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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성경(舊約聖經, Hebrew Bible, 기원전 1500년∼400년)
5세기에 신약성경이 결정되면서 경전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명칭이었다. ‘구약’이란 말은 ‘옛 계약’이란 의미의 한자어이며, 기독교의 관점에서, 신약성경과 대비되는 신과의 ‘옛 계약’이 적힌 책이라는 의미로 쓰이므로, 유대인에게는 용인되지 않는다. 구약성경을 히브리어 성경이라고도 한다. 구약성경은 율법서, 예언서 및 성문서 등으로 분류되며, 기독교 종파에 따라 분류 체계에 차이가 있고, 일부 낱권은 제2 경전 또는 외경으로 분류된다.
∎ 유대교
구약성경은 유대교의 경전이며, 본 명칭은 ‘타나크(Tanakh)’이다. 전통적인 증언은 기원전 1500년∼400년 사이에 유대민족의 구전 전승이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성서학계에서는 실제 문헌 작성 연대를 훨씬 나중으로 이해한다. 토라(모세오경)의 경우에는 주로 유대왕국 후반부터 바빌론 유수기에, 케투빔(성문서)와 느비임(예언서, 선지서)의 경우에는 바빌론 유수기부터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의 타나크 내 24권의 모든 문서가 유대교의 경전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70년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종교의 대부분의 유파가 사라지고 남은 유일한 유파인 바리새파가 유대교를 재형성하던 시기인 서기 90년 경의 얌니야 회의에서 결정하였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얌니야 회의에서 특정한 문헌의 타나크 목록 추가 및 배제가 논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주장은 얌니야 회의는 나자렛 이단 세력(후의 기독교)의 축출을 주목적으로 하였다고 본다.)
확실한 것은 구약성경 목록 확정의 공식적인 증거 자료는 2세기 경에나 비로소 나온다는 것이다. 1세기 말 요세푸스의 아피온 반박에서 22권의 정경이 언급되었지만 세부 목록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며, 1세기 말 작성으로 추정되는 에스드라 2서에서는 24권의 현 타나크와 같은 책 숫자가 언급되지만 역시 문헌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2세기에 작성된 ‘바바 바트라’에서 타나크 24권의 목록이 전체적으로 처음 언급된다. 하지만 동시대에 사르디스의 주교인 ‘멜리토’가 당시 유대교 경전을 정리했다고 하는 ‘좁은 성경 목록’ 22권과의 목록과의 상이성을 보면(에스더는 배제되고 지혜서가 포함된), 2세기 경 결정된 타나크 목록이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멜리토 이전의 초대교회가 당시 유대교 정경 결정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각 문헌들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증언에 주로 의존해 왔지만(벤 시락의 집회서나 에스라 등의 증언), 성서학계의 연구는 여러 갈래의 전승들이 본문 비평을 통해 다양한 기록자에 의해서 기록, 채색되었고, 지역 및 시대에 따라서 다른 갈래의 문서들이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히브리어 전통을 보존했던 팔레스타인의 바리사이파 랍비들은 그렇지 못했던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에 비해 신학적인 우월성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세력이 지지하는 문서와 그 목록이 경전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얌니야 회의이후 이들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한 문서들이 유대교 안에서 경전성을 배제당하는데, 신뢰성 있는 히브리어 원문의 존재 유무가 가장 핵심적인 경전성 결정의 기준이 되었다. 이전까지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새롭게 대두되던 기독교 세력이 사용하던 그리스어 번역 성경인 70인역은 얌니야 회의에서 인정된 히브리어 성경인 타나크와의 내용적 차이의 문제와, 히브리어 원문이 없이 그리스어 번역본만 존재하는 문헌들도 있어 그 출처의 신뢰성을 의심받았고, 결국 유대교 안에서 축출당하였다. 70인 역을 대신하여 유대교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 타나크를 대본으로 하여 아퀼라역을 새롭게 번역하였다.
∎ 기독교(基督敎)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타나크(Tanakh)’를 ‘구약’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382년에 로마 공의회에서 새롭게 정한 경전들을 ‘신약(New Testament)’이라고 부르기로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역사에 등장하였고, 따라서 ‘신약성경’으로 분류된 문헌 안에서 언급된 “성경”이라는 모든 표현은 곧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에는 그리스어 문화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세력과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따라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사용했던 70인역이 그대로 기독교의 경전이 되면서 외경논란(外經論難, Apocrypha controversy)의 화근이 되었다. 내부적으로 높은 권위를 인정되던 주요 문헌들이 70인역의 것을 주로 인용하였기에 기독교의 호교론적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문헌상으로 증명되는 최초의 정리된 기독교 구약 목록은 2세기 후엽의 인물인 사르디스(사데)의 감독인 멜리토의 편지로서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수록된 것이다. 좁은 성경 목록이라고 부르는 유대교 구약 성경 목록에 가깝지만, 에스더가 빠져있고 2경전에 해당하는 솔로몬의 지혜서가 들어가 있다는 차이점이 주목할만 하다. 이는 유대교 타나크가 초대 기독교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거나, 타나크 자체가 그 당시에 유대교 안에서조차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나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서신 등에서도 이러한 독특한 기독교의 좁은성경 목록의 경향성은 계속 드러난다. 대개 동방교회는 이러한 ‘좁은 성경 목록’의 입장을 보인 교부들이 많은 편이고, 이는 동/서 교회의 내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문헌상으로는 멜리토의 것처럼 정리된 목록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나, 다수의 초대교회 교부들은 2경전이나 일부 외경들도 성경으로서 인용하는 이른바 ‘넓은 성경 목록’의 입장에 선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입장들은 교회 내적으로 정리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정경화의 와중에 동⋅서 교회의 갈등도 점차 본격화 된다.
특히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게 공인된 이후, 급격히 교세가 확장되면서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는 상황에서 신약성경을 포함한 경전 확립의 필요성이 요청된 4세기 후엽에 그 갈등은 극에 달하였다. 당시에 경전의 확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가운데, 아타나시우스나 히에로니무스 등의 일부 저명한 신학자들은 구약 부분에서 유대교 히브리어 경전 본문과 그 목록의 우월성을 주장하였고 특히 히브리어 원본없이 그리스어 번역본만 있는 문헌들을 ‘아포크리파’라고 분류하며 그 권위를 상대적으로 낮잡아 보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의 전통적 호교론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침내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유대교에게는 인정되지 않은 그리스어 번역본의 경전성을 인정하며 ‘구약성경’을 일단 확정지었다.
그러나 서방교회 내부에서 비판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저명한 교부들 상당수가 2경전 문헌에 대한 정경성에 의구심을 보이고 비판하였으며, 특히 동방교회에서 카르타고 공의회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부 개신교계 성서학자들은 히에로니무스가 경전적인 문헌과 교회의 문헌을 나누어 불가타 성서에 실었는데, 필사자가 구분없이 필사를 하는 바람에 제2경전도 정경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경에 대한 해묵은 갈등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16세기의 종교 개혁에 의해서였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각 문헌들 사이에 권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Kanon im Kanon), 이 중 구약정경 구성에 대해서는 유대교 측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칼뱅의 경우에도 과거 카르타고 공의회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1545년의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정경에 대한 도전적인 주장들을 모두 일축하였고, 제2경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과거에 ‘외경’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던 일부 문헌들에 대하여 다른 성경 문서들과의 동등한 수준의 경전성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결정에 종교개혁 세력은 반발하였으며,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를 등지고 독립된 개신교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는 외경의 경전성을 부인하고 유대교의 타나크 24권을 재분류한 39권의 독자적인 구약정경의 목록을 확립하였다
개신교 제 종파 안에서도 의견을 달리해서, 공교회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종파인 루터교나 성공회, 감리교회, 구세군, 일부 성결교회 등은 외경에 대해 ‘교리를 도출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지만 신앙에는 유익한 문서’로 권장했던 아타나시우스나 히에로니무스의 입장에 가까운 편이다. 부록에 달린 외경의 독서를 금하지는 않는다. 성공회는 아포크리파를 준정경으로 인정하여 봉독하기도 하면서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따르는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결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학적 영향을 많이 받은 개신교 종파들은 외경에 대하여 교회 내 봉독을 금지하였고, 자체적으로 발행하는 성경 안에서 아예 완전히 배제하는 등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내에서는 개신교 성경편찬처인 ‘대한성서공회’의 ‘개역개정 성경전서’, ‘새번역 성경전서’에는 외경이 없으며, ‘공동번역 성서’에만 부록으로 외경이 실려 있다.
칠십인역(七十人譯, septuaginta, LXX)
칠십인역(70인역, 七十人譯, 라틴어: septuaginta, '70'을 의미, LXX)은, 현재 존재하는 구약성경 번역판 중 가장 오래된 판본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300년경에 고대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헬라어)로 작성되었으며, 현대에 제작된 많은 기독교 구약성경의 원본으로 사용되었다. 현재까지도 동방 정교회에서 공식 전례 본문으로 인용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유대교에서는 정경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전승에 따르면 히브리인의 경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기원전 3세기 중엽 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의 기간에 걸쳐, 조금씩 번역 및 편집된 내용들을 집성한 것이다.
칠십인역의 명칭인 ‘70’을 의미하는 셉투아진타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존재하나, 위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명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파견된 72명의 유대인 번역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72일간 ‘율법(모세 오경)’을 번역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단, 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자체는 70인역이 번역된 시기의 문장을 흉내 내어 작성된 후대의 문서로 보며, 따라서 이 문서 자체의 신빙성에 관하여는 부정되어 있다) 72인에 의해 번역된 성경이 언제부터 ‘70인역’으로 불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1세기경의 저술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70인의 장로와 2명의 사자가 알렉산드리아에 파견되었다는 기술이 남아 있어, 적어도 1세기 경에는 70인역이라는 명칭이 통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70인역으로 편집된 내용은, 히브리어 및 아람어로 작성된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제외된 문서 가운데 유대인에 의해 작성된 문서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완성된, 오늘날 외경 및 위경 등으로 분류되는 문서들 또한 포함되어 있다. 또한 원문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작성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리스어, 시리아어, 라틴어, 이디오피아어로 된 내용만이 전해지는 문서들도 있다. 토비트처럼, 나중에 사해 문서에서 아람어로 적힌 내용이 발견된 것도 있는가 하면, 제2, 3, 4 마카베오서 처럼,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저술된 내용도 70인역의 일부로 존재한다.
현존하는 70인역의 여러 사본(寫本)들은 기원전 3세기경부터 복잡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사본들을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에서 집대성하여 편집한 것이다.
70인역이 제작된 시기적 배경으로는, 당시에는 이미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아람어를 사용하게 되며 사어가 된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는 그리스어권에 사는 유대인이 많았으며, 또한 그중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이 늘어나, 이들의 이용을 위해 번역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른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에 경도되게 되나, ‘헬레니스트(Hellenist)’불리는 그리스어를 모어로 하는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3세의 원정 이래, 일정정도 증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외교문서 또는 교역 관련 문서가 번역되는 경우는 어느 시대에서도 있었을 것이나, 구약성경과 같이 어느 정도 이상의 분량에 율법, 이야기, 시문, 잠언 등의 여러 종류의 문서가 묶여진 서적이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인류사 관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신약성경의 내용에는 구약성경에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 이 70인역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신약성경에 포함되는 여러 서간의 저자로 일컬어지는 사도 바울로의 경우, 히브리어 및 아람어의 독해가 가능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나, 그의 서간에서는 일부 인용에서 70인역이 사용되고 있다. 히에로니무스 또한 구약성경의 번역에 이를 참조했다고 한다. 한편 르네상스 이전의 서유럽에서는, 히브리어를 아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70인역이 긴요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70인역을 구약의 정경으로 사용하여, 번역본을 만들 때의 원본은 마소라 본문이 아닌 70인역인 경우가 있다.
이렇듯 바울로를 필두로 당시의 사도들이 인용한 구약성경은 그리스어판의 성경인 70인역이었으며, 따라서 이 70인역은 기독교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70인역은 라틴어, 아르메니아어, 콥트어, 이디오피아어, 조지아어, 고대 슬라브어 등의 초기 기독교회의 각 교회에서 구약성경이 번역될 때의 그 바탕이 되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통역, 또는 번역할 경우 바탕 언어로 말하거나 기술한 내용의 이해가 전제조건이라는 점에서, 70인역 가운데 히브리어 및 아람어에서 번역된 부분은, 구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성경해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70인역은 단순히 히브리어 및 아람어의 구약 원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또는 그 배경이 되는 원전의 재구성을 위한 본문비평을 위해서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70인역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여기에 주석을 붙이는 ‘알렉산드리아 성경(La Bible d Alexandrie)’과 같은 판본도 존재한다.
가장 오래된 70인역의 사본은, 파피루스의 일부 단편이 존재하나, 그 외에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 4∼5세기 경의 거의 완전판의 사본이 현대에 남아 있다. 이는 히브리어의 가장 오래된 사본인 레닌그라드 사본(1008년) 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기원전 4,5세기 경의 히브리어 원전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70인역은 구약성경의 본문비평 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물론, 70인역의 중동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번역 단어가 원본 단어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번역에는 언제나 존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70인역에 포함되는 문서의 수는 현존하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사본 보다 많으며, 필사본을 비교하면 동일한 내용에 일부 문장 구조나 단어가 다른 문서 또한 존재한다. 기독교도가 70인역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삼는 것에 대해, 1세기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일하게 남은 유대종교의 바리새파는 기원후 90년 새로운 바리새파식 유대교를 규정하는 얌니아 회의에서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문서의 배제를 결정하여, 이것이 현재의 마소라 본문의 범위를 결정하였으며, 이 당시 배제된 문서를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한다.
기독교에서도 구약성경 부분의 엄밀한 범위를 얌니아 회의에서 확정한 정경의 범위를 받아들이는 신학자가 존재한다. 한편 역사적으로 중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도의 구약성경은 70인역과 거의 같았는 설 또한 있어, 현재도 로마 가톨릭 및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를 전통으로 따르고 있다.
70인역의 문서 가운데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근대에 들어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의 사본이 발견된 문서 또한 존재한다.
마르틴 루터는 구약성경의 바탕을, 히브리어 및 아람어 사본이 있는 것, 즉 마소라 본문 만을 채택했다. 이 영향으로 현대의 개신교의 많은 종파에서는 70인역에만 포함되는 문서를 구약의 외경으로 취급, 성경에 포함되지 않는 문서로 본다. 개신교의 일부(프로테스탄트 성서 주의 등)에서는 얌니아회의 이전부터 구약성경에는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있었다고 전제를 두며, 유대교의 얌니아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정경 및 외경의 구별이 존재했다고 전제하고 있다. 한편, 성공회는 성서정과 등에서 집회서를 일부 인용하는 등, 개신교의 일부에는 외경의 일부를, 준(準) 정경 형태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근대에 들어서, 현재의 사본에 기초한 학문적인 70인역의 교정본을 출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랄프스(A. Rahlfs)는 몇몇 사본을 바탕으로 셉투아진타(Septuaginta)를 1935년에 출판하여, 이는 지금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보다 조금 늦게 독일어권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현존하는 많은 수의 사본, 70인역의 옛 번역판, 고대 교회의 교부들의 70인역의 인용 등을 검토하여, 원시 70인역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출판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괴팅겐에 있는 70인역 연구소에서 출판했기 때문에 괴팅겐 70인역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기원전 4년∼서기 30년)
예수 그리스도(라틴어, Iesus Christus, 영 Jesus Christ, 기원전 약 4년∼기원후 약 30) 또는 나사렛 예수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인물이다. 모든 기독교 핵심 상징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聖子)로서 부활한 자이자 구약성경에서 계속 예언한 구원자 메시아로 믿는다.
그 생애와 행적은 사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모 마리아가 잉태하여 나은 것이 예수인데, 복음서는 그가 이 세상에서 전파한 여러 복음과 기적을 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본래 성부의 뜻한 바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 피로서 온 세상에 구원을 이루었고, 부활하여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고 전한다. 십자가 사건 이후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생애가 기독교의 중심이다.
기독교 일반론인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하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나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聖子)에 해당한다.
헬라어 이름인 이에수스는 히브리어 여호수아(Jehoshua)의 축약형인 예슈아(Jeshua)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옮긴 말이다. 여호수아(Jehoshua)의 어원은 접두어 여(Je-) (JHVH/YHWH:Jahveh 야훼, 하나님)와 호세아(hoshea, 구원, 구세를 의미)를 덧붙여 이루어진 이름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Nazareth) 예수”로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누가복음서 2:21), 나사렛의 예수(요한복음서 1: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가 복음서 6:3, 마태복음서 13:55) (중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가므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아들 예수’은 정식 성명이다. 쿠란에 기록된 예수의 아랍어식 이름은 ‘이사 빈 요세프’이다.).
예수에게 따라 붙는 그리스도(Christus 크리스투스)라는 낱말은 “기름을 부은” 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를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흔히 ‘메시아’로 표기하는 “히브리어: מָשִׁיהַ 마쉬아흐”를 번역한 것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은 유대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드높은 사람, 다시 말해 왕이나 예언자, 사제,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메시아 예수라고 풀 수 있다. 그 뒤로 예수는 많은 성도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이적을 보이고, 로마제국 하에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하고, 사흘 후 부활한다.
‘기원후’ 의미로 사용하는 ‘A.D.(Anno Domini)’는 예수 출생 이후 시대를 의미한다. ‘기원전’과 ‘A.D.’ 구분은 6세기경 신학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면서 사용한 게 이후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에 반영되었다. 이때 계산한 예수 그리스도 탄생 연대 기준이 오늘날까지 쓰인다. 하지만, 예수 태어난 날에 관해 여러 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팔레스틴 북부인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나자렛)’이라는 시골 출신이었으므로 그 출생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드물다. 오늘날 복음서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일과 태어난 장소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적 예수는 기원전 약 2년∼4년 경 태어났다고 추정한다.
마태복음서(2장 1∼16절)에는 예수가 태어나신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나고 헤로데 왕이 2세 미만의 갓난 사내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는 내용이, 누가복음서(2장 1∼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하여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는 내용이 실려 있다.
누가복음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기원전 4년경에 이루어졌다는 견해와 기원후 6년에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에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당시 시리아 지방의 총독이 퀴리니우스(퀴리뇨, Quirinius)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누가복음서 2장 1∼7절) 퀴리니우스는 1764년에 로마에서 발견된 비문에 기원전의 퀴리니우스 총독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볼 때 기원전 4년경 총독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견해가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전 2년∼4년 경에 출생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받아 들여 진다.
‘동방의 별’은 이후 ‘베들레헴의 별’로 알려졌다. 17세기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를 800년 주기로 목성과 토성이 분점에 대해 같은 위치에 놓이는 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주장하였고, 이로부터 그 시기를 기원전 7년으로 추측하였다.
한편, 예수의 탄생설화를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설화에 나오는 유아학살과 이집트 피난전승은 유대 기독교인인 마태와 마태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에게 익숙한 인물인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진 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썼다고 보는 성서학자도 극소수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지는 누가복음서과 마태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베들레헴이지만,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성장하였다. 마르코 복음서과 요한 복음서에 언급된 바와 같이 당시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로 불리었던 이유는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 있을 때 임신했으며, 베들레헴에서 출생 후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구유에서의 출생 이야기는 오로지 누가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된 이유를 누가는 인구조사 때문에 예수의 가족이 고향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유다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나사렛의 요셉과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다윗 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호구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태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자 미가서(5:2)와 이사야서(7:14)의 예언대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며, 이후 예수의 가족은 헤로데스 1세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흔히 헤로데 대왕이라고 부르는 헤로데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어떻게 베들레헴에 가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고, 마태는 그것이 바로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추가 설명을 한 것이므로 모두 일치된 기록이라는 해석이 보편적이다.
위 두 기록들은 언뜻 읽기에 서로 모순이 없는 것 같지만, 복음사가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다음 내용과 같다. 예수을 다윗 왕의 후손으로 소개하려는 복음서를 쓴 사람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에 따라 갈릴리에서 지리상 완전 동떨어진 유대로 예수의 가족이 이사를 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예수의 첫 활동 무대가 나사렛이었던 관계로 그의 고향을 다시 나사렛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마르코 복음서 1:9에, ‘예수께서 갈릴리의 나사렛에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예수의 출생지가 나사렛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요한 복음서 1:45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이 출생지라고 근거할 수 있는 논거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복음서 내의 전반적인 문맥을 따라서, ‘출신지’로 보며, 천주교,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나, 나사렛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나사렛을 출신지역으로 보고, ‘나사렛 예수’로 불린 것으로 보고 있다.
예수 가계에 관한 기록은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남아 있다. 두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가계도로 보면, 예수의 아버지인 나사렛의 요셉은 목수였으며, 어머니는 현재 성모 마리아라 부르는 나사렛의 마리아였다. 누가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과 친족 관계였다(누가복음서 1,36). 예수의 잉태 및 탄생과 관련된 성서 기록을 보면, 성모 마리아가 예수을 잉태하기 전에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고지 받았다(누가복음서 1,26-38) 그후 마리아는 약혼자 요셉에게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이 잉태되신 사실을 고백하였다. 요셉은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으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요셉은 꿈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게 되고, 마리아와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마리아는 예수을 출산하였다.(마태복음서 1,18-25)
마태복음서과 누가복음서은 예수의 육신적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복음서(1,2-17)은 요셉의 선조를 아브라함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서(3,23-38)은 심지어 아담까지 족보를 까마득히 펼치고 있다. 두 복음서는 여기서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마태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8대를 손꼽고 있는 반면, 누가는 요셉이 다윗의 42대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 역대기 상 3:10-24를 참조하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두 족보가 다른 이유는 마태와 누가의 복음사가가 각각 요셉과 마리아의 가계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고대교회의 신학을 형성한 교부들도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라 말하였고, 교회의 전승 또한 이와 일치한다.
현대의 개신교 신약성서학에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부정하는 추세이다. 예수의 형제들을 예수의 탄생 이후에 마리아와 요셉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의 친동생들이라 해석한다. 그 근거는 누가복음서 (2장7절)에 있는 “그녀의 맏아들”이라는 기록이나 마태복음서 (1장25절)에 “그녀가 맏아들을 낳을 때까지 요셉이 그녀를 알지 아니하였다.” 는 기록, 마태복음서 13장 55절 56절에서 예수 형제들의 이름과 예수의 누이들의 존재가 거론되는 장면이다.
반면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형제들을 친척형제 또는 사촌형제들이라 해석한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중동지역에서 형제라 함은 사촌형제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그의 홀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는 장면(요한복음서 19장 25-27절)을 떠올려 봐도 예수의 형제들을 ‘친형제들’로 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나 요셉, 시몬, 유다(갈라디아서 1장 19절, 마태복음서 13장 55절)가 예수의 친동생들이었다면 (즉,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예수 이외의 친자녀가 더 있었다면) 요한복음서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가 친족들 앞에서 그의 육신상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길 까닭이 없다. 예수의 어머니에게 예수 외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가 사랑한 제자에게 홀로 남겨질 어머니를 부탁한 것이란 해석은 자연스럽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복음사가 누가의 신학적인 의도가 들어 있는 누가복음서의 몇 구절이 조금이나마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수가 12세 때 유대인들의 광복절인 과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배를 마치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지만 부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방황하면서 아이를 찾았다고 한다. 예수를 찾은 지 사흘 뒤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만났을 때, 예수는 유대교의 랍비, 곧 율법교사들과 율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이에 부모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예수은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 자신과 온 인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때에 예수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누가복음서 2,41-51)
그 뒤에, 계속해서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은 요셉의 직업을 이어 목수 일을 배우며 자랐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엔도 슈사쿠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목수는 떠돌아다니면서 일하는 노동자였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예수가 자신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교회당 예배 때에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자신이 고난 받는 민중들과 연대하는 메시아로서 살아갈 것임을 알리는 설교를 하자, 고향사람들이 지혜에는 감탄했지만 ‘저 사람은 (목수인)요셉의 아들 아닌가.’라며 예수의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임을 지적하였다는 누가복음서의 보도(누가복음서 4:16-22)는 목수라는 직업이 변변치 않은 직업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예수의 유년시절에 대해 누가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누가복음서 2:52) 간단하게 적고 있다.
예수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나사렛을 떠나 출가하였다. 그 이후에 당시 먼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먼저 광야로 나가 세례(침례)를 베풀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나아가셨다(요한 1:23, 29). 예수을 본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세례(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받으러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통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를’ 바라셨고, 마침내 세례(침례)를 받으셨다. 세례(침례)를 받은 뒤에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셨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다(누가 3:22). 이러한 예수의 세례(침례) 장면에 대한 성서의 언급을,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투쟁에서의 우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수의 신학자들도 있다. 교회력을 신앙 전통으로 지키는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아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날을 ‘주님의 세례주일’로 기념한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에, 홀로 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하셨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마귀에게서 세 가지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한다(마태복음서 4장).
첫 번째 시험 : 돌들을 빵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신명기 8:3)’라는 성경 말씀으로 대적하였다.
두 번째 시험 : 예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게 유혹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이번에는 특이하게 성경 구절(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 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시편 91:11,12)을 들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은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떠보지 말라’(신명기 6:16)는 말로 사탄의 유혹을 꺾었다.
세 번째 시험 :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예수은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기 6:13)라는 성경 구절을 들며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고 난 뒤, 사탄은 그를 떠났고, 천사들이 날아와 그를 도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약성경 학자들은 예수께서 받으신 유혹을 고난의 그리스도가 아닌 영광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유혹 내용들이 모두 명예욕을 채울 수 있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처음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다.(2:11)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예수와 제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안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에게 이에 대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일렀고, 예수는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붓게 했다. 하인들이 시키는 대로 모든 물을 가져오자, 예수는 잔치를 맡은 이에게 그대로 갖다 주게 했는데,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된다(요한 2:1-11).
마리아가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할 때, 예수는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 하신다. 포도주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보혈을 상징하는데, 예수가 말한 “때”와 “포도주”의 관계는,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제물로 희생될 때 흘린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로 풀이한다.
∎ 산상수훈(山上垂訓, Sermo montanus)
예수께서는 초기에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이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산 위에서 이들에게 설교하였다. 이 산은 갈릴레아 호수 북쪽 타브가와 가파르나움(가버나움) 사이에 있는 한 야산이었다고 전해져 온다. 이를 담은 내용이 마태복음서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설교 내용은 마태복음서 5:3-12, 즉 팔복 부분으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20.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25.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26.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 누가복음서 6장 20-26절, 공동번역성서
이 밖에도 파격적인 내용(원수를 사랑하라, 은밀히 구제하라, 비판하지 말라)이 있다. 현재 전체 기독교에서 쓰이고 있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인 주의기도도 여기에 씌어 있다.
예수은 청중들이 알기 쉬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침을 행했다. 이를테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르코 복음서 4:3-20)는 밭을 갈지 않고 그대로 뿌리던 이스라엘 농부들의 농사 방법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수많은 병을 고쳤다는 기적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까닭은 예수이 메시아임을 변증하고자 하는 복음서저자들의 신학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병들을 고치는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한 자기 증명인 것이다. 일례로 그분이 병을 고치는 그 깊이는 다른 의사들의 차원, 심지어는 인간의 차원이 아니어서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하혈병으로 고통받은 부인을 고치는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부인이 12년간 병으로 고통받았지만 의사들이 고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 마르코 복음서 5:25-30 공동번역성서
또한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로마제국의 제국주의적 통치 즉, 로마제국이 팍스 로마나의 유지를 위해 식민지에서 실시한 폭력적인 통치와 경제적 착취로 인해 정신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쳤다는 이야기들을 보도함으로써 예수을 정신병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치유자로도 묘사한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 지방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셨을 때에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매어둘 수가 없었다. 쇠사슬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두었지만 그는 번번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밤이나 낮이나 항상 묘지와 산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하였다. 그는 멀찍이서 예수을 보자 곧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예수께서 악령을 보시기만 하면 더러운 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 하고 명령하시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 수효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악령들은 예수께 저희를 저 돼지들에게 보내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은 읍내와 촌락으로 달려가서 이 일을 알렸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바로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이 일을 지켜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나았으며 돼지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주자 그들은 예수께 그 지방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을 따라다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지만,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얼마나 큰일을 해주셨는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 하고 이르셨다.” — 마르코 복음서 5:1-19 공동번역성서
∎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복음사가 누가에 의하면 예수은 이미 12살 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리스도는 율법학자와 토론을 벌였는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전승도 율법학자와의 토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느 율법학자가 그리스도에게 “진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예수은 예시를 들어,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도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간호하고 여관에 맡겨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여 보살폈다는 비유를 말한다. 그러면서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묻자, 율법학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들의 오빠가 라자로였다. 라자로가 세상을 떠나자 예수는 라자로의 장례식장에 찾아가서 무덤에 장사 된지 나흘이 지난 그를 살려내서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셨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마태 20:17-19, 누가 18:31, 마르코 10:32)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은 민중들의 환대를 받는데, 이는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마태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뭇가지는 당시 유대교 종교 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재배하던 종려나무의 가지였다.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이들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떼어 감사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죽음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셨다.(마태 26:26-28) 이를 그리스도의 성체제정이라고 하는데,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 성찬례, 성체성혈성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이라고 부르는 성사를 성직자가 집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념한다.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인 예수를 위험인물로 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은 가리옷사람 유다와 결탁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예수는 가리옷 사람 유다가 자신을 유다의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한 내막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자신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었다. 체포된 후 그분은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산헤드린 의회에서의 재판을 거쳐 본티오 빌라도의 재판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 누가복음서은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여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압력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누가 23:14-25). 하지만, 빌라도의 총독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를 그의 의지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의 십자가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 지도자를 뜻하는 ‘유대인의 왕(INRI)’라는 죄패가 달렸으며 예수를 처형한 세력은 로마 제국의 공권력이었다. 더구나 예수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호를 받을 만큼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빌라도에게 그는 위험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누가는 교회가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지지했으나 마지못해 십자가형에 처한 것처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일부 시각도 있다. 반면에 빌라도에 대한 마이어의 연구를 보면, 당시 본디오 빌라도의 보호자 즉 후원자는 세야누스 였는데, 그는 황제에 대한 반역 음모를 꾸미다가 서기 31년 권력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빌라도의 지위는 서기 33년경에는 매우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시기는 바로 예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시기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당시의 유대인을 분노케 함으로써 황제와의 관계가 더 이상 곤경에 빠지지 않길 원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서의 묘사가 가장 정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두 명의 강도들과 함께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전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며 구타와 조리돌림을 병행하여 당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십자가 모양의 형틀이 아닌 가로대를 가리킨다. 처형장에 끌려가는 도중 예수께서 모진 구타 끝에 체력이 다하여 쓰러지자 구레네(카르타고 - 오늘날의 튀니지)출신의 ‘시몬’이라는 역사(力士)가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십자가의 모양은 본래 T자 모양이었으나 모양으로 알려졌다.
1.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2.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4.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5.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6.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7.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ia)》 15권 44장 2절에서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 내용을 기술하면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타키투스는 이를 라틴어 : Chrestiani로 기록하였다.)의 이름의 기원을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본티오 빌라도) 행정관(본티오 빌라도는 흔히 총독이라고 불리지만, 팔레스타인은 총독이 아닌 행정관이 다스리는 속령이었다.)에게 처형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 사악한 미신’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비티니아의 총독으로 재직 중이던 소 플리니우스는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신처럼 여기면서 성가를 불렀다는 내용이 존재한다.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한 부분인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인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가 가리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설이 현재 가장 유력하다. 참고로 수에토니우스가 말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도 나오는데, 누가에 의하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토로 이주한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신들처럼 천막 제작 노동자인 바울과 같이 일했다고 한다.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 독립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전세가 기울자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돌로 치는 형벌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유대교의 《탈무드》 〈산헤드린〉에는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하였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기독교계 사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의 전승을 해석한 글들인 신약성서이다. 기독교에서는 이중 공관 복음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공관 복음서가 예수의 언행을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정체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담은 요한 복음서을 중요하게 여긴다. 예수의 언행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구전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다. 복음서는 단순히 과거의 예수의 역사가 아니며, 그를 구세주로 믿은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반영되어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언급하는데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묘사하는데, 이를테면 베드로가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답했다는 이야기의 경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너라는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며 크게 칭찬하셨다고 매우 좋게 묘사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던 복음사가 마르코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며 간락하게 묘사한다. 또한 예수께서 하혈병에 걸린 부인을 고쳐주셨다는 기적이야기도 마태는 부인의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마르코는 부인이 얼마나 질병으로 고통 받았는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이렇듯 복음서는 예수의 전승을 그대로 받아 적거나, 예수의 행적을 연표처럼 시간순으로 적거나,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의 전승을 자신들의 신학에 따라 편집한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자로서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 복음서에는 예수에 관한 전승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 내려온 예수의 이야기가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어있기는 하나, 그것의 내용이 교회의 여러 활동에 적합하도록 형성되어 왔을 가능성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교회의 여러 활동뿐만 아니라 전승 담당자의 사회적 상황이 복음서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일에도 주목하고 있다.
학자들은 1세기 초의 종교적 배경을 예수의 삶에 대해 재조명 했던것으로 생각한다. 바리새파는 1세기 유대 공동체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이었다.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엄격하게 율법을 해석하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두개파는 특히 예루살렘에서 강력했다. 그들은 모세5경만을 인정하였으며, 이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사후세계에서의 징벌, 신체의 부활, 천사나 영혼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에 협력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으며, 정치사상에서는 당연히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에세네파는 금욕적 종말론자들로 신약성서에는 나오지는 않는다. 이들은 수도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이들이었다.
복음서는 마태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누가복음서, 요한 복음서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저자들은 마태, 마르코, 누가, 요한으로 여겨지는데, 모두 유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최근에 들어와서도 복음서는 종종 예수에 관한 전승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복음서는 신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동시에 예수의 어록 및 전승에 기초하여 기록되었다. 그래서 누가는 ‘자신이 직접 조사하고 수집한 예수의 전승에 기초해서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고 요한도 똑같은 진술을 하고 있다. 복음서는 저자들이 독창적으로 쓴 게 아니라, 서로 의존하여 마태와 누가는 첫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를 일부분 의존하였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1)라고 한 기록에서 드러나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사도 바울로는 사도행전에서는 사울이라고도, 바울로라고도 부른다. 바울은 해외거주 유대인이므로 히브리 이름인 사울과, 헬라(그리스) 이름인 바울로를 모두 사용했다. 따라서 바울로를 사울이 개명한 이름을 여기는 것은 무지이다.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바울은 역사 속의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는 그분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을 따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권 논쟁이 있었던 인물이다.
댜른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3년 반 동안 복음을 선포하시며 가르치심을 베푸시던 때에 예수를 따라 다니며 숙식을 함께 하던 제자들의 무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 세우신 자들이었는데 반해 바울로 사도는 예수께서 하늘에 승천하시기 전의 공생애 기간 중에는 그분과 함께 하지 않았으며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별도로 그를 만나시고 사도로 세워 주셨으므로 그를 사도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초기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일부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밝은 빛 가운데 공중에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 회심한 후(바울로가 살던 시대에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개종이 아님), 아라비아로 가서 삼년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에는 먼저 있던 사도들을 잠깐 만나 교제를 나누었다. 갈라디아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예수께로부터 계시로 가르치심을 받았다고 증언하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보다는 주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사역을 하였으며 이는 그를 이방인들의 사역자로 세우신 예수의 뜻에 의한 것이다. 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적 인물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복음서의 특정 에피소드들과 그에 서술된 연대, 그의 신격에 대해 거론된 신학적 이슈들에 관한 토론을 통해 검증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 뿐 아니라, 유대인이나 그리스 로마의 자료 등 다수의 역사적 비기독교 자료들 또한 예수의 존재에 관한 역사적 분석에 이용되어왔다.
대부분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 했었다는 것에 인정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그의 십자가형에 관해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로버트 반 브루스트(영어판)에 의하면 비기독교파에 의해 제기되어온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 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항상 논란이 되어왔지만, 많은 학자들을 설득하는데에 실패해왔고, 고전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 성경학자들 또한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논박하고 있다. Walter P. weaver와 그의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하는 활동들이 기술적인 범주 안에서나 이외의 어떤 식으로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어왔던 것으로 기술한다.
1세기 로마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와 타키투스(Tacitus)를 포함한 비기독교 인들의 자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사용되어왔다. 요세푸스(Josephus) 학자인 루이스 펠드만(영어판)은 요세푸스의 ‘역사적 예수의 존재 여부에 관한 언급’에 대해 “소수만이 그 진정성에 관해 의문을 가져왔다(few have doubted the genuiness)”라고 진술하여 오직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만 예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논점이 되었다라고 기술했다. 바트 D. 어만은 예수의 존재와 그에게 집행된 로마에 의한 십자가형에 관해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를 포함한 다양한 자료에 의해 입증된다고 서술한다.
예수의 역사적 인물로서의 존재 여부는 그의 신성이나 그의 존재가 사람인지 또는 신인지의 신학적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선구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특별히 예수의 존재 여부를 초자연적인 힘이 그에게서 나오는지, 또는 기독교 복음이 정확한지는 별개의 문제로 구분하고 있다. Dawkins는 비록 그의 견해가 복음의 문제에 관해 신뢰하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여부에 대해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또한 대표적 비평가인 조지 알버트 웰스(영어판)에 의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 없는 인물로 주장되어왔지만, 후에는 그의 견해를 바꾸었고,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여부는 전혀 논점이 아니었고 그의 존재자체가 부정되어 온 적은 없었다. 초창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관점의 다름(그리스도 단성설, miaphysitism, 그리스도 가현설, 네스토리우스의 교의 등)은 존재해 왔지만, 그것은 기독교 교리에 관한 논쟁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소수의 현대 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 적 없는 인물로 보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견해는 뚜렷히 비주류이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의 존재는 기독교가 만들어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외아들인 동시에, 피조 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며, 성모 마리아에게 혈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다.(니케아 신경/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그 외,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칼케돈 신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칼케돈 신경과 에페소 신경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었다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에 반대하여, 예수를 하나님이자 인간으로 고백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에 대해서 로마제국의 체제선전 수단인 황제숭배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로마제국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황제 숭배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를 쓴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분,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 주님, 복음 등의 로마제국이 체제선전에 사용하던 말들을 예수에게 붙임으로써 현실권력인 로마제국이 아닌, 예수에게 복종하겠다는 반골적인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반(反)국가 종교로 규정하여 탄압한 것도 복음서에서 드러나는 급진성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시대에 사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복음서의 정치, 사회적 배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가 한 말과 행동이 얼마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지 깨닫지 못한다.
근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예수를 윤리적으로 모범을 보인 도덕적 모범으로 이해하였다. 실례로 토머스 제퍼슨의 그리스도론은 축귀, 치병, 부활 같은 예수의 생에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부분들은 제외시키고, 산상수훈처럼 도덕적인 가르침들만 담아낸 것이었다. 이는 그들의 도덕적 이상을 예수에게 투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은 예수에게서 모든 기적들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지우고 한 도덕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 기독교에서는 성공회 신학자들인 톰 라이트 주교(Bishop Tom Wright)와 존 셸비 스퐁 주교, 맑스주의를 역사적 예수 연구방법으로 도입한 진보적 신학자 리처드 호슬리, 역사적 예수에 대한 대중적 신학서적들을 발표한 정승우, 성공회 신학자 마커스 보그, 로마 가톨릭 신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 등의 신학자들에 의해 역사인물로서의 예수의 삶을 복원하려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들이 쓴 역사적 예수 관련 신학서적들이 한국어판으로도 나와 있다.
유대교적 관점에서는 신은 여호와 뿐이라는 유일신 교리에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의 외아들 또는 하나님으로 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예언자(선지자)라고 본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유수아(يوسع) 혹은, 이이사(عيسى)라고 부르며 예수를 하나님(알라) 또는 그의 독생자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들은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 예수이라고 부르며, 인류에게 내려진 하나님이 보낸 가장 중요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사(聖使)로서 존경한다.
이슬람교도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라고 믿는 꾸란에는 예수가 신의 명령으로 마리아의 몸을 빌어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났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허가”를 받아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예수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바와 달리 누구에게도 살해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적도 없었고 다만 천국으로 들려 올려 졌다고 한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예수는 “심판의 날” 전에 다시 지상에 내려와서 정의를 회복하고 적그리스도를 물리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후 40년을 지상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이슬람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한사람의 무슬림으로 여겨져 왔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올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사람들에게 설교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신과의 협동”이라는 개념을 엄격히 금지하고 “유일신”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른바 독생자와 성육신의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고, 예수가 다른 예언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신성하게 선택되었던 “사람”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꾸란에서는 처녀잉태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며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꾸란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호칭하는데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상을 구원할 자”라는 의미의 메시아와는 다르게 “신의 은총을 받은 자”의 의미이지만, 근본적으로 세상을 구원할 때 강림하는 역할은 같다.
예수은 에아사(Easa)라는 이름으로 힌두교 성전에 등장한다. 이 이름은 이슬람교에서의 예수의 이름 중 하나인 이이사와 같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칼리 유가가 삼천 살이 되던 때에 후나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서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힌두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에아사 마시하(Easa Maseeha, 예수 메시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힌두교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은 다양하다. 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 (ISKCON)는 예수를 크리슈나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서 신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여긴다. Contemporary Sant Mat movements는 예수를 Satguru로 여긴다. Ramakrishna는 예수를 신이 육화된 것으로 여긴다. Swami Vivekananda는 예수를 찬미하고, 그를 힘의 원천과 완벽함의 전형으로 생각한다. Paramahansa Yogananda는 예수를 엘리사의 재육화이며, 엘리야의 재육화인 세례 요한의 학생이었다고 가르친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를 그의 주된 스승중 하나로 여겼으며 예수로부터 비폭력 저항 운동의 영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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