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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속죄 제물 예수
27: 1-8
1.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2.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찌며
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찌며
4. 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고리 넷을 만들고
5. 그물은 단 사면 가장자리 아래 곧 단 절반에 오르게 할찌며
6.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찌며
7.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찌며
8.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대로 그들이 만들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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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에 나타난 계시는 모두가 모형이나 상징으로 되어 있는데, 그 모형의 참형상과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이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인 것처럼, 성막 역시 장차 성막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렸고, 지난 시간에는 성막의 문에 담겨진 영적인 깊은 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막의 동쪽에 문을 내도록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막의 동쪽에 진을 쳤던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이 오직 하나이었던 것은 ‘유일한 구원의 문 되시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성막의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로 짰는데, 청색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곧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자색은 왕권을 의미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왕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홍색은 피 색깔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백색은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막 문으로 대답하면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우리 죄를 대신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고단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유일한 구원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성막의 번제단에 담겨진 깊은 진리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성막 문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약도라고 했습니다. 성막 문으로 들어가서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막의 문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번제단은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요? 번제단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속죄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성막 문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번제단에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제 번제단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번제단의 뜻
단은 ‘미쯔하바’라고 합니다. 이는 동물을 ‘학살하다, 죽이다’의 뜻입니다. 번제는 ‘올라’라고 하는데 ‘올라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동물을 죽여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사람이 긴급한 문제로 왕을 만나고 싶어 궁궐 앞에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관리가 못 들어가도록 막았습니다. 이때 어린아이 하나가 “왕을 만나고 싶으세요? 제가 만나도록 해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아이를 비웃으며 “네가 어떻게 왕을 만나게 할 수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어린아이는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왕의 아들 덕분에 왕을 만나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지엄한 왕을 만나볼 수 있었듯이, 번제단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는 유일한 문으로 들어가 피로 죄를 닦는 번제단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워지게 됩니다.
2. 번제단의 재료
번제단은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조각목은 아카시아나무의 일종인데 이는 무가치하고 버림받은 인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놋은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성경에서 놋은 저주와 승리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저주와 승리가 같이 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먼저 놋이 저주를 상징하는 말씀을 찾아보십시다.
신 28:22-23에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은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늘은 놋이 되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한재 곧 커다란 가뭄 재앙을 의미합니다.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하늘이 놋처럼 되는 가뭄은 얼마나 크나큰 저주입니까?
그런가 하면 놋은 승리로 상징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묘사할 때에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발은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놋처럼 강하고 능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왕상 4:13에 “바산 아르곱 땅의 성벽과 놋빗장이 있는 큰 성”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 놋빗장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강한 성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놋은 강한 것이기에 능력과 승리를 상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보지 않는 이들은 죽었습니다. 놋뱀이 장대에 매달린 것은 저주요, 그것을 쳐다보고 고침을 받은 것은 승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여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저주와 승리가 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이 놋으로 되어져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과 승리를 모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놋제단은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약하나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깁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능력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를 계시하는 모형입니다.
버림받은 조각목 같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각목을 놋으로 싸고 계속 불을 태우면 조각목이 타지 않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영국 소방서 당국에서 실제로 시험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금이 불에 녹는 온도는 섭씨 1069도 이고, 놋이 녹는 온도는 1085도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금보다 놋이 불에 강하였습니다. 실제로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불속에 넣어보았습니다. 결과는 조금도 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밀폐된 속에 있는 나무는 타지 않았습니다. 산소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뜨거워도 산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놋으로 싼 조각목은 결코 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로 싸여진 사람은 결코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이 브라질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대사가 간청해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는 그 사형수에게 미국 국기를 씌웠습니다. 그리고 “죽일 테면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차마 미국 국기를 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미국 국기에다 총질을 하면 커다란 외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기로 씌운 그 사형수는 그래서 살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어서 영원한 사형 언도를 받은 사형수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덮어져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들의 생명싸개가 되는 것입니다.
3. 번제단의 크기
번제단은 가로도 5규빗 세로도 5규빗이었습니다.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숫자입니다. 온갖 병자들이 모였던 베데스다 연못에는 행각이 다섯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죄와 이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고통스런 경험입니다. 짐승이 학살되어 타는 것은 고통의 모습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고통의 절정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인간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 때문에, 같이 고통당하는 자리가 바로 번제단 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인간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번제단은 죄 사함 받는 자리, 죄를 버리는 쓰레기장, 마귀와 이혼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번제단은 성막의 성물 중에 가장 큰 성물입니다. 죄 사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4. 번제단의 특징
번제단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번제단과 일치합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건물이 있지만, 사람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주는 곳은 오직 십자가가 있는 교회뿐입니다. 아무리 목욕탕에 들어가서 떼를 열심히 닦아도 죄는 닦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죄를 없이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병원에서 수술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수술하여 낼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교회만이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번제단에서 죄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번제단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제단은 4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번제단의 이 4 가지의 특징이 바로 교회의 4 가지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1)피
번제단의 첫 특징은 피입니다.
번제단 옆에서 잡은 제물의 피는 번제단 사면에 뿌려지게 됩니다. 번제단은 소 한 마리를 잡아 놓으면 꽉 차는 작은 곳입니다. 그런 적은 곳 사면에 피를 계속 뿌렸습니다. 그래서 번제단의 특징은 피입니다. 피가 없는 번제단은 번제단이 아닙니다. 제사가 없는 번제단 제물이 죽지 않는 번제단, 죄인이 오지 않는 번제단은 이미 번제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뿌리는 번제단 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특징은 피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무시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이 없어도, 피아노가 낡았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면 그 곳이 바로 교회가 됩니다.
2)불
번제단의 두 번째 특징은 불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돌단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전으로, 성전에서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돌단에는 항상 하나님의 불이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돌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횃불이 내려와서 지나갔습니다.
창 15:17에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성막을 만들어 놓았을 때에 번제단에 하나님이 불을 주셨습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 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 나와 단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고 했습니다.
로몬이 성전을 지어 놓고 첫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대하 7:1-2에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으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약의 교회가 시작될 때에도 불같은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행 2:1-4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같이 돌단의 시작은 불이었습니다. 성막의 시작도 불이었습니다. 성전의 시작도 불이었습니다. 교회의 시작도 불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관의 시작은 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불이 뜨겁게 타오르는 곳이어야 합니다. 불꽃이 없는 불은 불이 아닌 것처럼, 성령의 불로 뜨거운 열정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단에 불을 주셨다는 것은 제물을 받으시고 죄인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동쪽의 번제단과 서쪽의 속죄소는 멀었습니다. 제물이 불에 타는 순간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나폴레옹을 태운 말이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목숨을 걸고 달려가 그 말을 진정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너는 장교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병사는 장교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한 대위가 “너는 사병이니 사병석으로 가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때 그는 “나는 장교입니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대위는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습니다. 사병은 “나폴레옹 황제가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황제가 장교라고 하는데 누가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롬 8:32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상 상천하지에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3)뿔
번제단의 세 번째 특징은 뿔입니다.
번제단의 네 뿔은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실용적인 면이요 다음은 영적인 면입니다. 먼저 실용적인 면에서 본다면 시 118:27에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네 뿔은 희생 동물의 사지를 묶기 위하여 필요했습니다. 다음으로 뿔은 능력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번제단의 뿔만 붙들면 생명을 얻었습니다.
솔로몬 왕에게 반역한 아도니야가 도망가서 제단 뿔을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반역자는 즉시 사형감이었습니다. 이때 병사가 아도니야를 잡으러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 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이 보고를 받은 솔로몬 왕은 아도니야를 살려 주었습니다. 이처럼 제단 뿔은 생명의 뿔입니다.
이와 같은 번제단의 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눅 1:69절에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붙잡기만 하면 그는 살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번제단에는 네 개의 뿔이 있습니다. 한 개로도 족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동서남북에 한 개씩 네 개의 뿔이 달렸습니다. 복음은 동서남북으로 다 전파되어야 합니다. North(북) East(동) West(서) South(남)의 첫 글자는 News입니다. 복음만큼 큰 뉴스는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에게 가장 큰 뉴스는 역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은 혈통과 민족과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다 미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골고루 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영원한 사형수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가장 기쁘고 가장 놀라운 뉴스 중의 뉴스인 것입니다.
4)채
본문 6-7절에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지며”라고 했습니다.
광야에 세워진 성막에 있는 제단은 이동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들어서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다니게 되어 있는 채는 둘이었습니다. 한 개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도 두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 15:3-4절의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신 말씀처럼, 복음은 두 부분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 것입니다.
그것은 균형을 유지해 주며 서로 보충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는 부활과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죽음은 참으로 헛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것이니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오늘날도 살아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면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롬 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성막의 뜰 안에 있는 첫 번째 성물은 번제단인데 죄인들이 희생 제물을 불태워 바침으로 죄를 용서받는 곳을 가리킵니다. 구약 시대에 번제단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갔던 무수한 희생 제물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유일한 속죄 제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이 번제단은 다른 말로 놋제단이라고도 하는데, 놋은 심판과 저주 그리고 승리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그래서 죄와 죽음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구원의 뿔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아서 마귀와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시기를, 인류의 유일한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