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욕구로 가득한 존재이다.
영원한 인간사랑 ・ 2022. 11. 22.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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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부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욕구로 가득한 존재이다.
1.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14살의 주인공 포니보이는 시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한다.
사회집단은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 일탈을 창조해내고 그 규칙을 특정한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에게 아웃사이더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탈은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행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위반자에게 규칙과 처벌을 적용한 결과다.
일탈자는 꼬리표가 성공적으로 붙여진 사람이고, 일탈행동은 사람들이 일탈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행동이다. (하워드 베커)
소설 “아웃사이더”는 반항적인 십대들의 모습을 재현한 청소년 문학의 바이블로 S. E. 힌턴의 대표작이다.
폭력과 계급 갈등, 편견의 문제 등을 기존 방식과 다르게 다룸으로써 '뉴 리얼리즘'의 성취라는 찬사와 함께 청소년 문학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14살의 주인공 포니보이는 시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한다.
포니보이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모두 빈민가 출신,
집은 가난하며,
부모가 없거나 또는 둘 중 한 사람은 죽었고,
그나마 둘 다 살아 있는 아이는 부모의 무관심과 폭력에 시달린다.
겉보기에는 비참하고 불쌍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과 꿈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2. 조그마한 조개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꿰뚫어 보려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예리한 눈을 발견할 수 있다.
백경(白鏡)은 빛깔이 없는 알을 끼운 안경이다.
백경(白鯨 Moby Dick)은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그린 미국의 소설가 멜빌(Melville, H.)의 소설이다.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포경선의 선장이 복수를 위해 전 세계로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고래에게 목숨을 빼앗긴다는 줄거리이다.
앤 머로 린드버그(Anne Morrow Lindbergh)는 미국 작가, 시인, 수필가이다.
유명한 비행사 찰즈 오거스터스 린드버그 대령의 부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가장 역작으로 알려진「바다의 선물」에는 바닷가에 가면 지천으로 깔려있는 보잘 것 없는 여러 가지 조개들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조그마한 조개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꿰뚫어 보려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예리한 눈을 발견할 수 있다.
허민 멜빌은 미국 소설가 겸 시인이다.
대표작 「백경」은 강렬한 성격의 인물이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에 도전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모선인 범선이 아닌 노 젓는 작은 보트로 고래를 쫓는 용감한 포경선 선원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렸다.
3. 한비자는 오직 엄형과 중벌로써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비자(韓非子)는 순자의 인성론을 이어받아서 군주란 모름지기 명확한 법을 만들고 엄격한 형벌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백성을 혼란에서 구하고 천하의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엄정한 법치를 폭정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로 규정했으며, 인의와 혜애의 명분에 사로잡힌 당대의 군주들에 대해서도 실상을 모르고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며 비판하였다.
빈민들에게 베풀고[인의], 백성을 가엾게 여겨 벌주기를 꺼리는 것[혜애]은 곧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빈곤한 사람에게 무작정 베풀어 주면 나라에 공이 없는 사람이 상을 받는 셈인데, 그런 일이 생기면 백성은 밖으로는 적과 맞서 목을 베는 일에 힘쓰지 않게 되고, 안으로는 힘을 다해 농사짓지 않게 된다.
또한 백성을 차마 벌하지 못하면 난폭한 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성인(聖人)은 엄중한 형벌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물론 백성은 이를 두려워하고 싫어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사람의 사악한 마음을 끊고 간교한 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나라도 안정되고 난폭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비자는 오직 엄형과 중벌로써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4.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욕구로 가득찬 존재이다.
「동양의 순자」로 불리기도 하는 근대 영국의 정치이론가 홉스도 한비자와 유사한 주장을 폈다.
그의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인간론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욕구로 가득 찬 존재이다.
사람들이 종종 파괴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이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반(反)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아무런 제약 없이 ‘자연 상태’에 그냥 방치한다면 서로 간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누구든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간이 각자 서로에 대해 탐욕스럽고 난폭한 늑대처럼 살아가는 한 불행한 삶에서 헤어날 길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안전한, 그리고 예측 가능한 안정적 삶을 희구하므로 그런 상황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기적이고 사악한 본성을 억압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행복한 삶의 기본 전제이다.
홉스가 전권(全權)을 지닌 지배자가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이상으로 제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5.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교육 과목마다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과목마다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했다.
기하학이란 과목은 땅을 사고팔고 유산을 분배하고 일의 분량을 나누는 방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했다.
그는 어려운 학문에 정통했으나 그것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복잡한 학문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생활, 곧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시간을 빼앗기 때문이다.(크세노폰)
아테네 사람 크세노폰은 기원전 43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플라톤과 동년배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아나바시스」는 크세노폰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조국 그리스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은 여행기록이다.
이 안에는 그가 직접 겪은 페르시아 제국의 실상이 기록되어 있다.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도 단숨에 기습공격을 가하면 깨뜨릴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아나바시스에서 지적했다.
스파르타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모두 아나바시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6.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가슴에 영원한 사랑으로 남길 원한다.
빅터 프랭클(1905~1997)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는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네 곳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적어놓은 것이다.
굽힐 줄 모르는 낙관주의와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삶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삶의 의미란 고통 받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두 팔 벌려 껴안는 것이다.
헤쳐 나가야 할 고통이 얼마나 많은가!
고통에 등을 돌리지 않고 하나의 과업으로 받아들이면, 그 속에 성취할 기회가 숨겨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이란 행복과 마찬가지로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훌륭하고 보람 있는 일에 헌신함으로써, 혹은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얻어지는 의도되지 않은 부산물일 뿐이다.
빅트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중에서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이 세상 어느 것도 사랑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마치 우리들의 머리에 조각되어 남아있는 부모님의 사랑은 우리들의 인생항로에 영원한 스승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위대하고 강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가슴에 영원한 사랑으로 남길 원한다.
인생의 의미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좀 더 구체적 상황으로 당면하는 도전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발견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그대 자신을 내놓으라.
그대에게 주어진 상황, 현재라는 이 시간에 그대를 내놓으라.
그렇게 하면 그대에게 의미가 보일 것이다.(빅터 프랭크)
7. 매화는 진정 용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꽃나무이다.
대나무는 번영을 소나무는 장수를 매화는 용기를 상징한다.
매화가 왜 용기일까?
매화가 용기를 상징하는 것은 눈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비록 눈이 오고, 날씨가 매섭지만,
눈 때문에 꽃이 상하기 쉽지만, 매화는 이를 개의치 아니한다.
매화는 진정 용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꽃나무이다.(A.M. 린드버그)
뭔가를 하겠다고 말해놓고 실제로는 전혀 하지 않을 때마다 여러분은 자신이 지닌 힘을 갉아먹는다.
물론 때로 중도에 생각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킴으로써 내가 내 인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다.(앤드류 매튜스)
8. 라커토스(Lakatos)는 역사 발생적 논리에 따른 수학 인식론을 제기했다.
플라토니즘이란 수학적 지식은 영구불멸의 완전한 이상적 세계인 이데아라는 것이다.
힐베르트의 형식주의란 수학은 의미가 배제된 형식적 체계로 재조직해야 하며, 무모순성과 완전성이 수학의 확실성을 보장한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논리주의, 형식주의는 절대주의 수리철학이라 부른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는 공리로부터 연역적 절차를 통해 명제로 진리값을 전달하는 체계로서의 라커토스(Lakatos)는 「유클리드 체계」라고 했다.
그는 역사 발생적 논리에 따른 수학 인식론을 제기했다.
수학은 경험과학인 자연과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하며, 추측(가설)에 대한 거짓이 공리와 정리에 재 전달된다는 의미에서 준경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절대주의적 관점에서 증명은 절대적 진리로 인정되는 공리로부터 정리를 연역함으로써 정리가 참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라커스토는 증명의 전제가 참임을 보이지 못하는 절대주의는 순환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전제가 되는 공리가 절대적 참이라는 보장이 없고, 그리하여 만약 거짓이라면 증명은 참인 결론을 연역하지 않으며 거짓 결론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커스토는 증명의 진정한 기능이 이미 주장된 정리를 비판함으로써 정리를 개선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9. 증명은 사고 실험이며 원시적 추측을 정렬시키기 위해 분석하는 방법이다.
라커스토는 비형식적인 수학 이론의 성장을 보다 강조하면서, 수학적 발견의 단계들을 제시하고 있다.
라커스토의 수학적 발전 단계
1. 원시적 추축
2, 증명 : 원시적 추측을 그것을 하위 추측으로 또는 보조 정리로 분해하는 개략적인 사고 실험
3, 전면적 반례, 즉 원시적 추측에 대한 반례의 출현
4, 증명의 재검토
전면적 반례가 국소적 반례가 되는 ‘협의 있는 보조 정리’가 확인된다.
‘협의 있는 보조 정리’가 명백해지고 원시적 추측에 조건으로 부가 된다.
개선된 추측으로서의 정리는 원시적 추측을 대신한다.
증명의 재검토는 즉 증명 분석은 전면적 반례가 나타나거나 확실하다고 생각하였던 증명에 대하여 의심이 생길 때 시작된다.
그러한 의심은 반례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례는 증명과 지식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증명 분석을 통해 발견된 증명-생성 개념과 새롭게 드러난 보조 정리들은 새로운 이론을 형성하게 한다.
라커스토에 있어서 증명은 사고 실험이며 초기형태의 정리라고 할 수 있는 원시적 추측을 정렬시키기 위해 분석하는 방법이다.
증명은 원시적 추측을 부분 추측이나 보조 정리로 분해하여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식체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10. 자연과학에서 실험이 참과 거짓을 절대적으로 확립하는 것은 아니다.
라커스토에 의하면 증명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증명의 본질은 사고 실험이다.
증명 절차는 추측을 부분 추측으로 분해하여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증명의 본질이 사고 실험이라는 것은 준경험적인 학문으로서의 수학에서의 증명이 수단임을 시사하고 있다.
경험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학에서 실험은 발견의 수단이다.
자연과학에서 실험이 참과 거짓을 절대적으로 확립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 실험은 머리 속에서 어떤 대상들을 다루면서 사고 활동의 결과를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측이 참임을 밝히는 방법을 찾는 자세보다는 증명을 통해 추측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준경험주의는 라커스토로 대표되는 수리철학으로서 수학적 지식은 준경험적이고 오류 가능하며 인간의 창조적 활동 즉 발명의 산물이다.
수학적 지식은 절대적 진리도 아니고 절대적 확실성도 갖지 않으며 오류 가능하므로 끊임없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