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9월 9일 화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2,6-15
형제 여러분, 6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9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을 뽑으신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자 하는 뚜렷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많은 지파가 소멸하고, 남은 지파도 서로 합쳐져 겨우 두 지파 정도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이라는 상징적 숫자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회복시키시어 이스라엘 구원에 관한 하느님 약속을 실현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두 제자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사실 첫 번째 사도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적용되는 이 직분을 제자들에게도 주시면서 제자들을 당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주십니다. 또한 여기에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도 함께 하기를 바라시며, 이 사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 것에는 큰 뜻이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시고 이 일이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열두 사도 가운데는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고, 다른 제자들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점차 드러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뜻에 따른 선택이지만 우리 눈에는 완전해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그분의 개념이 다른 것은 아닐까요? 이 열두 사도의 부족함과 잘못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시거나 그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이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의 완전하심이 오히려 더 드러납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점차 그 사랑을 닮아 갑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사랑이 아닐까요?(김태훈 리푸죠 신부)
과분하게도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사도로 부르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과거 어려웠던 시절, 바자회를 자주 했습니다. 청소년 시설 운영비며 인건비를 직접 마련하다보니 늘 쪼달렸기에, 연중 치러지던 가장 중요한 행사는 기금 마련을 위한 축제나 바자회였습니다. 축제날이 다가오면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축제 전날이었습니다. 같이 살고 있던 초등학교 꼬맹이들이 하교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저를 보고는, 자기들도 돕겠노라고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거의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함께 돕겠다는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 사업, 당신 홀로 충분히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없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도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엄청나고 위대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 시기로 접어드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사명이 지속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를 사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절로 부르셨습니다.
그 누군가의 사절은 곧 그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다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합법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에 따르면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파견된 사람’(Apostolos)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목격 증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도인 우리들이 꼭 명심해야 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사도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파견 된 사람’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힘과 개인적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기에 앞서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겸손한 신원 의식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암부르시우스 교부)
오늘도 별 도움 안되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과연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8월 22일, 교구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14번째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인사이동은 늘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두 번은 교구장님의 특별한 면담이 있었습니다. 적성 성당으로 갈 때는 “성당이 작고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라고 하시며 “그래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해 주셨고, 저는 실제로 그곳에서 참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한 번은 미주가톨릭 평화신문으로 갈 때였습니다. 비자 문제로 사전에 알려 주셨고, 저는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신 주교님께서 저를 평화신문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새로운 사목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34년 동안 맡겨진 소임 하나하나가 저에겐 꽃자리였습니다. 제가 인사이동을 할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입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우리는 종종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불편하고 답답해서 가시방석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꽃자리인지, 가시방석인지는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마음을 지배하면 어디든 가시밭이 되고, 겸손과 감사가 마음을 채우면 그 자리는 곧 꽃밭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시밭에서도, 돌밭에서도, 심지어 길가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생명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불가마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를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옥중에서 복음을 전하며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분들의 자리는 감옥이었고, 불가마였고, 죽음 앞이었지만, 그곳이 바로 꽃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열두 제자를 뽑으시기 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받으셔야 할 분이, 스스로 기도 하셨습니다. 발 씻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으셔야 할 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기도와 섬김, 십자가는 결국 부활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이루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제자들의 이름을 지금도 외우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했고, 병자를 고쳤고, 마귀를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었고, 그 꿈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신앙은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표면이 아니라 깊이입니다. 바람이 분다고 쓰러지지 않고, 땅이 흔들린다고 뽑히지 않는 믿음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이 자리가 불편하고, 답답하고, 때로는 외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꽃자리라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불평 대신 감사로, 원망 대신 기도로, 권리 대신 섬김으로 살아갈 때, 그 자리는 영원한 생명의 꽃자리로 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꿈을 이루는 제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꽃자리로 바꾸어가는 복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산을 오르내리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오르다
하느님을
만나니
사람을
만나러
산에서
내려오다
사람을
만나니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오르다
그리 오르고
그리 내려오다
그리 내려오고
그리 오르다
산은
늘 곁에 있어
산에
늘 오르니
하느님과
늘 함께
산은
늘 곁에 있어
산에서
늘 내려오니
사람과
늘 함께
산을
오르며
하느님과
늘 함께하니
사람과
늘 함께
산에서
내려오며
사람과
늘 함께하니
하느님과
늘 함께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er Claver)
신분 :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 콜롬비아(Colombia)
활동연도 : 1580-1654년
같은이름 : 끌라베르,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교 베르두(Verdu)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rus Claver)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602년 8월 7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1604년까지 타라고나(Tarragona)에서 수련을 받았다.
그는 마요르카(Mallorca) 섬의 몬테시온 예수회 대학에서 1608년까지 철학을 공부하면서 같은 예수회원인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10월 30일) 수사를 만나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성 로드리게스 수사는 그에게 신대륙으로 가서 선교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가 되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1610년 그는 관구장의 지시로 다른 3명의 예수회원들과 함께 콜롬비아 카르타헤나(Cartagena) 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1612년부터 1615년까지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Bogota)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616년 카르타헤나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콜롬비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고, 카르타헤나는 노예 매매의 중심지였으므로 성 클라베르는 알폰소 데 산도발(Alfonso de Sandoval) 신부와 함께 콜롬비아 인디오들의 처참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집단 수용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음식물과 의약품을 공급하였고, 정기적으로 수용 막사를 방문하여 나병에 걸린 노예들을 돌보아 주면서 그들의 벗이 되었다.
성 클라베르는 40여년 동안 흑인 노예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는데, 그가 생전에 세례를 준 흑인 노예만도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또한 하루 종일 노예들을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주었고, 카르타헤나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그의 영적 자녀가 될 정도로 전 생애를 흑인 노예들을 위해서 살았다.
그는 스스로 엄격한 생활을 실천하였고,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초자연적 은혜를 받아 예언도 하였고 또 기적하는 능력도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힘도 매우 강하였다. 그는 1650년에 전염병에 걸렸다가 곧 회복되었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 4년 동안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1654년 9월 8일 카르타헤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51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뒤, 188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6년에 성 베드로 클라베르를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현재 그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 선교의 수호성인이며 흑인의 사도로 불린다.
성녀 마리아 데 라 카베사 (Mary de la Cabeza)
활동년도 : +1175년
신분 : 과부
지역 :
같은 이름 : 또리비아, 메리, 미리암, 토리비아
에스파냐의 토레존(Torrejon)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토리비아(Maria Toribia)는 성 이시도루스(Isidorus, 5월 15일)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지만 검소하게 살면서 어려운 이를 돕는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남편 못지않은 신심과 가난을 실천했기 때문에 마리아 데 라 카베사(Maria de la Cabeza)라는 이름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아우도마로 (Audomarus)
활동년도 : +595-670년
신분 : 선교사, 주교
지역 : 테루안(Therouanne)
같은이름 : 아우도마루스, 오도마로, 오도마루스, 오메르
오메르(Omer)라고도 불리는 성 아우도마루스(또는 아우도마로)는 프랑스의 쿠탕스(Coutance) 교외에서 출생하였고, 부모가 사망한 후에 성 에우스타시우스(Eustasius, 3월 29일)의 지도를 받으며 뤽세이유(Luxeuil) 수도원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이곳에서만 거의 20년을 머문 성 아우도마루스는 테루안의 주교로 임명되자 교구 내의 이완된 신앙과 윤리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구호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는 성 뭄몰리누스(Mummolinus, 10월 16일)와 성 베르트란드(Bertrand, 1월 24일) 그리고 성 베르티누스(Bertinus, 9월 5일)와 함께 시티으(Sithiu, 오늘날의 생베르탱)에 수도원을 세워 프랑스의 영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그가 행하는 수난에 대한 강론은 너무나 유명하였다.
만년에 그는 맹인으로 지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