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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前生說話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태어났다가 죽는 일을 反復한다는 佛敎의 輪廻思想을 바탕으로 한 說話)
★ 三國遺事, 韓國口碑文學大系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9) 에.
佛敎의 敎理에 依하면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는 꼭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動物이나 植物 또는 그 밖의 것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야기 속에서도 前生과 現生과 後生이 사람이거나 動物系나 植物系를 오고갈 수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 說話資料集 가운데 前生譚이 明快하게 敍述되고 있는 文獻의 例는 三國遺事이다. 三國遺事에는 金大城 · 金庾信 · 文武大王 · 竹旨郎 · 淵蓋蘇文 · 惠空, 蛇福의 어머니, 郁面, 惡龍 等의 前生과 後生에 얽힌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데, 가장 代表的인 例는 金大城의 逸話이다.
大城은 牟梁里 出身으로 집안이 宮塞하여 富者인 福安의 집에서 雇傭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開士 點開가 福安에게 施主를 權하며 布施를 하면 萬 倍의 福을 받는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勞賃으로 받은 밭을 法會에 布施하여 뒷날의 應報를 빌었다.
얼마 뒤에 大城은 죽었다가 宰相 金文亮, (三國史記에는 金文良)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前生의 어머니와 現生의 父母를 두루 供養하고, 얼마 안 되어 이승의 어버이를 爲하여 佛國寺를, 前生의 父母를 爲하여 石佛寺를 創建하였다.
이것은 佛敎의 輪廻思想과 因果應報의 原理가 結合되고 그 위에 寺刹緣起說話가 添附된 典型的인 前生譚이다.
人間關係와 動物이나 植物의 世界를 오가는 境遇로, 元曉의 벗인 蛇福의 어머니와 郁面은 前生에 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였고, 惠通이 唐나라에서 물리친 惡龍은 新羅에 와서 버드나무로 託身하여 惠通과 가까운 鄭恭을 괴롭혔다고 한다.
口傳되는 資料로는 ‘子息으로 태어난 짐승의 後患’에 얽힌 이야기가 가장 두드러진 類型이다. 그 內容은 뱀·지네·구렁이·벌레 等을 害치거나 함부로 죽인 主人公에게 앙갚음을 하기 爲해 그 動物이 아들로 태어나 집안을 亡하게 만들어 前生의 怨恨을 갚는다는 이야기인데, 許積 · 許穆 等이 主人公인 許氏 집안의 內歷으로 傳하는 例話가 있다.
이것은 한番 맺힌 怨恨은 다음 生에라도 풀어야 한다는 思考方式을 드러내며 사람이건 짐승이건 怨恨을 사서는 안 된다는 敎訓이 담겨 있다. 죽은 뒤에 人道還生하는 口傳說話에서는 前生의 功德이나 精誠 等이 强調되면서 貴한 身分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前生에서 未盡했던 因緣을 現生에서 다시 잇기도 한다.
‘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이야기는 前生譚에서 派生된 特異한 類型이다. 이것은 鎭川에 살다 죽어 저승에 갔다가 아직 壽命이 남아 있어 이승으로 돌아왔으나, 本來의 몸에 다시 靈魂이 들어갈 形便이 못 되어 龍仁에서 살다 죽은 다른 사람의 몸에 依託한 主人公이 두 곳의 家率을 다 거느리고 산다는 內容이다.
이 밖에도 깃털(옷감·종이 等)을 通하여 사람을 보면 前生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나 前生을 알아맞히는 異人 等의 前生譚에서 번져 나갔을 것으로 보이는 모티프들도 있다.
口傳資料의 前生譚은 文獻資料의 前生譚에 比하여 佛敎的인 色彩가 比較的 엷게 나타나고 있으며 因果應報의 思想이나 恨풀이 等이 强調되면서 變身說話와 아주 가까운 位置에 놓여 있다.
★ 前生 說話.
忠南 牙山 出身의 尹雄烈 大監은 1840年生으로 1856年 武科에 及第, 刑曹判書을 歷任하다가 高宗 때 全南 莞島로 귀양간다
3年째 귀양살이하던 尹大監이 洞네에서 용하다는 處女 무당이 있다는 所聞을 듣고 심심破寂 삼아 찿아가 占을 보았다.
16歲의 少女 占쟁이의 말이
"大監은 보름 後이면 귀양이 풀리고, 日本으로 留學간 아들의 後日 配匹은, 淸나라 女子일 것입니다" 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尹雄烈 大監은 前生은 咸鏡道 安邊郡 雪峯山에있는 釋王寺의 '海波'라는 스님이었는데 前生에 道伴이었던 스님(李景云)은 生前에 罪業으로 兩손이 조막손이되어 江原道 通川 시골에서 酒幕집을 하고 ...
前生, 海波스님인 尹雄烈 大監은 좋은 業을 쌓아 높은 벼슬을 하며, 後에 貴한 子孫을 둘것이라는 占卦!
尹大監은 正말 보름 後 귀양이 풀려 上京하게 된다.
어느덧, 漢陽에 올라온지 1年이 지난後 尹大監의 日本으로 留學갔다 歸國한 아들이 結婚 할 사이라고 데리고온 女人이 莞島 少女 무당의 말대로 淸나라 女子였다.
尹大監은 莞島의 占卦가 생각나서 1903年 咸鏡道 安邊郡의 釋王寺를 찿아갔는데 尹大監의 前生이라는 '海波'스님 浮圖塔이 實際하고있었다. 그리고 江原道 通川의 李景云을 찿아보니 正말 조막손이되어 酒幕집을 하고 있었다.
尹雄烈 大監은 前生의 道伴인 李景云에게 財物을 나누어주고 莞島의 處女무당은 서울로 데려와 집을 마련해 주었는데 그 집터가 現在 '恩石初等學校' 터 이다
奇妙한 이야기의 主人公 尹大監, 卽 尹 雄烈 大監은 尹潽善 前 大統領의 祖父이시다.
🍎 節婦岩 說話
遮歸島가 한눈에 들어오는 濟州市 翰京面 龍水里 浦口 옆 鬱蒼한 숲에는 夫婦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節婦岩이라는 바위가 1百年이 넘는 時間을 뛰어넘어 그대로의 모습으로 앉아있다. 죽어서도 하나가 되고 싶었던 한 夫婦의 懇切하고 잔잔한 사랑은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이 時代에 示唆하는바가 크다. 典型的인 海岸마을인 北濟州郡 翰京面 龍水里. 겨울바다바람이 매서워 實際 氣溫보다 더 춥게 느껴지지만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노을과 調和를 이루는 마을의 모습은 아름다운 한 幅의 水彩畵를 聯想케 한다.
또 사철나무와 厚朴나무, 冬柏나무 等 暖帶性植物이 7百m 假量 우거진 龍水里 浦口 옆 絶壁의 雰圍氣는 色 다른 雰圍氣를 演出한다.
또 그 숲에는 朝鮮時代 石造文化財로 分類돼 지난1981年 濟州道記念物 第9號로 指定된 節婦岩이라는 바위가 1百年이 넘는 時間을 뛰어넘어 그 자리에 앉아 죽어서도 같이 있고자 했던 變치 않는 夫婦의 情을 느끼게 한다.
朝鮮末期 龍水里에는 康士喆 이라는 漁夫가 살고 있었다.
어려서 父母를 일찍 여의고 혼자 살던 康氏는 비슷한 處地의 옆 마을 高氏 處女를 아내로 맞아들여 없는 살림이지만 서로를 依支하며 幸福한 나날을 보낸다.
힘들고 지치지만 自身을 理解해주고 精誠을 다해 받들어 주는 아내 高氏가 있어 幸福하기만 康氏.
그러던 어느 날 康氏는 遮歸섬 으로 대나무를 베러 떠난다. 대나무바구니를 만들어 場에 내다 팔고 사랑스런 아내에게 예쁜 비녀를 사다 주기 爲해서다.
우거지 수풀을 헤치며 熱心히 대나무를 베는 康氏의 마음은 未來에 對한 設計로 그저 幸福하기만 했다.
돈을 모아 한平生 아내와 오순도순 살 집을 장만하고 밭도 사야지 하는 마음에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비 오듯 흘러내리는 구슬땀은 밝은 未來를 爲한 거름이라 여겨졌다.
어느덧 時間은 흘러 해가 西便으로 기울어 갈 때쯤 일을 마친 康氏는 타고 왔던 배안에 대나무를 가득 싣고 집을 向해 노을 젓기 始作한다.
그러나 하늘의 시샘일까 난데없는 突風이 불어와 배에 타고 있던 康氏를 덮쳐 바다에 빠진 康氏는 있는 힘을 다해 헤엄을 쳐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마을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極甚한 風浪은 冷情하게 康氏를 삼키고 만다. 이런 事實을 알지 못하는 高氏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男便 康氏가 오기만을 기다리지만 해가저도 男便은 돌아오지 않는다.
不吉한 마음에 사로잡힌 高氏는 마을을 돌며 康氏의 行方을 搜所聞 했으나 누구에게서도 男便의 消息을 들을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高氏는 날이 밝자마자 바닷가로 나가보지만 康氏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부서진 배의 破片과 대나무만 바다에 떠다니고 있을 뿐 이었다.
이에 高氏는 이미 康氏는 이 世上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哀慟한 마음을 억누르며 男便의 屍身라도 찾으려고 며칠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닷가를 徘徊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가난 했지만 多情多感했던 男便이 없는 世上은 高氏에게는 苦痛이었다. 夫婦의 緣을 다하는 길은 먼저 世上을 등진 男便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 高氏는 素服 차림으로 龍水里 바닷가 俗稱‘엉덕동산’ 숲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 男便의 뒤를 따른다. 그러자 神奇하게도 高氏가 목을 맨 바위의 나무 아래 바다에서 男便 康氏의 屍身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사람들은 男便을 向한 高氏의 節槪를 높이 稱頌하게 됐으며 이 事實은 곧 官家에 알려졌고 當時 大靜 判官이던 愼哉祐가 高氏가 숨진 바위에 節婦岩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해마다 陰曆 3月15日에 高氏와 康氏의 靈魂을 달래는 祭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이 祭祀는 只今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죽어서도 하나가 되고 싶어 했던 夫婦의 哀絶한 事緣을 간직한 濟州市 翰京面 龍水里 節婦岩에 얽힌 이야기는 만남과 헤어짐의 所重함을 다시 한 番 생각하게 한다.
🍎 占夢
옛날에 儒生 세 사람이 있었다. 將次 科擧 試驗을 보러 가고자 하는데, 한 사람은 꿈에 거울이 땅에 떨어졌고, 한 사람은 쑥으로 만든 人形(艾夫)을 門 위에 달아 놓았으며, 또 한 사람은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세 儒生이 함께 꿈을 占치는 사람의 집을 찾아갔다. 꿈占 치는 사람은 없고 그의 아들만이 있었다. 세 사람이 꿈의 吉凶을 물으니 그 아들이 占을 치면서,
" 세 가지 꿈이 다 祥瑞롭지 않습니다. 所願을 成就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의 解夢 조금 後에 꿈占 치는 사람이 와서 自己 아들을 꾸짖고는 詩를 지어 주기를,
艾夫人所望 ~ 쑥 人形은 사람이 우러르는 것이요.
鏡落豈無聲 ~ 거울이 떨어지니 어찌 소리가 없을꼬.
花落應有實 ~ 꽃이 떨어지면 應當 열매가 있을 것이니,
三子共成名 ~ 세 분은 함께 이름을 이루리라.라고 하였다.
果然 그 세 사람은 모두 科擧 試驗에 及第하였다.
🍎 占卜
未來에 對한 어떤 徵兆를 미리 判斷하고자 하는 技術. 單純히 占이라고도 한다. 自然現象이나 生理的 現象을 判斷하는 것과 人爲的으로 어떤 現象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判斷한 結果로써 將來를 占치는 것 等이 있다. 이같은 俗信에는 占卜과 함께 豫兆 · 禁忌 · 呪術 等이 있어 이들은 서로 分離하여 생각할 수 없는 密接한 關聯을 지니고 있으며, 이 밖에 鬼神 · 도깨비 · 符籍까지도 包含시켜 생각할 수 있다. 卽 豫兆나 占卜은 未來를 事前에 豫知하는 知識과 技術이며 禁忌와 呪術은 不測의 結果를 豫防하고 處理하는 技術이다.
占卜의 歷史는 人類生活과 더불어 찾아볼 수 있고, 占卜의 發達과 더불어 人類의 文明도 發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人間이 占을 치는 目的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測面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眞實을 探究하기 爲한 目的이었다. 여기에서 眞實이란 神意를 말하는 것으로, 古代人들은 神意에 違背되는 行動을 하면 곧 神의 罰을 받는 것으로 믿었으며 그 神罰을 받지 않기 爲하여는 먼저 神意를 正確히 把握하여 그 神意에 따라 行動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占卜이 必要했을 것이며, 이러한 目的은 漸次 擴大되어 뒤에는 占卜이 犯人의 方向이나 失物의 行方을 追測하여 社會의 安定과 秩序를 維持하기 爲한 手段으로까지 利用되었다.
둘째는 未來를 豫測하기 爲하여 占卜이 생겼을 것이다. 未來에 對한 예豫知欲은 人間의 基本的인 心理이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아왔을 때, 새해에 展開될 일들을 미리 알고자 하는 것도 人間의 基本心理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豫知欲을 充足시키기 爲하여 占卜이 發生하였을 것이다. 以上과 같은 目的을 充足시키기 爲하여 생긴 占卜은 東西洋에서 文化程度의 高低와 相關없이 일찍부터 어느 民族에게나 있어왔다. 유럽에서는 바빌로니아에서 發生하였다는 占星術과 動物의 肝 等에 依하여 占치는 內臟占이 일찍이 發達하였고, 占杖에 依하여 地下水나 鑛脈을 찾아내는 占法이 있는가 하면, 無心히 冊을 폈을 때 먼저 눈에 띄는 文章으로 占을 치는 開典占 等도 있었다. 그리스도敎에서는 聖書로써 開典占을 쳤는데, 이것을 聖書占이라 하였다. 또 트럼프로 占치는 가루다占도 有名하였으며 夢占도 있었다. 東洋에서는 印度의 占星術, 中國의 卜筮 (筮 : 占 서)가 일찍부터 發達하였고, 特히 中國의 占卜은 韓國과 日本 等에 强한 影響을 끼쳤다. 中國의 代表的인 占卜은 卜筮로서, 卜은 獸骨이나 龜甲을 使用하여 行하는 占이며 筮는 筮竹과 算木을 使用하는 占이다. 獸骨은 肩胛骨, 龜甲은 거북의 腹部 껍질을 主로 使用하였는데, 이것을 불에 구워 트는 貌樣으로 吉凶을 占쳤다. 이 占의 뜻을 判斷하기 爲하여 專門的인 占者를 두기도 하였다. 筮는 周易을 典據로 삼아 陰陽의 算木과 筮竹의 算術的 造作으로 卦를 얻어 判斷하는 占으로, 民間에서 크게 發展하여 五行說과 干支說을 받아들이면서 몇 個의 流派가 생겼다. 後代로 내려오면서 筮竹이나 算木 代身 銅錢 等을 利用하는 易占이 一般化되었다. 이들 占法 以外에도 中國에서는 各種 占星術이 發達하여 中國의 歷史는 實로 占星術師에 依하여 發達되었다고도 한다. 韓國의 占卜도 일찍이 中國의 影響을 받아 이미 上古時代부터 卜, 卽 獸骨이나 龜甲을 利用하는 占이 있었다. 그 例로서 夫餘의 占俗을 보면 戰爭이 일어나면 먼저 하늘에 祭祀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톱을 보고 戰爭의 勝敗를 미리 占쳤다. 卽 소의 발톱이 벌어져 있으면 凶하고, 붙어 있으면 吉하다고 했다. 이것은 分離와 結合을 뜻하는 것으로 結合하면 이긴다는 眞理를 나타낸다. 占卜은 上代로 遡及할수록 政治와 密着되었고 그 結果를 믿는 傾向도 强하였다. 占의 結果를 判斷하는 技術은 元來 主觀的이고 直觀的인 것이어서 祭政一致 時代에 民心을 統合하기 爲하여는 몇 個의 結果가 나와서는 困難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占을 치는 過程도 秘密에 싸여 있었고 그 占卜者는 權力과 密着된 專門家가 管掌하였다.
占卜은 크게 나누어 自然的인 占卜과 人爲的인 占卜으로 나눌 수 있는데, 前者는 어떤 特異한 自然現象을 通하여 未來의 天候를 推測한다거나 漁業 · 狩獵 等의 生産 結果를 豫知하는 日月星卜 · 虹卜 · 雲卜 · 水氷占 · 天氣占 等과 같은 自然現象占을 말하며, 後者는 積極的인 占卜術로 託宣 · 呪法 等으로 吉凶을 判斷하는 夢占 · 神秘占 · 作卦 · 現象占 等을 가리킨다. 이 人爲的 占卜을 行하는 占者를 그 職能에 따라 專門的인 占者와 副業的인 占者로 區分할 수 있어, 前者는 古代社會의 日官 · 日者 · 巫者 · 師巫 ·占卜官 · 覆術者 · 神占者 等이 이에 該當되며, 後者는 다른 職業을 主業으로 하면서 副業으로 占卜 行爲를 하는 祈禱業者 · 僧侶 等이 이에 該當한다.
爲政者는 占卜을 政治的으로 利用하기 爲하여 專門的인 占卜家를 두었는데 百濟에서는 이들을 日者 또는 巫者라 하였고, 高句麗에서는 師巫 또는 單純히 巫라 하였다. 新羅에 이르러 이들을 日官이라 부르고 그들이 所屬된 官廳을 觀象監이라 하였다. 이러한 制度는 高麗時代에 具體化되어 天文 · 曆數 · 測候 · 刻漏를 擔當하는 太史局과 占卜을 擔當하는 太卜監을 두고 여기에 卜博士職과 卜正職을 任命함으로써 占卜을 國家的인 次元에서 다루었다. 이들 官廳은 그 後 여러 가지 名稱으로 改稱되는 한便 科擧制度를 通하여 占卜師를 登用하기도 하였다. 朝鮮時代에도 高麗의 制度를 本받아 書雲觀을 두고 天文 · 地理 · 易數 · 占算 等을 管掌하게 하였다. 한便 이들 國家機關이 管掌하는 占卜과 幷行하여 民間에서도 많은 占卜術이 오랜 歲月을 두고 깊이 뿌리를 박게 되었다.
特히 占歲的 行事가 크게 盛行하여 傳統的인 占卜 以外에도 土亭秘訣 · 直星行年法 · 行年致誠法 · 五行占 · 行年厄日法 · 出行法 · 分出行法 · 折草法 · 九宮法 · 四柱法 · 病人馬采占 · 病人算占 · 天干字病占 · 地支字病占 等 各種 占俗이 橫行하였으며 그 一部는 只今도 傳한다. 現代 科學文明의 發達은 이들 迷俗을 根本的으로 否認하여 이를 拂拭시키려 하나 人間의 本能 속에 自身의 運命과 吉凶을 豫知하려는 心理作用이 있는 한 좀처럼 이들 俗信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資料 出處 : 東亞大百科 事典)
占卜의 類型은 크게 自然現象에 依한 占卜과 人事에 依한 占卜, 그리고 神秘占 · 人爲占 等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自然現象에 依한 占卜은 古代人들은 特異한 自然現象이 發生하였을 때 그것을 未來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事件의 豫兆로 믿는 일이 많았으므로 그 豫兆를 通해서 未來를 追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自然現象 가운데에는 日月星辰의 異變이라든가 風雲雷雨 · 水變 · 地變, 動植物의 異變 等이 모두 包含된다. 따라서, 이러한 自然現象에 依한 占을 自然現象占이라고 할 수 있다.
(2) 人事에 依한 占卜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떠한 特徵이나 生活하는 동안에 偶然히 發生한 일을 原因으로 하여 未來를 占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占卜의 範圍는 人間의 活動範圍가 넓으면 넓을수록 더욱 廣範해진다.
그러므로 一定한 限界를 定하기란 매우 困難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運命的 · 生得的 特徵에 依한 사람의 動作 · 行爲에 依한 占卜, 偶然한 일에 依한 占卜, 꿈에 依한 占卜 等이 있을 수 있다.
(3) 神秘占은 크게 人體降靈占과 器物降靈占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人體降靈占이란 神活 · 神筆 · 空唱 等과 같이 神靈이 占者의 肉身에 降臨, 憑依하게 함으로써 占者 自身이 一時的으로 神靈이 되어 未來의 吉凶을 占쳐 주는 占法이다. 이를 神託占이라고도 한다.
器物降靈占이란 撒米 · 擲錢 · 神將竿 또는 返魂과 같이 各種 器物에 神靈이 憑依하도록 하고, 占者가 거기에 나타난 神意를 把握하여 未來의 吉凶을 豫測하는 占法이다. 이를 神示占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占法은 神의 降臨 · 憑依를 本質로 하기 때문에 人間의 靈과 神靈 사이를 交通할 수 있는 特異한 能力과 技術이 必要하다. 따라서, 이러한 占法은 高度의 精神訓練과 技術이 要求되기 때문에 專門的인 占者만이 할 수 있는 占法이다.
① 神託占:特別한 製作物을 必要로 하지 않는다. 그 代身 몇 가지의 簡單한 道具를 使容하여 情感을 일으키는 言語와 行動으로써 神을 迎接하는 占法이다. 그러고 나서 그 神과 暗號나 판에 박힌 慣用句 또는 어떠한 形用語句로써 意事를 交換한다. 徐居正의 筆苑雜記 卷2에 보면, 巫女가 能히 鬼神語로써 지나간 일이며 將次 닥쳐올 일들을 모두 알아맞힌다고 하였다. 또, 成俔도 그의 弁齋叢話에서 巫人이 空中에서 소리가 나게 하여 지나간 일들을 모두 알아맞힌다고 하였다. 이처럼 空中에서 나는 소리를 空唱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神이 憑依하여 鬼語나 空唱으로써 賣卜하는 者를 서울에서는 ‘太子’, 南部地方에서는 ‘明圖’라 하였다. 이는 손님媽媽(天然痘)를 앓다 죽은 어린아이의 靈魂이 그 占者에게 붙어 이루어지는 일이라고도 한다.
② 神示占:占者의 肉身 代身 어떠한 器物에 神靈이 憑依하도록 하고 거기에 나타난 徵標로써 未來를 豫測하는 占法이다. 이 때 흔히 利用되는 器物은 쌀 · 돈(葉錢) · 방울 · 神將杆 · 粉이나 재 等으로서, 이러한 器物을 通하여 나타난 神의 徵標를 보고 未來에 到來할 事件을 占친다. 이러한 占은 어떠한 器物을 利用하느냐에 따라 擲米占 · 錢占 · 神將占 · 鈴占 · 招魂占 等으로 나눌 수 있다.
擲米占은 床 위에 쌀을 흩어 놓고 呪文을 외며 그 쌀알을 집는다. 그리하여 집힌 낱알이 짝數인가 홀數인가, 또는 잡힌 낱알의 數가 몇 個인가에 따라 未來의 吉凶을 占치는 것을 말한다. 또, 床 위에 뿌려 그 흩어진 狀態에 따라 占을 치기도 한다. 아니면 床을 뒤집어도 床에서 떨어지지 않고 거기에 붙어 있는 낱알의 數로써 占을 치기도 한다.
錢占은 3매(梅) 以上, 數十 梅의 葉錢이나 銅錢을 床 위에 던져 그 흩어진 狀態에 따라 神意를 把握한다. 또는 돈의 흩어진 狀況과 問占者의 四柱를 맞추어 吉凶을 判斷하기도 한다. 或은, 龜形의 占具 속에 돈을 넣고 흔들었다 꺼내어, 그 돈의 表裏로써 卦를 만들어 吉凶을 判斷하기도 한다.
神將占은 나뭇가지를 神將杆 神靈이 그 神將杆에 憑依하도록 한다. 이윽고 神靈이 그 神將杆에 憑依하면 神將杆은 저절로 動搖하게 된다. 이 때 占者가 그 神將杆을 向하여 問卜者가 알고자 하는 事項을 묻는다. 그러면 神將杆은 움직임이나 移動으로써 神意를 나타낸다. 占者는 그 神意를 問卜者에게 傳達한다.
鈴占은 占者가 방울을 흔들어 그 방울에 憑依하게 하고, 그 神鈴을 向하여 問卜者가 알고자 하는 事項을 묻는다. 그러면 방울이 흔들려 神意가 表示된다.
招魂占은 死者의 靈魂이 現在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지를 占치고, 그 魂을 찾아내는 占이다. 이는 主로 溺死者가 생겼을 때 그 溺死者의 魂을 찾아내기 爲한 占으로, 이를 흔히 ‘넋 건진다’라고도 한다.
넋을 건지기 爲하여 “周鉢에 쌀을 가득 넣고 뚜껑을 덮어 보자기에 잘 싸서 溺死한 地點의 물 속에 가라앉혀 놓는다. 그리고 巫人이 굿을 한다. 굿이 모두 끝난 다음 周鉢을 꺼내어 열어보면 거기에 머리카락이나 손톱 또는 발톱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것이 곧 溺死者의 넋이라고 한다. 한便, 죽은 者의 靈이 어떠한 狀態로 있는가를 占치기 爲해서는 밀가루나 쌀가루를 그릇에 平平하게 펴 놓는다. 그리고 그 곁에 종이로 人形을 만들어 놓은 다음 굿을 한다.
오래 굿을 하고 난 다음 가루 위를 보면 거기에 特定한 鳥獸의 발자국이 생긴다. 그러면 占者는 그 발자국을 보고 죽은 者의 靈魂이 只今 어떠한 狀態에 있는가를 占친다.
그 발자국이 소나 개같이 一般的으로 싫어하지 않는 動物의 것이면 吉하고, 뱀 等과 같이 싫어하는 動物의 것이면 크게 凶하다고 占친다. 大凶으로 占쳐지면 절에 가서 佛供을 드려 그 大凶을 免하도록 하여야 한다. 굿이 끝나면 종이人形은 불에 태워버린다.
(4) 人爲占은 어떠한 偶然한 豫兆나 現象 또는 呪力에 依하지 않고, 意圖的으로 어떠한 일을 造作하여 거기에 나타난 結果로써 未來를 判斷하는 占法이다. 앞에서 살펴본 神秘占은 主로 專門的인 占者들에 依하여 展開되는 占이나, 人爲占은 非專門的인 一般人에 依하여 展開되는 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人爲占은 週期的인 儀禮에서나 傳統的인 方法으로써 進行된다. 그것은 主로 集團의 吉凶, 特히 農作物의 豊凶을 미리 豫測하는, 多分히 遊戱的이며 娛樂的인 占이다. 따라서, 人爲占은 現代의 文明社會에서는 占으로서의 機能보다도 文明人들의 심심풀이 또는 遊戱的 · 娛樂的 機能이 優勢해졌다. 이러한 人爲占은 勝負占 · 娛樂占 · 年占으로 大別할 수 있다.
① 勝負占:다른 말로 競技占이라고도 한다. 大部分의 競技는 宗敎의禮로부터 始作되었다고 한다. 卽, 神殿에서 競技를 擧行하여 神을 즐겁게 하기 爲한 儀式으로부터 各種 競技가 發生하였다는 것이다.
競技에는 大槪 勝負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古代人들은 神殿에서의 勝負는 곧 그 神의 意志에 따라 決定되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서 勝負의 結果로써 未來의 吉凶을 占치려는 勝負占이 發生하게 되었다.
遊戱 · 娛樂施設이 거의 없었던 古代社會에서는 神殿에서 神을 즐겁게 하기 爲하여 擧行되었던 競技가 唯一한 娛樂手段이었다. 따라서, 그 競技는 急激히 一般化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元來 그 競技가 지니고 있던 神聖性은 漸次 稀薄해지고 오늘날에 와서는 다만 遊戱나 娛樂으로 轉落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傳統的인 競技로는 石戰 · 줄다리기 · 車戰 · 횃불싸움(鼠火戰) 等을 들 수 있다. 石戰은 安東을 비롯하여 金海 等地에서도 매우 激烈하였던 것 같다. 줄다리기는 只今도 一部 農村에서 찾아볼 수 있는 集團競技의 一種이다.
이것도 元來는 神祭 끝에 서로 줄을 당겨 그 勝에 따라 豊凶을 占치던 놀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宗敎的 機能은 弱化되고 遊戱的 機能이 强化된 채 傳承되고 있다. 마을을 東西 또는 上部 · 下部로 便을 갈라서 한다.
횃불싸움은 正月 上元日에 擧行되었다. 이날 낮부터 홰를 만들어 두었다가 저녁이 되면 各其 홰를 들고 山으로 오른다. 달이 떠오르는 때를 기하여 홰에 불을 붙여 들고 이쪽 마을에서 저쪽 마을을 向하여 “덤벼라!” 하는 喊聲과 함께 달려 나간다.
그러면 相對方에서도 亦是 같은 方法으로 달려와 兩便이 횃불을 흔들며 밀고 밀쳐 서로 넘어뜨린다. 그러다가 몰려 달아나는 便이 지게 되는데, 이로써 그 해의 豊凶을 徵驗한다.
② 娛樂占:各種 遊戱를 通하여 그 해의 豊凶을 占치는 風俗이 있다. 假令 윗洞네와 아랫洞네가 서로 便을 갈라 윷을 놀아, 윗洞네가 이기면 그 해는 天水畓에 豊年이 들고 아랫洞네가 이기면 平野地帶에 豊年이 든다고 占친다. 또, 연날리기 · 그네뛰기 等의 놀이로써 그 해의 運數를 占치기도 한다. 이러한 占俗을 娛樂占이라고 한다.
③ 年占:그 해 作物의 豊凶에 關聯하여 每月의 天候 · 氣狀 等을 占치는 것이 年占이다. 이러한 年占은 正初, 特히 正月 보름날에 行하는 것이 많고 그 類型도 多樣하다. 年占은 極히 簡單한 方法으로 그 해의 豊凶을 占치는 것을 말한다.
(5) 其他의 占卜도 許多하다. 그 中에서도 作卦占 · 觀相占 等은 일찍이 高度로 發達되어 어느 面에서는 學의 境地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作卦占 · 觀相占은 比較的 理論的 體系를 갖춘 科學的 占法이라 할 수 있다. 作卦占은 陰陽五行이나 數理를 基初로 卦를 만들어 이것을 數理的으로 解釋하여 吉凶을 判斷하는 占法이다.
이러한 作卦占을 具體的으로 細分하면 六爻占 · 算筒占 · 松葉占 · 四柱占 · 斷時占 · 五行占 · 柶占 等이 있다. 이러한 占은 該博한 知識이 必要하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占이 아니다. 비록, 專門的인 占術家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方面에 많은 造詣가 있는 者만이 할 수 있는 占法이다.
觀相占은 사람의 顔面 · 骨格 · 手足 또는 音聲이나 擧動 等에 나타난 特徵을 보아 그 사람의 性格 · 心性 · 運命 等을 判斷하는 占이다. 이는 俗信으로서의 占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觀相學으로서 朝鮮時代까지만 하더라도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基本的인 常識이었다.
觀相占은 身體의 어디를, 또는 무엇으로써 그 사람의 未來를 判定하느냐에 따라서 鼻相 · 口相 · 耳相 · 手相 · 骨相 等으로 細分할 수 있다.
🍎 占卜說話
(占을 치는 行爲나 占卦에서 드러난 內容의 이이야기를 展開하는데 核心的인 動期가되거나 興味의 焦點이 되는 說話)
★ 韓國口碑文學大系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에.
‘名卜說話’, ‘卜術說話’라고도 하며, 占卜競爭譚, 엉터리占卜譚, 名卜의 逸話, 破字占이야기 等이 있다. 占卜說話의 類型을 內容別로 分類하면,
① 名卜의 逸話 : 흔히 '洪繼寬의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占卜者가 自身의 運命을 占치고 죽을 運數를 避하려고 하였으나 失敗한다는 이야기다.
임금이 占쟁이를 임금의 龍床 아래에 숨어 있게 한 다음 龍床 앞을 지나간 쥐의 數를 알아맞히라고 하였는데 占쟁이는 뱃속에 든 새끼의 數까지 正確히 맞히었다.
그러나 性急한 임금이 占쟁이가 惑世誣民하고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여 그를 死刑에 處하였다. 이 說話는 卜術家의 神秘한 能力, 性急한 王의 橫暴, 運命을 豫見하고도 逃避하지 못하는 人間의 悲劇을 보여 주고 있다.
② 卜術 競爭 : '郭璞과 李淳風' '郭璞과 周易이' 等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郭璞과 李淳風 師弟之間으로 旅行을 하면서 占術 競爭을 한다. 두 사람은 소들이 누워 있는 들판을 지나다가 어떤 소가 먼저 일어날 것인가를 占쳤는데, 郭璞은 누런 소, 李淳風은 검은 소라고 말한다.
結果는 검은 소였는데, 弟子에게 敗한 郭璞이 李淳風에게 占卦를 묻자, 占卦는 불로 나왔는데 불이 나려면 煙氣부터 나야 되기에 검은 소가 答이라고 풀이하였다. 저녁 飮食으로 무엇이 나올까 하는 問題도 亦是 弟子인 李淳風이 맞히고 郭璞이 틀리는데, 뱀의 卦를 잘못 解釋한 때문이었다는 內容이다.
郭璞과 宙易이는 媤아버지와 며느리의 對決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서, 며느리인 周易이 媤아버지의 占術을 꾀를 내어 避하고, 며느리를 죽이려던 郭璞이 오히려 죽게 된다는 內容이다. 이들 說話는 모두 中國의 實存 人物과 結付된 占卜說話인데, 周易이라는 書籍 名稱이 卜術家의 이름으로 登場되 興味롭다.
③ 破字占 說話 : 破字占을 하는 卜術家가 똑같은 글자를 가지고도 짚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解釋한다는 이야기이다. '暗行御史와 거지', '李成桂와 거지', '首陽大君과 金宗瑞' 等의 이야기가 모두 여기에 屬한다.
'暗行御史와 거지'는 暗行御史가 ’卜‘ 字를 짚고 占을 치자, 占쟁이는 허리에 馬牌를 찼으니 暗行御史가 分明하다며 致賀를 하였다. 이것을 지켜보던 거지가 옷을 바꾸어 입고 ’卜‘ 字를 짚고 占을 치니, 占쟁이는 허리에 쪽박을 찬 거지라고 하였다는 內容이다.
또한, "李成桂와 거지'는 李成桂가 물을 ’問‘ 字를 짚고 占을 치니 占쟁이는 左로도 임금 ’君‘, 右로도 임금 ’君‘이니 틀림없이 君王이 되겠다고 하였다. 거지가 같은 글자를 짚고 占을 치니 門前에 입을 달았으니 빌어먹겠다고 하였다-는 內容이다.
'首陽大君과 金宗瑞'는 首陽大君이 ‘田’ 字를 짚으니 占쟁이는 前後左右로 ‘王’이니 君王이 되겠다고 하였고, 金宗瑞가 같은 글자를 짚으니 ‘甲字無足 用兵無日, 十字四圍 衆口難防’이라고 하였다는 內容이다.
이러한 說話는 占卜의 神異함을 盲目的으로 崇尙하지 않고 狀況에 따른 臨機應變의 智慧를 興味의 要諦로 삼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④ 엉터리 占쟁이 : 흔히 '李개구리의 占卜'으로 알려진 說話로서 全國的으로 傳承되는데 內容은 다음과 같다. 이름이 개구리인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偶然한 일로 有名한 占쟁이가 된다. 마침 소를 도둑맞은 사람에게 소를 찾아 주고 떠나가는데, 도둑이 외딴곳에서 지키고 있다가 손에 개구리를 잡아 싸쥐고 알아맞힐 것을 要求한다. 개구리는 自身이 죽는다는 뜻으로 ‘李 개구리가 죽는구나!’라고 嘆息을 하였는데, 도둑은 개구리임을 알아맞힌 것으로 알고 感服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占卜에 惑하는 人物을 諷刺한 逆說的 意味를 가진다. 이 밖에도 名卜과 名風의 大決譚이나, 집 앞에 불을 놓아 子息이 바위에 치여 죽을 것을 防止하였다는 이야기 等이 있다.
🍎 占術家 洪繼寬
洪繼寬은 實存했던 人物로, 몇몇 資料에서 關聯된 記錄이 있다. 洪繼寬은 朝鮮時代 사람으로 生歿年은 正確히 알 수 없으며, 이야기의 出處를 大部分 口碑傳承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야기의 內容과 時代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例를 들면
1. 朝鮮 明宗 때 卜術家 洪繼寬
2. 占쟁이 洪啓寬과 關聯하여 傳해 내려오는 이야기. (楊州 鄕土文化百科)
3. 燕山君 때, 쥐 이야기(文化院型百科)
4. 世祖 때 이야기(洪繼寬의 占卦에 感歎하여 살려 주었다)
5. 世宗 때, 黃喜政丞 셋째 아들 이야기.
6. 一說에는 이 아차고개가 只今의 盧梁津洞 死六臣墓가 있는 마루턱이라고도 한다.
7. 明宗 때 사람이 아니라는 證據.
世宗 때 黃喜政丞이 죽었다.
하지만 洪繼寬이 刑場에서 죽은 것과 그의 執行을 막으려는 사람의 行動과 ‘아차’라는 嘆息 그로 因해서 ‘아차고개’가 되었다는 것은 同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俗談에 '洪繼寬이 제 죽을 날 모른다'는 말이 있다.
(1) 洪繼寬 이야기
忍 字 세 番이면 殺人을 免한다.
洪繼寬은 朝鮮時代 때 널리 알려진 占쟁이다. 그의 占術이 너무나 神通하여 그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洪繼寬은 盲人 占術家의 始祖가 되었다.
타고 날 때부터 盲人이라 걱정을 많이 했으나 占術이 알려지면서 집안에 돈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身數占이 너무나 有名하여 1年의 運數 吉凶禍福의 判斷에서 짧게는 몇 年
길게는 數 十 年 뒤의 일까지 꿰뚫어보았다.
한 선비가 찾아와 將次의 運數를 보았다.
"將次 天下에 이름을 크게 떨칠 富貴할 相 이오. 그런데 자칫 失手로 殺人트로 平生을 亡칠 수도 있소"
"그렇소, 그럼 避할 方法은 무엇이요?"
"方法이 한가지 있소. 집에 가거든 보이는 곳마다 '참을 忍'字를 많이 써 붙이시오"
그는 歸家 後 大門을 비롯해 집안 구석구석에 써 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醉해 집에 돌아와 안房門을 여니 마누라가 어느 상투 튼 男子와 同寢을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치솟는 鬱憤에 부엌으로 달려가 食칼을 집어 들고 나오는데 忍字를 보았다. 그래도 憤에 못 이겨 안房 마루에 오르며 기둥에 붙인 忍字를 보고선 暫時 망설였으며, 안房門에 이르러 또 忍字를 보는 瞬間 暫時 그 占쟁이의 '殺人으로 平生을 마친다'란 말이 떠 올랐다.
그때 안房에서 아내가 人기척에 房門을 열며,
"여보, 罪悚해요. 먼저 자서"
"옆에 상투 튼 놈은 누구요?"
"웬, 상투라니요?"하면서 옆에 잠든 이를 깨웠다.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를 뒤로 웅켜 맨 채 잠들었던 妻弟였다.
瞬間 선비는 얼어 붙었으며, 식은땀이 등줄기에 흘러내렸다.
선비는 洪繼寬의 豫知力에 感歎했다.
훗날 政丞이 된 선비는 子孫에게 그 얘기를 傳해주며,
"어떤 境遇도 行動에 앞서 먼저 狀況을 把握하라" 고 訓戒했다.
여기에서 '참을 忍'字 세 番이면 殺人도 免한다는 俗譚이 생겨났다 한다.
(2) 洪繼寬 이야기
洪繼寬이 神通力이 온 나라를 퍼져임금님의 귀에도 들어갔다.
임금은 어설픈 재주로 世上을 어지럽히는 洪繼寬을 嚴히 다스릴 料量으로 朝廷으로 불러드렸다.
"네가 洪繼寬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네놈이 그리 神通하다면 바로 앞에 있는 箱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말해 보거라. 萬若 못 맞히면 斬首 하리라." 한참 後
"네 殿下, 쥐 이옵니다."
"그럼, 몇마리이냐?"
"세 마리 옵니다"
"에잇 고얀 놈, 쥐 한 마리 든 것도 못 맞추면서 뭘 안다고 온 나라를 어지럽게 하느냐?"며 버럭 火를 내며
"여봐라, 저놈을 잡아다 목을 베거라"
그리하여 洪繼寬은 刑場으로 끌려갔다. 그래도 或是나 하여 箱子 안을 살펴보니 암놈 쥐가 새끼를 두 마리 낳아 모두 세 마리가 들어있었다.
"어이쿠, 생사람이 죽게 되었구나." 임금은 急히 刑場으로 사람을 보냈다.
使者가 遑急히 말을 달려 刑場의 고개를 오르며 멈추라는 信號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 손짓을 빨리 死刑을 執行하라는 것으로 誤解한 망나니의 칼 끝에 그는 '아차'하는 瞬間에 목이 베였다.
그로부터 洪繼寬의 死刑執行이 이루어졌던 이곳을 '아차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 傳한다.
(3) 洪繼寬 이야기
明宗 때 領議政을 지낸 尙震의 曾組父 尙英孚는 財物이 많아 利息을 놓고 살았는데 晩年에 그 借用證書를 모두 모아 불 살랐다. 그 煙氣가 하늘높이 이르는 것을 보고 '반드시 感天하여 좋은 後孫을 보리라'고 사람들은 그를 稱頌하였다.
바로 그 後孫이 丞相 尙震이다.
맞추지 않은 豫言이 없었다는 所聞난 占術家 洪繼寬 으로부터 죽을 날을 豫言 받은 尙震은 死後를 整理하고 殞命을 기다리는데 죽을 幾微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의 壽命만은 洪繼寬의 占卦도 틀리곤 했다.
하루는 尙震 政丞이 洪繼寬을 찾아와 물었다.
"지난날 자네가 내 壽命을 말해주기를 某年 某月이라 하지 않았는가?
한데 그로부터 數많은 날이 지나도록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어찌 된 것인냐?"
洪繼寬이 말하기를,
"죽을 사람을 살려준 陰德으로 延命하는 境遇가 있는데 或 그런 없습니까?"라며 물었다.
젊었을 때 밤길에 붉은 보자기를 줍고 보니 大殿 水剌間에서만 쓰는 그릇인지라 이를 몰래 搜所聞하여 훔친 宮女를 찾아내곤 그 物件을 남몰래 돌려주어 그의 목숨을 지켜준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尙震 政丞은 그 後로 自身의 四柱八字보다 15年을 더 살았던 것이다.
🍎 접동새 說話 (까마귀와 접동새의 由來)
(繼母에게 薄待받던 處女가 죽어 접동새가되었다는 內容의 說話)
★ 韓國口碑文學大系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에.
動物 由來譚의 하나로 變身譚에 屬한다. ‘까마귀와 접동새의 由來’로도 불리고 있다. 口傳說話로 全國에 널리 分布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採錄된 說話는 많지 않은 便이다.
옛날 어느 夫人이 아들 아홉과 딸 하나를 낳고 世上을 떠났다. 後妻로 들어온 夫人이 딸을 몹시 미워하여 늘 驅迫하였다. 處女가 長成하여 媤집갈 때가 되었으므로 많은 婚需를 장만하였는데, 갑자기 죽어버렸다.
아홉 오라버니가 슬퍼하면서 同生의 婚需를 마당에서 태우는데 繼母가 周邊을 돌면서 아까워하며 다 태우지 못하게 말렸다. 火가 난 오라버니들이 繼母를 불 속에 넣고 태우니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
處女는 접동새가 되어 밤만 되면 오라버니들을 찾아와 울었다. 접동새가 밤에만 다니는 理由는 까마귀가 접동새를 보기만 하면 죽이므로 무서워서 그렇다고 한다.
이 說話는 까마귀와 접동새의 生態界 內의 關係와 접동새 울음소리의 來歷을 說明하면서, 傳統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못된 繼母를 둘러싼 家庭悲劇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소재는 비단 설화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문학작품의 중요한 원천으로 작용하여 많은 계모형 소설들을 형성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유형은 김소월(金素月)의 시 「접동새」의 직접적인 소재적 원천으로서 우리 문학의 비극적 정서환기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 접동새 (김소월)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夜三更)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 鄭萬瑞說話
*諧謔小說大全集 2(金容喆, 노벨文化社, 1970), 鄭壽銅과 鄭萬瑞(趙能植, 大亞出版社, 1978),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에.
文獻說話는 發見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類型에 따라 詐欺談·競爭談 또는 淫談悖說로 分類될 수도 있으나, 全體的으로 보아 笑話나 滑稽談이라고 할 수 있다. 이 說話는 鄭萬瑞의 出生地인 慶州市 隣近 一帶에 널리 傳承되고 있으며, 이 地域과 交流가 있는 慶尙北道 南東部 地域 一帶에도 다수 傳承되고 있다.
鄭萬瑞는 慶州市 乾川面 出生이며, 龍明2里에 무덤이 있다. 碑文에 依하면, 東萊 鄭氏로서, 이름은 鄭容瑞, 字는 萬瑞, 號는 春岡이고, 1872年(高宗 9)에 懸陵參奉에 除授되었으며, 1896年 61歲로 죽자 嘉善大夫에 贈職되었다.
그는 一生을 平民과 더불어 살면서 富者와 官僚들의 橫暴에 맞서고 風流와 臨機應變의 才致로 生活의 方便을 삼는가 하면, 삶과 죽음 等 根源的인 問題를 自覺시켜 주는 逸話도 많이 남겼다.
*하루는 鄭萬瑞가 大邱 西門市場에 나타나서 땅을 치며 終日 울고 있었다. 異常하게 여긴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는다! 그것이 슬퍼서 운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緣由를 캐어물으니 “여기 늙어서 죽지 않을 사람 누가 있느냐?”고 하였다. 사람들은 한便으로는 크게 놀라며 모두들 웃고 헤어졌다 한다.
또한, 鄭萬瑞가 客地에서 腹膜炎으로 죽을 고비에 이르렀는데, 아들이 消息을 듣고 모시러 왔다. 배가 부어서 아들 등에 등을 대고 업히어 오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걱정스레 安否를 물으니 “등 따시고 배부른데, 이보다 더 좋은 八字가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臨終 直前에 親舊들이 찾아와서 죽음에 對한 所感을 물었더니 “아직 初죽음이라서 죽어 봐야 알겠다.”고 對答하였다고 한다.
說話의 內容은 相當히 知的인 言辯과 段數 높은 機智, 飛躍的인 論理로 이루어져 바로 理解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 鄭北窓 說話
(朝鮮 明宗 때의 學者, 官吏, 道人인 鄭磏에 關한 說話)
★ 海東異蹟,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鄭磏(1506 ~ 1549) 字는 士潔이며 號는 北窓이다. 風水說話, 짐승 소리를 알아듣는 知音說話, 延命說話, 修道說話 等이 傳한다.
洪萬宗의 '海東異蹟'에 依하면, 鄭北窓은 世上에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또 대낮에는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生而知之한 天才요, 그림자가 없는 鬼神이었다는 世評을 들을 만하였다.
實際로 鄭北窓이 中國에 갔을 때 奉天殿에서 中國의 道士를 만났는데, “우리나라는 三神山이 있어서 낮에도 道士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恒常 볼 수 있으니 무엇이 貴하겠는가?”라 하며 神仙이 되는 段階를 說明하니, 中國 道士가 슬그머니 避해 버렸다.
琉球에서 中國에 온 使臣에게 琉球 말로 周易을 講義하고, 各國에서 온 使臣이 물으면 그 나라 말로 척척 對答을 하자 天人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듣고서 解得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지 오래다.”라고 對答하였다.
그가 金剛山에 올라 휘파람을 불었더니 바위와 골짜기가 振動하고 중들은 피리 소리로 여겼다고 한다. 以上은 文獻에 說話이며, 現傳하는 口傳說話는 다음과 같다.
① 四寸이 죽은 아버지의 墓 자리를 求하기 爲해 鄭北窓에게 付託하였는데, 求하여 준 墓 자리가 진흙밭으로 물구덩이인지라 돌을 넣고 埋葬하면서 四寸兄인 鄭北窓에게 나쁜 터라고 怨望을 하였다. 그런데 事實은 그곳이 玉貫子가 여럿 나오는 明堂이었다. 돌을 넣은 수가 玉貫子를 달 後孫이 태어날 數字였던 것이다.
② 山中을 가다가 까마귀가 ‘大肉, 大肉’ 하고 우는 소리를 듣고 屍身을 찾았으나 오히려 殺人者로 陋名을 쓰고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自身이 새소리를 알아듣는 知音이 있다는 證據로 裁判官인 員님이 품속에 감추어 둔 제비의 울음소리를 解釋해서 살아났다.
知音은 天機를 漏泄하는 것이라 하여 王이 鄭北窓을 잡아 죽이려고 품속에 든 제비의 소리를 알아듣는지 묻자,
“어미 제비가 임금님이 잡으신 새끼 제비를 살려 달라고 하면서 ‘皮不用 肉不用 骨不用’이라 웁니다.”라고 말하니까 感歎하면서 鄭北窓을 살려 주었다.
③ 親舊인 尹斗壽 이야기로, 鄭北窓이 그에게 40歲밖에 못 살 短命할 八字이니 天上의 神仙을 만나서 壽命을 延長해 달라고 빌라고 일러 주었다. 그런데 神仙이 그렇다면 이 秘密을 알려 준 鄭北窓의 壽命을 줄여서 尹斗壽의 壽命을 延長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尹斗壽는 長壽하고 鄭北窓은 短命하였다 한다.
④ 鄭北窓은 忠淸南道 牙山市 松岳面 솔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季嫂의 아들인 조카는 사랑하지만 정작 自己 子息 셋은 사랑하지 않아서 아내가 不評을 하였다. 얼마 뒤에 아들 三 兄弟가 같은 날 같은 時刻에 죽어 슬피 우는데, 仔細히 보니 鄭北窓이 婚姻하기 前에 죽인 구렁이가 復讐하려고 아들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 內容을 이미 알아챈 鄭北窓이 自己 子息을 미워하였던 것이다.
위의 文獻과 口傳說話를 通하여 보면, 鄭北窓은 無不通知한 天才이면서 天文 地理와 動物과 鬼神의 世界까지 理解한 異人임을 알 수 있다.
🍎 鄭壽銅 說話
(朝鮮 後期의 中人 出身 詩人 鄭壽銅에 關한 說話)
★ 夏園詩鈔, 枕雨堂集, 逸士遺事,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에.
文獻說話는 逸士遺事에 傳하며, 口傳說話는 鄭壽銅의 活動地域이었던 서울을 中心으로 하여 水原, 議政府 等 中部地方에 分布되어 있다.
最近 여러 出版社에서 刊行한 野談과 野史集을 通해서 다른 地方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口傳說話는 몇 便에 지나지 않으나 野談集과 野史集에 20如 篇의 類型이 傳하고 있다. 술, 이야기, 詩文과 風流를 즐긴 鄭壽銅은 當代의 文人·政治家로 이름을 떨친 名士들과 交流하면서 그들의 虛僞와 不正을 諷刺한 逸話들이 많은데, 主로 兩班 官僚들의 不正 築財를 批判하는 이야기가 많다.
鄭壽銅은 不正한 돈은 술로 씻어야 한다면서 늘 술에 醉하여 있었다.
鄭壽銅 (1808 ~ 1858)은 朝鮮의 委巷詩人(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一般 大衆들의 社會를 이른것)이다. 本貫은 東萊. 本名은 芝潤. 字는 景顔, 號는 夏園.
倭語譯官의 家計에서 出生했으나 文人으로 살았다. 태어날 때 손바닥에 '壽'字의 紋身이 있었고 이름 芝潤의 ‘芝’가 漢書에 ‘芝生銅池’로 있다고 하여 銅字를 따서 壽銅이라는 別號를 使用하였다.
社會的인 諸矛盾에 不滿을 느낀 나머지 平生을 狂人 처럼 行勢하였으나 그 言動에는 날카로운 諷刺가 깃들어 있었다.
本디 規律的인 生活을 싫어하는 自由奔放한 性格을 지니고 있어서 平生 布衣詩客으로 滿足하였고, 頭腦가 明晳하여 아무리 뜻이 깊고 어려운 文章도 한 番 훑어보고는 그 要旨를 깨달았으나 모르는 것처럼 謙遜했다고 한다.
‘奇拔한 익살꾼’으로 有名하였다.
詩風은 權力이나 金力에 對한 抵抗 속에 날카로운 諷刺와 揶揄를 一貫하고 있으며, 詩는 번거로운 文章이나 虛荒한 形式을 排擊하고, 簡潔한 가운데 높은 格調를 담고 있다.
(1) 吝嗇한 親舊 집을 찾아갔더니, 늦은 저녁인데도 불을켜지 않고 캄캄한 房에서 親舊와 밥을 먹게되자 → 뜨거운 국을 떠서 親舊 입에 부었다.
놀란 親舊가 "이 무슨 짓이야"며 다그치자, 曰 "난 어두워서 내 입인줄 알았어"라한다.
(2) 어릴 적 이야기다.
더운 여름날, 鄭壽銅은 書堂에서 더위로 因해 졸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訓長이 불號令을 내리며 매를 들었다. 며칠 後, 鄭壽銅은 訓長님이 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鄭壽銅은 訓長님을 조용히 깨우며 물었다.
"訓長님! 訓長님은 왜 주무십니까?"
그러자 멋쩍은 訓長이 둘러댔다.
"나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이가 먹어 자꾸만 잊어버려서 잊어버린 것을 물으러 暫時 孔子님께 다녀왔다. 그것이 너에겐 자는 것으로 보였느냐?"
鄭壽銅은 瞬間 訓長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鄭壽銅은 訓長님이 보는 앞에서 자는 척했다. 또다시 잠자는 모습을 본 訓長은 큰 소리로 말했다.
"壽銅이 이놈, 또 잠을 자는구나!"
訓長이 큰 소리에 鄭壽銅은 깨는 척하며 말했다.
"訓長님! 저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孔子님을 뵈러 갔을 따름입니다." 訓長은 內心 뜨끔해 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 孔子님이 네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네. 孔子님께 며칠 前 訓長님이 다녀가셨느냐고 물었더니, 오신 적이 없다고 하시더이다."
(3) 돈 이라고는 한 分도 없는 鄭壽銅이 酒幕에서 外上술을 달라고 한다.
구두쇠 酒母가 들어줄리 없다.
그래도 이 가난뱅이 술꾼은 자꾸 치근댄다. 그러자 못된 酒母가 말했다.
"그래 正~ 술을 한 盞 얻어 먹고 싶다면 今方 나를 웃겼다가 今方 火나게 해보시오!"
鄭壽銅은 卽時 그집 뜰에 풀어놓은 돼지 앞에 가서 엎드렸다.
그리고는 큰 절을 올렸다.
"兄님. 그 間 便安 하신지요?"
지켜보던 酒母가 氣가차서 낄낄 댔다.
그러자 이 능청맞은 사람이 酒母앞에 가서 큰절을 올리면서 삼가 問候를 아뢰었다.
"兄嫂님. 그동안 便安 하신지요?"
酒母는 弄이 지나치다며 火를 내면서도 約束은 約束인지라 鄭壽銅의 머리에 술벼락을 안겼다. 그는 입으로 흘러내리는 술을 핥아댔다.
(4) 가깝게 지내던 趙斗淳의 잔치에 招待를 받은 鄭壽銅이 솟을大門을 들어섰다. 이때 한 시골 富者가 賂物을 10萬兩을 보내왔는데 淸廉한 官吏인 줄 알았던 趙 政丞이 그 돈을 받아 챙기는 것을 보고 매우 失望했다.
그때 行廊어멈 아들이 銅錢 한 닢을 그만 삼켰다. 다들 "창자가 녹아 죽네 다네"라며 떠들썩하자,
이때 鄭壽銅이 나서서 舍廊에 모인 大監들이 들으라는 套로,
“걱정할 것 없네. 아랫배만 슬슬 쓰다듬어 주면 그만일세. 어느 大監은 남의 돈 몇 萬 兩을 삼키고도 배만 쓸고 있으면 아무 일 없는데, 까짓 제 돈 한 닢을 삼키고야 무슨 배탈이 나겠는가!” 하고 소리를 쳤다. 大監들은 이 말에 흠칫하였다.
이윽고 술盞이 돌고 遊興이 무르익자 趙 大監이 座中에게 世上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大監은 호랑이라 하고 도둑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大監이 나서더니, “兩班의 號令 한마디면 호랑이도 잡고 도둑도 잡을 뿐 아니라, 兩班네의 命令에 누군들 꿈쩍하겠소. 그러니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이 兩班이오.” 하며 座中을 둘러보자, 잠자코 있던 鄭壽銅이,
“世上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를 탄 兩班 도둑입니다. 가슴에 호랑이(옛날의 號牌)를 달고 온갖 도둑질을 恣行하여 百姓들의 膏血을 빨고 三千里江山을 亡치니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소!”라고 하여 座中을 肅然하게 하였다.
(5) 鄭壽銅이 하루는 '漢陽땅하고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安東金氏네 權門勢家가 櫛比한 北村마을 어느 大監의 邸宅 앞을 어슬렁 거리며 지나가는데, 그날따라 무슨 일인지 고래등같은 솟을大門 안쪽 마당에서 奴僕들이 精神없이 뛰어다니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平素와는 雰圍氣가 영 딴판이라 鄭壽銅이 한 奴僕을 붙잡고
"이보시게 , 이宅이 왜 이리 騷亂한가? 무슨일이 생겼나?"라고 물어보니 그 奴僕이 答하기를
"아이구, 生員님 큰일났어요! 좀前에 大監宅 어린孫子가 葉錢한닢을 입에 넣었다가 그만 목구멍이 막혀서 死境을 헤메고 있습니다요"라고 하니 鄭壽銅 曰
"그래? 거참 큰일났구만...내가 그 孫子를 살려낼테니 걱정말고 나를 大監께로 案內하게~"라고 하니 鄭壽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奴僕이 急히 鄭壽銅을 舍廊채로 案內하고 大監에게 달려가 아뢰니 그말을 들은 大監 亦是 急히 달려와,
"아이고, 貴人이 오셨구려. 내 孫子를 좀 살려주세요." 라며 어떤 處方이 있는지를 물으니 鄭壽銅이 泰然自若하게 答하기를,
"이보시오, 大監! 大監은 지난 數十年동안 무려 數百萬兩을 꿀꺽 하시고도 여태 아무런 탈이 없는데, 아무리 어리기로서니 天下의 大監 孫子가 그깟 葉錢 한 닢 삼켰다고 무슨 큰탈이 나겠소이까? 걱정마시고 조금만 기다리시면 孫子는 無事할것이외다"라고 하는게 아닌가!
그 狀況에서 이런말을 들은 大監이 瞬間的으로 脈이 탁 풀리는 가운데서도, 이내 곧 精神이 돌아오고보니 火가 머리꼭지까지 치밀어올라
"너이놈! 只今 내 孫子의 목숨이 頃刻에 달려있거늘 니놈이 敢히 나를 嘲弄해? 이런 쳐죽일노옴~!!! 하면서 下人을 불러 鄭壽銅을 處理 하려는 瞬間, 밖에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는가 싶더니 奴僕들이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와 아뢰기를,
"大監님, 方今 道令께서 葉錢을 吐해내시고 숨이 돌아왔습니다!"라는 기쁜 傳喝을 아뢰었다.
일이 그리되고보니... 아무리 權勢家라 한들 한瞬間 뼈아픈 毒說을 들기로 어찌 敢히 鄭壽銅을 함부로 責望할수 있었겠는가? 責望은 姑捨하고 床다리가 부러지게 鄭壽銅을 隆崇히 待接하고 用채까지 넉넉히 주어 돌려보냈다하니 비록 腐敗한 權勢家이긴 했어도 그 大監도 그리 壅拙한 小人輩는 아니었나보다.)
(6) 慶尙道 어느 고을員이 심심하여 榜을 써 붙이길 '全國에 거짓말 잘하는 者에게 3百兩의 賞金을 내린다. 단 내가 "얘끼 그런 거짓말이 어딧어"란 말이 나와야 한다. 無謀하게 挑戰하여 失敗하면 棍杖 몇 臺 程度는 甘收하라'
이에 全國 乾達리며 閑良에 藥장수, 엿장수, 거짓말 께나 하는 사람이 몰려 왔으나 기껏해야 "그렇구나" 하는 程度로 敗를 當했다.
이 때 襤褸한 차림의 鄭壽銅이 찾아와 手下를 帶同한 사또를 對面한 後
"우리 마을에 90歲 된 할머니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럴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 할멈이 몇 해만에 老患으로 世上을 뜨기前에 제게 찾아와 아들의 將來를 付託하다면서 緊한 말씀을 하시며, 便紙 한 張을 내밀며 '이 아비가 어느 고을 員이니 開封해 確認하고 傳達하면 拒絶을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럴수도 있겠지"
이때 壽銅 괴나리 봇짐에서 주섬주섬 便紙를 한 桶 찾아내어 사또에 내밀며
"그 사또님이 바로 侍生이 마주한 員님이옵니다"
사또는 瞥眼間 얼굴이 붉어지며
"얘끼, 고얀 그런 거짓말이 어딧어"
壽銅은 3百兩을 받아 들고 술집으로 向했다.
(7) 壽銅이 親舊집에 놀러갔더니 親舊가 말하 길
"닭欌 안에 있는 저 커다랗고 잘 생기고 살찐 장닭을 보게 나. 그런데 통 울지를 않으니 氣가 막히네"
壽銅 "그럼 내가 새벽에 울게 해 줄 터이니 文房四友를 가져오게. 氣가 막힌 處方을 해 줌세"
이리하여 종이에 글을 쓰기를
"네 아비가 죽었다"라 쓰곤 닭欌 안에 들어가 장닭 목에 걸어 두었다.
다음날 壽銅이 다른 親舊를 찾아가 "오늘 닭잡아 술 한 盞 하자" 하니 그가 따라 나섬에 함께 어제 그 親舊 집을 찾아가,
"오늘 새벽에는 장닭이 分明 울었지?"
"울기는 개뿔. 찍 소리 없는 걸 보니 자네 處方이 거짓같아"
壽銅 닭欌에 뛰어들어 장닭의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자
親舊가 놀라며, "아니 이 사람아 왜 그래"
壽銅이 "애비가 죽었다는 대도 울지도 않는 놈은 살 價値가 없는 놈이야"
親舊는 壽銅의 꾀에 當하고 말았고, 세 사람의 술자리는 꾀나 재미있었다.
(8) 서울 간 壽銅이 돈이 窮하여 어느 大監집에 들러 下人에게 "뒤가 마려우니 한 兩을 줄 터이니 化粧室을 한 番만 쓰자" 며 돈을 건네고 볼일을 보려 들어간 後 繼續 버티고 나오지 않아, 大監 歸家 時間이 가까워 오자 똥줄탄 下人이 結局 事情事情하여 닷 兩을 빼앗겼다.
(9) 壽銅이 洞네 酒幕에 外上 술을 먹으려 갔더니 酒母가,
"初하루 부터 外上 주면 한 달 내내 外上이 된다며 拒絶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툇마루에 壽銅이 앉아 있는데 때마침 돼지가 마당으로 어슬렁 거리며 나와 고두밥를 먹기 始作했다.
平素 같으면 좇아버렸으나 오늘은 心術이나 지켜만 보았다.
酒母가 부엌에서 나왔을 땐 고두밥은 조금밖에 없었다. 酒母가 壽銅에게 火를 내며 "사람의 心보가 왜 그모양이요?" 하자
壽銅 曰 "나는 初하루라 돼지도 맡돈을 낸 줄 알았기에 지켜보았을 뿐이요" 하며 痛快한 웃으며 가버렸다.
(10) 빨래가 된 鄭壽銅
어느날 鄭壽銅이 술이 잔뜩 醉해 通禁時間을 어기고 가다가 巡邏꾼에게 잡히기 바로 前에 담벼락 밑에 가서 기대어 팔을 벌리고 섰다.
"게 누구냐?"
"빨래요."
"무슨 빨래가 말을 다 하나?"
"갈아 입을 옷은 없고 急해서 통째로 빨았습니다."
巡邏꾼이 웃으며 빨래는 두고 그냥 나쳐 갔다.
(11) 도깨비를 놀린 鄭壽銅
鄭壽銅이 平安道에 살때의 이야기이다. 洞口의 城隍堂에 사는 도깨비들이 行悖를 부려서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했다. 어느날 鄭壽銅이 親舊 金興根(1796~1870. 安東 金氏의 首長이자 當時 最高 歲力家)과 놀다가 집 近處의 城隍堂을 지나는데 갑자기 우락부락한 무서운 얼굴을 한 八尺長身 도깨비가 앞에 턱 버티고 서서 "金生員, 돈 百 兩만 꾸어 주게." 도깨비는 無識해선지 祖上이 金씬지 아무나 金哥로 불렀다.
壽銅이 마침 親舊에게 받은 돈이 있어서 빌려 주고, 이튿날 찾아갔더니 도깨비가 빚을 갚았다.
그 다음 날 壽銅이 장난삼아 도깨비를 골려주기로 하고 다시 城隍堂으로 찾아가,
"도깨비야.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에이, 나쁜 도깨비 같으니"라 하자, 도깨비는 바로 百 兩을 건네 주었다.
그 後로도 며칠間 壽銅이 繼續 장난질을 하자, 도깨비도 눈치를 채었는지 害코질 始作했다.
도깨비의 첫째 害코지는 鄭壽銅이 키우던 개를 지붕위에 올려 놓았다.마을 사람들이 奇異한 일이라고 不吉해 하는 한便 嘲弄꺼리로 삼았다.
도깨비의 心術을 알아차린 鄭壽銅은 껄껄 웃으며,
"洞民들 이것 보시오. 이녀석이 도둑놈을 잘 살피려고 지붕에 올라갔으니 참 대견치 않소?"
鄭壽銅의 능청에 마을 사람들도 맞는 말이라며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이러자 도깨비는 둘째로 鄭壽銅집만 비가 와서 물바다가 되게하였다.
壽銅은 좋아하는 낚시를 멀리 안가도 되어서 좋다며 얼씨구나 했다. 도깨비는 그에게 즐거움을 주지않으려 물을 빼어버렸다.
이番엔 도깨비가 그의 논밭에 바위와 돌을 갔다놓았다. 그는 바람의 被害를 막을수 있어 좋다고 오히려 기뻐하며 도깨비를 찾아가 고맙다고 하고, 그의 行動을 逆利用키 爲해 이런 말을 했다. "도깨비야 더럽고 무서운 똥이 아니고 바람 막는 바위여서 히려 잘 되었다"라 했다.
도깨비는 바로 行動에 옮겨 그의 논밭에서 바위와 돌을 치우고 더럽고 무섭다는 똥을 잔뜩 퍼부어 놓았다. 그러나 똥은 거름이 되어 農事에 도움이 되었다.
壽銅은 이참에 도깨비를 城隍堂에서 쫓아내리라 마음 먹었다.
곧 月蝕이 始作 될 날을 알고 月蝕에 앞서 城隍堂에 올라가 도깨비를 불러놓고 "너희들이 害코질 그만두지 않으면 天災를 내려 씨를 말려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선, 곧장 나무에 올라가서 뭐라고 呪文을 외우니 곧 달이 漸漸 사라져 같다. 이에 도깨비들은 크게 怯을 먹고 아예 그 城隍堂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다.
(12) 한때 趙斗淳이 司譯院 提調(正2品)로 있을 때, 鄭壽銅의 才幹을 아껴 그를 參奉(從9品)으로 拔擢한 적이 있었으나 몇 달 만에 달아나버렸다. 그는 그의 緣줄을 타고 富貴榮華를 貪하기보다는, 뜻이 맞는 親舊들과 어울려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마음껏 兩班世上을 비웃기도 하고 明山大川을 찾아 아름다운 自然 속에 묻히는 自由奔放한 生活을 擇했다. 그래서인지 一 年 中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解産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는 順産을 시키자면 佛手散 (解産 前後에 쓰는 處方)을 지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부리나케 옷을 주어입고 집을 나섰다. 구리 골에 있는 단골 藥房을 찾아 가다 길거리에서 마주 오던 親舊 두 사람과 마주쳤다.
“아니! 두 분이 함께 어디를 그렇게 가시나?”
“마침 잘 만났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둘이 함께 오면서 자네 이야길 하던 참일세.”
“내 얘기를! 그런데 大體 어디를 가시는 겐가?”
“우리 말인가. 金剛山 遊覽 길일세.”
壽銅이 깜짝 놀라며 그들의 行色을 살펴보니 발에는 짚신에 발감개를 튼튼히 하고 등에는 큼직한 봇짐을 진 것으로 보아 두 親舊의 말이 맞는것 같았다.
“오라. 그래서 두 분이 내 얘길 하셨군 그래.”
“바로 맞혔네. 그래 자네도 우리와 同行하지 않으려나?”
“그야 물어보나 마나지.”
平素 金剛山 遊覽이 所願이던 그는 産母의 藥은 잊어버리고 同行하기로 應諾하고 漢陽을 빠져나와 金剛山으로 向했다.
金剛山 境內에 첫 발을 들여놓는 瞬間부터 이들은 넋을 빼앗는 絶景에 醉해 名所마다 10 ~ 15日씩 묵으며 詩興과 酒興으로 時間 가는 줄 몰랐다. 그러던 中 그들 一行은 楡岾寺에 들렀다. 그곳의 大雄殿에서 佛像들을 차례로 돌아보다 千手觀音像에 이르렀을 때, 鄭壽瞳의 입에서는 不知不息間에 “아차!” 하는 呻吟소리가 튀어 나왔다.
“아니 왜 그러시나?”
“내 이런 健忘症을 봤나. 우리가 구리 골에서 만났을 때 事實 나는 出産을 앞둔 집사람을 爲해 佛手散을 지으러 藥房을 찾아가던 길이었다네.” 하며 難色을 지었다.
“뭐? 집사람의 佛手散을?”
“글쎄 그랬는데 길에서 자네들을 만나 金剛山 遊覽을 간다는 바람에 그져 신이나 잊고 말았어.”
“이런 사람을 봤나. 그런데 우리가 金剛山에 온지 1年이 되도록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떻게 다시 그 생각을 해내셨나?”
“저 千手觀音像을 보니 문득 佛手散이 생각나네 그려.” 하고는 自身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며칠 後 遊覽을 마친 鄭壽銅이 서울로 돌아와 自己 집 大門으로 들어서니 房 안에서 사람들이 가득 모여 떠들썩했다. 瞬間 不吉함 보담 必是 뭔가 慶事스런 일인 듯싶었다.
다름 아니라 이날은 바로 鄭壽銅이 佛手散을 지으러 집을 나간 뒤에 多幸히도 婦人이 順産해 낳은 아들의 첫 돌 날이었다.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그가 큰 기침을 하며 마당으로 들어서자 房 안에 있던 婦人 金氏가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띠우고 奔走히 마루로 나와 그를 맞았다.
“書房님이 元體 性味가 急하시어 아이 돌 날이 되어서야 佛手散을 지어가지고 오십니다 그려.” 하고 한마디 하였다.
鄭壽銅은 빙그레 웃으며
“내 性味는 本來 그렇듯이 참으로 急하기도 하지. 그런데 미처 佛手散이 오기도 前에 아이 돌잔치부터 차리는 婦人의 性味도 나 못지않은 것 같소.”라며 應手하였다.
곁에서 이들 夫婦의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던 一家親戚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으며 한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다고 한다.
(13) 鄭壽銅의 網巾
하루는 어느 大監宅 잔치에 招待받아 밤늦도록 酒興을 즐기다가 大監宅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洗手를 하고 나서 網巾을 찾았으나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分明히 자기 前에 머리맡에 벗어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띄지 않으므로 壁에 걸려 있는 大監의 網巾을 슬쩍 내려 쓰고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니 主人 大監이 들어와서 網巾이 없어졌다며 시끌벅적했다.
大闕 朝會에 쓰고 갈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舍廊房을 淸掃하고 管理하는 종은 이리뛰고 저리뛰며 網巾을 찾았지만 鄭壽銅은 시치미를 떼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종이 헌 옷가지를 틀어박아 둔 구석에서 다 떨어진 網巾 하나를 찾아냈다.
事實 아침에 房淸掃를 하다가 쓰레기로 알고 버렸던 것이었다.
"애걔 ! 이게 누구 網巾일까?"
그제서야 鄭壽銅이 나서면서,
"이리 내게! 그 網巾은 내 것일세"
"그럼 宅에서 쓰고 계시는 건 누구 網巾이요?"
"누구 것이긴? 大監 것이지."
"아니, 그럼 當身이 쓰고 있는 網巾이 大監 것이라니요?"
"내 걸 찾다가 못 찾아서 大監 網巾을 썼다오."
"뭐라구요? 어찌 敢히 大監의 網巾을 쓸 수 있으며, 아침 동안 줄곧 網巾 찾는 걸 보고도 天然덕스럽게 그냥 앉아만 있었던 거요?"
鄭壽銅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허허, 이 사람아! 내 網巾 같았다면 자네가 그처럼 애를 써서 찾아 주겠는가! "
"그게 무슨 말씀이요?"
"헌 網巾이라고 하여 남의 網巾을 쓰레기 取扱하고 쓸어버리는 사람이,
내가 網巾 없어졌다고 하면 찾는 척이라도 하겠는가 말일세!"
그제야 종은 網巾을 쓰레기처럼 버린것에 對하여 멋적은 表情을 짓고는,
"허허 내 精神 좀 보게. 어르신네 網巾을 못 알아보고서...." 하고는,
얼른 안채로 들어가서 아침 解酲 술床을 잘 차려 와서 깍듯이 待接해 보냈다고 한다.
(14) 하루는 鄭壽銅이 어떤 兩班 한 사람과 偶然히 만나 同行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때마침 물오리떼가 江둑에서 西녘하늘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저 물오리 한 마리 잡아서 按酒하면 술맛이 나겠구먼…"
같이 가던 兩班의 말이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아니 어렵지 않다니, 只今 우린 활도 없고 맨 손이 아닌가?"
"꼭 먹고 싶은가? 그렇다면 물오리 값을 미리 받겠네."
"물오리 값?"
"몰랐나? 저 물오린… 우리 집에서 기르는 물오리네."
鄭壽銅의 말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끼니를 굶다시피 하는 鄭壽銅이 물오리를 기르고 있을 턱이 없었다. 同行하던 兩班은 當時의 兩班 階級에 흔히 있는 例처럼 世上일에는 어둡고 愚直한 一面이 있었다. 百姓을 긁어 먹는데는 꾀도 있고 殘認하기까지 했다.
"이 사람아, 그런 말 말고 , 한 마리 잡아 보내게…"
"아하! 한 마리 같으면야 내가 물오리 값을 달라고 하겠나."
"난 한 마리만 있으면 되네."
"모르는 소리, 물오린란 놈들은 한 마리만 잡아 보내면 그 다음 놈들도 저절로 따라가는 法이야."
"흠, 그렇겠군."
"그러니 한 마리가 아니라 열 다섯 마리를 다 가져가야 하지.". 그 兩班은 鄭壽銅의 말이 그럴 듯했고 입 밖에 내다 보니 事實 물오리가 더욱 먹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열 다섯 마리를 다 집으로 가지고 가서 한 마리씩 차례로 잡아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結局 값은 쉽사리 흥정이 되고 鄭壽銅은 뜻밖의 橫財로 열 다섯 마리의 물오리 값이 생겼다.
"그럼 저녁에 奴婢를 보냄세."
두 사람은 이렇게 約束을 하고 헤어졌다. 저녁이 되어 물오리를 가지러 온 兩班집 종에게 鄭壽銅이 말했다.
"야 이놈아! 날아가는 물오리를 파는 놈이 罪냐, 그걸 산 놈이 罪냐? 네 主人에게 가서 물어봐라."
이렇듯 鄭壽銅은 當時 社會制度에 不滿을 갖고 있었고 또 露骨的으로 그것과 맞서서 對抗했다.
(15) 어느 고을에 監司의 行次가 있다 하여 그 行次가 지나가는 길을 고치게 되었다. 賦役을 붙일 일이지만 時日이 促迫하여 어떤 사람에게 그 일 全體를 떼어 밭겨야 될 處地였다. 이 일로 해서 只今의 競爭入札 같은 方法으로 選拔된 사람이 바로 鄭壽銅이었다.
官에서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으나 鄭壽銅의 奇拔한 智慧를 믿는 一面도 있고 해서 미리 工事에 必要한 一切의 費用을 주었다. 그런데 일을 맡은 鄭壽銅은 그 돈으로 每日 술만 마실 뿐 길 가운데 있는 돌 하나 치우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監司가 四人轎로 지나가다 길이 몹시 나쁜 것을 詰責하였다. 結局 鄭壽銅은 監司 앞에까지 불려나오게 되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라 일을 맡아서 그 일은 하지 않고 國庫만 縮내었느냐?"
鄭壽銅은 躊躇 없이 길 가운데로 나가더니 그곳에 솟아있는 돌 하나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척했다.
"그렇지. 그 말이 틀림없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더니 다시 監司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혔다.
"저는 처음 저 돌을 뽑고 망가진 다리를 고쳐 훌륭한 길을 닦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 돌을 비롯해 모든 것들이 反對를 해서 工事를 하지 못했습니다."
"反對라니?"
"저 돌의 主張은 이렇습니다. '나는 옛날부터 이 자리에 박혀 있는 돌이다. 上監께서 지나가실 때도 나를 뽑아버리지 않았는데 監司가 지나가는데 왜 나를 뽑으려 하느냐' 그래서 工事를 하지 못했습니다."
鄭壽銅의 말을 들은 監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工事를 하지 않은 鄭壽銅을 當場 處罰하기는 쉬운 일이나 임금이 지나갈 때에도 빼내지 않을 돌을 自己가 뽑으라 命令하면 그것은 不敬罪로 목이 달아나는 판이었기 때문이다.
(16) 鄭壽銅 하루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洞네 金寡婦를 發見하고는 쫒아가서 강아지에게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면서
"아이쿠 兄님 나오셨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金寡婦가 웃음보가 터져서 깔깔대고 웃으니까
鄭壽銅이가 놀래는 시늉으로 다시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兄嫂님도 나오셨군요. 兄嫂님 安寧하셨습니까?"
웃고 있던 金寡婦가 크게 火가나서 집으로 돌아들어가 지게 작대기를 찾아들고 나왔다.
鄭壽銅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뛰여서 親舊들이 있는 느티나무 아래로 가서는,
"봤지? 좀 前에 金寡婦를 한瞬間에 웃겼다 火내게 할 수 있다는 내기는 내가 이겼으니 約束한대로 금술이 자네는 닭 한마리 내놓게나!"
껄껄대고 웃음보늘 터트린 값으로 금술이네 장닭 한마리 잡고 술을 나누게 되였는데, 壽銅이가 술이 거나해 질 무렵 보아하니 술을 남았는데 按酒가 떨어져 가는 지라, 뒷間에 간다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갑자기 장작깨비로 금술이네 씨암닭을 내리쳤겠다. 장닭이 꼬꼬댁거리며 騷亂하게우는 소리에 밖으로 나온 금술이가
"왜, 술 한 盞 잘 먹고는 또 남에 씨암닭을 잡고 이게 뭔가?"
鄭壽銅이 曰, 죽은 씨암닭을 가르키며 "글쎄 저년이 즈그 書房 죽은지 한나절도 안돼었는데 이웃집 장닭과 울타리 밑에서 書房질을 하고 있지를 않나? 말일쎄. 내가 그 모습을 보고 鬱火가 치밀어서 볼수가 없었네 그려"
이렇게 해서 꾀 많은 한량 鄭壽銅은 또 다시 술床을 맞이하게 되었고
興겨운 파티가 벌어졌다.
* 鄭壽銅은 晩年에 自身의 處地를 恨歎하며 이런 詩도 읊었다.
少年欽慕詩千首 ~ 少年에 詩 千首의 꿈을 欽慕했더니
老年歸依酒百盃 ~ 老年엔 술 百 盞으로 돌아갔더라.
이 글속에서 '詩'가 '酒'로 變했으니 價値觀의 質的인 下落이요, '千'에서 '百'이 되었으니 量的인 衰落을 自歎하는 表現인 듯...
🍎 鄭忠信 說話
(朝鮮 中期의 名將 鄭忠信에 關한 說話)
★ 溪西野譚, 靑邱野談, 東野彙輯, 海東野書,
韓國口碑文學大系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酒席見六子起敬 等에 傳함.
鄭忠信의 아버지는 光州 鄕廳의 座首였는데, 어느날 밤 無等山이 갈라지며 靑龍이 뛰어나와 自己에게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怪異하게 여기고 다시 잠이 들자, 또 꿈에 山이 갈라지고 白虎가 달려 나와 품에 안겼다. 그는 놀라 일어나 뜰을 徘徊하다가 부엌에서 잠든 食婢를 보고 마음이 動하여 合歡하였다. 食婢가 孕胎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鄭忠信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怜悧해서 壬辰倭亂 때에 光州牧使로 있던 權慄의 通引 노릇을 하였는데, 權 牧使의 寵愛를 받았다. 倭亂 中에 權慄의 狀啓를 義州 行在所에 傳達하였고, 그곳에서 李恒福의 推薦으로 武科로 進出하고 여러 番 功을 세웠다.
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都元帥 張晩은 安州牧使로 있던 鄭忠信을 불러 對策을 相議하였다.
이 때 그는 三策을 말하고, 李适은 샛길로 京都를 取하는 下策을 쓸 것이라고 豫言하였는데 이 말이 的中하였다. 李适이 漢陽을 侵入하여 景福宮에 駐屯하고 仁祖가 公州로 播遷하자, 鄭忠信은 張晩에게 鞍嶺에 依據하여 싸우라고 勸하였다. 이 싸움에서 勝利하여 鄭忠信은 1等 功臣으로 策定되고 錦南君에 封해졌다.
光海君 때 朝廷에서 鄭忠信을 建州衛에 보내어 胡國의 情勢를 살피게 하였는데, 胡國의 여러 酋長들은 그의 堂堂한 態度와 智略에 監伏하였다. 口傳說話도 鄭忠信의 出生譚과 壬辰倭亂 때의 活躍, 淸나라에 갔을 때의 智略과 勇氣에 對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文獻說話와 비슷한 點이 많다.
以上의 內容은 大體로 鄭忠信의 實際 行跡에서 由來한 것으로서 野談的 性格을 지닌다. 鄭忠信의 出生譚은 英雄 出生譚으로서 洪吉東의 出生譚과 一致하며, 神話의 非正常的 出生譚이 身分制 祀會에서 變用되어 鄭忠信의 行跡에 符合된 것으로 보인다.
🍎 帝王과 神仙 陳圖南
宋나라가 建國되기 以前의 亂世에 天下를 얻을 大 野望을 품고 華山이란 곳에서 救國의 野心을 닦고 있던 陳圖南이란 白髮道人은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며, "오! 하느님, 이 亂世를 收拾할 智慧와 勇氣를 주시옵소서. 어서 빨리 時가 急합니다." 祈願했다.
몇 年間 道의 境地에 이르다보니 앞날을 豫知하는 能力이 있던 陳圖南 白髮道人은 새벽 일어났다. 그리고 冷水에 沐浴을 하고는 아홉 尺이나 되는 긴 지팡이를 짚어가며 華山 中에도 가장 險峻하고 普通 사람의 能力으로는 敢히 올라갈 수 없는 頂上을 飛虎처럼 날아올라 눈을 감고 合掌 後 未來에 對해서 天眼通을 試圖해 보고는 깜짝 놀랐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마치 거울에 物體가 나타나듯이 돌아올 未來事가 훤히 펼쳐 보여졌다. 世上 저쪽에서는 盜賊놈들이 婦女子들을 怯奪하는 것이며, 寡婦가 홀아비와 情을 通하는 것, 有婦男 有夫女가 陰沈한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通情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서로 나라를 얻고자 날뛰고 있는 모습들이 참으로 亂世 그대로 나타난 때문이었다.
그 많은 現象들 中에 陳圖南을 더욱 깜짝 놀라게 한 것은 그와 生月日時가 똑같은 趙點檢이란 사람의 머리에 天下를 얻을 天氣가 무지개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陳圖南은 그 길로 下山을 하여 天下를 얻을 野望을 펼치며 여러 人才들과 接觸을 하면서 그 氣勢를 宮城으로 몰았다.
그러나 宮城을 앞에 얼마 남기지 않고 있을 때 天下를 震動하는 天軍萬馬의 喊聲이 들려왔다.
異常하다 싶어 急히 말을 몰아 달려가 보았더니 이미 四柱八字가 같은 趙點檢이 天下를 얻어 入宮하고 있었다.
陳圖南은 그 자리에서 宮城을 向하여 큰절을 올리고서 껄걸 웃고는 그 卽時로 말머리를 돌려 다시 入山하였다. 運命의 順理를 따르고자 함이었다.
그 後 陳圖南은 道에 專念하여 神仙이 돼 數많은 사람을 濟度하였다. 人間 世上에서 가장 尊貴하고 높은 사람은 天子라고 할 수 있겠으나, 道를 닦아 神仙이 되는 것도 그만큼 尊貴한 것이다.
그러나 뭇사람들은 그 眞實을 모르고 偏見에 사로잡혀 있으나 天下를 다스린 趙點檢이나 道를 닦은 陳圖南은 비록 맡은 地位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를 망정 人間 世界에서의 帝王이든 天上界의 神仙이든 그 尊貴함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 太陽이 둘 있어서는 안 된다."는 眞理를 말하고 入山修道 한 陳圖南의 名言은 自身을 아는 일이 얼마나 重要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 조마구 說話
(어버이를 죽인 怪物을 退治하여 怨讐를갚는다는 內容의 說話)
★ 韓國口碑文學大系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주둥이 닷발 꽁지 닷발 된 짐승’, ‘꼬랭이 닷발 주딩이 닷발’, ‘꼬리 닷발 주둥이 닷발 怪物’, 또는 조마구說話 等으로도 불린다.
少年·아이·외동아들 等으로 說定되는 主人公이 書堂에 다녀오거나 밖에 나가 놀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自己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洞네 사람들에게 緣由를 물으니 주둥이 닷발 꽁지 닷발 되는 怪物이 집에 들이닥쳐 어머니를 害코지하였다는 것이다.
아들은 復讐를 決心하고 怪物을 찾아 길을 떠난다. 가는 길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힘든 일을 해주는 對價로 怪物이 간 곳을 알아내고 찾아갔다.
怪物의 집에 當到해 適宜한 곳에 몸을 숨겼다. 먼져 怪物이 마련한 끼니를 먹거나 치움으로 해서 怪物을 부엌으로 誘引하여 솥 안에 가두고 불을 때 태워 죽일 생각이었다.
飮食이 자꾸만 없어지자 몹시 배가 고픈 怪物이 精神이 昏迷해 부엌에 들어와 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붙인 後 飮食物을 準備했다. 그리고 솥뚜껑을 열고 飮食物을 쏟아 부을 瞬間, 少年은 敏捷하게 怪物을 물이 끓는 솥안으로 밀어넣어 어머니의 恨을 復讐했다.
🍎 趙 富者 이야기
朝鮮時代 慶尙南道 巨濟에 趙 富者 가 있었다. 그는 膝下에 子息이 없어 苦悶하다 玉女峰에서 千日 祈禱를 드린 다음에, 딸을 얻었다. 그런 딸이 어느 덧 屍집갈 나이가 되자, 趙 富者는 사윗감을 찾기 始作하였다. 하나뿐인 딸이지만 明晳하고 예쁜 容貌라 사윗감을 고르는데 무척 愼重하였다. 어느날 靑袍童子라며 사위로 받아달라는 者가 나타났는데, 趙 富者 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俊秀한 外貌에 禮를 갖춘 모습으로 마음에 쏙 들어 사위로 맞아 들릴만하였다. 그런데 사위가 되려면 一旦의 試驗을 거쳐야 했는데, 文章力과 武藝의 程度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趙 富者는 먼저 文章力을 알아보려고, 딸과 詩로써 겨루게 하였다. 試驗이 始作됐는데도 그는 緊張感은 全혀 찾아 볼 수 없을뿐더러 딸과 呼吸이 잘 맞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였다. 趙 富者는 그가 漸漸 마음에 들었으며, 또한 武藝試驗에서도 활로 새를 正確히 맞추어 無難히 通過하였다. 그러자 趙 富者는 婚禮날을 잡기로 하고 靑袍童子에게 사위가 되어 달라고 하였다.
그랬는데, 그 다음 날이었다.
이番엔 黃袍童子가 찾아 왔다.
그는 靑袍童子 보다 더 뛰어 난 外貌이고 보니 趙 富者는 慇懃히 黃袍童子가 靑袍童子 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黃袍童子 亦是 文章力과 武藝 솜씨가 아주 뛰어나 趙 富者는 靑袍童子와 이미 約束을 해버린 터라 그 約束을 撫摩시킬 窮理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의 꿈에 玉女峰의 女神이 나타나
"그 두 童子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初아흐레 날. 靑袍童子가 오거든 이 붉은 종이를 내보이고 黃袍童子가 오거든 큰 개를 풀어놓으시오. 그리고 이 달 보름에 한 乞人이 찾아 올 것인데, 그를 사위로 맞아드리기 바라오." 하는 것이었다.
그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을 때 神奇하게도 그의 손에는 붉은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윽고, 初아흐레 날이 되자 靑袍童子가 찾아 왔다.
"이놈 어딜 들어오느냐!" 하며 趙 富者는 붉은 종이를 꺼내들고 靑袍童子에게 다가서자 靑袍童子는 苦痛스런 呻吟소리를 내며 큰 지네로 變하여 죽어버렸다. 그리고 난 뒤 暫時 後, 이番에는 黃袍童子가 들어왔다. 그러자 趙 富者는,
"썩 물러가라!" 하며 큰 소리와 함께 개를 풀어놓으니, 개는 왈칵 달려들어 黃袍童子를 물어뜯는 것이었다. 그러자 黃袍童子는 한 마리의 늙은 노루로 變하며 죽었다.
그런 일이 지나고 보름이 되던 날, 正말 한 乞人이 찾아드니 趙富者는 厚한 待接을 한 後 어리둥절해 하는 그를 사위로 맞아드렸다. 그랬더니, 그 날 밤 꿈에 또 玉女峰 女神이 나타나 그 乞人에 對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龍宮의 거북將軍인데 그만 失手를 저질러 玉女峰 둘레에 거북山이 되고 靈婚은 獄苦를 치르다가 거지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라했다. 그런 일이 있은 以後, 이 趙 富者는 子孫代代로 富貴榮華를 누렸다 한다.
🍎 朝鮮國祖 神話 (朝鮮의 建國神話)
★ 龍飛御天歌에 傳함.
朝鮮 王朝의 建國神話를 綜合的인 體系로 세운 것으로는 龍飛御天歌가 있는데, 이 作品을 通하여 朝鮮國祖神話를 엿볼 수 있다. 이 神化의 特徵은 國祖의 人物들을 모두 龍으로 象徵한 點이다.
* 第1章의 ‘海東六龍’은 穆祖 · 翼祖 · 度祖 · 桓祖 等 李太祖의 先祖 네 사람과, 太祖 · 太宗의 두 王을 가리킨다. 李太祖는 潛龍으로 象徵되는데, 다른 龍들은 李太祖가 王位에 오를 것을 豫言하기 爲하여 나타난다.
特히, 龍飛御天歌 第22章에 나타난 龍의 說話는 다른 部分의 化石化된 龍과는 意味가 다르다. 度祖가 白龍을 도와서 黑龍을 退治하였는데, 이 白龍이 度祖에게 將次 子孫이 王位에 오를 것을 豫言하였기 때문이다. 于先 人間에게 도움을 請하는 白龍은 善한 便이고, 黑龍은 다른 龍들과는 區別되는 惡龍이라는 點이 注目된다. 곧, 第22章의 龍은 單純한 帝王의 象徵으로서 登場한 것이 아니라, 龍에 對한 根源이 오래된 民間說話에 收容되어 있었다는 것을 反映하는 것이다.
* 第22章의 龍은 新羅의 居陀知說話, 高麗 建國의 作帝建說話를 收容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龍飛御天歌는 度祖라는 人物을 英雄化하기 爲하여 龍의 救出說話를 借用한 것이다.
龍飛御天歌 總 125章에서 人物들의 活躍 分布를 보면, 李成桂 80章, 李芳遠 21章, 翼祖 9章, 度祖 6章, 穆祖 3章, 桓祖 2章이다. 이 統計에 依하면 龍飛御天歌의 主人公은 李成桂요, 副主人公은 李芳遠이다. 李成桂는 百戰百勝의 勇將으로 政治的 業積이 크고, 人間的으로 友愛가 있으며, 學者이며 謙讓의 德을 具備한 사람으로 裝飾하였다.
그러나 革命 英雄으로서의 李成桂의 性格은 始終 不統一과 矛盾을 招來하고 있다. 그렇게 進就的이고 好戰的이며, 또 外敵 擊破의 英雄인 李成桂가 遼東征伐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卑屈하였고 事大的이었다.
政敵인 鄭夢周의 除去에 있어서도 始終 優柔不斷하여 勇斷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오히려 李芳遠이 鄭夢周를 處置하여 버렸다. 處置한 뒤에도 李成桂는 李芳遠을 나무랐으나, 그 婦人의 眞言으로 適當히 收拾하였다. 이러한 不統一은 李芳遠의 境遇에도 많이 나타난다. 활과 駿馬와 武勳으로 華麗하게 裝飾된 李成桂는 事實上 重要한 契機와 危機에 있어서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나, 활과 駿馬도 없이 오직 아버지 太祖의 相을 닮았다는 條件만으로 裝飾된 李芳遠은 實際로는 아버지보다 뛰어난 偉大한 英雄이 되었다. 政敵인 鄭夢周 · 鄭道傳 · 李芳幹 等의 擊退라든가, 李成桂가 卽位하는 決定的인 事件도 事實上 李芳遠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高麗 王氏의 臣下가 祖國에 反旗를 들고 朝鮮 王朝를 세운 그 革命의 創業을 合理化, 神聖化하였는데, 이것이 또 反逆이 아니라 天命을 따른 것임을 强調하려고 하니 여기에는 애初부터 여러 가지 無理가 따르기 마련이다.
李成桂를 高麗 王朝의 忠臣으로 만들어 놓고, 또 그를 새 國家의 創業主로 내세우려는 二律背反의 苦心이 있어야 하였다. 때문에 自然히 李成桂는 決定的인 重要 時期에는 몸을 사리게 되고, 그 代役으로 李芳遠이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李芳遠은 謀略家요 野心家가 되어야 하고, 李成桂는 좋은 意味에서 점잖고 착하고 義理 있는 人間이 되고, 나쁜 意味에서 卑怯하고 優柔不斷한 政治人이 되고 만 것이다.
다음으로 指摘할 矛盾은 無條件 事大主義에 服從한 것이다.
龍飛御天歌의 構成은 앞 句가 中國의 故事이고, 뒤 句가 朝鮮 創業이라는 事實이다. 中國 側은 夏 · 殷 · 周 · 隋 · 唐 等의 奇事異跡을 늘어놓고, 여기에 附會하기 爲하여 朝鮮의 傳說과 故事를 造作하여 羅列하려니 온갖 無理와 矛盾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기에 엉뚱한 神話를 만들어 내야 하였다. 穆祖를 비롯한 4代祖의 神話는 거의 信憑性이 없는 空想의 이야기 같으나, 事實 壯嚴하다거나 興味 있는 줄거리도 없는 極히 貧弱하고 짤막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朝鮮의 國祖神話에 比하면 高麗의 國祖神話는 훨씬 規模도 크고, 또 想像力도 豊富하다. 이와 같은 缺陷은 神話 製作에 參與한 사람들이 모두 儒學者들이므로 새로이 建國神話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中國의 故事에 依存하였기 때문이다.
🍎 曹操와 道人 左元放
三國時代의 曹操와 道人 左元放의 이야기다.
左元放이 天柱山에서 弟子들을 가르치며 精進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자 猜忌가 많은 曹操가 不安을 느끼고 害치울 생각으로 于先 左元放을 宮闕 안으로 불러들여 다짜고짜로 監獄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며칠동안 밥을 주지 않으면 죽겠지.....'하고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半年쯤 지나도 아무런 異常이 없자, 그로부터 一年쯤을 그대로 放置해 두었다.
曹操는 추운 겨울을 지내는 동안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慇懃히 期待하며 左元放이 갇혀 있는 監獄으로 갔는데, 죽어서 뼈만 남아 있어야 할 左元放이 하하하 웃으며,
"道를 닦을 수 있게 큼 이렇게 조용한 房을 주셔서 感謝합니다." 라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曹操는 깜짝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泰然하게 珍羞盛饌을 차려놓고 和解를 하는 척하면서 어려운 問題를 내어 萬若 그것을 못 맞추면 죽일 計略이었다.
曹操는, 이윽고, "술 按酒로 다섯 자 假量의 큰 農魚가 먹고 싶은 터에 多幸히도 이곳에 有名한 禪師가 계셔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니 禪師께서 다섯 자 假量의 農魚 한 마리만 求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며 左元放에게 堂堂한 態度로 묻자, 左元放은, "같은 값이면 多紅치마라고 좀더 큰 農魚를 찾지 않으시고요. 그러면 제가 只今부터 農魚를 잡아들일 테니 잡수기만 하십시오." 하며 큼지막한 구리 대야와 낚싯대를 가져 오라 했다. 그리고, 물이 가득 담겨 있는 대야에 낚싯대를 드리우며 한참동안 沈默만 지키고 앉아 있었다. 周圍에 모여 서 있는 數많은 사람들은 숨죽인 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 느닷없이, "이~얍!" 하고 소리친 左元放은 곧 그 대야에서 펄펄 뛰는 커다란 農魚 한 마리를 낚아 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周圍에 모여 섰던 많은 사람들은 一齊히 拍手를 치며 喊聲을 올렸다.
이에 曹操는 더욱 火가 치민 얼굴로 눈을 부아리며 이젠 露骨的으로 左元放에게 直接 술을 따라 올리라고 嚴命을 내렸다. 그러자. 左元放은 얼굴에 微笑를 지으며 曹操의 술에 술을 가득 따라, 보란듯이 술盞을 들어올려 曹操에게 주는 듯하다가 自身이 먼저 두서너 모금을 마신 後에 그 술盞을 曹操에게 올렸다.
그러자, 속으로 火가 머리끝까지 오른 曹操는 마음 속으로 발끈하여, '無禮한 놈 같으니!' 하면서도 겉으로는 泰然한 척 左元放이 주는 술盞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이어 "이番에는 이 술盞을 空中에 올려보시오." 라고 左元放을 쳐다보며 試驗을 내리자. 左元放은 갖고 있던 젓가락으로 술盞을 虛空으로 툭 튕겨 올렸다.
周圍 사람들은 窒色을 하며 술盞이 떨어질까 어쩔 줄 모르고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술盞은 空中에서 빙빙 돌아가며 曹操와 滿朝 百官, 심부름하는 奴婢들 앞에 暫깐씩 머무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左元放은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火가 난 曹操는 온 몸을 와들와들 떨며 그 자리에서 卽時 온 나라에 左元放을 逮捕하라는 嚴命을 내렸다.
曹操에게 쫓기는 몸이 된 左元放은 羊떼 무리 속에 숨어들어 順한 羊으로 遁甲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한 쪽 눈이 찌그러지고 걸레같이 갈기갈기 찢겨진 옷을 입고 있는 늙은 거지로 變裝하기도 했다.
또한, 한 마을에 똑같은 모습의 거지들이 득실거리게 만들어 捕卒들을 어리둥절케도 하고 捕卒들의 訓鍊場에 들어가 捕卒들을 滿醉케 하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曹操를 戱弄 할대로 戱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左元放은 吳나라에 가서 갖가지 道術과 遁甲術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好感을 사게 되었으나 孫策의 미움을 받아 쫓기는 身世가 되기도 했다.
그 理由는 어느 날, 孫策이 여러 臣下들과 한 고을을 行次하여 돌아보고 있을 때, 左元放이 느닷없이 나타나 孫策이 타고 가는 말 앞에 나막신을 신고 어정어정 걸어가며 길을 비켜주지 않으며, 孫策의 가는 길을 放害하자 結局 火가 치민 孫策은 左元放을 當場 찔러 죽일 생각으로 槍을 휘두르며 말을 채찍질하여 달렸지만, 끝내 左元放을 잡지 못하고 中途에 抛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後, 左元放은 藿山이란 곳에 隱居하며 仙道의 秘法을 葛玄이란 弟子에게 물려주고 白日昇天 하였다 한다.
🍎 調信 說話
*三國遺事 塔像篇에.
新羅때 調信이라는 중이 太守 金昕公의 딸을 깊이 思慕하였으나, 그 女子가 다른 곳으로 媤집을 가자 슬피 울다가 暫깐 졸았다. 꿈에 娘子가찾아와 夫婦의 緣을 맺고 살면서 아이를 5名이나 두었다. 그러나 漸漸 가난해져서 큰아이가 굶어 죽고, 夫婦는 늙고 病들어 結局 아이들을 2名씩 나누어 맡고 헤어지게 되었다.
이때 꿈에서 깨니 調信의 鬚髥과 머리가 하얗게 세 있었다. 이에 世上事에 執着하는 마음을 懺悔하고 蟹縣嶺에 가서 큰 아이가 묻힌 곳을 파보니 돌彌勒이 있었다. 調信은 돌彌勒을 깨끗이 씻어서 가까운 절에 封安하고 서울로 가서 淨土寺를 짓고 白業을 부지런히 닦았다. 이 이야기는 '現實 - 꿈 - 現實'이라는 夢遊樣式을 通해 人生無常이라는 主題를 나타낸 代表的인 幻夢說話로 後代의 많은 夢遊錄과 夢字類小說에 影響을 미쳤다.
🍎 좁쌀 한 알로 장가든 總角
(科擧를 보러 가는 젊은이가 좁쌀 한 알로 漸漸 利得을 보는 交換을 하여 成功한다는 內容의 說話)
★インド古代民謠集 (松村武雄 譯, 現代思想社, 1977)
朝鮮鮮の民話 (孫晉泰, 岩崎美術社, 1974)에.
形式譚에 屬하며, 그 中에서도 累積的形式譚에 屬한다. 卽, 한 行爲가 原因이 되어 다음 行爲가 생기는 結果가 繼續되어, 끝 結果는 가장 큰 期待를 實現시키는 方向으로 累積되는 形式을 지닌 說話이다.
어느 젊은이가 科擧를 보러 가는 길에서 좁쌀 한 알을 酒幕에 맡기면서 이건 所重한 것이니 잘 간수하였다가 달라고 일렀다. 이튿날 아침 “좁쌀은?”하고 물으니, 酒幕집 主人은 엊저녁에 쥐가 먹어 버렸다고 하므로 그 쥐를 잡아 달라 하였다.
主人은 할 수 없이 쥐 한 마리를 잡아 주었다. 다음 酒幕에 가서 이건 所重한 것이니 잘 간수하였다가 달라고 일렀다. 이튿날 아침 主人은 고양이가 그 쥐를 잡아먹었다 하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 달라 하였다.
셋째 酒幕에서는 말에 채어 고양이가 죽었다 하므로 그 말을 달라 하여 말을 끌고 서울 가까운 酒幕에 들었다. 이튿날 主人은 간밤에 그 말이 소와 싸우다가 죽었다 하므로 그 소를 달라 하여, 그 소를 끌고 가 長安의 酒幕에 맡겼다.
이튿날 主人이 아들 녀석이 그 소를 잘못하여 어느 政丞 집에 팔아 버렸다 하므로 그럼 그 政丞을 끌고 오라고 하였다. 主人은 政丞에게 가서 찾아온 來歷을 말하였다.
政丞은 “나를 끌고 오라니 별난 놈 다 보았다. 이리 데려오라.” 하여 젊은이를 불러들였다. 젊은이는 政丞 앞에 나아가 소를 내놓으라고 하였는데, 벌써 잡아먹었다고 對答하자 그럼 먹은 者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政丞은 그 氣魄에 感動하여 그의 딸을 젊은이에게 주었다.
이 說話는 凡世界的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東洋에서는 日本을 비롯하여 印度·필리핀 等에, 유럽에서는 프랑스·불가리아·잉글랜드 等에서 報告된 바가 있다.
이 說話는 最小의 犧牲으로 最大의 效果를 바라는 富貴榮華에 對한 憧憬心 같은 것이 가장 素朴한 原初的인 事考를 通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朱蒙 神話
★ 三國遺事에.
高句麗는 곧 卒本扶餘다. 或 只今의 和州니 成州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卒本州는 遼東의 境界에 있다. 國史 高麗 本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始祖 東明王은 姓은 高氏요, 이름은 朱蒙이다. 이 보다 앞서, 北扶餘 王 解夫婁가 東扶餘로 避해 가고, 夫婁가 죽자 金蛙가 王位를 이었다.
그 때 한 女子를 太白山 南쪽 優渤水에서 만나 물으니,
"나는 河伯의 딸로 이름은 柳花입니다. 同生들과 놀러 나왔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解慕漱를 만나 熊神山 밑 鴨祿가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父母가 仲媒 없이 남을 따라간 것을 責望하여 여기에 귀양 보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金蛙가 異常히 여겨 柳花를 집에 두었더니, 햇빛이 비쳐 몸을 避해도 좇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孕胎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들이나 되었다. 王이 버려서 개,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으며, 길에 버리면 소나 말이 避해 가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王이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으니 도로 어미에게 주었다. 어미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氣骨이 英特하고 奇異하여 7歲에 벌써 普通 사람과 다르게 뛰어났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百發百中하였다. 俗談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朱蒙'이라 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朱蒙이라 하였다.
金蛙에게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朱蒙과 같이 놀면 그 재주가 늘 따라가지 못하였다. 맏아들 帶素가 王에 말하되,
"朱蒙은 사람의 子息이 아니니, 萬若 일찍 없애지 않으면 큰 後患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王은 듣지 않고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朱蒙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조금씩 먹여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王은 살찐 것을 타고 여윈 것은 朱蒙에게 주었다. 朱蒙의 어미가 王의 다른 아들들이 여러 將帥와 함께 朱蒙을 將次 害치려 함을 알고,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害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智略으로 어디로 간들 안 되겠느냐? 속히 일을 꾸며라."
라고 하였다.
이에 朱蒙이 烏伊 等 세 사람의 벗과 淹水에 이르러 告하되,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河伯의 孫子다. 오늘 逃亡하고 있는데 뒤쫓는 者가 따라오니 어찌하리오?"
하니, 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주었다. 朱蒙이 건너자 다리는 사라지고 쫓아오는 軍士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卒本州에 이르러 都邑하였으나 미처 宮室을 짓지 못하여 沸流水 가에 草幕을 짓고 國號를 高句麗라 하였다. 高氏로 姓을 삼았으니, 그 때 나이 12歲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