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4) - 헤이마켓 사건
1886년에는 남부의 사탕수수 농장에서도 노동조합이 결성될 만큼 노동조합 운동이 활기를 띄었다.
1886년 5월 1일에 전국의 1만 1천 5백 곳에서 노동자 35만이 모여 1일 8시간 노동을 주장하면서 파업을 했다. 시카고에서는 4만 여 노동자가 참여했다. 5월 3일에는 대치하고 있던 파업파괴자를 향해 노동자들이 공격하자 경찰이 노동자에게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많는 사람이 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헤이마켓 광장에서 이를 항의하는 노동자 집회가 있었다. 경찰이 출동하자 그 한 가운데로 폭탄(다이나마이트)을 던져서 경찰관 7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하였다. 경찰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서 근본은 사회주의자이다.)의 소행이라면서(아나키스트들이 노동조합에 침투해 있은 것도 사실이다.) 8명을 주동자로 체포하였다. 증거라고는 8명 중에 1명이 폭탄을 만들 줄 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7명에게는 사형을 1명에게는 15년 형을 선고했다. (이때는 미국 국민이, 노동자까지도 아나키스트에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사형수의 1명은 집행 직전에 자살했고, 한 명은 종신형으로 감형받았으며, 4명도 사형을 집행했다.
1893년에 새로 선출된 일리노이 주 지사는 이들을 사면했다.
재판을 받던 사람 중의 한 명인 어거스트 스파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목매달므로 노동운동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 (이 뒤에 노동운동에 대한 긴 말들을 한다.) 이것은 지하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다.
당신들이 밟고 있는 대지 자체가 불타올라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때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노동기사단의 회원은 6년 동안 70만 명에서 10먼 명으로 줄었다.
5월 1일은 노동절이 되었다.
그 뒤에 새무얼 곰퍼스라는 사람이 ‘좀 더, 좀 더 바로 지금 당장’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정치적이 아닌 순순한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노동조합의 연합체로 미국노동총면맹을 결성했다. 회원이 15만 명이었다. 곰퍼스는 철저한 마르크스 주의자이면서도 회원모집에 ‘흑인들은 신청할 필요가 없음’이라 하여 흑인을 배제했다. 그리고 숙련 기술자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결국은 노동운동에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는 길을 막았다. 이로서 노동운동이 성공을 거두었다. 이 때문에 레닌은 곰퍼스를 부르주아지 첩자라고 했지만, 러시아와 미국은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