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3년 6개월 전에 쓴 글이다. 세월이 참 잘 간다. 내 글을 두고 "나는 아는데 니는 모르제~"하며 쓰는 글이라고 한 10년 이상은 궁시렁 비난을 받은 듯 하다. 그래도 나는 내 고집대로 써 왔다. 그건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리려는 내 무언의 시위이기도 하였다. <임금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풍자적 이야기다. 참을 말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과 맞서지 마라! 모든 위선과 허위와 거짓은 거기서 부터 시작된다.
나는 죽은 자는 가르치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쓴 가르치는 투의 글을 전부 모아서 살아 있는 인간들이 읽어서 유익한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할 것이다. 이제는 이것도 나이라고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대략 한 1년 원고와 씨름 하면 책이 만들어 질 것 같다. 읽어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나는 세상을 향해서 내가 하고 싶은 내 속의 소리를 내 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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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우리 삶은 늘 문제의 연속이다. 삶에서의 어떤 문제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다중의 문제가 될 때 그 문제는 비로소 모두의 문제(사회문제)가 된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사적인 문제에만 몰두 할 뿐 사회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그가 더 식견이 높고 도덕적으로 더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이웃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한다는 마음이다. 지금은 내가 다행히 그 문제에서 비껴나 있어 다행인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그대로 두면 가까운 장래에 나에게 바로 피해로 닥칠 문제이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는 마음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시민정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을수록 우리사회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가 사회문제화 되기 위해서는 다수의 동의가 필요하고, 다수의 동의를 얻어 내기 위해서는 여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술좌석이나 여타 친목을 다지는 자리에서 사회문제를 안주꺼리로 올리면 우리의 풍토가 아직은 ‘네까짓 게 뭔데 그런 일에 열을 올리느냐?’고 비웃거나 좌파적 시각이니 우파적 시각이니 하며 다투기만 할 뿐이라, '적당히 대충하고 넘어가자’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는 경향들이 많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학덕을 갖춘 분들이 모인 자리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시간을 쓸데없는 잡기 놀음으로 떼우고 만다. 먹물든척하다간 비웃음을 살 수도 있다는 경험칙에서 나오는 무의식이 작동하여 모두들 같이 한 통속이 되어 시시덕거리는 도회술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민의식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는 빈정거리기를 잘해도, 자신을 드러내어서 바른 말은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조직의 지도자는 구성원들로부터 자신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 심지어는 자기 민족에게 로켓포를 쏘고 전투기로 기총사격을 가하는 독재자조차도 역사 앞에서 찬양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힘으로 입을 틀어막거나 아니면 그 입에 돈을 물려줘서 매수하려 든다. 민주시민사회에서 여론형성에 주된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언론인데 언론이 본연의 사명을 지켜나가느냐, 아니면 훼절하여 타락하고 마느냐의 운명은 여기서 결정된다.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하면 사회문제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그 해법도 전혀 엉뚱한 방법이 나오게 된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무한대로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혹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법으로 정할 것이냐? 아니면 자유로운 토론의 장에서 스스로 걸러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옳으냐?의 방법론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마광수의 소설이 음란물이냐 아니냐? 무대에서 배우들이 전라로 연기하는 것이 외설이냐 아니냐? 미네르바의 글이 유언비어 유포냐 아니냐? 공익을 위해 발표한 어떤 기사가 개인과 국가의 명예 훼손이 되어 그 기사를 쓴 기자가 형사처벌은 물론 금전적인 손해 배상까지 당해야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또 그동안은 한 통속으로 지내면서 침묵하고 있던 내부고발자를 처벌해야 하느냐, 아니면 보호하고 포상해야 하느냐?,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같은 글이 좌파적이냐 아니냐?, 신학철의 모내기 그림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느냐 아니냐? 의 이런 논쟁들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 할 것인가? 의 그 임계치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독자나 관람자들이나 깨어 있는 시민대중들이 스스로 알아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정신적영역의 문제를 다수결의 원리로 또는 법으로 그 수위를 정할 수가 있기는 한 것인가? 지난 시대의 일이지만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다고 경찰들이 자와 가위를 들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사진들을 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가마득한 시절의 이야기 같아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단체의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은 말 그대로 자유 게시판이다. 글을 게재하는 것도 자유고 그 자유에 대해서 반박하는 것도 역시 자유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인간의 정신세계에도 격이 있다고 인격이라 하는 것이니, 감정이 개입된 인신공격적인 글 보다는 품격을 갖춘 글을 쓰는 게 "표현의 자유"를 더욱 더 보장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언론이 타락하면 우리 사회는 “하여가” 수준의 세상이 되고 만다. 나는 하여가와 단심가를 초등학교 때 배우고 암기했다. 한번 정상에 오르면 내려오지 않고 저희들끼리 만수산 드렁 칡처럼 자손 대대로 얽히고 설켜서 돌아가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의 아들과 손자들이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원시적, 본능적 욕구임으로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 허용함으로써 입는 피해보다는 그걸 억제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왜곡되고 유린되는 피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현대는 개방화된 다양성의 시대다. 수많은 직업군들이 있고 그들 직업군들은 또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오늘은 이 생각을 따르다가도 내일은 저 생각을 따르기도 하는 시대다. 이런 다양성의 시대에 개인의 생각을 좌파, 우파로 획일적인 구분을 하여 네편 내편으로 줄을 세우고는 “나를 따르라!”고 외친다고 해서 대중들이 무턱대고 따르겠는가?
이 시대의 바람직한 리더상은 불도저처럼 밀어 붙이는 영웅적인 리더형이 아닌 다양한 생각 집단들과 잘 소통해나갈 줄 아는, 사람을 향해 무한히 열린 마음을 가진 가슴 따뜻한 리더가 더 각광을 받는 시대다. 올바른 리더십을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더 많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 되어야 한다. 특히 작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곧 생명과 다름없는 것임에야 물을 이유조차도 없는 것이다. (2011.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