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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학
중관사상과 더불어 대승의 기본 사상
현장이 ‘유식론’ 번역후 법상종 생겨
“모든 것은 식(識)뿐이고 경계는 없다.
육진(六塵)이 없는 것인데 허망하게 있다고 보는 것은 사람의 눈에 병이 나면 헛것이 보이는 것과 같다.”
이 말은 <유식론>에서 유식의 대의를 밝혀 놓은 말이다.
<유식론>은 세친(世親, Vasubandhu)이 지은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해석한 책으로 호법(護法)을 비롯한 십대
논사들의 주석을 취합한 것이지만 호법의 설을 정설로 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줄여 <유식론>이라 부른다.
대승불교의 2대 사상체계를 흔히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라 하는데 <유식론>이 바로 유식사상의 근거가 된다.
중관사상은 용수의 <중론>을 근거하여 일어난 사상이라면 유식사상은 미륵으로부터 이어진 무착이나 세친의 사상이
체계화 된 것이다.
무착과 세친은 형제 사이로 무착이 형이고 세친이 동생이다. 밑에 사자각이란 동생이 또 있어 삼형제가 모두 출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친은 처음 소승교의에 통달 설일체유부의 근본성전이라 할 수 있는 <구사론>을 지었다. 그러나 뒤에 형 무착의
권유로 대승으로 전향하여 <유식삼십론>외에도 <금강반야경론> <변중변론> <섭대승론> <불성론> 등 많은 대승론서를
짓기도 하였다.
그를 천부논사(千部論師)라 부르게 된 것은 대.소승에 걸쳐 많은 분량의 논서를 지었기 때문이다.
<유식론>1권 서두에 논을 지은 목적을 서술하면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모르는 자들에게 유식설을 설하여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두 가지 장애를 끊어 대보리와 대열반을 증득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는 인도 부파불교시대의 자아를 인정하고 법을 인정하던 일체유부 등 여러 부파의 설을 정면으로 비판한 말이다.
이른바 아비달마불교는 업(業, Karma) 위주의 설명이었으므로 모는 것을 유(有)의 견지에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일체유부라는 부파의 이름이 이것을 말한다.
연기설에서도 업감연기설이 제일 먼저 나온 연기설이다.
그러나 업 이론이 한참 유행된 뒤에 이 업이 어디에 저장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를 연구하다 새로운 단어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란 말이 등장하였다. 이 말이 나오고부터 연기의 주체가 업
에서 아뢰야식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아뢰야연기설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뒤에 다시 진여연기설이나 법계연기설이
나왔지만 유식사상은 아뢰야연기설은 설하고 있다.
유식론 2권에서 4권까지는 바로 이 아뢰야식을 설명한다. <능가경> <해심밀경> 등의 경 구절을 인용해 아뢰야식을
설명하고 다음에는 말나식(末那識)을 설명하고 있다.
아뢰야식을 초능변식이라 하고 말나식을 제2능변식이라 하며 이렇게 제3 능변식까지를 설명한다.
이렇게 하여 식(識)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주체라 하여 ‘만법이 오직 식뿐이다’(萬法唯識)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 것이 <유식론>의 대의이다.
논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유가행파의 수행계위인 오위(五位) 곧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를 설하고 있다.
<구사론>에서는 만유제법을 5위 75법으로 설명했으나 <유식론>에서는 5위 100법으로 나누어 법의 수를 늘려 놓았다.
이 <유식론>을 현장삼장이 번역하고부터 중국에 유식학이 크게 일어났다.
일찍이 현장이 천축에 들어가 나란타사에서 계현논사로부터 유식학을 배웠다. 16년의 천축 체류를 끝내고 중국으로
귀국한 후 그는 역경에 종사하여 많은 경론을 번역하고 성유식론을 번역한 후 제자들과 함께 유식학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이리하여 유식종이라 할 수 있는 법상종이생겨났다.
유식삼십송
유식이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준말이다.
오직 의식만이 존재하고 외계에 실재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일체는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역사적인 전개의 과정에서 보면, 유식학파는 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부학파와 일체가 공(空)이라는 중관학파의
입장을 모두 비판한다.
유부학파는 상식을 옹호하여 외계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다. 이것을 소박한 실재론이라 치부한다.
소박하다는 말은 실제로 대상이 외계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반성적인 비판을 하지 않는 채 관습적으로 외계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유식학파는 외계 존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이 반영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유식학파는 모든 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중관학파의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외계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마음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꿈을 꾸는 의식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일상의 상식을 설명할 수가 있고, 누구나 힘들어하는 고통의 발생과 그 소멸을 설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유식학파는 미륵(Maitreya)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미륵이 실존했던 인물인가에 대해 학계에서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다.
그의 생몰 연대가 350-430 경이라곤 하지만, 오히려 역사상의 인물이기보다는 신화적인 인물에 가깝다.
이를테면 미륵의 저작으로 알려진 『유가사지론』의 경우도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참여하였고, 저작시기도 일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유식사상을 실질적으로 조직한 인물은 무착(Asanga)이었다.
무착의 대표적인 저술은 『섭대승론』이다.
『유가사지론』이 초기 유식사상의 성립을 보여준다면, 『섭대승론』은 아뢰야식, 삼성설, 유식수행론 등 실질적인
유식사상을 본격적으로 체계화시킨 저술로 평가된다.
다음으로 유식사상에서 중요한 인물은 바로 세친(Vasubandhu)이다.
세친은 무착의 친동생이다. 세친은 본래 유부학파에 속하였고, 나중에는 『구사론』과 같은 경량부적 관점의 저술도
남겼지만, 형의 권고로 끝내는 대승불교로 전향하였다.
세친은 방대한 유식사상을 간결하게 게송으로 정리함으로써, 유식사상의 대중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유식이십론』과 『유식삼십송』이다.
특히 『유식삼십송』은 짧은 게송의 형태인데, 깊고 넓은 유식사상을 매우 간결하게 잘 표현한 명작으로 손꼽힌다.
이후 유식사상은 실질적으로 『유식삼십송』을 중심으로 십대논사들이 많은 논쟁을 하면서 전개되었다.
본 연재에서는 『유식삼십송』을 강의하고자 한다. 물론 과거에도 그렇지만,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세친의
『유식삼십송』은 해설되고 강의가 되었다.
본 연재에서는 심리학혹은 심리치료적 관점에서 해설하고, 쟁점이 되는 부분은 호법의 『성유식론』의 입장을 존중
하여 연재하고자 한다. 관심 있는 여러분의 동참을 기대한다.
자아와 세계는 갖가지의 양상으로 전개되지만 /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설로서 의식에 의한 전변의
결과이다 /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의식에는 단 세 종류가 있다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위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첫 번째 게송이다.
이것의 요점은 ‘오직 유식(唯識, Vijnapti-matra)만이 존재하고, 자아와 법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의식에 의한 전변(轉變, Parinama)에서일 뿐이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게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식(識), 의식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의식으로 번역되는 용어는 Vijnana와 Vijnapti가 있다.
이 두 용어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학자들은 이들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한다.
Vijnana는 인식의 주체, 혹은 인식작용 자체를, Vijnapti는 인식 작용에 의한 결과로서 표상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유식(唯識, Vijnapti-matra)이란 용어의 정확한 번역은 ‘자아와 세계는 오직 의식의 표상으로서 존재할
뿐이다’가 된다.
유부(有部)학파의 주장처럼, 우리의 상식은 자아와 세계[法]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중관(中觀)학파는 자아와 세계는 실제로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고 주장을 한다.
자아와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은 중관학파의 주장에 당혹스럽고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자아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서로 의존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는 존재성이 결여돼 있다는 점을 이해할지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살아갈 때 또 다시 유부학파의 관점으로 되돌아가 대상에 집착되어 버린다.
왜 그럴까? 이것을 설명해주는 개념이 바로 유식(唯識, Vijnapti-matra)이다.
자아와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의 지평에서 나타난 ‘표상’일 뿐이다.
여기서 자아와 세계는 다만 마음에 의해서 구성된 영상, 개념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
둘째로 설명되어야 할 중요한 개념이 식전변(識轉變, Vijnana-Parinama)이란 용어이다.
식전변이란 ‘식에 의한 변화’란 의미로서, 의식이 상호 인과의 관계를 가지면서 상속, 지속될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식전변에는 표층과 심층의 2가지 의미가 있다.
표층적인 수준에서 보면, 인식하는 주체로서 표상되는 자아[我]와 인식의 대상으로서 표상되는 세계[法]가 모두
의식의 전변에서(Pariname, 처격으로 사용됨) 발생된다는 점이다.
게송에서 자아와 세계란 일종의 가설(假設, upacara)인데, 가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을 임시
존재로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임시로 설정하여 개념화되었음을 표시하는 용어가 전변이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투사나 동일시의 현상과 유사하다.
투사란 내적 심리적 사실을 외적인 존재로 귀인 시키는 현상이고, 동일시는 내적 경험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
한다.
인식의 대상을 세계라고 보는 것은 투사이고, 인식하는 심리적 경험을 자아로 집착하는 것은 동일시의 현상이다.
이것들은 사실 의식의 전변에서 나타난 표상으로서의 가설인데도 우리는 그것들이 실제로 외계의 존재라고 투사하고
그것을 자아라고 집착하여 동일시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자아와 세계의 표상은 역사적인 시간을 따라 실제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된다.
그것은 경험내용을 저장하는 아뢰야식, 사량하는 말나식 / 그리고 대상을 표상하여 인식하는 요별식 등
세 가지이다 / 첫째의 아뢰야식은 이숙 혹은 일체의 종자식이라고도 한다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위는 『유식삼십송』의 두 번째 게송이다.
여기서 식전변의 주체는 경험한 내용을 저장하는 아뢰야식(阿賴耶, 8식), 끊임없이 사량하는 말나식(末那, 7식), 대상
으로 표상하는 요별식(了別, 6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마음작동의 세 층위이다.
아뢰야(alaya)식에서 아뢰야로 음역된 Alaya의 어원은 a-lI로서, 심리적으로 어떤 대상을 ‘집착한다’는 것과 경험
내용을 ‘저장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집착의 의미는 주로 초기불교에서는 사용되고, 저장의 의미가 부각된 것은 유식학파에서 비롯되었다.
심리적인 현상에서 집착과 저장은 서로 전혀 다른 개념은 아니다.
우리는 집착의 대상을 마음에 담고 정확하게 기억하지만, 관심이 없는 부분은 전혀 기억이 되지 못한 경우를 보면
이점을 알 수가 있다.
아뢰야식의 기능을 이숙(異熟, vipaka)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숙이란 말 그대로 시간에 따라서(異) 과일처럼 익어
간다(熟)는 뜻이다.
집착되어 저장된 경험내용들은 어떤 잠재적인 힘을 가진 씨앗처럼,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점차로 익어가서 행동으로
표출됨을 함축한다.
여기서 점차로 익어가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잠재적인 힘을 ‘종자(種子, bIja)’라고 부른다.
이것은 반복된 행위의 원인이 되거나 혹은 그 결과로 나타난 기운이기 때문에, 습기(習氣, vasana)라고도 한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면, 잠재의식 속에서 식당으로 가는 행위가 발생된다. 식당으로 발을 옮기게
하는 내적인 공능은 반복된 행위의 결과로서, 아뢰야식에 저장된 기운이다.
무착은 『섭대승론』에서 종자의 유형을 ‘언어적인 사유작용’, ‘자아의식’, ‘선악의 윤리적인 행위’ 등 세 가지로 분류
하고 있다.
사량(思量)이란 제7식을 말한다.
보통 제7식을 말나(末那)식이라 한다. 이것은 ‘생각하다’는 의미의 man의 명상형인 manas의 음역이다.
이것의 특징은 끊임없이 ‘사량’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근대적 의미의 개인의 특징을 사유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곧 사유한다는 것은 바로 나의 존재의 증거
라고 본 것이다.
제7식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잠재화된 힘을 기반으로 하여, 전변에 의한 표상된 세계를 끊임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량의 주체적인 입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생각하는 자아의 본질은 불안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량한다.
생각을 생각하면서 실존의 안정성을 확보할 것으로 믿지만, 그럴수록 자아는 더욱 불안하여 진다.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별(了別)식은 제6식을 말한다. 색깔, 냄새와 같은 대상을 인식하여 구별한다는 의미에서 요별(了別)이라고 한다.
감각기관에 기초한 의식은 현재에만 관련되지만, 제6식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관념을 가진다.
인식의 과정에서 저기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표상하고, 그것을 언어와 결합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감각기관은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지만, 결코 그것을 표상하여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을 언어와 결합시키는 것은 바로 제6식의 역할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작동은 세 가지 계층으로 분류된다. 가장 심층에 존재하는 것이 아뢰야식이고, 인식대상을 향하
여진 요별식이 표층의 작용이라면, 이런 경험내용을 사량하여 조직화하는 일은 말나식이 담당한다.
이들은 모두 마음 그 자체로서 각각 별도의 몸통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들의 몸통은 하나로서 작용하는 기능에 따라서 구분할 뿐이다.
아뢰야식의 대상은 알기가 어려운 집수(執受), 처(處), 요별(了別)이며 / 항상 접촉, 작의(作意), 감정, 생각,
갈망의 마음현상과 상응한다 /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아뢰야식은 가치중립적 태도에 취한다.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이것은 세 번째 게송이다.
여기서는 마음작동의 3가지 층위 가운데 아뢰야식을 설명한다.
첫 번째 구절의 집수(執受), 처(處), 요별(了別)은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이다.
이것들이 알기가 어렵다고 한 것은 표층적 수준이 아니라 광대한 심층적 수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수(執受, upadi)는 말 그대로 가져[執] 지녀서[受] ‘보존하다’ 혹은 ‘유지하다’는 의미이다.
아뢰야식이 가져지니는 대상은 ‘종자’와 ‘신체’, 2가지가 있다.
종자는 과거의 반복된 경험내용으로 『성유식론』에서는 ‘표상’, ‘개념’, ‘분별’과 같은 언어적 습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신체는 특히 감각기관을 말한다.
감각기관은 표층적 수준이지만, 신체를 유지하는 의식은 심층적인 수준이다.
만약 죽은 시체는 감각기관은 존재하지만, 그곳에 의식이 존재하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종자는 마음을 말하고 신체는 몸을 말한다.
몸과 마음의 생명현상을 보존하고, 양자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아뢰야식이라는 말이다.
처(處)는 아뢰야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활동공간을 말한다. 이를 기세간(器世間), 혹은 의보(依報)라고 한다.
기세간이란 산하대지, 넓게는 우주를 말한다. 의보(依報)란 의지하여 나타난 결과로서, 아뢰야식의 전변에 따르면,
세계는 아뢰야식에 의해서 구성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원인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장소란 아뢰야식이 전변하는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요별(了別)은 대상을 인식하는 아뢰야식의 활동을 가리킨다. 아뢰야식은 대상을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으로서 그
활동의 방식으로 삼는다. 이런 활동의 결과로서 자아와 세계의 표상이 형성되고 전개된다.
두 번째 구절은 아뢰야식과 항상 상응하는 보편적 마음현상[遍行心所]을 설명하고 있다.
아뢰야식은 직접 관찰할 수가 없지만, 이에 상응하는 접촉(觸), 작의(作意), 감정(受), 생각(想), 갈망(思) 등을 탐색
함으로써 인식할 수가 있다.
접촉[觸, sparsa]이란 감각기관[根], 대상[境], 의식[識] 등이 화합(和合)하는 것을 말한다.
작의(作意, manaskara)는 접촉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마음의 기울어짐이다.
『성유식론』에서는 대상에 대한 경각심(警覺心)이라고 정의한다. 경각이란 놀라서 느끼는 마음으로, 마음이 대상을
향하는 것을 뜻한다.
느낌[受, vedana]은 순(順)경계에 대해서는 즐거움을 느끼고, 역(逆)경계에 대해서는 불편이나 싫음의 느낌을 받는다.
불편한 느낌은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집착하게 된다.
생각[想, samjna]이란 대상에 대한 표상, 이미지 등을 취하여, 그곳에다가 이름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대상을 한정
시키고 구별하여, ‘이것은 무엇이다’고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갈망[思, cetana]은 바로 무엇을 하고자하는 바램이나 욕구를 의미한다. 대상에 대해서 선과 악을 판단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을 조작하고 자기 방식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이들은 아뢰야식의 전변으로서, 모든 마음이 존재할 때[時]는 반드시 함께 존재하며, 어떤 마음이 일어나면 이들
역시 함께 일어나며[俱], 선악(善惡)의 모든 가치판단에 관련되어 있으며[性], 이들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이선(二禪)까지 함께 작용(地)한다.
하지만 제8식 그 자체는 선악에 물들지 않고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물들어진 행위종자를 찾아 해방시키는 작업은 바로 이들을 중심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아뢰야식은 유복(無覆)과 무기(無記)의 성격을 가지며 접촉[觸] 등의 변행심소(遍行心所)도 마찬가지이다.
아뢰야식은 항상 폭류처럼 변하고, 아라한의 지위에서 소멸된다.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暴流 阿羅漢位捨)
위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제4송이다.
제3송과 마찬가지로 아뢰야식의 성격을 설하는 게송이다. ‘아뢰야식은 무복(無覆)과 무기(無記)의 성격을 가진다’는
제1구에서, 『성유식론』에 의거하면, 무복(anivrta)은 성인의 길을 덮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무기(avyakrta)
는 선악을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아뢰야식이 대상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명상수행을 방해하지 않고, 또한 선악의 결정이 없기 때문에 경험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창고처럼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오고 감을 그냥 그대로 수용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만약 창고가 스스로 가치를 판단하거나 선악을 구별한다면, 창고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제2구에서 ‘접촉(觸) 등의 보편적 마음현상(遍行心所)도 마찬가지이다’는 구절은 접촉, 작의, 감정, 생각, 갈망 등도
아뢰야식과 상응하는 마음현상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역시 무복이고 무기의 성품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감정이나 생각과 갈망이 대상에 물들지 않고, 선악의 결정을 할 수 없는 마음현상이라고 한 점은 조금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감정, 생각, 갈망은 이미 대상을 향하여 물들어 있고, 벌써 선악의 가치판단을 함축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자체로는 선악의 가치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단지 그것들을 자아가 평가하고 해석할 때에,
비로소 선악의 가치에 물든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감정, 생각, 갈망에 대해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아뢰야식이 아니라, 제7식의 자아의식이라는 것이다.
성남의 감정 그 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지만, 자아가 그것을 의식하고 평가하는 순간, 그곳에는 가치가 개입되어
죄책감이나 자책으로 물들게 된다는 의미이다.
제3구는 아뢰야식은 폭류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음을 언급한 대목이다.
이것은 아뢰야식이 어떤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 고정된 어떤 실체를 가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것의 존재는 항상하지만, 끊임없이 변천하여 흐르는 폭류에 비유된다.
촛불은 그 자체로 영속적인 존재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끊임없이 초물이 흘러서 불꽃으로 변화된다.
마찬가지로 흐르는 강물도 항상된 존재로 보이지만 계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생명의 흐름을 상징한다.
만약 거친 강풍이 불어 닥치면, 거친 파랑이 일어나면서 강물은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이때 거친 강풍은 제7식에 해당
된다. 제7식은 새로운 종자를 뿌리고, 제8식의 강물은 그 씨앗을 수용하여 저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연에 따라서 밖
으로 드러난다. 이런 과정이 폭류의 비유이다.
마지막 제4구는 아라한의 지위에서 아뢰야식은 그 성격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그 자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된다. 다시 말하면 말라식에 의한 선악의 분별에서 오는 번뇌가 사라진 점에서 ‘집착한다(執臧)’는 의미의 명칭을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성유식론술기』에 의거하면, 소멸된 것은 무겁고 거친 번뇌가 사라진 것이지, 이것이 근본적인 깨달음을 의미
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의 능변(能變)이다. 이 식은 말라식(末那識)이라고 이름한다 / 말라식은 아뢰야식에 의지
하여 전변하여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 말라식은 사량하는 것을 성품과 행상으로 삼는다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이것은 제5송이다.
말라식은 제7식으로 의(意, manas)로 번역이 된다.
의식(意識)으로 이해되는 제6식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말라식으로 음역하여 자주 사용된다.
『성유식론』에서는 말라식의 성격을 ‘항심사량(恒審思量)’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항(恒)사량과 심(審)사량으로 구별
된다.
항(恒)사량이란 ‘사량’의 항상성을 의미한다. 이점은 전5식과 제8식은 사량하지 않지만, 제6식과 제7식은 사량하는
기능을 가진다. 제6식의 경우는 언어로서 사량하지만, 항상 사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7식은 단절 없이 계속적으로 사량한다는 점에서 항사량이라고 한다.
이것이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心所)은 감정, 생각, 갈망 등으로 이것을 ‘나’
라고 동일시하여 집착하고 ‘나의 것’으로 분별하고 그것의 상실을 염려한다.
심(審)사량이란 아뢰야식 자체를 자아로 사량하는 작용이다. 아뢰야식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제7식은 변화하는 강물을 변하지 않는 존재로 사량한다. 이는 마치 ‘모든 사물은 변화하지만, 변화하는 그 자체는 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변화하지 않는 그것을 존재로서 판단하고, 스스로 그것을 자아라고 집착한다. 이점들은 범주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사물이 변한다’고 하는 판단과 그 문장에 대한 판단이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를 판단하고 사량
하는 존재자를 가설하여 제7식은 그것을 자아라고 잘못된 인식을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항심사량은 인지왜곡의 한 형태이다.
위의 게송에서 능변(能變)이란 능히 변화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사량하고 자아라고 집착함으로써, 제7식은 자아와
구별되는 타자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서 자아와 타자가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중생과 그 세상을 능동적으로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때 제7식이 전변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이 바로 아뢰야식(依彼轉緣彼)이다.
따라서 아뢰야식과 말라식은 매우 밀접한 관계(俱有依)를 유지한다.
이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성유식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종자의(種子依)로서, 제7식의 사량은 반드시 아뢰야식의 종자에 의존하여 발생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연의(因緣依)라고 한다. 원인은 같은 계통의 종자이고, 조건은 그 씨앗에서 새싹이 돋게 하는 주변 환경을
말한다. 이때의 환경이란 물리적인 조건이기보다는 심리적인 환경이 크게 작용한다.
둘째는 증상의(增上依)이다. 양자는 서로 의존되어서 더욱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말라식이 아뢰야식 종자의 출현에 의지하여 활성화하듯이, 아뢰야식 종자의 출현은 다시 말라식에 의해서 새롭게
전변하여 흡습된다.
양자는 서로 의존되어서 역동성을 창조한다. 이점은 고통발생의 그 역동적인 구조를 탐색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해탈, 곧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가 있다.
셋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다. 순간 발생되어 순간 소멸하는 의미로서, 선후관계에서 유사성(等)과 연속성(無間)을
말한다.
유사성은 같은 종류의 경험을 상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레몬향기는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상기시키거나 아니면 슬픈 음악과도 결합될 수도 있다.
레몬 향기는 어떤 경험을 촉발시킨다. 그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함께 이루어진 간격이 없는 시간적인 경험다발을 말
한다.
연속성이란 현재의 레몬향기와 과거의 경험사이에는 유사성에 근거한 어떤 심리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고통발생의 형태나 과정을 탐색하는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7식은 4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한다.
그것은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이다.
이밖에 접촉 등 5가지의 보편적 마음현상과 8가지의 거친 번뇌,
특별한 마음현상 가운데 지혜 등은 제7식과 상응한다.
(四煩惱常俱 謂我癡我見 幷我慢我愛 及餘觸等俱)
이것은 제6송이다.
여기서는 말라식과 상응하는 번뇌와 마음현상을 설명한다.
우리가 자아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유식불교에서는 바로 말라식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치(我癡), 아만(我慢), 아견(我見), 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를 파생시킨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아치’란 무명(無明)이며, 자아의 상에 어리석고, 자아 없음의 이치에 미혹되어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무명은 ‘밝지 않음’으로 자각, 깨달음의 결여를 말한다.
이렇게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탐욕(貪), 어리석음(癡), 교만9慢), 의심(疑) 등과 같은 일체의
번뇌들이다.
두 번째는 근본적으로 항상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탐욕이나 의심을 일으킬 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탐욕의 대상을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자아는 자기의 상을 만들고 그것을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은밀한 노력이 있다는 말이다.
‘아견’이란 아집이다. 육체와 정신을 자기라고 집착함을 말한다. 모든 것에 자아가 없어, 인연법임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견해를 만들어낸다.
‘아만’이란 타인에게 교만하고 오만하여 타인을 경시하고 스스로 지고하다고 마음을 일으킨다.
‘아애’는 자기에 대한 애착이다. 나르시스즘에 해당되는데, 나라고 집착하는 바에 탐착을 일으킨다.
이렇게 제7식은 항상적으로 자아에 집착하므로 이들 네 가지 번뇌(四煩惱)가 늘 함께 한다.
이들 4번뇌는 근본적인 번뇌이다.
이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세친은 무명, 곧 아치가 아견·아만·아애를 순차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본다.
반면에 안혜는 아치가 아견을 만들면, 아견이 다시 아만과 아애를 병렬적으로 발생시킨다고 본다.
하지만 아치가 근본적인 번뇌의 뿌리라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런 점에서 간화선에서 ‘무엇이 나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효과적인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서 자아의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제7식과 함께 하는 것은 접촉, 작의, 느낌, 생각, 욕구라는 다섯 가지의 보편적 마음현상(遍行心所)이다.
이들 마음현상을 보편적이다고 한 이유는 이것들은 일차적으로 제8식의 종자와 상응하지만, 늘 제7식과도 함께 하고,
또한 제6식과도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8식에 근거하여 발생하며, 제7식에 의해서 경험된다. 이를테면 느낌은 그 자체로 선악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판단하고 자아의 소유로서 집착함으로써 고통으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제7식에 의한 영향이다.
그밖에 제7식과 관련된 마음현상은 근본번뇌에 뒤따르는 여덟 가지의 번뇌(八大隨煩惱)와 의욕, 뛰어난 이해, 알아
차림, 선정, 지혜 등의 특별한 마음현상 가운데 지혜(慧)가 여기에 속한다.
여덟 가지의 번뇌란 삼보에 대한 불신, 정진을 소홀히 하는 해태, 대상에 대한 집중력의 결여인 방일,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하여 통찰을 방해하는 혼침, 마음의 평정을 방해하는 흔들림, 알아차림을 놓치는 실념, 바른 이해가 없는
불정지(不正知), 삼매가 없는 산란 등이다.
또 특별한 마음현상은 마음성장을 돕는 5가지로, 이 가운데 7식과 상응하는 ‘지혜’는 관찰의 대상(所觀境)에 대한
분별(簡別)과 그것에 대한 분명한 결정(決擇)의 능력이다. 하지만 이때의 지혜는 출세간의 조건 없는 지혜는 아니다.
말라식은 유복무기에 속하며,
태어나는 곳에 따라서 그곳에 소속되고,
아라한의 경지인 멸진정에 들어가서
출세간의 도를 성취하여야 소멸된다.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이것은 제7송이다. 여기서 유복무기란 말라식의 성격을 말한 것이다.
유복이란 번뇌의 덮음(覆)이 있어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지혜가 장애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는 선악의 가치판단을 기록할 수가 없는 무기(無記)라고 말한다. 자아의 분별은 그 자체로는 선악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번뇌를 일으키고 스스로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윤회는 반드시 요청되는 불교의 세계관은 아니지만, 대승불교 이후로 윤회는 중요한 논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윤회는 천상, 인간, 축생, 아귀, 아수라, 지옥의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말한다.
자신이 태어나는 곳에 따라서, 자아의 이미지가 결정된다.
이를테면 축생은 축생의 표상에 대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따라서 각각의 정체성을 결정되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말라식이다.
위의 게송에서 제3구와 제4구는 말라식을 어떻게 정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정화란 오염된 물을 맑게 바꾸는 일이다. 물론 더러운 물이나 깨끗한 물이나 동일하게 물이다.
제7식을 비롯한 모든 식은 무기로써 그 자체로 번뇌는 아니지만, 물들어진 관계로 지혜로 전환되기(轉識得智) 위해
서는 일정한 형태의 명상수행이 요청된다. 제7식은 조복(調伏), 소멸(消滅)을 거쳐서 마침내 평등성지(平等成智)를
이룬다.
조복이란 번뇌가 활성화되지 못하도록 하는 작업이라면, 소멸은 고통을 완전하게 없애는 것이다.
조복이 마치 잡초를 일시적으로 눌러놓은 것 같은 상태를 말한다면, 소멸은 근본적으로 그 뿌리를 완전하게 근절
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 각각의 차별성이 없는 평등한 지혜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제7식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은 우선 자아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철저하게 자각함으로써 벗어날 수가 있다.
아라한은 바로 자아의 허구성을 터득한 단계이기 때문에, 조복의 단계라고 할 수가 있다.
자아에 대한 조복은 감정(受)과 사유(想)라는 두 가지의 번뇌를 소멸한 상태(滅盡定)를 말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종자의 뿌리를 잘라내지 못하였기에, 아직은 소멸의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다.
선정이나 좌선의 상태에 있을 때는 번뇌가 단절된 듯이 보이지만, 일상에서 대상에 부딪치면 다시 종자가 활성화
되어(現行) 번뇌가 일어난다.
그래서 아라한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가 없다. 일상의 삶과 출가의 생활이 온전하게 통합된 출세간의
도를 얻어야 비로소 번뇌는 완전하게 지혜가 된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번뇌가 그대로 진리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아견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法我見)이다.
아견은 아뢰아식에 의지하여 제7식이 일으킨 내용이고, 법아견은 잠재의식의 종자를 인연하여 일어난다.
아뢰야식의 주체적인 애착을 ‘자아’라 하고, 그것이 표층에로 현행되는 현상으로서 종자를 세계라고 하는 집착이
그것이다.
이 양자를 모두 벗어나 정화될 때를 출세간도(出世間道)라 한다.
이때야 비로소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장애 없는 지혜를 얻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한계가 있고, 간화선의 수행에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감정이나 생각을
다루는 표층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본성을 자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간화선은 아뢰야식 종자의 심층수준까지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세 번째의 의식이 있다.
여기에는 여섯 종류의 차별이 있다.
대상을 요별(了別)하는 것을 성격으로 삼고,
착함[善]과 착하지 않음[不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마음현상과 상응한다.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이것은 제8송이다.
여기서는 마음작동을 주도하는 세 번째의 의식인 육식(六識)의 성격을 설명한다.
육식의 성격과 기능을 보통 요별(了別)로 호칭한다. 요(了)란 각각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별(別)이란 대상
을 인식할 때 감각기관에 따른 차별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眼耳鼻舌身意] 등의 감각기관은 각기 서로 다른 대상을 인식한다.
눈은 색깔을,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감촉, 마음은 마음의 대상을, 각각의 기관에 따라서 각기
상응하는 대상을 가진다.
이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그에 상응하는 대상과 의식이 결합되면서, 인식이 성립된다.
이것을 감각[根], 대상[境], 의식[識]의 세 가지가 만나서 접촉을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삼사화합촉(三事和合觸)’
이라고 한다.
이렇게 접촉이 있으면, 다음으로 느낌이 발생된다.
예를 들면, 가을 하늘을 보면, 마음에서 청명하게 느낀다고 할 때, 대상은 푸른 색깔이고, 감각기관은 눈이고, 여기에
의식이 결합하면서 접촉이 성립되고, 청명한 느낌이 발생되었다고 설명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감각기관에 따라서 발생된 느낌은 여섯 종류가 있고, 그 맛의 종류는 즐거운 느낌, 불편한 느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느낌 세 종류가 있다.
이에 따라서 행위를 하게 된다. 즐거운 느낌에는 탐착을, 즐겁지 않는 느낌은 혐오와 함께 도피의 행동을 한다.
이런 행위는 윤리적 가치에 따라서 착함, 착하지 않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 등 세 종류로 다시 분류한다.
여기서 눈, 코, 귀, 혀, 몸과 관련된 다섯 가지 의식을 마지막 여섯 번째의 의식과 구별하여, 전자를 전오식(前五識)이
라고 부른다.
전오식은 세 가지의 중요한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각기 상응하는 대상이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점이다. 색깔을 보는 것은 눈이지, 귀로 색깔을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둘째는 외적인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수동적이라는 의미는 경험내용을 해석하거나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항상 현재의 시점에서 작용된다는 점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대부분의 마음작용이 미래나 과거에 매달리기 때문에 명상수행은 바로 현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삶을 보다 윤택
하게 한다.
반면에 여섯 번째의 의식, 제6식은 전오식과 비교할 때, 첫째는 언어적인 표상작용을 하고, 둘째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셋째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통괄하는 역할을 한다.
제6식의 언어적인 기능은 제7식의 자아의식과 결합함으로써 경험내용을 조직하고 해석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것은 다른 동물과 다른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을 부여하지만, 또한 많은 인지의 왜곡과 감정적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이상으로 아뢰야식, 말라식, 육식 등은 마음작동을 주도하는 세 의식이다.
이들은 보통 심ㆍ의ㆍ식(心意識)이란 용어가 동의어로서 혼용된다. 대체로 초기불교의 경전이나 『청정도론』과
같은 남방 상좌부 전통에서는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반면에 『구사론』 이후로 북방의 유식불교 전통에서는 엄격하게 그 기능에 따라서 구별하여 사용한다.
심(心)은 정보를 기억하는 제8식을 말할 때, 의(意)는 자아를 사량하는 7식, 식(識)은 대상을 요별하는 경우를 가리킬
때에 사용한다.
마음작용은 51개로 제 6식과 모두 상응
일상적응 수준이지만 ‘불편한 마음상태’
제6식에 상응하는 마음현상은 보편적 마음현상, 특별한 마음현상, 착한 마음현상, 근본적인 번뇌의 마음현상,
뒤따르는 번뇌의 마음현상, 선악을 결정할 수 없는 마음현상 등이다.
이들은 모두 즐거운, 불편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세 가지의 느낌에 상응한다.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定 皆三受相應)
이것은 제9송이다.
여기서는 제육식에 상응하는 마음현상을 말하고 있다. 제육식은 모든 마음현상에 상응한다.
마음현상의 6가지 범주 총 51개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첫 번째는 보편적인 마음현상이다. 마음이 대상을 접촉(觸)하면 종자가 활성화(作意)되면서 감정(受), 생각(想),
갈망(行)이 발생된다.
이 5가지가 두로 모든 마음에 작용하는 보편적 마음현상(遍行心所)이다. 이것은 번뇌발생의 일반적인 패턴을 설명한다.
둘째는 특별한 마음현상이다. 이것 역시 5가지로, 의욕(欲), 승해(勝解), 알아차림(念), 선정(禪), 지혜(慧)가 여기에
속한다. 이것들은 번뇌로부터 마음을 깨어나게 하고 궁극적인 해탈로 나아가게 하는 명상수행의 마음현상들이다.
하지만 항상 작용하는 마음이 아닌 까닭에 특별하게 주의를 기우려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셋째는 착한 마음현상이다. 여기에는 총 11개가 소속된다. 그것은 믿음(信), 정진(勤), 부끄러움(慙), 미안함(愧),
욕심이 없음(無貪), 성냄이 없음(無瞋), 어리석음이 없음(無痴), 부지런함(不放逸), 편안함(輕安), 평등함(行捨), 해치지
아니함(不害) 등이다. 이들은 반드시 착한 마음과 함께 일어난다.
넷째는 근본적인 번뇌의 마음현상이다. 이들은 탐욕(貪), 성냄(瞋), 거만(慢), 어리석음(痴), 의심(疑), 잘못된 견해
(惡見) 등 6가지이다. 이들은 모든 번뇌의 근본적인 뿌리인 까닭에 근본번뇌라고 한다.
다섯째는 근본번뇌에 뒤따라 일어나는 수번뇌의 마음현상이다. 여기에 소속된 마음현상은 20개이다.
이것은 분노(忿), 원망(恨), 고뇌(惱), 죄를 감춤(覆), 기만(), 아첨(諂), 교만(驕), 방해(害), 질투(嫉), 인색(), 부끄러움
이 없음(無慙), 미안함이 없음(無愧), 믿지 않음(不信), 게으름(懈怠), 방일(放逸), 혼침(昏沈), 산란함(掉擧), 주의
집중의 결여(失念), 잘못 이해함(不正知), 심란(心亂) 등이다.
여섯 번째는 선악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마음현상 4가지이다. 이것은 수면(睡眠), 후회(悔), 거친 추구(尋), 세밀한
추구(伺) 등이다. 이들은 착함에도 번뇌에도 속하지 않는 마음현상이다.
이들 마음작용을 한역에서는 마음에 속하는 현상이란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고 하는데, 모두 51개로서 제육식과는
모두 상응된다.
여기서 마음과 마음작용과의 상응관계를 보면 전오식은 보편적 마음현상 5가지, 특별한 마음현상5가지, 근본번뇌
3가지(貪, 瞋, 痴), 수번뇌 11개로 총 34개, 제7식은 보편적 마음현상 5가지, 특별한 마음현상 1개(慧), 번뇌 4가지
(貪, 慢, 無明, 我見), 수번뇌 8가지로 총 18개, 제8식과 상응하는 것은 보편적 마음현상 5개가 상응한다.
이들은 가운데 모든 마음에 공통적으로 적용된 경우는 보편적인 마음현상 5가지이다.
이들은 모든 마음에서 작용하기에 보편적인 마음현상이라고 한다.
유식불교의 마음작용의 분류는 서구심리학에서 말하는 일상의 생활에 불편을 주는 심각한 마음의 장애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일상에서 적응적인 수준이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마음현상을 말한다.
물론 서구 심리학의 DSM에서 분류하는 질병적인 상황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포괄할 수 있는 폭넓은 개념이다.
유식불교의 분류체계는 포괄적인 측면으로 기술하고 있기에, 임상적인 측면에서의 진단보다는 환자가 아닌 일반적
적용에 더 적절하다고 본다.
근본식인 제8식에 의지하여 / 전5식은 인연을 따라서 나타난다 / 혹은 함께 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 마치 물결의 파문이 물에 의지함과 같다(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或俱或不俱 如濤波依水)
이것은 제15송이다. 제10송에서 제14송은 앞 송에서 언급한, 제육식에 상응하는 마음현상의 6가지 범주 총51개를
열거한다.
제10송은 보편적 마음현상과 특별한 마음현상 10가지를, 제11송은 착한 마음현상 11개, 제12송과 제13송은 근본적인
번뇌의 마음현상 6개와 뒤따르는 번뇌의 마음현상 20개, 제14송은 선악을 결정할 수 없는 마음현상 4개를 하나씩
열거한다.
위의 제1구에서 ‘근본식(根本識)’이란 아뢰야식을 말한다. 제7식을 비롯한 6식이 모두 제8식을 의지하여 활성화가
되는 까닭이다.
반면에 근본식에 의지하는 모든 의식을 ‘전식(轉識)’이라 한다.
이것은 제8식에 의지하여 전변하는 까닭이다. 제2구인 ‘전오식은 인연을 따라서 나타난다’는 것은 항상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인연되는 대상에 따라서 발생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를테면 눈은 색깔을 대상으로 하고 귀는 소리를 대상으로 한다. 대상에 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제3구에서 ‘함께 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라는 구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하나는 전5식과 관련한 해석으로 대상에 따라서 함께 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눈과 귀가 동시에 작동된다면, 함께 하는 것이요, 각각 대상에 따라서 분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제8식과 관련된 해석이다. 대상을 인식할 때, 제8식의 경험정보가 전5식의 인식에 함께 작용하기도
하고 혹은 양자가 서로 분리되어 작용할 때도 있다고 이해할 수가 있다.
함께 작동될 경우는 과거의 경험내용이 현재에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행사하는 경우라면, 분리되어 작용할 때는
대상의 인식이 현재에 국한 될 경우이다. 전자는 심층적인 제8식의 작용이요, 후자는 표층적인 전식의 작용이다.
그러나 이들은 끊임없이 인과적 관계를 가지면서 순환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이것은 마치 물과 그 파랑처럼, 파랑은 물을 떠날 수가 없고, 물은 파랑으로 현현된 것,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전5식은 인연에 따라서 간헐적으로 작용하지만, 제6식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표상을 포함한 까닭에
항상 작용한다.
이들은 모두 그 대상이 거칠고 표층적인 수준에서 일어난다.
반면에 제7식과 제8식의 대상은 관찰하기 어려운 미세하고 심층적인 수준에서 발생된다.
또한 이들은 어떤 방해를 받지 않고 인연의 계기가 되면 그 작동이 활성화되어 표층수준의 활동을 일시에 혹은 점진
적인 수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전5식은 외적인 대상에 대해서 현재의 국면에 한에서 작동하면서 언어적인 활동이 아니며, 다른 요인에 의해서 그
작용이 방해를 받을 수가 있다.
하지만 제16게송(六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에 의거하면, 제6식은 언어적인 활동을 포함하며,
내적ㆍ외적인 대상에 모두 작동된다. 제6식은 무상천, 무상정, 멸진정, 수면과 민절 5가지의 상태에서는 그 작용이
멈춘다.
무상천(無想天)은 명상수행에 의해서 모든 사유가 끊어진 수행자가 태어나는 세계를 말한다.
제6식에 의해서 발생되는 언어적인 사유작용이 멈추어진 수준인 까닭에 여기서는 제6식이 작동되지 않는다.
무상정(無想定)은 이것은 모든 사유작용이 멈춘 제3선정을 말한다.
제2선정에서 언어적인 작용이 사라지는 성스런 침묵을 경험하고 제3선정에서 진정한 마음과 마음현상이 모두 그치고
정화되는 까닭이다.
멸진정(滅盡定)은 배움이 끝나는 무학의 경지로서 모든 탐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이다.
한편 깊은 수면상태(睡眠)나 극단적으로 피로한 상태(悶絶)에서도 역시 제6식은 작용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