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1998년에 새로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대북 포용 정책을 실시하면서 정주영 회장의 방북을 추진했다. 정주영이 처음 방북한 날로부터 9년만이었다.
1998년 6월16일 오전 6시10분, 정주영은 여느 때처럼 간단한 아침 식사를 끝내고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을 나섰다.
감색 양복에 갈색 외투를 입고 흰색 중절모를 쓴 그는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왔다.
그 자신은 최대한 평상심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주변은 취재진들로 소란스러웠다.
방북 일정 등을 묻는 취재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정주영 회장은 할 말을 찾았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냥 손을 흔들어 보이며 옅은 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직은 다시 고향에 가는 일이 실감나지 않았다. 회사에는 그와 함께 동행할 동생 세영, 아들 몽구 등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니 조금 실감이 났다.
'오늘 드디어 다시 고향에 가는구나. 내 생전에 다시 가게 됐어.'
기자들에게도 한마디 건넸다.
"고향 가니까 좋지 뭐. 어제 돼지꿈 꿨어."
현대그룹 직원 1000여명이 미리 출근해서 사옥 앞에 도열해 태극기와 대한적십자사 깃발을 흔들며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그룹 총수의 성공적인 방북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정주영 일행은 직원들의 갈채를 뒤로 하고 삼청동 남북회담 사무국에 들러 방북 증명서 확인과 휴대품 검사 등 간단한 절차를 밟은 뒤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으로 향했다.
몇시간 후 서산 농장에서 키운 500마리의 소떼가 50대의 트럭에 실려 왕복 4차선 통일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정주영의 주변에는 이제 한국 언론사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기자들도 앞다투어 취재 경쟁을 벌였다.
다리 이북 구간은 원래 민간인출입 통제구역으로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아니 과거 반세기 동안은 그랬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만큼은 출입 '가능'지역이었다.
정주영은 민간인으로서 처음으로 출입증을 발급받아 그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소떼를 몰고 갈 때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해서 가겠다는 조건을 내건 이는 정주영이었다. 분단의 장벽을 허문다는 뜻이었다.
정주영은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 제가 오랜 꿈을 이뤘습니다. 보고 계십니까? 그러나 오늘 제가 한 일은 앞으로 만들어야 할 큰 역사의 시작일 뿐입니다.'
83세 정주영의 얼굴에 벅찬 감회와 설렘이 가득 찼다. 굳게 닫혀 있던 분단의 문이 열리는 역사적인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취재진들, 그 앞에 선 정주영! 그는 준비한 소감문을 읽어내려 갔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탓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정주영은 아버지의 소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다.
그 결과 한국 경제 성장의 중심에 설 수 있었고 오늘은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분단의 빗장을 열었다.
"이제 그때 그 소 1마리가 500마리의 소가 되어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도 그리던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무수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텔레비전 방송 3사의 생중계로 정주영의 소떼 방북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누구는 인생유전을 누구는 통일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핑퐁 외교’가 있었다면 남한과 북한 사이엔 ‘황소 외교’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일명 '정주영 소떼 방북'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미국의 뉴스 전문 채널인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주요 외신들도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 국가인 남북한이 최초로 휴전선을 열었다고 대서특필했다.
아버지의 소 판 돈 70원을 훔쳐서 가출한 17세 소년 정주영 회장이 쌀집 배달원, 자동차 수리공장과 건설 회사 사장을 거쳐 글로벌 기업가가 된 이야기, 그리고 고향에 빚을 갚기 위해 소 500마리를 끌고 분단의 벽을 넘은 이 영화 같은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정주영 회장이 판문점의 북측 지역 판문각에 도착하자 그를 초청한 단체인 북한 아세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이 그를 맞아주었다.
소떼 방북은 1994년 이후 남북 정상회담, 실무회담을 제외하고 북한 당국이 굳게 닫아온 교류를 민간 차원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었다.
정주영 회장의 방북 이후 남북한 민간 교류는 크게 확대됐다.
정주영 회장은 6월23일까지 8일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평양, 원산, 금강산 및 고향인 통천 등을 방문했다. 북측 관계자 등과 만나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 서해안 공단 사업 및 전자 관련 사업 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정주영 회장은 10월에 다시 501마리 통일 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001마리 소를 북으로 보낸 것이다.
왜 1000마리도 아닌 1001마리였을까?
처음엔 정주영 회장도 1000마리의 소를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싶어 생각을 바꾸었다.
'1000+1', 추가된 1마리의 황소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정주영의 의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정주영 회장이 몰고 간 소떼 1001마리에는 작은 비밀이 숨어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북한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어서 임신한 소를 섞어서 보낸 것이다. 1차로 보낸 500마리 중 절반이 암소였는데 그중 상당수가 뱃속에 새끼가 있었다.
◇대북 사업을 전담하다
남한 경제계 거목과 북한 최고 권력자의 첫 만남!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둘러싼 갖가지 소문이 있던 터라 천하의 정주영도 긴장이 됐다.
그런데 첫인상이 예상과 달랐다. 김 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을 깍듯이 예우했다. 기념사진 촬영 때도 가운데 자리를 정주영 회장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왼쪽에 섰다.
정 회장은 이런 김 위원장의 태도에 놀랐다. 지방에서 현지 지도 중이던 김 위원장이 정주영 회장 일행을 깜짝 방문하기도 했다.
"금강산 사업은 나누지 말고 정주영 회장님이 모두 추진해주시기 바랍니다. 발해만에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석유가 생산되면 남쪽에 주겠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김 위원장이 매우 현실적인 시각을 갖춘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북측은 미군의 남측 주둔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미군이 계속 남아서 북과 남이 전쟁하지 않도록 막아주어야 합니다."
김 위원장의 말에 정주영 회장은 당황했다. 김 위원장이 매우 호전적이며 미국을 증오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1999년 6월에 일어난 제1차 서해교전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했다.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우리 측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해군에서 육군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내가 더 이상 확전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해군은 남측과 상대가 안 되지요."
한번은 김 위원장이 정주영에게 물었다.
"남북합작 공단을 왜 신의주가 아니라 개성에 만들려고 합니까?"
개성은 판문점에서 겨우 4㎞ 가량 떨어져 있는 곳으로 지하에 군사 시설이 많아 북한이 남측 기업에 공단 부지로 선뜻 내주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물건을 만들어 남쪽에 팔아야 합니다. 개성에서 만들어 남쪽으로 실어 가 수출해야 효율이 높고 타당합니다."
김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자리에서 아세아태평양위원회 관계자에게 말했다.
"내일 당장 아침 일찍 모시고 현장을 보여드리시오."
다음날 정주영 일행은 개성공단이 들어설 6600만㎡를 답사할 수 있었고 정주영 회장은 김 위원장의 그런 모습을 보고 대북 사업에 자신감을 얻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대북 사업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신뢰와 우호적인 태도를 확인한 정주영 회장은 11월18일에는 동해항에서 관광유람선인 현대금강호를 출항시켰다. 금강산을 향한 첫 항해였다.
그리고 다음해 1999년에는 현대아산주식회사를 설립해 대북사업을 전담토록 했다.
사람들은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볼 수 있게 됐고 남북 경제 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모습을 드러냈다.
경제 분야뿐 아니라 남북한 민간 교류나 통일농구대회, 교예 공연 등 문화·체육 교류도 꾸준히 이어질 수 있게 됐다.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남북 관계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도 성사됐다.
대북 사업은 대규모의 투자금이 소요되었을 뿐 아니라 긴장의 연속이었다. 남북 당국 간 대화 중단과 군사적인 긴장이 발생할 때마다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뜻을 이어 꿋꿋하게 지속됐다. 체제와 이념이 다르고 경제력이 차이가 났지만 서로 실리를 추구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헤쳐나갔다.
그 결과 연간 50만명의 남북 관광시대를 열었고 개성공단에는 120여개의 남한 기업이 북한 근로자 4500명을 고용하게 됐다. 금강산과 개성 사업의 추진은 경제 협력의 법과 제도 등에 대한 모델을 제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성공한 실향 기업인으로서 고향에 대한 애정만으로 혹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 대북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정부간의 민감한 정치적 현안을 피해서 경제와 문화, 체육 등 분야에서 협력과 교류를 증진해 서로의 경계심을 완화하고 점차 신뢰를 쌓는 것이 장차 통일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대북 사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원대한 꿈이 실현되는 것은 보지 못 했다.
정주영 회장이 2001년 3월 21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이 남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했고, 그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정주영 회장이 건설을 추진했던 체육관이 2003년에 완공되자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고 이름 짓고 남북 긴장 완화의 주역으로 민족 화해와 협력에 공헌한 그의 삶을 기억하도록 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모두를 위한 꿈을 꾸었던 거인이 남긴 유품은 낡은 텔레비전, 면장갑 그리고 생전에 신던 구두 한 켤레였다.
그러나 통일을 향한 꿈은 대한민국의 꿈이기도 하기에 창의적인 도전 정신과 더불어 위대한 유산으로서 정몽헌 회장 그리고 그의 타계 이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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