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과 칼
“배꽃은 벌써 지고 소쩍새 슬피 울 때
낙산사 동쪽 언덕으로 의상대에 올라앉아
일출을 보려고 밤중에 일어나니 …
바다에서 솟아오를 때는 천지가 흔들릴 듯하더니/
하늘에 치솟아 오르니 머리카락을 헤아릴 만큼 밝구나.”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가사(歌辭) 작품 <관동별곡(關東別曲)>의 한 구절이다.
송강은 생전에 80여수의 주옥같은 시를 지었지만
백미는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이 4수의 한글 가사다.
세종대왕이 한글이라는 원석을 캤다면
송강은 이 원석을 갈고 다듬어 빛나는 보석을 만들었다고 문학평론가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어령 박사는 송강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라 치켜세운다.
“잠시라도 임 생각을 잊고 시름을 달래려 해도
마음 속에 맺혀 있어 뼈속까지 사무치니
편작 같은 명의가 열이나 온들 이 병을 고칠 수 있으랴.”
이것은 <사미인곡(思美人曲)>의 한 구절이다.
제목만 보면 연인을 못 잊어 애타게 그리워하는 詩로 보이지만
사실은 남녀 사랑에 빗대 임금을 향한 신하의 충절을 노래한 것이다.
미인은 임금으로, 송강이 그리워한 미인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다.
임금을 향한 충절을 보편적 남녀 사랑과 그리움에 절묘하게 대비시켰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했으며,
춘하추동 사계절 따라 시상(詩想)의 변화도 무쌍하다.
정철은 1536년 지금의 종로 청운동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세를 얻었지만 훗날 을사사화에 휩쓸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다.
정철의 맏형은 곤장을 맞아 장독으로 죽고
아버지는 유배지를 전전하느라 열살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마침내 아버지가 사면되어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정착한다.
정철 나이 27세에 장원급제를 했다.
명종은 정철의 장원급제를 축하해 연회를 베풀어주었지만,
정철은 나중에 미운 털이 박혀 낙향한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3년 동안 초야에 파묻혀 있던 정철이 인사권을 쥔 이조좌랑으로 중책을 맡아
어느새 서인(西人)의 실력자로 자리잡으며 붕당정치의 문을 연다.
43세 때인 1578년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의 뇌물 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1589년 선조 22년에 아직까지도 역사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못해 아리송한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터진다.
동인의 득세에 불안을 느낀 선조가 왕권을 강화하려고 꾸민 조작 사건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선조가 정철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악마를 본 것인가,
그에게 우의정 자리를 주고 수사 전권을 맡긴다.
관군이 진안에 있는 정여립을 잡으러 가자 정여립은 자결하고 만다.
잔혹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피바다를 이룬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은 당사자와 그 가족까지 몰살당한다.
동인 이발과 그의 형제 셋이 고문을 받다가 죽고, 열살 난 어린아들과 조카도 죽고,
심지어 82세 노모도 사금파리 위에 꿇어앉히고 그 위에 판자를 얹어 문초관이 올라서서 구르니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전남 나주시 왕곡면 광산 이씨 집성촌에서는
여자들이 식칼로 고기를 다질 때 “정철 쾅쾅 정철 쾅쾅 정철 쾅쾅…”
어금니를 깨물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정여립과 서찰을 주고받은 사람, 그저 아는 사람 등등,
정철은 2년에 걸쳐 1000여명 선비들을 잔혹하게 국문해서 죽였다.
원한에 사무쳐 동인 선비들을 작살낸 것이다.
전해오는 얘기로, 정철은 술주정뱅이로 임금의 부름에도 술이 덜 깨어나 못 간 적도 있다.
또 말이 정제되지 않고 직설적으로 함부로 해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가사 문학의 일인자를 부정하는 평자도 많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둘 다 한글로 교언영색한‘아부성 용비어천가’라는 것.
더구나 (관동별곡)은, 그해 강원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아사자가 속출하는데
관찰사라는 작자가 가마를 타고 술을 마시며 산천경개 둘러보고 시를 짓다니!
결국 정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조정에 왜군이 모두 철수했다고 허위 보고를 해 선조로부터 파직 당했다.
그후 강화도를 떠돌다 58세에 굶어 죽었다.
정철(연일 정씨)은 1536년(중종 31) 서울 장의동에서 돈녕부판관 정유침과 죽산 안씨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큰누이가 인종의 후궁이며, 막냇누이가 계림군 유의 부인으로,
왕실 인척으로서 어린 시절 경원대군(후일의 명종)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0세 때 을사사화로 매형 계림군이 역모로 처형당하고,
아버지가 유배길에 오르면서 고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16세가 되어서야 겨우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26세 때 진사시 급제, 27세 때 문과 별과 장원을 하고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로 출사하였다.
이후 이조정랑, 홍문관 전한,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역임하고,
서인의 영수로 명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붕당 정치의 한가운데 있었다.
수차례의 사화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여러 번 파직과 유배를 거듭한 끝에
만년에는 남인의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도 송정촌에서 칩거하다
선조 26년인 1593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정철이~~
민심은 천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