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론 : 슈뢰딩거의 하늘 위 하늘을 걷는 실존의 무브먼트 실험 — 정동재의 시 <만나보기 어려운 무한대 플러스 원 (∞+1)
만나보기 어려운 무한대 플러스 원 (∞+1)
정동재
빛나는 마천루, 세상이 초고속 자본의 레버리지를 좇아 눈을 돌릴 때
사내는 오직 정밀한 손끝으로 명품 무브먼트의 톱니바퀴를 맞물린다
압축된 태엽의 부드러운 힘이 임계점을 지나 침묵의 심장을 깨울 때
사내는 은막의 창에 비친 무의미한 기억들을 가만히 지워낸다
3인칭의 객관적 시선으로 영혼의 다이어리에 담담히 받아 적는다
“유성우처럼 그저 사라져 버리는 소모가 아니라는 시간,
은하수를 건너 사람이 그리워 보내온 별편지라는 애틋한 서신들의 축적이라는 발상.”
그 축적의 자리에서 고결이라는 패턴을 꺼내 읽는다
타인이라는 완벽한 남으로 만나 서로의 모난 각을 눈부시게 깎아내며
같이 머물러온 삼십 년 세월이 긋고 있는 동그라미 같은
자식들을 모두 분가시킨 고요한 빈방,
이제는 사내가 정성스레 차려내는 소박한 밥상에서 새어나오는 도마 소리가
그늘졌던 아내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켜켜이, 부드럽게 풀어낸다
사내가 짓는 그 지극한 위로의 서사 속에서
어느날부터 무한대 플러스 원(∞+1)이라는 신비로운 차원이 가끔씩 걸어나온다
부부는 소리 없이 찬란한 하늘 위 하늘의 스펙트럼을 손잡고 같이 걷는다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룰 수 있다면 복리는 사라질거야 그거야말로 개벽이겠지?”
사내의 말이 그녀의 영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게 보인다
차가운 메트로폴리스의 굳은 시멘트 거리는
이제 낮과 밤, 생성과 소멸이라는 세상의 이분법을 모두 거두어들인다
수많은 영혼을 사치라는 고독 속에 가두고
사람을 혹독하게 제련하여 숨조차 거둬들인다
눈부신 아침 태양의 스포트라이트 앞에서도
늘상이라는 말이 복리라는 거대한 단어의 발굽에 밟힌다
여기저기라는 흔한 지상이 오늘로 박제된다
▶ 평론 : 슈뢰딩거의 하늘 위 하늘을 걷는 실존의 무브먼트 실험
— 정동재의 시 <만나보기 어려운 무한대 플러스 원 (∞+1)
정동재 시인의 <만나보기 어려운 무한대 플러스 원 (∞+1)>은 현대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실존의 양자 실험’이다.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상자 속에서 삶과 죽음의 중첩 상태로 존재하다가, 극도로 정밀하게 고안된 관측 장치에 의해 비로소 하나의 단단한 현실로 증명되듯, 시인이 선언한 ‘무한대 플러스 원’이라는 초월적 차원 역시 결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초고속 자본의 레버리지가 요동치는 차가운 마천루 속에서, 오직 정밀한 손끝으로 태엽의 임계점을 맞물리고 무의미한 기억들을 지워내는 사내의 ‘고난이도 실존 장치’를 통해서만 간신히 지상에 그 결과를 드러낸다.
삼십 년 세월의 마찰을 견디며 아내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풀어내는 소박한 도마 소리, 그리고 모든 이치를 모아 ‘복리가 사라지는 개벽’을 꿈꾸는 사내의 한마디는 이 혹독한 메트로폴리스라는 상자 안에서 탄생한 지극한 위로이자 위대한 우주적 관측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개벽(開闢)’은 단순히 종교적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닫힌 계(System) 안에서 인간을 영혼까지 가두고 짓밟는 ‘자본과 선형적 시간의 복리 법칙’을 우주의 근본 이치로 깨부수려는 거대한 영적 물리학의 시도이다.
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늘상이라는 말이 복리라는 거대한 단어의 발굽에 밟힌다 / 여기저기라는 흔한 지상이 오늘로 박제된다”라는 결구는 이 평론의 핵심을 관통한다.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으로 출렁이던 인간의 위대한 매일(늘상)이, 메트로폴리스라는 비정한 현실의 시스템에 의해 단단한 고체(입자)로 고착화되는 순간을 양자역학적 찰나로 포착해 낸 절창이다.
그러나 시인은 현실의 발굽에 짓밟히는 고통 속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는다. 은하수를 건너온 ‘별편지’라는 관측 장치를 통해 마침내 상자 밖으로 걸어나가, 부부가 서로 ‘손잡고’ 함께 ‘하늘 위 하늘’이라는 중첩된 차원의 스펙트럼을 온기로 채우며 걷기 때문이다. 이 시는 비정한 운명의 법칙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새로운 실존의 차원을 열어젖히는, 정밀하여 맛깔난 위대한 사유의 마스터피스다. (평론: 정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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