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12. 2 평북 운산~.
언론학자.
리영희는 경성공립공업학교와 국립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잠시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을 맞아 연락장교로서 7년간의 군복무(육군 소령으로 예편)를 마쳤다. 1957년부터 1971년까지 15년 동안 〈합동통신사〉와 〈조선일보사〉에서 일한 다음 1972년부터 1995년까지 한양대학교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가 1964년 아시아-아프리카(AA) 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조선일보〉에 쓰자 박정희 정권은 그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후 3선 개헌 및 10월유신 등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베트남 전쟁 파병과 국내의 민주헌정 파괴 및 사회정의 후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지식인의 집단적 선언활동에 참여했다. 1971년의 '위수령 발동 항의 시국선언', 1974년의 '민주회복 국민선언' 등이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한 대표적 선언활동이다.
언론인 혹은 비평가로서 그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대한 정권의 탄압은 심해져 그는 여러 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리영희와 시인 김지하의 투옥은 한국의 인권상황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사건이었다.
그는 1977년 자신의 저서인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이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2년 동안 금고형을 받은 것을 비롯해, 1984년 '국정교과서 내용 중 민족분열-반통일 지향 부분을 분석 조사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다시 1989년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 기획에 참여한 것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반년간 투옥되었다.
리영희는 2000년 4월 〈신문의 날〉을 맞아 한국기자협회가 행한 조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존경하는 기자로 리영희가 뽑혔다.
리영희는 저널리즘, 대학 강단, 그리고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의 정의감 혹은 양심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1999년 12월 〈동굴 속의 독백〉을 펴냈고, 그밖의 저서로는 〈반세기의 신화〉(2000), 〈대화〉(2005) 등이 있다. 리영희는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투병 생활을 했으며, 2006년 9월 지적(知的) 활동을 마감하겠다고 선언하고 집필을 중단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늦봄통일상(1999), 만해상(2000), 심산상(2006), 단재언론상(2006), 한겨레통일문화상(2007)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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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간에 떠도는 지적을 살펴보면, 이영희 선생이 책에서 예언한 것들이 현재 모두 틀리고 말았지요. -> 동서독은 통일되지 못할것이다, 소련은 소수민족에게 좋은 자치권을 행사해서 영원토록 연방으로 있을 것이다.중국은 소수민족탄압이 없다.----수많은 그의 주장이 지금 보면 다 거짓말이 되고 말았죠. 그는 자신의 책이, 자신의 분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절필하던지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자신이 잘못 이끈 후학에게 사죄의 글을 써야한다고들 합니다.
이런 문제는 거짓이기 보다 식견의 문제로 보아지는데요.그런 관점에서 그분은 시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그래도 김지하씨보단 변하진 않은 것 같군요. 김지하는 요즘 이상하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존경 받기 위해선 미래에 대한 정확한 식견이 필수인데 사실 너무 빗나간 식견들 때문에 학자로 인정 받기엔...... 더 분발하셔야 할 것 같네요.
너무 지나친 혁명적인분 같아요.공산당 이야기도 변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했었지요.그래도 살아있는 양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