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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선 시 깊이 들여다보기
생명력의 숭고함과 권력의 폭력
―남효선의 신작시를 중심으로
이성혁
1989년에 등단한 남효선 시인은 2008년에 첫 시집 『둘게삼』을 냈다. 등 단한 지 근 20년 만에 첫 시집을 낸 것이다. 1년 만에 새 시집을 내곤 하는 현 시단의 세태와 비교해보면, 남 시인의 과작(寡作)은 오히려 돋보인다. 물론 시를 적게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 칭찬 받을 일은 아니다. 과작은 시에 대한 태만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둘게삼』을 읽어보면, 남 시인의 과작은 태만과는 반대로 어떤 엄격함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집에 실린 어떤 시에서도 허투루 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시 한 편 한 편에 시작에의 몰두가 떨어뜨린 땀이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 남 시인의 과작은, 그가 시를 삶에서 결정(結晶)되는 진주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인 듯도 하다. 즉 그는 시를 삶과 유리되어 제작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험난한 역사가 스며들어 있는 민중의 삶 자체에서 빚어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시인은 민중―자신의 친척까지도 포함해서―의 삶에서 풀려 나오고 있는 시적인 의미를 붙잡아 언어로 정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시인이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민중에 대한 믿음과 애정, 그리고 민중의 삶이 빚어낸 역사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둘게삼』에 실린 시들은 그러한 시인의 태도가 모범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평등하고 민주적인 세상을 열어나가려고 노력했던 민중의 삶을 조명하여 복원하려는 시들은 남효선 시인의 역사의식이 어떠한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권력에 의해 좌절을 거듭한 민중이지만, 그가 민중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자연의 생명력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보기에 민중의 끈질긴 의지는 삶의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삶의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온다. 즉 그 의지는 생명력의 표현이다. 권력은 일시적으로 그 표현을 억누를 수 있으나 역사는 장기적으로 보면 민중의 생명력이 승리하는 길을 걸어갔다.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민중의 삶과 역사에 대한 존경심은 이를 의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여기 발표되고 있는 시들에서는 시인의 역사의식이 전경화되고 있지는 않지만, 민중의 삶과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시인의 존경심과 경이를 드러내고 있다. 「대목장」부터 살펴 보자. 이 시는 ‘울진읍장’에서 도토리묵이나 시래기, 차좁쌀 등을 팔고 있는 ‘순례할미’를 묘사한다. 순례할미는 “올해로 예순 해”째 “걸어서 세 시간 걸리는 울진읍장 드나”들었다고 한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쇼핑을 하는 시대에, 팔 음식을 머리에 이고 세 시간 걸어서 장에 오는 이 할머니는,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달리 말하면, 그녀는 앞으로만 내달리는 현대적 삶의 흐름에서 제외되어 60년 동안 동일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은 불행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인위적인 변화에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면에서 평온한 삶일 수도 있다. 여하튼,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 할머니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손주에 대한 사랑이다. “도토리묵 한 양푼이, 잘 말린 시래기 세 묶음, 차좁쌀 세 되/마구 팔아 남은 돈 이만 원”에서 자신을 위해 쓴 돈은 점심값 이천 원이다. 하지만 ‘손주 놈’을 위해서는 설 선물로 “칠천 원 주고” 골덴바지를 사서 “애지중지/나이롱 보푸재에 말아” 쥐는 것이다. 할머니의 이러한 모습에서 손주를 생각하는 살뜰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할머니 집안은 매우 가난했을 것이다. 그래서 손주의 어머니일 ‘며눌아’는 이태 전 집을 나갔을 것이다. 손주를 돌봐줄 사람은 이 할머니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 집안에서 돈을 벌어오는 이는 이 할머니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교통비라도 아끼려고 장에 걸어오시는 것일 터, 그러니 할머니로서는 칠천 원을 쓴다는 것은 제법 큰돈을 쓰는 것일 테다. 가난한 생활은 물품을 소중하게 여기게 만든다. 그렇기에 할머니는 골덴바지를 애지중지 말아 쥐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돈에 얽매인 이기주의와는 상관 없다.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야 하는 가난한 생활이지만, 할머니와 같은 민중의 생명력은 화폐의 교환체제를 넘어서는 바가 있다. 이 시의 후반부가 이를 보여준다.
살아갈수록 좋은 날은 안 생기고
닷새 장마다 낯익힌 어물전 끝냄이 할미
팔다 남은 물가자미 세 마리 건넨다
순례할미, 말없이 물가자미 받아들고
나생이 한 단 들이민다
나이롱 보푸재에 계란만큼 남아 있던 겨울 해는
저만치 삿갓봉 목재를 기웃거린다
손주 놈 골덴바지 말아 쥔
나이롱 보푸재, 순례할미 손등 검버섯 새로
한 줄 희멀건 힘줄, 숨 가쁘다
―「대목장」 부분
‘순례할미’와 ‘끝냄이 할미’는 팔다 남은 음식을 서로 직접 교환한다. 즉 화폐를 매개로 음식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물물교환을 하는 것이다. 화폐 교환 체제는 물건의 가치를 수치화하여 동질화 한다. 여기에 계산적 이성이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물물교환에서는 계산적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나생이 한 단과 물가자미 세 마리는 화폐의 척도에 따라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그리고 계산이 아닌 애정 속에서 교환된다. 이러한 교환의 장에는 겨울 해와 같은 자연물도 기웃거리면서 참여한다. 이렇게 가난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 자연스러운 연대를 낳으면서, 사랑에 기초한 민중의 생명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생명력은, 손주의 바지를 싼 나이롱 보푸재를 꽉 쥐고 있는 순례할미의 손등에서 육체적으로 표현된다. “손등 검버섯 새로/한 줄 희멀건 힘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힘줄에 대해 “숨 가쁘다”라고 말한다. 시인이 숨 가빠해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검은 색과 흰 색―‘검버섯’과 ‘희멀건 힘줄’―이 보여주는 색채의 대조에서 나타나듯이,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삶이 가까스로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어서 아슬아슬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그 아슬아슬한 생명력이 시인에게 숭고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 원에서 자신의 식사비로는 이천 원을 쓰고 손주를 위해 칠천 원을 쓰는 할머니의 행위는 특별하다고 할 수 없다. 도리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할머니의 마음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행위는 손주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어서 숭고하다. 생명력은 사랑의 힘이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생명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기에, 그래서 사랑이 현현하는 장면은, 그것이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숭고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대목장」이 조명하고 있는 할머니의 힘줄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다. 「22번 중매인」역시 어떻게 보면 평범한 어머니를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에게 어떤 숭고를 느끼게 하는 장면을 조명하고 있다. 이 시의 주인공은 젊은 시절에 뱃사람 남편을 잃고는 삼남매 아이들을 억척같이 일해서 키워낸 어머니다. ‘순례할미’가 육십 년 동안 장에 나가 음식을 팔았다면, ‘악바리 별명’을 듣는 이 삼남매 어머니는 삼십 년 동안 새벽마다 포구에 나가 생선을 입찰해 ‘대처’에 나가 팔았다. 그렇게 일해서 삼남매 혼사도 치러주고 “남 서럽지 말라고 아파트 한 칸씩도 장만해”준 어머니인 것이다. 그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이 어머니가 해야 했을 고생이 어느 정도일지는, 안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조명하는 장면은, 남편 제삿날에 “뜬금없이 환갑잔치 지내야겠”다고 말하는 자식들과 이 어머니가 대화하는 모습이다. 어머니는 고개를 젓지만, 자식들은 “한사코 지내야겠”다고 고집한다. 특히 “지 애비 먼저 보내놓고 무슨 환갑잔치냐”는 어머니의 말에 ‘지난해’ 외손주를 낳은 막내딸이 “아부지 없으면 어무이는 그 흔한 환갑도 못 지내냐고/기어코 눈물 그렁그렁 쏟는” 장면에 시인은 초점을 맞춘다. 시인은 그 막내딸의 울음에 울컥한 어머니의 심정을 “서른 해 가슴 닫고 산 세월, 울컥/파도가 뭍으로 오른다”라면서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악착같이’ 돈을 벌기 위해선 지아비를 잃은 슬픔이 마음을 적시지 않도록 해야 했을 것이다. 슬픔은 의지를 약하게 하고 활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슬픔의 파도가 마음의 뭍으로 오르지 않도록 가슴을 닫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허나 막내딸의 말과 울음은 지아비의 죽음과 자신의 삶의 희생에 대한 슬픔이 삼십 년 동안 가슴에 박아 놓은 방파제를 ‘울컥’ 넘게 만든다.
그 넘치는 파도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자식들에 대한 사랑 역시 자연스러운 마음일 터이나 그 사랑을 위해 설치한 방파제를 넘고 만 설움 역시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자연 역시 이렇게 막고 넘치는 과정으로 살아나간다. 그 과정이 자연의 생명인 것이다. 봄이 오면 생명이 이 세상에 만발하게 되면서 겨울이 생명이 발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쳐놓은 담장을 범람한다. 「서설(瑞雪)」은 함박눈이 내리는 초봄을 배경으로 생명이 새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다시 읽어본다.
경칩에 눈이 내렸다. 예고도 없이 내린, 보기 드문 함박눈이다. 밀려오는 봄기운을 버팅기듯 온 산천을 눈꽃으로 매달았다. 한풀한풀 벗어 던지며 마침내 은박지처럼 눈부신 속치마로 겨울을 덮고 봄을 받는다.
하얗게 달아오른 산천이 속살을 열고 생명수를 잦아 올리자, 개울이 풀리고 금세 개불알꽃, 노루귀, 변산바람꽃이 솜털을 나풀거리며 꽃을 피운다.
뭍과 함께 바다도 열렸다. 서설(瑞雪)이 억센 바다의 등짝을 두들기자, 몸을 뒤채이며 바다는 한꺼번에 생명을 토해낸다.
진저리니, 토박이니, 말치니, 미역이니, 송곳나물이니, 국수말 따위의 바다나물이, 바다 밑바닥 혹은 갯바위에 단단히 뿌리박고 길게 목을 뽑아 올려 바다를 헤집는다.
음력 이월 초하루, 갯가 아낙들은 바람과 종자 신 영등할망이를 부르며 소지를 올렸다. 한 보름 내내 바다를 달구었다. 바다는 비릿한 봄내음 풀풀 날리는 여자들 판이다.
―「서설(瑞雪)」 전문
경칩에 내리는 눈은 생명의 봄을 알리는 눈이기에 상서롭다. 그래서 서설(瑞雪)이다. 상서로운 눈이라서 그런지 내리고 있는 눈은 탐스럽고 복스러운 함박눈이다. 그 눈은 생명을 얼리는 눈이 아니라 겨울을 잠재우고(“겨울을 덮고”) 생명을 표현하는 눈, 꽃과 같은 눈이다. 그래서 ‘눈꽃’이다. 그 속치마처럼 하얀 눈은 생명의 속살을 드러내는 꽃처럼 관능적이다. ‘눈―속치마’가 산천을 덮자, 산천은 “하얗게 달아오”르고 자신의 속살을 열어 꽃들을 피워 올린다. 어떻게 몸이 “하얗게” 달아오를 수 있을까? 맑은 생명수가 산천의 몸속을 흐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서설이 내리자 이렇게 물이 풀려 뭍이 열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설의 손길을 받은 바다 역시 자신의 몸을 열어 꽃과 같은 생명들―바다나물들―을 토해낸다. 그래서 그 생명들이 즐비한 갯가엔 ‘아낙들’이 모여들어 “영등할망이를 부르며 소지를 올”린다. 영등할머니는 음력 2월 초하룻날인 영등날에 하늘에서 내려와 2월 스무날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신화적 존재로, 바람을 다스리고 농촌의 실정을 조사한다고 한다. 그러니 그 할머니는 바로 봄의 기운을 세계에 불어넣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는 봄이 다가오면서 생명이 깨어나는 세계의 움직임을 생동하는 표현으로 흥겹게 그려낸다. 이 시에 등장하는 자연물들―사람과 신까지 포함하여―은 모두 움직이고 있다. 눈은 “겨울을 덮고 봄을 받”고 있으며 “바다의 등짝을 두들”긴다. 생명수가 흐르자 산천은 속살을 열어 꽃을 피우고 바다도 “몸을 뒤채이며” “한꺼번에 생명을 토해”내고 있다. 바다나 물은 “길게 목을 뽑아 올려 바다를 헤집”고 있으며 아낙들은 “영등 할머니를 부르며 소지를 올”린다. 시인은 생동하는 자연을 이렇게 동사를 동원하여 인상 깊게 묘사하면서 “개불알꽃, 노루귀, 변산바람꽃”이나 “진저리니, 토박이니, 말치니, 미역이니, 송곳나물이니, 국수말”과 같은 특유한 이름들을 불러내기도 한다. 이 고유한 우리말들은 이 시에 더욱 발랄한 분위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런데 생명이 이렇게 발랄하게 개화하는 세계는, 영등할머니가 여자이듯이 “비릿한 봄내음 풀풀 날리는 여자들 판”이다. 생명은 여자들이 낳고 기르는 것이어서 자연 자체가 여성적인 것이다. 「자하(紫霞) 동천(洞天)을 찾다」 역시 생명을 낳는 자연을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시에 등장하는 생명을 낳는 주체는 다음과 같이 흐르는 냇물이다.
구불구불 부처 곁으로 오르는 길
노을이 걸렸다
천축산을 에돌아 이무기의 길을 흐르는
빛내(光川) 속살이 붉다
안일왕산에서 샘을 만들어
불영의 속살로 들어와
연꽃 한 무리 피웠다
내가 좇은 길, 네가 따른 길
빛내가 이룬 용소에서
소용돌이로 우주를 이뤘구나
물안개 옷깃 털며
외길 뒷걸음치면
붉은 노을 한 다발 꽃잎처럼
물 위로 연꽃 위로
붉은 물안개 피워 올리며
장삼자락 너머
동천은
마침내 마을로 닿는구나
―「자하(紫霞) 동천(洞天)을 찾다」 전문
그 흐르는 냇물은 ‘빛내’라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다. ‘빛내’는 경북 울진군의 천축산을 에돌아 나와 “안일왕산에서 샘을 만들어” 연꽃을 낳는다. 관능적인 붉은 속살을 지닌 ‘빛내’는 우리네 삶처럼 흘러가다가 안일왕산의 ‘불영’―불영사를 의미할 것이다―과 교접하여―“불영의 속살로 들어와”―아이―연꽃―를 낳은 것이다. 이 아이를 낳으면서 이무기였던 ‘빛내’는 용이 되어 승천한다. 즉 용소龍沼를 이룬다. 길을 감싸고 있는 붉은 노을―‘자하’―과 섞이면서, 냇물이 새 생명을 낳고 있는 이 풍경은 승천하는 용과 같은 “소용돌이로 우주를” 이루는 숭고함을 뿜어낸다. 그런데 숭고를 “피워 올리”는 이 ‘자하’의 풍경과 시인이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따른 길”을 “내가 좇”았기 때문이다. “내가 좇은 길”이란, 바로 붉은 노을과 함께 ‘빛내’가 흘러간 길을 말할 터, 그런데 그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사람의 삶에 닿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에 의하면 ‘동천(洞天)’―산천으로 둘러싸여 경치 좋은 곳―은, ‘마침내’ 사람이 사는 마을에 닿기 때문이다. 그 마을도 동천일 수 있는 것은, 그 마을이 기막힌 풍경을 자아내며 생명을 풀어내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어울리기 때문일 테다.
사람의 살림살이가 자연의 생명력을 드러낼 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 테다. 소지를 올리며 영등할망이를 부르는 아낙네들, 지아비 제삿날 환갑잔치를 둘러싸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녀, 손주의 골덴바지를 말아 쥐고 있는 할머니가 벌이는 ‘여자들 판’이 바로 저 동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마을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여자들 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세상은 남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이다. 「찬(讚) 몽유도원도」는, 이 아름답고 숭고한 생명의 세계와 폭력적인 인간 세상이 섞이지 못하고 길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다시피 몽유도원도는, 꿈에서 도원을 거닐었다는 안평대군의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그린 그림이다. 몽유도원도 옆에는 안평대군, 박팽년, 신숙주 등의 시문이 적혀 있다. 이 시의 1연은 바로 안평대군의 꿈을 시인이 상상해서 쓴 것이다. 안평대군과 박팽년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솔내음이 가득한 도원을 걷고 있고 그들을 신숙주와 최항이 ‘너풀너풀’ 뒤따르고 있다. 몽유도원도에 그려진 것처럼, 이 도원은 절벽으로 채워져 있어서 길이 매우 험하지만, 역시 꿈속 세계이니 이들의 걸음걸이는 가볍고 즐겁기만 하다.
2연을 읽어 보면, 이 도원의 세계는 「자하(紫霞) 동천(洞天)을 찾다」에서의 그 동천과 같은 곳이다. 이들 일행은 새의 발자국만 남은, 즉 새도 넘기 어려울 만큼 험한 산속의 좁은 길인 “조도잔(鳥道殘)을 돌아/외줄기 샘을” 만나게 된다. 그 샘은 불영사에서 연못을 이뤄 연꽃을 피운 ‘빛내’와 같이 생명수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들은 그 샘에서 “단숨에 물을 마”신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자하’가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복사꽃비가 하늘을 수놓”고 “붉은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는 것이다. 「자하(紫霞) 동천(洞天)을 찾다」에서 ‘내’가 자하를 좇았듯이 아이들이 “복사꽃비를 쫓”고 있고, 그 붉은 꽃잎은 “아비들 잠뱅이 걷고 밭을” 갈고 ‘어미들’은 나물을 뜯고 있는 마을에 닿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 아비와 어미가 평화로이 일하고 있는 이 마을의 풍경 역시 생명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의 다음 부분이 알려주듯이,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 세상은 꿈속에 존재하는 것일 뿐, 현실은 피비린내 나는 것이다. 3연부터 인용해본다.
아마득하다
뒤돌아보니 울울첩첩
조정은 아마득하다
숙주와 최항이 손을 휘저으며
헐떡헐떡 쫓아오다가
안개 너머로 되돌아선다
훅, 바람결에 비린내 그득하다
되돌아 나오는 길, 새발자국 좇아
천길 낭떠러지로 고꾸라진다
몽상이다 줄줄 식은땀이 흐르는
적삼 깃에
복사꽃이파리 한 점
핏빛이다
―「찬(讚) 몽유도원도」 부분
이 도원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인 조정 사이엔 아마득한 거리가 놓여 있다. 조정은 남성의 세계이며 권력과 폭력의 세계이다. 안평대군과 박팽년을 쫓아오던 신숙주와 최항은 그들로부터 되돌아서서 자하의 세계 너머로 가 버린다. 그들은 조정의 권력 세계에 몸을 맡겨버린 것이다. 안개 너머의 세계는 피비린내 그득하다. 그래서 그 세계는 꿈속의 세계에까지 “바람결에 비린내”를 풍긴다. 허나 안평이나 박팽년도 현실을 등질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로 되돌아가려고 하지만, “뒤돌아보니 울울첩첩”이어서 결국 “천길 낭떠러지로 고꾸라”지고 만다. 도원의 아름다운 절벽은 이제 이들을 죽게 만드는 무엇으로 변모했다. 숭고한 아름다움을 현현시켰던 붉은 복사꽃이파리도 핏빛으로 변하여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장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독자들도 잘 알 것이다. 알다시피 신숙주와 최항은 세조의 권력에 빌붙고 단종의 복권을 꾀했던 박팽년과 안평대군은 사형당하고 만다. 박팽년과 안평대군은 도원과 같은 이상 세계를 꿈꾸었다. 하지만 현실은 부당한 권력에 의해 피비린내 가득하게 되었다. 자연의 이상을 꿈꾸었던 이들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세조를 축출한다는 위험하고 험난한 길을 걷게 된다. 안평과 박팽년과 함께 이상을 꿈꾸고자 했던 신숙주와 최항은 결국 이상을 배신하고, 이들을 죽이는 데 동참하게 된다. 자연의 이상은 패배하고 권력의 폭력은 승리한다. 자연과 현실은 섞이지 못하고 현실의 권력은 자연을 파괴한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시인과 꿈을 진술하는 안평이 겹쳐 있는 이중 화자라는 것에 주목된다. 즉 화자를 시인으로 봐도 되고 안평으로 봐도 되는 것이다. 이는 “줄줄 식은땀이 흐르는” 안평의 목이 바로 시인의 그것과 같음을 의미한다. 즉, 자연의 삶,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꿈꾸기에, 시인 역시 자신이 이 폭력적인 현실에 식은땀을 흘리며 위태롭게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패배할지도 모르는 이 대항이 바로 자연의 생명력에 의지하는 것이요 사람의 삶과 현실을 좀 더 낳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을 테다.
이성혁
서울 출생. 2003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불꽃과 트임』, 『不和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시에』2011년 봄호
첫댓글 "자연의 이상은 패배하고 권력의 폭력은 승리한다. 자연과 현실은 섞이지 못하고 현실의 권력은 자연을 파괴한다." 시인론 속의 글을 따와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평문으로 민중의 숨결, 더욱 새롭게 각인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