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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의 한국 나들이]
“권력은 곧 법이다.”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는 철리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동방국이나 서방국이나 가릴것 없이 다 들어맞는다.
“법률 앞에선 사람마다 평등하다.”고 누구라 없이 다 외울 줄을 안다. 사실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면서도 헛소리를 죄치는 것이다.
어느누가 어느때 어디에서 어떻게되여 규정 지었는지 어느 나라에 가보나 법원청사라면 이마에 황금빛의 커다란 천평(天平) 모형물을 번듯하게 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거개가 두리모자 혹은 어깨나 가슴에 작은 천평 같은 것을 달고 다니며 멋을 부린다. 그들이 걸어놓거나 달고 다니는 것을 천평으로 보면 틀린다. 천평 모형인 장식품이지 천평이 아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저울질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진짜로 천평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천평은 사람들 마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헌데 그 천평이 같은 품질로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거니와 저질품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저질 천평으로 모든 것을 저울질 하다보니 공정이란 운운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우기 천평 지침이 한쪽으로 기울러 지며 전도된 수치가 나올 때엔 어느 한쪽에 꼭 돈 뭉치나 권력이 얹혀져 누르고 있음을 제꺽 알아차려야 한다. 한국 책엔 “칼자루 쥔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고 중국 책엔 “팔로 큰 다리를 비틀 수 없다(胳膊拧不过大腿).”는 말도 있다. 그러니 권력이 없고 돈이 없는 평민 백성은 많이 조심하고 기 죽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 법칙이다.
사실 법관들마다 이른바 법대로 하려고 애 쓰지만 일마다 법대로 되여지질 않는 것이 현실이다. 법을 지배하는 것이 권력이고 돈이니깐. 권력이나 돈이 있으면 이 사회에서 큰 소리 땅땅 치며 살 수 있다. 권력과 돈 그리고 법은 한집 식구이다. 권력은 남편 같은 것이고 돈은 안해 같은 것이며 법은 자식 같은 존재이다. 권력과 돈이 결혼하여 법을 낳았다. 권력이 있으면 돈을 얻을 수 있고 돈이 있으면 권력이 생긴다. 그러니 그들은 천상 배필이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 효도해야 한다. 그러니 법은 권력과 돈 앞에서 찍 소리도 못 한다. 법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 하려고 나라들마다 애써보지만 범죄분자만 날로 늘고 대중성적인 집회나 로조 행렬이 끊이질 않고 자살 테러 폭팔 사건이 날마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다.
“권력과 돈 그리고 법”, 이 법칙은 한 가정이나 한 나라에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도 적용이 된다. 미국은 돈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돈이 많다고 패권을 쥐려고 한다. “법률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고 하듯이 국제 사회에서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진보국이든 락후국이든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 미국의 관점은 그렇지가 않다. 최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국제 사회에서 최고의 권력으로 알고 있는 미국은 국제법도 자기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고 여기며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우리민족의 자랑이라고 말들을한다.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최고상”을 수여 받고도 남음이 있다. 허지만 한민족 한나라가 두쪽으로 갈라져 사는 신세에 유엔사무총장이면 뭘 하며 자랑스런 한국인이면 뭘 한단 말인가? 자기 민족 자기 나라 일도 제대로 못하는 신세에 세계일을 하면 어느만큼이나 할거냐 하는 나의 둔한 생각이다. 그의 임기 사이 세계 어느 나라에 “분단선”이나 더 늘지 않을런지? 최고의 “자랑스런 한국인”이란 이름 답게 한반도의 “분단선”이나 지워버려 준다면 전 민족은 감지덕지 할 것이다.
20일 아침 9시에 나는 열 이틀 로임 36만원을 타가지고 “종점 갈비점”을 떠나 저녁 9시에 광수를 만났다. 충남 보령 웅천읍 서해 고속도로 건설장이다. 김씨성인 사장님은 나와 간단한 대화를 한 후 인천시 부평구 본부로 돌아갔다. 그들은 부평에 “평화 회사”라 이름 달아놓고 사람 너덧이서 이것 저것 끊고 때고 하며 철 대문도 만들고 알뉴미늄 창문도 만들고 하다가 간혹 야외 공정도 도거리 맡군 하였다.
서해 고속도로 웅천지구 몇십키로메터 구간에는 산굴도 몇개 있었고 산을 썩뚝 깎아버리고 길을 닦은 것도 몇곳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깎아놓은 산벽 락석(落石) 방지 공정이다. 산벽 밑 한메터 높이의 콩크리트 담 뒤에 최 대형 “공자 형강(工字型钢)”을 너덧메터 간격으로 용접하여 세운다. 그다음 그뒤에 쇠그물를 세워 펴고 량켠에서 당겨주고 기둥에 고정하고나면 끝난다. 우리는 먼저 기둥 세우는 일부터 시작 하였다. 우리란 김 광수와 나 그리고 평화 회사의 리대리와 아르바이트 대학생 애들 셋, 도합 여섯이다. 콩크리트 길과 벽을 때릴 때 미루 고정 해놓은 쇠판이 드러날 때까지 그들이 흙이나 돌멩이를 깨끗히 치워버리고 철기둥을 세워 잡아주면 내가 용접 한다. 날씨는 무더웠으나 일은 막힘 없이 잘 진척되여 나갔다.
리대리와 광수 나 우리 셋은 웅천서 제일 큰 려관에 방 하나를 잡고 투숙했고 근처의 작은 음식점 하나를 고정해놓고 하루 세끼씩 먹으러 다녔다. 알바 애들은 방학하여 돌아온 읍내 애들이라 점심만 우리와 같이 먹고는 집으로 다녔다.
그애들은 방학간 돈을 벌어 호주로 배낭연수 갈 참이라한다. 가만히 보면 방학에 놀고있는 대학생이 하나 없이 모두가 일에 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는 애 하나는 우리가 먹으러 다니는 음식점 녀사장의 아들인데 음식점은 작아도 고속도로 일군들이 얼마나 많은지 돈을 갈퀴로 긁는 판이였다. 걔들이 방학에 일하는 것은 돈 버는 재미와 번 돈을 유용하게 쓰는 재미를 감수 하려는 것이고 사회와 접촉 하면서 사회를 알고 장래 자기가 살아 나갈 길을 미루 구상하며 찾게 되는 것이다.
중국 애들은 아직도 이런 자립성이 부족하다. 모든 것은 부모한테 의거하려 하고 부모 또한 허리를 졸라 매며 돈을 모아 끝까지 자식의 뒷바라질을 한다. 그러하기에 자식 키우기가 힘 들고 힘이 드니 낳으려 하지 않고 낳지를 않으니 조선족의 인구는 급격히 줄어든다. 대학을 마친 적잖은 조선족 처녀애들은 한족 동창생이나 외국인과 결혼 하는가 하면 연변의 가임(可妊)여성 적잖은 수, 처녀애들은 물론이고 지어 기혼 (已婚)녀들까지도 남편을 버리고 한국으로 시집 가는가하면 중국 관내 발달한 연해 도시로 가 일 한다. 연변에 조선족 홀아비나 로총각들이 늘고 너무 많아 문제거리이다. 중국 보담 못 사는 조선에서 건너온 녀성을 몰래 뎃고 살다 들통나 잡혀가는 일도 있고 아무도 모르게 어데론가 도망가 버리는 일도 있다.
고속도란 나라의 동맥과도 같은 것이다. 고국의 대동맥 속에 나의 자그마한 힘이나마 부여하고 나의 한방울 피라도 흐르게 할 수 있게되여 크낙한 긍지와 희열로 나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안해도 20일 나와 함께 와 려관에서 이틀밤 자고 부천으로 돌아갔다. 웅천에서 식당 도우미 일이라도 찾으면 함께 있으려고 했었는데 자리가 없었다. 22일 저녁에 돌아간 그를 25일 아침에 다시 불렀다.
24일, 오전부터 적은비가 내려 일을 할 수 없으니 광수와 나는 리대리를 따라 바다가로 놀러 갔다. 넓은 갯벌에서 우리는 반지락도 줏고 식지만큼씩 길다란 맛도 많이 잡았다. 그것들을 삶아 점심 먹을 때 소주 한잔씩 하였다. 려관으로 돌아온 후 리대리와 둘이서 소주 두병에 맥주 다섯병을 더 마셨다. 머리가 알딸딸해나고 세상이 콩알만큼 해졌다. 본틀이 들어날 차례이다. 술이 모자라다고 리대리를 데리고 우리가 들어있는 려관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거기엔 커피숍도 있고 노래방도 있었다.
나는 노래방에 자리를 정하고 아가씨도 한명 청했다. 노래방은 한시간에 이만원이고 술과 안주 값은 따로 낸다. 아가씨한테도 시간당 2만원씩 줘야한다. 거기에서 노래 부르며 세시간쯤 마시고는 리대리와 아가씨를 달고 또 려관 앞길 건너에 있는 포장마차로 갔다.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술만 둬시간 더 마셨다. 호주머니에 있던 24만원을 다 털고도 4만원이나 모자라 아가씨에게 훗날 갚어 주기로 약속 했다. 리대리의 호주머니에도 몇만원쯤은 있음직 한데 한푼도 낼 념을 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자기 것을 절대로 쓰지않고 언제나 광수보고 달라해서는 전화를 치는 그런 구두쇠였다.
노래방 아가씨의 돈 4만원을 갚고저 안해를 부른 것이다. “바람은 나그네가 피우고 돈은 녀편네가 문다.”더니 이놈이 그쪼 났다. 돈도 돈이겠지만 술이 끝난 후 리대리가 볼일 있다며 파출소에 갔었는데 얼빤한 정신에 따라다니다가 넘어져 안경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잃어버린 이백 오십도짜리 돋보기가 없으면 잘 보이질 않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6월 26일 아침 여섯시 40분경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형사들이 들이 닥쳤다. 광수와 나 그리고 나의 안해까지 셋은 보짐을 대강 꿍져가지고 경찰차로 안개 자욱한 칠갑산 고개를 넘어 보령시 경찰서에 모시워 갔다. 보령 경찰서에서 형사들과 함께 곽밥을 불러다 아침을 먹으면서 물었다.
“경찰 아저씨, 우리를 왜 붇잡는거죠?”
“당연 위법 했으니깐 붇잡는게 아닐까유?”
“우리는 위법 한 일 없는데요.”
“우리는 신고를 받았으니 공무 집행 할 뿐이쥬.”
“누가 신고 했습니까?”
“그건 말 할 수 없구요, 아저씨 한국말 잘 하신데 몇번째 한국에 왔쥬?”
“처음이구요, 딱 한달 됐거든요. 우리를 어떻게 처리하는 겁니까?”
“처리는 우리가 하는거 아니구, 가보면 알겁니다.”
우리는 다시 경찰차에 앉아 대전 “외국인 출입국 관할서”에 옮겨졌다. 핸드폰, 손목시계, 만년필, 라이타등 소지품과 혁띠와 신끈까지 보관 당하고 구치소에 갇혔다. 광수는 불법 체류죄, 나는 놀러와서 일한죄, 안해는 무죄라 석방이였다. 석달 비자로 친지 방문을 온 그녀를 잡을 리유는 추호도 없었다. 사실은 셋 다 불법 체류자로 알고 잡은 것일게다. 잡고 보니 아닌지라 하나는 석방 시키고 하나는 “일 한 죄”를 만들어 씌운 것이다.
구치소엔 우리 먼저 여섯이 갇혀 있었다. 조금 후 검은 살색을 가진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 왔다는 30대의 젊은이가 교통 사고를 쳐 잡혀들어왔다. 전날 밤엔 그 작은 방에 서른 둘이나 앉았었다가 아침에 비행장으로 싣겨 갔다고 한다.
흑인 하나외에 여덟이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이다. 흑룡강 어데서 왔다는 20대 중반쯤 된 한 애는 분을 참지 못하고 집에 간 후 한국인에게 복수하리라고 중국 말로 허튼 소리만 죄친다. 점심이라고 들여온 곽밥도 차 버리면서. 금요일, 29일 비행기로 몽땅 강제 추방 시킨다는 것이다.
잡혀 들어온 후로 외계와 아무런 련계도 가질 수 없게 되였다. 안달아 난 것은 나의 안해였다. 함께 잡아 넣어달라고 해도 안된다, 남편을 놔달라고 해도 안된다, 면접도 안된다, 친척집으로 그냥 돌아가라는 한마디 뿐이였다.
안해는 보령에서 우리를 압송해온 한 키다리 형사한테서 핸드폰을 빌렸다. 법학 박사 공부를 하고있는 조카 연이에게 전화를 쳐 사연을 알렸다. 연이는 광주 형님께 전화로 구원을 요청 했다. 그형님은 청와대 동생한테 다시 전화 하였다. 청와대 형님은 즉시 나를 구속한 대전“관할서”에 전화를 쳤다. 그들은 내 소지품과 혁띠를 돌려주고 책상머리에 세웠다. 연이도 이미 와 있었다.
나는 그네들이 힘들여 타자 해 준 “돈 벌이 안함, 불법 체류 안함, 한국의 모든 법을 어기지 아니함.”등의 세가지 내용을 쓴 각서에 싸인하고 해방 받았다. 령수증 없는 벌금 50만원을 하였는데 그들이 저녁 먹을 돈이 없으니 구걸하는 것이리라 생각 하며 자선 사업을 한번 하였다. 나오다가 호출령을 받고 온 “평화 회사”의 김사장을 마당에서 만났다. 광수를 구해달라고 말은 해봤지만 그라고 무슨 힘이 있겠는가? 부천에 돌아와 여러 곳에 전화를 치고보니 광수의 딱친구네 친척이 법무부에 있는데 그이가 날이 밝으면 광수 구하러 간다고 하기에 큰 기대를 걸며 비로서 안도의 숨을 쉬게되였다.
친구광수는 결국 구원되지 못하고 중국으로 쫓겨왔다. 우리와 함께 일 하던 아르바이트 애들 부모가 신고한 것이라고 광수는 추측하고 있었다. 원자재가 오지 않아 반날 쉬고 비가 내리는통에 하루 쉬고 한건데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리유이고 그러니 그애들도 제대로 돈 벌이를 할 수 없으니 불만이였을 것이라 한다. 진상은 지금까지도 누구나 알 수 없으니 추측일 뿐이다.
광수는 점잔하면서도 강의한 친구이다. 그는 중국에 돌아오자 성시 생활을 버리고 룡수마을 농촌으로 내려가 명태 말리기 부업을 시작 하였다. 몇년 사이 20만원이란 빚을 다 물었고 아빠트 한채 살만한 돈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돈을 번다는게 한국에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임을 광수는 우리들에게 알려주었다.
권력이 있어야 산다. 내가 내돈 내고 내입으로 술을 마신 것이 불법인가? 일 한 것이 불법이라 한다. 내딴엔 그래도 고국 건설에 땀 흘리는 것이라고 즐겁게 생각 했었는데, 언젠가 어데선가 서해 고속도로라 말이 나온다면 그곳 한 모퉁이에 나의 피와 땀도 슴배여 있노라고 우줄렁 해보려고 생각까지 했더랬는데 불법이라 하니 크게, 뜨겁게 부풀어 올랐던 가슴도 금시 식어버리고 만다. 불법이든 뭐든 청와대에 형님이 안 계셨더면 나는 별 수 없이 안해와 갈라져 한달만에 쫓기우고 말번 한 것이다. 그러니 권력이 있어야 산다 그것이다.
“아줌마, 왜 총통한테는 전화 하지 않으시유?”하며 한 뚱뚱이 형사가 나의 안해한테 롱담삼아 비꼬아 말하였다. 그들은 이 아줌마가 직접 청와대에 전화 한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하기에 그후론 누구도 그녀를 쉽게 대하지 못 하였다.
“무죄한 남편을 놔주지 않으믄 총통한테 전화 할라고합니다.”
안해는 주저 없이 말하였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청와대에서 전화가 내려온 것을 전혀 몰랐고 연이한테 전화를 걸어놓고 속만 빠질빠질 태우며 그애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판이였다. 법을 배우는 애이니 형사들을 설들하여 삼촌을 구원 할 수 있으리라 안해는 믿고 있었다. 형사들은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법을 집행 하고 있는 것이 아니임을 그녀는 모르기에 법학자인 조카애를 태산같이 믿고 있었다. 믿은 것은 옳바른 처사였다. 연이는 법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알기에 즉각 권력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눔 자식들 싹 다 총살 해버려라… 씹할, 어느 때는 잡아라 잡아라 해놓고는 또 내놔라고 지랄들이야…”
한 형사는 두덜두덜 청와대를 욕한다. 듣지도 못하는 욕이나 해대며 속풀이 하는 신세, 한급만이라도 위인 상사 앞에선 찍 소리도 못내는 그들의 신세가 가소롭지가 않을 수 없다.
99년 9월 말,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대 회의실에서 한 “재외 동포 지위 향상 추진 협의회” 창립 회의에 참가하러 간 연변 작가협회 83세 고령인 고 김 학철선생님은 문화일보가 조직한 좌담회의에서 다음 같이 말씀하셨다.
“조선족이 딱히 한국에서 기업을 하고 투자를 하고 부동산을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일해서 벌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대개 제 3 산업도 마다 않고 노동을 하고자합니다. 부지런한 이사람들이 들어오면 한국에 유리한것 아닙니까? 한국 정부가 조선족이 알거지라고 해서 동포로서의 대우조차 안 하는데 대해서는 슬픔을 느낌니다.”
“…최소한도로 왕래의 자유를 보장 하는 것부터, 한국내 불법 체류자 문제들을 해결하는 문제 등을 차근히 풀어가자는 것이지요… 최근 한국내에서 대통령의 발언과 상관 없이 길거리에서 불심 검문에 의한 체포와 추방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합니다. 한국 국민 대다수는 조선족을 동포로 껴안고 있으나 소수의 악덕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임금 체불을 항의하면 기업주가 불법 체류자로 신고하고 경찰에 붇잡히면 돈을 줘야 풀려난다는게 현실이라고 들었습니다. 천만원 정도 빚지고 한국땅에 들어와 빚을 갚고 돈을 벌어 돌아가기 위해 4-5년 동안 불법 체류자로 도망 다니며 불안에 떠는게 현실이 아닙니까? 이런것부터 고쳐가자는 것입니다.”
동년 동월 중순, 남서울대학 보건행정학과 이 윤현교수님은 연변에 다녀간 후 썼다.
“…지금 이시간에도 우리 편이대로 뒷전으로 돌린 동포들이 한국의 뉴스와 드라마를 즐겨보고 같은 유행가를 부르며 살아가고 있다. 먼 이국에서 반세기 넘게 지켜온 동질성을 단순히 짧은 경제론리로 모르는척 해선 안 될 것이다…”
어제 전남 여수시 외국인 관리소에 불이 났다. 불법 체류자로 같혀 있던 50여명 외국 로동자들 중 아홉이 숨지고 열 몇이 큰 화상을 입었다고 보도 되였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갸냘픈 목숨들이 이렇게 로동의 권리마저 삐앗기고 죽는 세상이다. 그 누군들 부모 처자 멀리한 낯설은 타향에서 불법 체류자로 숨어 다니며 고생하고 싶고 잡히우고 싶고 갇히우고 싶고 객사하고 싶겠는가? 모든건 권력이 없고 돈이 없는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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