70순 맞은 기념을 전체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축하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몸 안아프고 즐겁게 살자고 서로 위로 축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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