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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권 세기(世紀) 고려(高麗) 4
○ 지원(至元) 12년 충렬왕(忠烈王) 원년 5월 계사에 고려 왕 왕심에게 조서를 내려서 탐라(耽羅)에 가 있는 진도(珍島)
의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 7월에 흑적(黑的)이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왔다. 11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왕심에게 유시해 관직의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왕심이 대방후(帶方侯) 왕징(王澂)을 파견해 관원의 자제(子弟) 20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석말천구(石抹天衢)를 부다루가치[副達魯花赤]로 삼았다. 《이상 모두 원사》
○ 13년 충렬왕 2년 정월 기축에 고려국에 칙서를 내려 관직이 있는 자의 자제들을 볼모로 보내게 하였다.
○ 7월에 왕심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어서 송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 9월 을사에 고려 왕이 첨의중찬 김방경의 공을 상달하자, 호부(虎符)를 주었다.
○ 11월에 왕심이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 주열(朱悅)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게 해 이름을 왕춘(王賰)으로 바꾸었다고
아뢰었다. 《이상 모두 상동》
○ 14년 충렬왕 3년 정월 무술에 고려의 김방경 등이 난을 일으켰다. 고려 왕에게 명하여 그의 죄를 다스리게 하고,
이어 흔도ㆍ홍다구에게 명하여 군사를 정돈해 방어하게 하였다. 《상동》
○ 15년 충렬왕 4년 정월에 왕춘이,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의 임기가 찼으나 아직 교체되지는 않았으니 다시 3년
을 더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자, 황제가 따랐다.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가 상언하기를,
하였다. 《상동》
○ 16년 충렬왕 5년 정월 계축에 고려국에 칙령을 내려 대회애주(大灰艾州)ㆍ동경(東京)ㆍ유석(柳石)ㆍ패락(孛落)
4역(驛)을 설치하게 하였다.
○ 6월 갑신에 칙령을 내려 전선(戰船)을 만들어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고려에서 배를 만드는 재목이 산출되니
고려에 가서 만들게 하였으며, 고려 왕에게 그에 대한 편부(便否)를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 8월 기해에 해적(海賊) 김통정(金通精)이 죽었다. 그의 조카인 김온(金溫)을 잡았는데, 유사(有司)가 법대로 논해
처형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7년 충렬왕 6년 5월에 고려 왕 왕춘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하면서 양식 1만 석을 꾸어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전선(戰船) 3천 척을 만들게 하고, 탐라에 칙령을 내려 재목을 마련해 보내 주게 하였다.
7월에 고려에 처음으로 역참(驛站)을 두었는데, 백성들에게 식량이 부족하자 한 해 치의 식량을 주도록 명하였으며,
이어 사신들이 왕래할 때 음식물을 지공하도록 요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 8월 무진에 왕춘이 와서 조회하였으며, 또 군사 3만 명을 더 보태어 일본을 정벌하라고 말하였다.
○ 10월 계유에 왕춘에게 개부의동삼사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開府儀同三司中書左丞相行中書省事)를 더해 주었다.
12월 신미에 고려 왕 왕춘이 군사 1만 명, 수수(水手) 1만 5천 명, 전선 9백 척, 양곡 10만 석을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
하러 나갔다. 홍다구 등에게 전쟁 도구를 주고, 고려국에 갑옷과 전투복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여러
도의 군사들에게, 고려의 길을 취해서 나아가되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고려의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을 정일본도원수(征日本都元帥)로 삼고, 밀직사 부사(密直司副使) 박구(朴球)ㆍ
김주정(金周鼎)을 관고려국정일본군만호(管高麗國征日本軍萬戶)로 삼았으며, 이들 모두에게 호부(虎符)를 하사하
였다. 계유에 고려 왕 왕춘을 중서 우승상(中書右丞相)으로 삼았다. 《이상 모두 상동》
○ 18년 충렬왕 7년 정월 임자에 고려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이 변경을 침입해 왔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보내어
추격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금주(金州)의 포구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 5백 명을 보내 주었다.
○ 3월에 왕춘이, 본국의 필도치(必闍赤)가 공문서에 쓰는 글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낭중(郞中)과 원외랑(員外郞)
을 각 1명씩 제수해 그를 보좌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 무진에,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선사군(善射軍)과 고려의 화장 수군(火長水軍)에게 초(鈔) 4천 정(錠)을 내려 주었다.
신미에, 고려 왕 왕춘이 공주에게 장가들었다는 이유로 조칙(詔勅)을 내릴 때 ‘부마(駙馬)’ 두 자를 더 써 주기를 요청
하니, 그러라고 하였다. 병술에 일본국을 정벌하러 가는 군사들이 길을 떠났다.
을해에 칙령을 내려 탐라에서 만든 전선을 홍다구에게 주어 일본을 정벌하러 나가게 하였다.
5월 임자에 탐라국에서 올해에 조공으로 바칠 백저(白紵)를 면제하게 하였다. 탐라국다루가치[耽羅國達魯花赤] 탑아적
(塔兒赤)에게 칙령을 내려 고려의 전라도 등에서 사냥을 하여 백성들을 소요시키는 일을 금지하게 하였다.
6월 임오에 탐라를 지키는 군사들에게 힘써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라고 명하였다.
일본행성(日本行省)의 신하가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였다. 임진에 고려 왕이 본국에 역(驛) 40개를 둔 뒤로 백성들이 잔폐해 졌다고 말하자, 칙령을 내려 20개의 참(站)
으로 줄이게 하고, 이어 말 값으로 8백 정(錠)을 주게 하였다.
8월 임진에 흔도ㆍ홍다구ㆍ범문호(范文虎)ㆍ이정(李庭)ㆍ김방경(金方慶) 등 제군(諸軍)의 전선(戰船)이 파도를 만나
난파되어 상황이 아주 불리하게 되었다. 이에 나머지 군사들이 고려의 경내로 되돌아왔는데, 살아난 자가 열에 두세 명
이었다.
○ 《원사》 2백 8권 일본열전(日本列傳)에는, “패졸(敗卒) 우창(于閶)이 일본에서 도망쳐 돌아와 말하기를, ‘관군(官軍)
이 6월에 바다로 들어가 7월에 평호도(平壺島)에 도착하여 오룡산(五龍山)으로 옮겨 있었다.
8월 1일에 바람이 세게 불어 배가 난파되었고, 5일에 범문호(范文虎) 등 여러 장수들이 각자 튼튼하고 좋은 배를 잡아
타고 사졸 10여 만 명을 산 아래에다 버려둔 채 돌아갔다. 남아 있던 군사들이 장 백호(張百戶)란 자를 추대하여 주수
(主帥)로 삼았는데, 그를 장 총관(張摠管)이라고 불렀다. 한창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서 돌아가려고 하고 있던 차에
7일날 일본 군사들이 와서 그들과 싸웠는데, 모두 죽었으며, 살아남은 자 2, 3만 명은 모두 포로로 잡혔다.
9일에 팔각도(八角島)에 도착하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몽고와 고려, 한인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고는 새로 군대에 편입
된 자 가운데 중국 사람들만 죽이지 않고 살려서 노예로 삼았는데,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하였다. 대개 행성
(行省)의 관원들이 일을 의논하면서 서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모두 군사들을 버리고서 되돌아온 것이다.
오래 뒤에 막청(莫靑)과 오만오(吳萬五)란 자가 역시 일본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군사 10만 명 가운데 돌아온 자는
이들 3명뿐이다.” 하였다.
9월에 탐라를 지키는 군사를 더 보태었다. 이어 고려에 명해서 전투 도구를 지급해 주게 하였다.
○ 11월 갑자에 고려국의 금주(金州) 등지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두어 일본을 제어하게 하였다.
○ 을사에 군기감(軍器監)에 칙령을 내려 무기를 고려에 보내어 바닷가의 군현에 나누어 주게 하였다. 고려 왕이
바닷가에 있는 성(城)을 완전하게 하여 일본을 방비하게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상 모두 상동》
○ 19년 충렬왕 8년 정월에 왕춘이 일본에서 바닷가의 군현들을 노략질하면서 집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잡아갔다고
하면서, 도리첩목아(闍里帖木兒) 휘하의 몽고 군사 5백 명을 파견하여 금주(金州)에 주둔하게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또 따라 주었다.
○ 7월에 고려 왕이 스스로 전선 1백 50척을 만들어 일본을 정벌하는 데 돕겠다고 청하였다.
9월 임신에 고려ㆍ탐라ㆍ평란(平灤) 및 양주(楊州)ㆍ융흥(隆興)ㆍ천주(泉州)에 칙령을 내려 크고 작은 배 3천 척을
만들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0년 충렬왕 9년 정월 을축에 일본을 정벌하는 데 필요한 군량을 미리 준비하게 하였는데, 고려로 하여금 20만 석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아탑해(阿塔海)를 전과 같이 정동행중서성승상(征東行中書省丞相)으로 삼았다.
4월에 고려 왕에게 명하여 행성(行省)에 나아가서 일본을 정벌하는 일을 조처하게 하였다. 갑오에 고려 왕 왕춘이
몽고 사람에게 행성의 일을 함께 조처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계묘에 왕춘을 정동행중서성좌승상에 제수하고, 이어
부마 고려국왕(駙馬高麗國王)으로 삼았다.
5월에 정동행중서성을 세우고 고려국왕이 아탑해와 함께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고려국의 군사
들에게 옷과 갑옷을 내려 주었다. 《원사》 91권 백관지(百官志)에, “정동등처행중서성(征東等處行中書省)이다.
지원(至元) 20년에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고려국왕에게 명하여 성(省)을 설치하고 군사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제반
사항을 맡아보게 하였다. 군사가 돌아오자 성을 혁파하였다.” 하였다. 갑술에 고려국권농관(高麗國勸農官) 4명을 설치
하였다. 《상동》
○ 21년 충렬왕 10년 정월에 탐라국안무사(耽羅國安撫使)를 두었다.
○ 2월 신사에, 고려에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배를 만드는 것을 혁파하였다. 4월 무신에 고려 왕 및 공주가 세자 왕원
(王謜)과 함께 와서 조회하였다. 7월에 탑라적(塔刺赤)이 말하기를,
하자, 백안(伯顔) 등이 의논올리기를,
하니, 황제가 따랐다. 《이상 모두 상동》
○ 22년 충렬왕 11년 4월 신유에, 탐라에서 만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배 1백 척을 고려에 내려 주었다.
10월 정묘에 추밀원에 칙령을 내려 교주(膠州)ㆍ내주(萊州) 등 여러 곳의 조선(漕船)과 고려(高麗)ㆍ강남(江南) 등
여러 곳의 해선(海船)을 헤아려 보고 강회(江淮) 지방의 민선(民船)을 임대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11월 무인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에 가서 군사 1만 명, 배 6백 50척을 징발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것을 도우라고 고
하게 하였다. 이어 부근 지역에다 명령을 내려 배를 많이 만들게 하였다. 계사에 칙령을 내려 강회(江淮) 지방에 있는
쌀 1백 만 섬을 조운하되, 바다를 건너 싣고 가서 고려의 합포(合浦)에다가 쌓아 두게 하였다. 이어 동경(東京)과
고려로 하여금 각각 10만 석씩의 곡식을 저축해서 일본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여러 군사들은 내년 3월에
차례대로 출발해서 8월에 합포(合浦)에 모두 모이게 하였다. 《상동》
○ 23년 충렬왕 12년 5월에 칙령을 내려 탐라에서 수자리 살고 있던 사람 4백 명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9월 임진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의 포로를 바쳤다. 10월 임술에 고려에서 또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의 포로
16명을 바쳤다. 《상동》
○ 24년 충렬왕 13년 5월에 고려 왕 왕춘에게 행상서성평장사(行尙書省平章事)를 제수하였다.
임자에 고려 왕이 군사를 더 파견해서 내안(乃顔)을 정벌하기를 청하니, 5백 명을 보내었다. 《상동》
○ 25년 충렬왕 14년 2월 기묘에 고려 왕 왕춘을 다시 정동행상서성좌승상으로 삼았다. 《상동》
○ 26년 충렬왕 15년 정월 무신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장수지(張守智),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이천영(李天英)을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일본을 정벌하는 데 필요한 군량을 마련하기를 독촉하게 하였다.
4월 기유에 요양성(遼陽省) 관내에 기근이 들자, 고려에서 쌀 6만 석을 꾸어 진휼하게 하였다. 계유에 고려에서 은(銀)
이 많이 산출되므로 공인(工人)을 고려로 내보내어 인근 백성들을 징발해서 제련한 다음 관가로 실어들이게 하였다.
9월 기묘에 고려국유학제거사(高麗國儒學提擧司)를 두었는데, 종5품 벼슬로 하였다. 《상동》
○ 27년 충렬왕 16년 정월 병인에 합단(合丹)의 잔당들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고려에 명하여 탐라(耽羅)에 수자리
살고 있는 군사 1천 명을 징발해서 토평하게 하였다. 정묘에 고려 왕이 말하기를,
하니, 황제가 따랐다. 《원사》 1백 31권 백첩목아열전(伯帖木兒列傳)에, “합단(哈丹)이 다시 고려의 경내로 들어가자
백첩목아가 회원대장군 상만호(懷遠大將軍上萬戶)로서 명을 받들고 철리첩목아(徹里帖木兒)와 함께 나아가 토벌하
였다.” 하였다.
2월 초하루 을해에 고려전라주도만호부(高麗全羅州道萬戶府)를 설치하였다. 4월 계사에 태부(太傅) 여옥로(呂玉魯)가
말하기를,
하니, 요양(遼陽)의 행성(行省)에 칙령을 내려 사실을 조사해 본 다음 지급해 주게 하였다.
5월 기사에 철리철목아(徹里鐵木兒)에게 소속된 여진(女眞)ㆍ고려(高麗)ㆍ거란(契丹)ㆍ한(漢)의 군사들에게는 지세
(地稅)를 수송하는 이외의 부역을 모두 면제시키도록 명하였다. 《상동》
○ 28년 충렬왕 17년 5월 계축에 상서성(尙書省)의 일을 혁파하고 모두 중서성(中書省)으로 귀속시켰다.
정동행상서성좌승상 부마 고려국왕(征東行尙書省左丞相駙馬高麗國王) 왕춘을 정동행중서성 좌승상(征東行中書省左
丞相)으로 고쳐 제수하였다.
기미에 고려국왕 왕춘이 그의 아들 왕원(王謜)을 세자로 삼기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왕원을 고려 왕세자로 삼고
특진 상주국(特進上柱國)에 제수한 다음 은인(銀印)을 하사하였다.
10월 신사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 왕춘과 공주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에게 예궐하게 하였다.
계미에 고려국에 기근이 들자, 쌀 20만 곡(斛)을 주었다.
12월 을축에 요양(遼陽)ㆍ홍관(洪寬)ㆍ여진부(女眞部)에 기근이 들자 고려의 곡식을 빌려서 진휼하였다.
정묘에 고려국 압록강 서쪽에 있는 19개의 역(驛)이 내안(乃顔)의 반란을 겪는 동안에 마축(馬畜)을 모두 약탈당하였
으므로, 소 각 40마리씩을 지급해 주었다. 《상동》
○ 29년 충렬왕 18년 2월 을해에 총관고려여진한군만호부(摠管高麗女眞漢軍萬戶府)를 설치하고 은인(銀印)을 나누어
주었다.
○ 합단(哈丹)이 바다 남쪽을 건너서 고려를 습격하였다. 제왕(諸王) 탑출(塔出)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토벌하였다.
○ 무인에 조서를 내려 고려 왕 왕춘에게 태보(太保)의 직책을 더해 주었다. 윤6월 신해에 고려에 기근이 들자 고려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곡식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쌀 10만 석을 하사하였다.
8월 무오에 고려ㆍ여진의 계수관(界首官)인 쌍성(雙城)에서 기근이 들었다고 고해 오자, 고려 왕에게 칙령을 내려 해운
(海運)한 곡식 가운데서 덜어 내어 진휼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고려사》 세가(世家)에,
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 《일하구문》에는 또, “곤전(昆田)이 살펴보건대, 고려의 세자는 바로 충선왕(忠宣王) 왕장(王璋)으로, 일찍이 경사
(京師)에다가 만권당(萬卷堂)을 지은 자이다.” 하였다.
○ 30년 충렬왕 19년 2월에 왕춘이 사신을 파견하여 이름을 다시 왕거(王昛)로 고쳤다고 아뢰면서 공신의 호를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제서(制書)를 내려 추충선력정원공신(推忠宣力定遠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 살펴보건대, 《원사》 본기를 보면 29년 2월에 공신의 호를 내려 준 것으로 되어 있는바, 고려전(高麗傳)과는 서로
다르다.
○ 또 고려의 첨의부(僉議府)를 첨의사(僉議司)로 올리고 2품의 도장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따라 주었다.
신해에, 고려에 조서를 내려 연해(沿海)에다가 수역(水驛)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탐라에서 압록강의 입구까지 모두
11개소를 두고, 홍군상(洪君祥)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 11월에 고려 왕 왕거가 들어와 조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31년 충렬왕 20년 4월 갑오에 성종(成宗)이 즉위하였다. 을사에 고려 왕 왕거에게 은 3만 냥을 하사하였다.
○ 5월 무인에 황고(皇姑) 고려 왕 왕거의 비(妃)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을 책봉해서 안평공주(安平公主)로
삼았다.
○ 고려 왕이 상언하기를,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하였다. 이로부터 드디어 다시 고려에 복속되었다. 《이상 모두 상동》
○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충렬왕 21년 4월 을사에 고려 왕 왕거에게 은 3만 냥을 하사하였다.
○ 윤4월 무진에 애아적(愛牙赤)을 파견하여 고려에 저축되어 있는 양곡을 파악하게 하였다.
6월 임자에 고려 왕 왕거가 태사 중서령(太師中書令)으로 삼아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상 모두 상동》
○ 2년 충렬왕 22년 7월에 고려의 첨의사(僉議司)를 올려 2품 아문(衙門)으로 삼았다.
○ 임오에 특진 상주국 고려 왕세자 왕원(王謜)에게 의동삼사 영도첨의사사(儀同三司領都僉議司事)를 제수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대덕(大德) 원년 충렬왕 23년 정월에 왕이 공주, 세자와 함께 만세산(萬歲山) 광한전(廣寒殿)에서 황제를 모시고
잔치하였다. 《일하구문(日下舊聞)》
○ 2월 계묘에 도리태(闍里台)에게 예속된, 새로 부속시킨 고려ㆍ여진ㆍ한(漢)의 군사를 심주(瀋州)에 살게 하였다.
11월 계해에 고려 왕 왕거가 늙었음을 고하면서 작위를 아들 왕원에게 물려주게 하기를 요청하였다.
정축에 조서를 내려 고려 왕세자 왕원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부마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
行中書省左丞相駙馬上柱國高麗國王)으로 삼고, 이어 왕거에게 관작을 더 제수해 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 개부의동삼사
태위 부마 상주국 일수왕(推忠宣力定遠保節功臣開府儀同三司太尉駙馬上柱國逸壽王)을 삼았다. 《원사》
○ 2년 충렬왕 24년 정월에 화림(和林)에 수자리 살고 있는 고려ㆍ여진ㆍ한의 군사에게 초(鈔) 3만 정(錠)을 하사하였다.
7월에 고려 왕 왕원이 명령을 제멋대로 내려 함부로 죽이자 조서를 내려 중서 우승(中書右丞) 양염룡(楊炎龍), 첨추밀원
사(僉樞密院事) 홍군상(洪君祥)을 파견해 왕원을 불러들여 입시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그의 아버지인 왕거에게 국정을 통괄하게 하였다. 《상동》
○ 3년 충렬왕 25년 정월에 왕거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공을 바쳤다. 승상 완택(完澤) 등이 말하기를,
하였다.
○ 임진에 고려의 배신(陪臣) 조인규(趙仁規)를 안서(安西)에다가 안치하고, 최충소(崔沖紹)를 공창(鞏昌)에다가 안치
하였는데, 모두 태형(笞刑)을 가한 뒤 유배 보낸 것이다. 이로써 왕원에게 빌붙어서 마음대로 인명을 살해한 죄를 바로
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왕거를 고려 왕으로 삼은 다음 공부 상서(工部尙書) 야선철목이(也先鐵木而), 한림대제(翰林
待制) 가여주(賈汝舟)를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 2월에 왕거와 온 경내의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하였다. 5월에 합산(哈散)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하였다. 경자에 드디어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다시 설치한 다음, 활리길사(闊里吉思)에게 명하여 고려행성평장정사
(高麗行省平章政事)가 되게 하였다. 9월에 왕거가 사신을 보내어 들어와서 조공을 바치면서 조정에서 행성(行省)을
설치한 것에 대해 표문을 올려 진정하였는데, 그 대략에,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4년 충렬왕 26년 2월에 정동행성평장사(征東行省平章事) 활리길사(闊里吉思)가 말하기를,
하니, 산동 선위사(山東宣慰使) 탑찰아(塔察兒), 형부 상서(刑部尙書) 왕태형(王泰亨)을 파견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여 참람된 의식을 바로잡은 다음 보고하게 하였다. 3월에 활리길사가 다시 글을 올리기를,
하였다. 《상동》
○ 5년 충렬왕 27년 2월에 고려 왕 왕거를 위하여 행성(行省)의 관원을 혁파하고는 조서를 내려서 왕거에게 유시하였다.
7월에 왕거가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하니,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였다.
○ 12월 신묘에 정동행성평장사 활리길사가 고려를 제대로 안집시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
이상 모두 상동》
○ 7년 충렬왕 29년 9월에 형부 상서 탑찰이(塔察而)와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왕약(王約)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
하여 전횡을 한 고려의 국상(國相) 오기(吳祈)를 징소(徵召)하여 대궐에 나오게 해 죄를 문책하였다.
○ 고려 왕 왕거가 연로하여서 아들인 왕원에게 나라를 전하자, 왕원의 정사에 대해 불안하게 여겨 원나라에 참소하여
이간질하는 자가 있었다. 왕원이 경사에 조회하러 오자, 이들이 몰래 사람을 시켜서 원나라의 권력자에게 뇌물을 보내어
왕원을 원나라에 머물려 두고 돌려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왕거가 다시 왕위에 올라서 소인배를 등용하여 세금을 많이
거두고 형벌을 함부로 쓰자, 고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조정에 나와 하소연하였다.
이에 중서령이 그 주모자를 잡아 형부(刑部)에 구금하였다. 그런데도 그의 당여들이 죄를 뉘우치지 않자, 왕약(王約)
에게 맡겨서 사실을 조사하게 하라고 상주하였다. 왕약이 고려에 이르러서 조서를 반포하고는 유시하여 말하기를,
하니, 왕거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하기를,
하였다. 《일하구문》
○ 11년 충렬왕 33년 5월에 무종(武宗)이 즉위하였다. 6월 무오에 고려 왕 왕거를 올려 책봉해서 심양왕(瀋陽王)으로
삼았으며, 태자태부 부마도위(太子太傅駙馬都尉)를 더해 주었다. 《원사》
○ 《동국사략》에,
하였다. 《일하구문》
○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충렬왕 34년 4월 병진에 고려 왕 왕장(王璋)이 말하기를,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하였다. 9월 병진에 고려국왕 왕거가 졸하였다. 경진에 고려국왕 왕장이 고려의 왕위를 이었다. 살펴보건대, 《홍간
속록(弘簡續錄)》에는 원 성종 11년 5월에 충렬왕이 훙한 것으로 되어 있고, 《원사》 본기에는 무종 지대(至大) 원년
9월에 훙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사》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원사》에는 지대 원년 4월에 고려 왕 왕장이 행성을 혁파하기를 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의거하여 보면
행성을 설치한 것은 마땅히 충렬왕이 훙하기 전에 있어야 하니, 《고려사》 및 《홍간속록》과는 서로 어긋난다.
○ 이해에 영원왕(寧遠王) 활활출(闊闊出)이 역모를 꾀하자, 조서를 내려서 고려로 옮겨 있게 하였다. 《이상 모두 원사》
○ 2년 충선왕 원년 2월 계해에 태후가 오대산(五臺山)의 불사(佛寺)에 행행하였다. 3월 기축에 요양행성우승(遼陽行
省右丞) 홍중희(洪重喜)가 고려국왕 왕장이 국법을 준행하지 않고 포악한 짓을 한다는 등의 일에 대해 하소연하였다.
중서성의 신하가 홍중희와 고려 왕을 대질시키기를 청하니, 중서성에 칙령을 내려 대질시키지 말게 하였으며,
고려 왕으로 하여금 태후를 따라서 오대산(五臺山)으로 가게 하였다. 《상동》
○ 3년 충선왕 2년 4월 기유에 고려국왕 왕장에게 공신의 호를 하사하고, 심왕(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상동》
○ 4년 충선왕 3년 3월에 인종이 즉위하였다. 4월 임인에 조서를 내려서 불법적으로 들어온 한인ㆍ고려인ㆍ남인(南人)의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태거(汰去)시켜 원적(原籍)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동》
○ 인종(仁宗) 황경(皇慶) 2년 충선왕 5년 4월 병자에 고려 왕이 왕위를 사양하였다. 그의 세자인 왕도(王燾)를 정동행
중서성좌승상 상주국(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으로 삼고 고려국왕에 봉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귀국시키려고 하였는데, 충선왕이 핑계 댈 말이 없었다.
이에 드디어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도(王燾)에게 왕위를 전하고, 스스로는 심양왕(瀋陽王)이라고 칭하였다.” 하였다.
○ 《고려사》 세가에,
하였고, 또,
하였다. 《일하구문》
○ 10월 임인에 칙령을 내려 한인ㆍ남인ㆍ고려인으로서 들어와서 숙위하고 있는 자들을 상도(上都)에다가 사(司)를
나누어 있게 하고, 활과 화살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원사》
○ 연우(延祐) 원년 충숙왕 원년 12월에 복색(服色) 등에 관한 제도를 정하였으며, 지금 이후로는 고려 사람으로서
겁설(怯薛)에 투속된 자들은 모두 금한(禁限)에 들어 있게 하였다. 《상동》
○ 3년 충숙왕 3년 3월 신해에 고려의 세자 왕고(王暠)에게 개부의동삼사 심왕(開府儀同三司瀋王)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 《홍간속록》에는, “고려 왕 왕도(王燾)가 처음에는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가 이어 조국장공주(曹
國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얼마 뒤에 왕도의 동생인 왕고(王暠)를 왕세자로 삼아 양왕(梁王) 송산(松山)의 딸에게 장가
들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려사》에, 충선왕이 이미 심양왕(瀋陽王)이라 칭하고는 형의 아들인 왕고를 세자로 삼았으며 얼마
뒤에 심왕의 자리를 왕고에게 전하였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 7월 경오에 고려ㆍ여진ㆍ한의 군사 1천 5백 명을 동원해 빈주(濱州)ㆍ요하(遼河)ㆍ경운(慶雲)ㆍ조주(趙州)에서
둔전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5년 충숙왕 5년 4월 기해에 탐라(耽羅)의 포렵호(捕獵戶) 성금(成金) 등이 노략질을 하자, 정동행성에 칙령을 내려
군사를 독려해 체포하게 하였다.
○ 6월에 위왕(衛王) 아출가(阿朮哥)가 죄를 지어 고려로 쫓겨났는데, 술자(術者)인 조자옥(趙子玉)이 몰래 배를 타고
고려로 가서 아출가를 데려오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당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7년 충숙왕 7년 3월에 영종(英宗)이 즉위하였다. 4월 무진에 왕후(王煦)를 봉하여 계림군공(鷄林郡公)으로 삼았다.
《상동》
○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충숙왕 8년 정월 갑신에 고려 왕 왕장(王璋)에게 조서를 내려서 상도(上都)로 오게
하였다. 《상동》
○ 2년 충숙왕 9년 5월 계미에 휘정원사(徽政院事) 신원(新源)을 탐라에 유배 보냈다. 《상동》
○ 3년이다. 충숙왕 10년 조정에서 정동성(征東省)을 혁파하고 삼한성(三韓省)을 설치한 다음 법제와 규식을 다른 성
(省)의 예와 똑같이 하는 것을 의논하였다. 조서를 중서성에 내려서 그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는데, 집현태학사(集賢太
學士) 왕약(王約)이 대답하기를,
하니, 승상이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하면서 이를 아뢰었다. 이에 그 논의가 중지되어 시행되지 않았다.
고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왕약의 화상(畫像)을 그려 사당에 걸고 섬기면서 말하기를,
하였다. 《상동》
○ 태정제(泰定帝) 원년 충숙왕 11년 정월 갑인에 고려 왕에게 칙령을 내려 환국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왕은 충선왕
이다. 이어 그의 인(印)을 되돌려 주었다. 《상동》
○ 4년 충숙왕 14년 마찰대(馬札台)를 패호부 영고려여진한군만호부다루가치[佩虎符領高麗女眞漢軍萬戶府達魯花赤]
로 삼았다. 《상동》
○ 치화(致和) 원년 충숙왕 15년 6월에 고려의 왕세자 완자독(完者禿)이 그의 인(印)을 충숙왕이 빼앗았다고 하소연하자,
평장정사(平章政事) 매려(買閭)를 파견하여 고려 왕에게 유시해 인을 돌려주게 하였다. 《상동》
○ 문종(文宗) 천력(天曆) 원년 살펴보건대, 치화 원년 9월에 문종이 즉위하여 천력(天曆)으로 연호를 고쳤다.
11월 기미에 고려의 환관(宦官) 미설미(米薛迷)ㆍ강답리(剛答里)를 석방하여 고려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동》
○ 2년 충숙왕 16년 정월 계유에 요양성(遼陽省)에 있는 몽고ㆍ고려ㆍ조주(肇州)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는 장교가
역적을 따라서 경기(京畿)를 침범하자, 인부(印符)와 제칙(制勅)을 압수하였다. 11월 기묘에 고려 왕 왕도(王燾)가 병
으로 인해 오랫동안 조회하지 못하자, 그의 아들 왕정(王禎)에게 왕위를 전하도록 명하기를 청하였다. 《상동》
○ 지순(至順) 원년 충숙왕 17년 4월 신축에 명종(明宗)의 후(后) 팔불사(八不沙)가 참소를 입어 해를 당하였다.
이에 드디어 명종의 아들 타환첩목이(妥懽帖睦爾)를 고려의 대청도(大靑島)로 옮기고 사람들과 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1년이 지나서 다시 조서를 내려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으로 옮겼다. 《상동》
○ 2년 충혜왕(忠惠王) 원년 4월 무신에 궁중에 있는 고려의 여자 불안첩니(不顔帖你)를 연철목아(燕鐵木兒)에게 하사
하였다. 고려국왕이 고려에 있는 전지(田地)를 떼어 보내 주기를 청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가서 받게 하였다. 《상동》
○ 3년 충숙왕 후 원년 정월 계유에 고려 왕 왕도에게 그대로 고려 왕이 되라고 명하고는 금인(金印)을 하사하였다.
당초에 왕도가 병이 나자 그의 아들인 왕정에게 왕위를 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왕도의 병이 다 나았
으므로 복위하게 한 것이다. 《상동》
○ 순제(順帝) 원통(元統) 원년 충숙왕 후 2년 고려국의 사신이 경사에 조회하러 가면서 요양(遼陽)을 지나게 되었다.
요양성의 관원을 알현하면서 포목 4필과 서신 1통을 올렸는데, 거기에 정동성(征東省)의 도장을 찍어 봉하였다.
그러자 행성의 참지정사 답리마(答里麻)가 사신을 꾸짖기를,
하니, 사신이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 서신과 포목은 되돌려 주었다.
○ 12월 임신에 노열니타(奴列你他)에게 그의 아버지인 탑라적(塔刺赤)을 대신해서 탐라군민안무사사다루가치[耽羅
軍民安撫使司達魯花赤]가 되게 하고, 삼주호부(三珠虎符)를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년 충숙왕 후 3년 4월 임신에 당기세(唐其勢)에게 명하여 총관고려여진한군만호부다루가치[摠管高麗女眞漢軍萬
戶府達魯花赤]가 되게 하였다. 《상동》
○ 후지원(後至元) 원년 충숙왕 후 4년 3월 경자에 어사대(御史臺)의 신하가 말하기를,
하니, 황제가 따랐다. 11월 갑오에 연철목아(燕鐵木兒)ㆍ당기세(唐其勢)ㆍ답리(答里)가 빼앗은 고려의 전택(田宅)을
고려 왕 아라특눌실리(阿刺忒訥失里)에게 돌려주었다. 《상동》 ○ 살펴보건대, 아라특눌실리는 충숙왕의 몽고식 이름
이다.
○ 3년 충숙왕 후 6년 4월 임오에 고려 왕 아라특눌실리가 조하(朝賀)하고 환국하였는데, 금 1정(錠)과 초(鈔) 2천 정을
하사하였으며, 종관(從官)들에게도 차등이 있게 하사하였다. 《상동》
○ 6년 충혜왕 후 원년 6월 병신에 조서를 내려서 문종(文宗)의 태자 연첩고사(燕帖古思)를 고려에서 석방하였다.
《상동》
○ 지정(至正) 2년 충혜왕 후 3년 가을에 감찰어사가 아뢰기를,
하였다. 대개 당시에 환관들은 대부분 고려 사람들이 하였다. 《경신외사(庚申外史)》
○ 12월에 일본의 장사꾼 1백여 명이 폭풍을 만나서 고려로 표류해 왔다. 고려에서 그들의 재물을 빼앗고는 표문을
올려서 그 사람들을 몰입(沒入)하여 노예로 삼기를 청하자, 철목아탑지(鐵木兒塔識)가 안 된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필요한 물자를 지급해 주어 돌려보냈다. 《원사》
○ 4년 충혜왕 후 5년 3월 임인에 팔독마타아지(八禿麻朶兒只)에게 정동행성 좌승상을 특별히 제수하여 고려국왕의
자리를 이어받게 하였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충혜왕이 탐학스럽고 음란하며 부도하다는 이유로 내주(乃住)ㆍ타적(朶赤)
등을 파견하여 충혜왕을 원나라로 잡아가 게양현(揭陽縣)에 유배하였는데, 중도에 악양(岳陽)에 이르러서 훙하였다.
왕이 원나라로 잡혀갔을 때 재상(宰相)과 국로(國老)들이 민천사(旻天寺)에 모여 글을 올려서 충혜왕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하기로 의논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그 글을 초하여 서명을 받은 다음 정동성(征東省)에 바치고자 하였는데, 일이 마침내 성사되지 못하
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고려국의 기로와 뭇 관원들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정동성의 여러 상공(相公)들의 집사(執事)께 글을 올립니다. 원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사신 타적(朶赤) 등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대사(大赦)하라는 덕음을 공손히 받들고 앞서 왕경(王京)에
왔습니다. 이에 우리 보탑실련왕(寶塔實憐王)이 관원들을 거느리고 의장(儀仗)을 갖춘 다음 성 밖으로 나아가 맞이하
고, 다시 본성(本省)으로 들어가 조서를 반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마치자마자 사신 등이 왕을 잡아 말에
태워서 돌아갔습니다. 일이 창졸간에 발생하였으므로 배신(陪臣)들은 모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
겠습니까. 생각해 보건대, 왕은 나이가 어려 많은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한 탓에 감정에 따라 곧바로 일을 행하여서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왕의 본심을 따져 보면 대개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늘의 해가 내려 비추고 있는데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또 생각해 보건대, 소방은 시조(始祖) 왕씨가 바다 귀퉁이에서 개국한 지 이미 4백 26년이 되었고, 자손
들이 서로 계승한 것이 이미 28대나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송(宋)ㆍ요(遼)ㆍ금(金)나라를 두루 섬기면서 사신을 통하여
내왕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 얽매여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태조 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께서 나라를 일
으키실 즈음에 미쳐서 금산왕자(金山王子)란 자가 중원의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망한 요나라의 왕업을 다시 일으키기를
도모하다가 형세가 궁해져 동쪽으로 달아나 섬에서 숨어 지내며 날뛰었습니다. 태조께서 합진(哈眞)ㆍ찰라(札刺) 두
장수에게 명하여 그의 죄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날씨는 차고 눈은 높이 쌓여 군량미를 이어 대지 못하였으므로,
우리 충헌왕(忠憲王)이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 등을 파견해 군사와 식량을 도와 일거에 적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두 나라가 서로 동맹을 맺어 자손만대토록 그 당시의 일을 잊지 말자고 하였으며, 인하여 포로로 잡은 자들을
서로 나누어서 징표로 삼았습니다. 지금 소방에 거란장(契丹場)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조 문무황제(世祖文武皇帝)께서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사열하실 때 아리패가(阿里孛哥)가 막북(漠北)에서 변란을
선동하자 제후들이 모두 의심하여 각자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우리 충경왕(忠敬王)이 세자로
있으면서 험난함을 무릅쓰고 곧바로 변량(汴梁)에 가서 길에서 황제를 맞이하자, 세조께서 바라보시고는 놀라고 기뻐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고려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이다. 지금 내가 북쪽으로 돌아가서 장차 대통(大統)을
이으려 하는데, 고려의 세자가 스스로 와서 나에게 귀순하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 뒤 충경왕이 이미 즉위하였는데도 배신(陪臣) 임유무(林惟茂) 부자가 내속(內屬)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제 마음대로
충경왕을 폐하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서 저항하자, 세자로 있던 충렬왕이 원나라 조정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
였습니다. 그러자 세조께서 불끈 화를 내시어 조서를 내려서 왕을 복위시키고 역말을 타고 달려와 조근(朝覲)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왕과 세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서 역당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와
온 마음을 다해 직공(職貢)을 닦았습니다. 충렬왕 대에는 세조께서 두 차례 일본을 정벌하시었는데, 왕이 김방경(金方
慶) 등을 파견하여 전선(戰船)을 수리하였으며, 매번 선봉이 되었습니다.
또 내안(乃顔)의 당(黨)인 합단(哈丹)이 수달달(水達達)과 여진(女眞) 지역을 함락시키고는 우리나라의 국경까지 침범
하여 황제의 위엄을 거역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왕이 군사를 출동해 맞받아쳐서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덕(大德) 말년에 익지례불화왕(益知禮不花王)이 인종황제(仁宗皇帝)를 도와 난을 평정하여 궁궐을 맑게
했으며, 무종황제(武宗皇帝)를 맞이해 와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왕씨가 원나라에 충성한 것은
오래된 것입니다. 또 생각해 보건대, 세조황제께서 홀독겁미사공주(忽篤怯迷思公主)를 고려로 시집보내셨는데,
이 공주가 익지례불화왕을 낳고, 익지례불화가 아납특실리왕(阿納忒室利王)을 낳고, 아납특실리가 보탑실리왕(寶塔實
里王)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보탑실리왕은 비록 소원하기는 하지만 세조에게 있어서는 실로 피를 나눈 후손인 것입니다.
또 생각해 보건대, 황후(皇后) 기씨(奇氏)는 소방에서 태어나 위로 지존(至尊)의 배필이 되어 태자를 낳아 천하 사람들
이 경하하면서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원나라 조정에서 소방을 다른 번국(藩國)들과 똑같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또 생각건대, 소방은 일본과 더불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원나라로부터 복을 받는다면 저들은 원나라에 늦게 귀화한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우리가 화를 당한다
면 저들은 원나라에 귀화하지 않은 것을 잘한 짓으로 여길 것으로, 이는 형세에 있어서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옛날에 주(周)나라에서는 우후(虞侯) 간(衎)을 잡아갔다가 마침내는 그로 하여금 왕위를 회복하게 하였고, 한(漢)나라
에서는 양왕(梁王) 무(武)를 징소하였다가 역시 양(梁)으로 되돌아가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왕자(王者)의 큰 도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원나라 조정은 열성조(列聖祖) 이래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저 주나라나 한나라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지금 남쪽 교외에서 친히 제사 지내어 조(祖)를 높여 하늘에 짝하게 하고, 대례(大禮)가 이미 이루어져 덕음(德音)이
널리 펴졌습니다. 이에 밖으로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춤을 추면서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은택을 입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마음 아프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천자(聖天子)께
서는 허물을 용서하는 더할 수 없이 크신 어지심으로 한 마음을 돌림으로써, 우리 보탑실리왕으로 하여금 죄망에서
벗어나 은파(恩波)에서 놀게 하고, 또 왕씨의 군신(君臣)과 사직(社稷)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바꾸지 않고 의관과
풍속을 모두 옛 제도대로 하게 해서,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구업(舊業)에 편안하게 하신다면,
태조와 세조께서 소방을 돌보아 주신 뜻이 어찌 더욱더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세조께서 공주를 시집보내시
어 자손을 낳게 해 먼 나라의 마음을 붙잡아 두신 그 규모가 어찌 더욱 원대해지지 않겠으며, 기씨 황후가 태자를 낳
아 천하 사람들이 경하하며 의지하는 것이 어찌 더욱 거룩해지지 않겠으며, 소방에서 근왕(勤王)하며 적개(敵愾)하는
마음이 어찌 더욱 굳어지지 않겠으며, 복종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이 그 어리석음을 고쳐서 기꺼이 원나라로 귀화하려
는 뜻이 어찌 더욱더 독실해지지 않겠으며, 4백 26년간 28대에 걸친 역대의 선왕들이 어찌 더욱더 감격해 하지 않겠
으며, 허물을 용서해 주는 더할 수 없이 큰 원나라 조정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어찌 더욱더 천하 후세에 퍼져나
가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보잘 것 없는 저의 말을 굽어 살펴서 황제께 진달해 주소서.’ 하였다.” 하였다.
○ 또 살펴보건대, 팔사마타아지(八沙麻朶阿只)는 충목왕(忠穆王)의 몽고식 이름이다.
○ 8년 충목왕 4년 12월에 감찰어사 이필(李泌)이 아뢰기를,
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상동》
○ 기씨(奇氏)에 대한 일은 인물고(人物考)에 상세히 나온다.
○ 10년 충정왕(忠定王) 2년 11월 병진에 고려 심왕(瀋王)의 손자 탈탈불화(脫脫不花) 등을 동궁(東宮)의 겁설관(怯薛官)
으로 삼았다. 《상동》
○ 11년 충정왕 3년 9월 임술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 부답실리(不答失里)의 동생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에게 왕위를
이어받게 하고, 부답실리의 아들은 폐위시켰다. 《상동》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충혜왕의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寶塔實里)이고, 공민왕(恭愍王)의 몽고식 이름은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이다.
○ 12년 공민왕 원년 8월 정미에 일본에서 고려에 알려오기를, “도적들이 바다를 건너가서 노략질할 것이다.” 하였는데,
알려온 자는 자칭 도거주(島居主)라고 하였다. 고려국왕 백안첩목아가 군사를 징발해 왜구들을 물리치자, 금계요
(金繫腰) 하나와 초(鈔) 1천 정을 하사하였다. 《상동》
○ 14년 공민왕 3년 9월 갑자에 고려국왕 탈탈불화(脫脫不花)를 봉하여 심왕(瀋王)으로 삼았다. 《상동》
○ 15년 공민왕 4년 11월 신해에 고려국왕 백안첩목아에게 친인보의선충봉국창혜정원공신(親仁輔義宣忠奉國彰惠靖
遠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상동》
○ 16년 공민왕 5년 2월 병인에 한림국사원(翰林國史院)ㆍ태상예의원(太常禮儀院)에 명하여 황후 기씨(奇氏) 3대의
공신 시호(功臣諡號)와 왕작(王爵)을 의논해 정하게 하였다. 《상동》
○ 18년 공민왕 7년 12월 계유에 관선생(關先生)ㆍ파두반(破頭潘) 등이 상도(上都)를 함락하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7일간 머무르다가 다시 요양(遼陽)으로 가서 공략한 다음 드디어 고려에까지 이르렀다. 《상동》
○ 19년 공민왕 8년 파두반ㆍ관선생ㆍ사유(沙劉) 및 이군(二軍)이 고려의 왕경(王京)으로 들어가자 고려 왕이 탐라
(耽羅)로 도망쳤다.
그의 신하들이 여자들을 바치면서 항복을 청하자, 장교들이 여자들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어 드디어 고려와 인척 관계를
맺고는 마음대로 왕래하였다. 고려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말을 몰래 수풀 속에 감추고는 어느 날 저녁에 왕의 명령을 전
하면서 고려말을 하는 자는 죽이지 않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 이에 사유 및 이군과 관선생이 모두 죽고,
오로지 파두반과 비장 좌이(左李)만이 날랜 기병들을 거느리고 샛길을 따라서 서경(西京)으로 도망쳤다.
《경신외사(庚申外史)》
○ 22년 공민왕 11년 12월에 황제가 참소하는 말에 속아 고려 왕 백안첩목아를 폐위시키고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왕으로 삼았다. 그러자 고려 사람들이 상서하여 옛 왕을 폐해서는 안 되고 새 왕을 즉위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하
였다.
○ 황후 기씨의 종족들이 고려에 있으면서 황제의 총애를 믿고는 교만방자하게 굴었다.
《경신외사》에, “기후(祈后)의 종족들로서 고려에 남아 있는 자들이 대부분 관작과 봉호를 받고는 나가서는 세력을
믿고 교만방자하게 굴면서 다른 사람들의 전택과 자녀들을 강탈하였다.” 하였다. 백안첩목아가 여러 차례 경계시켰
으나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이에 고려 왕이 드디어 기씨의 일족을 모두 죽이니, 황후가 태자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이때 고려 왕의 형제로서 경사에 머물러 있는 자가 있었는데, 의논을 하여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왕으로
삼았다. 《홍간속록》에, “황후가 고려 왕이 기씨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유로 날마다 황제에게 참소하여 마음대로 왕위
를 폐하였다.” 하였다. 그러고는 기씨의 족자(族子)인 삼보노(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고 장작동지(將作同知) 최첩
목아(崔帖木兒)를 승상으로 삼아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가게 하였다.
이들이 압록강에 이르러서 고려의 군사들에게 패하여 겨우 17기(騎)만 경사로 되돌아왔다. 《이상 모두 원사》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탑사첩목아는 바로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 왕혜(王譓)이다. 일찍이 중이
되어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원나라에서 탑사첩목아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임인년에 반신(叛臣)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유세하여 왕으로 세우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로 들어와서 약탈하려고 하였는데, 갑진에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원나라에서는 명을 내려 다시 공민왕을 복위시키고, 최유를 잡아보내니, 복주하였다. 최유는 바로 최첩목아
이다.
○ 23년 공민왕 12년 봄에 관선생(關先生)의 잔당들이 다시 고려로부터 돌아와서 상도(上都)를 노략질하였는데, 패라
첩목아(孛羅帖木兒)가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상동》
○ 25년 공민왕 14년 12월 을묘에 조서를 내려 차황후(次皇后) 고려 기씨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그러고는 기씨를
숙량합씨(肅良合氏)로 고친 다음 천하에 조서를 내리고, 이어 기씨의 아버지 이상 삼대를 봉하여 모두 왕작(王爵)을
주었다. 《상동》
○ 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원년 공민왕 17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려왕 왕전(王顓)에게 새서(璽書)를 하사하고,
천하를 평정하였음을 유시하였다. 《명사(明史)》
○ 2년에 공민왕 18년 왕전이 표문을 올려 하례하면서 방물을 바쳤으며, 아울러 고려 왕으로 책봉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부새랑(符璽郞) 설사(偰斯)를 파견하여 살펴보건대, 《본기》에는 8월 병자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서와 금인(金印), 고문(誥文)을 싸 보내어 왕전을 고려국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 왕전이 총부 상서(摠部尙書) 성유득
(成惟得)과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 김갑량(金甲兩)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아울러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였으며, 인하여 제복(祭服)에 관한 제도를 청하였다. 성유득 등이 하직하고 돌아갈 때 황제가 조용히 묻기를,
하니,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뢰기를,
하였다. 이에 드디어 새서를 내려서 유시하였다. 새서는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
○ 《무비지(武備志)》에는, “새서를 내려서 왕에게 유시하기를, ‘불법(佛法)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가 아니니, 양(梁)
나라 무제(武帝)의 일이 후세의 귀감인 것이다. 왕은 불법에 미혹되지 말라. 한나라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정령(政令)을
펴지 않고서야 어떻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는가. 왕의 나라는 북쪽으로는 오랑캐들과 접하여 있고, 남쪽으로는 왜놈들
과 인접해 있다. 오랑캐들이 지금 이쪽에서 상처를 입었으니 아마도 그쪽으로 도망칠 것 같으며, 왜놈들은 또 교활하고
탐욕스러워 바닷가에 출몰하면서 왕의 빈틈을 노릴 것이니, 짐은 걱정이 된다. 성을 쌓고 군사를 모아 방비를 굳게
하는 것을 왕은 잘 생각해서 하라. 이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여러 책을 왕에게 하사하니, 짐의 뜻을 잘 알라.’ 하
였다.” 하였다. 이로부터 공물을 자주 바쳤고, 원단(元旦)과 성절(聖節)에는 사신을 보내 축하하는 것이 해마다의 규례
로 되었다. 《상동》
○ 3년 공민왕 19년 정월 계사에 황제가 7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직접 축문(祝文)을 지어 서명하였다.
그러고는 향(香)을 사신에게 주어 고려국으로 보내 산천(山川)의 신에게 제사 지냈다.
○ 이해에 과거령(科擧令)을 반포하면서 고려에 조서를 보내 알렸다.
다음 해에 고려에서 들어와 과거에 응시한 3인 가운데 1명이 급제하였는데, 중국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후하게 대접한
다음 되돌려 보냈다. 《이상 모두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
○ 5년 공민왕 21년 왕전이 예부 상서 오계남(吳季南), 민부상서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하였는데, 새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였다. 《오학편(吾學編)》
○ 공사(貢使) 홍사범(洪師範)ㆍ정몽주(鄭夢周) 등 1백 50여 명이 경사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39명이 죽었는데, 홍사범
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황제가 불쌍하게 여겨 원나라의 추밀사(樞密使)로 있었던 연안답리(延安答里)를 파견하여
고려에 가서 조공을 자주 바치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그런데 왕전이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강인유(姜仁裕)를
보내어 말을 바쳤으며, 하정조사(賀正朝使) 김서(金湑)가 그에 앞서 와 있었다. 황제가 이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명사》
○ 상이 고려의 사신들을 돌려보냄을 인해서 중서성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6년에 공민왕 22년 고려 왕이 다시 사신 김갑량(金甲兩) 등을 보내어 말 50필을 바쳤다. 김갑량이 경사에 와서 도중에
말 2마리가 없어졌다고 말하였는데, 말을 올릴 때에는 50마리를 바쳤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사마(私馬)로 채워 넣었다
고 하였다. 다시 어떻게 사마를 구하였는가를 묻자, 동궁(東宮)에 바치려고 하던 말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가
성실치 못한 것을 미워하여 말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르기를,
하면서, 왕전에게 새서를 내려, 이 뒤로는 성실치 못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자를 사신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상동》
○ 7년에 공민왕 23년 왕전이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 주의(周誼)ㆍ정비(鄭庇) 등을 보내어 와서 공물을 바치고,
표문 5통을 올렸다. 2통은 전후로 내려 준 2통의 새서에 대해 사은하는 것이었고, 1통은 해마다 한 차례씩 조공을 바치
겠다는 것이었고, 1통은 조공하는 길을 정료위(定遼衛)를 거치는 육로로 가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것이었고, 1통은 풍랑에 휩쓸린 사람들을 구휼해 준 데 대해 사은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그 공물을 되돌려 주면서 새서
를 내려 이르기를,
하였다. 이해에 왕전이 졸하였다. 왕전이 졸한 것은 대개 고려의 권신인 이인인(李仁人)이 시해한 것이다. 왕전에게
아들이 없어서 총애하는 신하인 신돈(辛旽)의 아들 신우(辛禑)를 아들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이인인이 살펴
보건대, 이인인은 이인임(李仁任)으로 써야 한다. 신우를 왕으로 세웠다. 《상동》
○ 8년에 신우(辛禑) 원년 신우가 판종부사(判宗簿事) 최원(崔原)을 파견하여 부고를 전하였다. 그러고는 또 말하기를,
하였다. 황제가 속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최원을 구류시키고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명사》
○ 10년에 신우 3년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죽은 왕의 시호(諡號)를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는 왕전이 시해당한 지 이미 3년이 지난 뒤였다. 황제가 중서성의 신하에게 칙령하기를,
하고, 인하여 최원을 풀어 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여름에 고려에서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하여 말과 방물을 조공하였으나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명사》
○ 겨울에 고려의 사신이 다시 왔다. 중서성에 칙령하기를,
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11년에 신우 4년 고려가 정사를 담당하고 있는 대신을 파견하여 약속한 조공을 바쳤는데, 감히 ‘사왕(嗣王)’이라고
칭하지 못하고 ‘고려국 왕세자 우(禑)’라고 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하였다. 이에 황제가 정사를 담당하고 있는 고려의 신하를 돌려보내면서 칙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하였다. 《상동》
○ 12년 신우 5년 겨울에 신우가 이무방(李茂芳) 등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하였는데, 약속과 맞지 않으므로 퇴각시켰다.
○ 섭왕(葉旺)이 요동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려에서 사신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서신과 예물을 올렸다.
섭왕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하였다.
○ 명나라에서 요왕(遼王) 식(植)을 위하여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었다. 그때 마침 고려에서 국중(國中)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곡을 저장하니, 황제가 고려에서 음모를 꾸밀까 염려하여 공사를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이상 모두 명사》
○ 경신에 원나라의 임금이 사막(沙漠)으로 달아난 뒤의 그 임금과 신하들의 사적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고려에서 가끔 사신을 보내 통교하면서 북원(北元)이라고 칭하였다. 북원의 임금이 응창(應昌)으로 달아났다가 홍무
3년 경술년 4월에 죽었다. 국인(國人)들이 뒤에 혜종(惠宗)이라고 시호를 올렸는데, 이가 바로 순제(順帝)이다.
그의 아들이 임금의 자리를 이어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화림(和林)으로 달아났다. 홍무 10년 정사에 북원에서 고려로
사신이 왔는데, 선광(宣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국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살펴보건대,
바로 홍무 12년이다. 또다시 첨원(僉院) 보비(甫非)를 파견하여 천원(天元)이라는 연호를 알려왔다.
이에 신우가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을 파견하여 가서 축하하도록 하였다. 임금으로 된 지 11년 만에 죽었고 북원
에서 시호를 소종(昭宗)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폭서정집(曝書亭集)》
○ 13년에 신우 6년 고려에서 명나라 변경의 신하들에게 자주 금과 비단을 예물로 바쳤는데, 다시 주의(周誼)를 파견
하여 요동으로 들어가 일을 꾸미게 하였다. 이에 황제가 변경을 지키는 장수인 도지휘사(都指揮使) 번경(藩敬)과 섭왕
(葉旺)에게 칙령을 내리기를,
하였다. 주의가 경사에 도착하자, 경사에 머물게 하고는 이르기를,
하였다.
○ 17년 신우 10년 6월에 신우가 사복 정(司僕正) 최연(崔涓), 예의 판서(禮儀判書) 김진의(金進宜)를 파견하여 말 3천
필을 바쳤다. 또 말하기를,
하였다. 요동의 수장(守將) 당승종(唐勝宗)이 이를 청하자, 황제가 허락하였다. 가을에 또 사신을 파견해 표문을 올려
죽은 왕의 시호 및 사왕(嗣王)의 책봉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명사》
○ 18년 신우 11년 정월에 고려에서 공사(貢使)가 나와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포 5만 필을 바쳤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하고, 이어 왕전에게 공민왕(恭愍王)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명산장왕향기》
○ 7월에 왕우를 봉하여 고려국왕으로 삼았다. 《명사》
○ 19년에 신우 12년 지휘첨사(指揮詹事) 고가노(高家奴) 등을 보내어 기단(綺段)과 포필(布疋)을 가지고 고려로 가서
말을 사게 하였는데, 말 1필당 문기(文綺) 2필, 포 8필을 주게 하였다. 《속문헌통고》
○ 전에 원나라에서 고려의 포마(鋪馬 역마(驛馬)를 말함)에게 준 몽고 문자(蒙古文字)를 받아들이고, 쌍마(雙馬)에게는
4통의 현자호(玄字號)를, 단마(單馬)에게는 2통의 홍자호(洪字號)를, 기선(起船)에게는 2통의 안자호(安字號)를 내려
주었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20년에 신우 13년 고가노(高家奴) 등이 고려에서 말을 사고는 돌아와서 고려 왕이 말값을 받지 않겠다고 표문을 올려
청하였다고 아뢰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고, 예부에 유시하기를,
하고, 이어 연안후(延安侯) 당승종(唐勝宗)에게 유시해서 고려의 말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쓸만한 말을 가려 값을 갚아
주고 노둔하고 허약한 말은 값을 적당하게 감한 다음 이어 고려의 국왕에게 보고하여 알리게 하였다. 이 칙서가 요동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고려에서 보낸 말 3천 40필이 요동에 도착하였다. 당승종이 칙서의 내용대로 값을 쳐주었다.
○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
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고가노(高家奴)ㆍ서질(徐質)
등이 고려로 말을 사러 갈 때에 미쳐서 예전에 원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 교주(咬住) 등이 이 사실을 말하자, 황제가
고가노 등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가 판 말을 보내는 편에 이들을 보내어 드디어 요양과
심양에서 옮겨간 유민 나타리(奈朶里)ㆍ불반(不反) 등 45호(戶) 3백 58명이 돌아왔다. 《이상 모두 엄주별집(弇州別集)》
○ 7월에 고려에서 주달하기를,
하였는데, 예부 상서 이원명(李原名)이 아뢰기를,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호부에 명하여 고려 왕에게 자문(咨文)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 자문에,
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하였다.
8월에 고려의 천호(千戶) 진경(陳景)이 와서 항복하였다. 10월에 신우가 그의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청하
였다. 《상동》
○ 《오학편(吾學編)》에는, “이인인(李仁人)이 우(禑)를 위협하여 수금하고는 그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그런 다음 강백회(姜伯淮)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하였다.
○ 22년 공양왕(恭讓王) 원년 창이 들어와 조회하기를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 《무비지(武備志)》에는, “국상(國相) 이인인이 우를 폐위시키고 창을 세우고는 그해에 두 번이나 입조할 것을 청
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하였다.
○ 이성계가 창을 폐위시키고 정창국원군(定昌國院君) 요(瑤)를 세우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고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살펴보건대, 공양왕은 신종(神宗)의 7세손이다.
○ 24년에 공양왕 3년 고려에 조서를 내려서 말 1만 필을 샀다. 8월에 권국사(權國事) 왕요(王瑤)가 판선공시(判繕工寺)
양천식(楊天植) 등을 파견하여 고려에서 판 말 1천 5백 필을 올렸다. 요동에 와서 아뢰기를,
하였다. 11월에 고려의 신하 김지탁(金之鐸) 등이 고려에서 판 말 2천 5백 필을 올리기 위해 요동에 이르니, 황제가
정료위 지휘첨사(定遼衛指揮僉事) 장충(張忠)에게 명하여 광녕위(廣寧衛)ㆍ중호위(中護衛) 등에 보내어 기르게 하
였다. 《엄주별집》
○ 12월에 왕요가 그의 아들 왕석(王奭)을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명사》
○ 25년에 공양왕 4년 고려국의 지밀직사(知密直事) 조반(趙胖) 등이 고려의 도평의사(都評議司)에서 올리는 주문
(奏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하였다. 이어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바꾸고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고쳤는데, 황제가 모두 따라 주었다. 《사승고오》
[주D-001]탐라(耽羅)에 …… 무리들 : 김통정(金通精)이 거느리고 들어간 삼별초(三別抄)의 군대를 말한다.
[주D-002]관직의 …… 하였다 : 이때 원나라에서 원나라의 관명(官名)과 일치하는 것은 참람하다는 이유로, 고려의
관직 가운데 최고 행정 기구인 중서성(中書省)ㆍ문하성(門下省)ㆍ상서성(尙書省)을 통합하여 첨의부(僉議府)란 단일
기구로 개편하는 동시에 그 장관을 첨의중찬(僉議中贊)이라 하고, 상서육부(尙書六部)는 이부(吏部)와 예부(禮部)를
합하여 전리사(典理司)로, 병부(兵部)를 군부사(軍簿司)로, 호부(戶部)를 판도사(版圖司)로, 형부(刑部)를 전법사
(典法司)로 고쳤으며, 사(司)의 장관을 상서(尙書)에서 판서(判書)로, 차관을 시랑(侍郞)에서 총랑(摠郞)으로 고쳤다.
또 추밀원(樞密院)은 밀직사(密直司)라고 개칭하여 첨의부와 함께 양부(兩府)라 하고, 양부 요관(要官)의 합의 기관인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칭하였으며, 왕과 왕족에 관련되는 칭호 및 용어도 모두 고쳤다.
《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613쪽》
[주D-003]김방경 …… 일으켰다 : 이때 김방경은 난을 일으키지 않고 무고(誣告)를 당하였다. 당시에 김방경이 권력을
잡고 일본을 정벌한 데 대한 논공행상을 주관하면서 공평하게 하지 않자, 대장군 위득유(韋得儒), 중랑(中郞) 노진의
(盧進義)가 개인감정으로 흔도(忻都)에게 ‘김방경이 그의 아들과 사위 및 공유(孔愉)ㆍ나유(羅裕)ㆍ안사정(安社貞)ㆍ
김천록(金天祿) 등 4백 명과 모의하여 왕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화도로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무고하였는데, 홍다구(洪茶邱)에 의해 대청도(大靑島)로 유배 갔다가 얼마 뒤 무고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東史綱目 第12上》
[주D-004]김수(金㥅) :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김흔(金忻)으로 되어 있다.
[주D-005]해도(海島) : 이때 김방경은 홍다구(洪茶邱)의 모함으로 대청도(大靑島)로, 김흔은 백령도(白翎島)로 유배
되었다가 얼마 뒤 무고임이 밝혀져 풀려났다.《東史綱目 第12上》
[주D-006]화장 수군(火長水軍) : 전선(戰船)을 지휘하여 항해하는 수군을 말한다.
[주D-007]초(鈔) : 지폐(紙幣)를 말한다. 회자(會子)ㆍ보초(寶鈔)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저화(楮貨)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주D-008]일본행성(日本行省) :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하였던 관청이다. 제1차 일본 정벌에
실패한 원 세조가 충렬왕 6년(1280)에 일본행성을 설치하고 제2차 일본 정벌을 준비, 실행에 옮겼다가 실패하자
충렬왕 8년에 폐지하였다. 그 후 제3차 일본 정벌이 계획됨에 따라 충렬왕 9년에 다시 설치하였으나, 중국 강남에서
소요가 일어남에 따라 정벌 계획을 중지하는 동시에 일본행성도 폐지하였다. 그 후 다시 충렬왕 11년에 3차로 설치하고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다음 해 1월에 계획의 중지로 폐지하였다. 정동행성은 본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설치했으나,
원나라에서 일본 정벌을 포기한 뒤로는 고려에 대한 간섭 기관으로 변모되어 공민왕 5년(1356)까지 존속하였다.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ㆍ정동행성(征東行省)ㆍ정동성(征東省) 등으로도 칭하였다.
[주D-009]평호도(平壺島) : 일본 서해도(西海道) 비전주(肥前州)에 속하며, 대마도와 구주(九州) 사이에 있는 일기도
(壹岐島)의 동쪽에 있다. 평호도(平戶島)라고도 한다.
[주D-010]내안(乃顔) : 원나라 태조의 동생인 첨목가알적근(帖木哥斡赤斤)의 5대손으로 흥안령(興安嶺) 동쪽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이해에 동쪽 지방에 있는 여러 왕들을 충동해 4만 명의 군사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
다가 원 세조 홀필렬(忽必烈)에게 패하여 사로잡혀서 처형되었다. 그의 나머지 잔당들이 충렬왕 16년(1290)에 합단
(哈丹)과 합류하여 고려의 북변을 침입, 철령(鐵嶺)을 넘어 양근(楊根)을 함락하였는데, 고려와 원나라 군사가 힘을
합해 연기(燕岐)에서 대파하여 물리쳤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624쪽》
[주D-011]합단(合丹) : 원나라 태조의 동생인 합적온(合赤溫)의 손자이다. 내안(乃顔)의 여당(餘黨)으로, 내안이 토벌
된 뒤 다시 반기를 들어 일어났다가 원나라 관군에게 패하였다. 그러자 방비가 약한 동쪽으로 진출해 충렬왕 16년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고려로 침입해 와 양근(楊根)을 함락하였으나, 연기(燕岐)에서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D-012]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이름이다.
[주D-013]계수관(界首官) : 주위에 있는 주부(州府)와 군현(郡縣)을 관할하는 중심이 되는 고을을 말한다.
[주D-014]만권당(萬卷堂) : 충선왕이 재위 5년 만에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 서울인 연경(燕京)에다 지은
독서당(讀書堂)으로, 충숙왕 1년(1314)에 건립하였다. 고금의 많은 진서(珍書)를 수집하여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본국
으로부터 이제현(李齊賢)을 불러 그 당시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조맹부(趙孟頫)ㆍ염복(閻復)ㆍ우집(虞集) 등과 함께
경사(經史)를 연구, 토론케 하여 두 나라 간의 문예(文藝)가 많이 교류되었다.
[주D-015]탐라에서 …… 두고 : 이 부분의 원문은 ‘自耽羅 至鴨綠江 幷楊村海口 凡十一所’이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를 보면 “지원 30년에 해안선을 따라 수역(水驛)을 설치하였는데, 탐라에서 압록강까지와 양주(楊州)의 바다 입구
까지 합하여 30개소였다.”고 하였고, 《원사》 권17 본기 제17 세조 14에는 ‘自耽羅至鴨綠江口 凡十一所’라고 되어 있다.
이에 ‘幷楊村海’를 빼고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고려 왕 …… 요청하였다 : 이해에 충렬왕의 비(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죽자, 원나라에 있던
그의 아들 충선왕(忠宣王) 왕원(王謜)이 귀국하여 제국대장공주가 죽은 원인이 내총(內寵)을 투기하는 자들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면서 충렬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무비(無比) 등 여러 사람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에 충렬왕은 아들의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 및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에 충격을 받아 충선왕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태상왕(太上王)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다시 원나라의 명에 의해 복위(復位)하였다.
[주D-017]겁설대(怯薛䚟) : 시위하는 군사를 말한다. 겁설(怯薛)은 몽고어로 시위(侍衛)를 뜻하며, 겁설알(怯薛歹)이라
고도 한다.
[주D-018]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를 …… 짓 : 충선왕의 정비(正妃)는 원나라 진왕(晉王)의 딸 계국대장공주인데,
계국대장공주와 원나라에서 혼사를 맺기 전에 고려에 있으면서 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었다.
충렬왕 24년에 충선왕이 계국대장공주와 함께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돌아와 즉위한 뒤 조비(趙妃)만을 총애하자, 계국
대장공주는 조비의 어머니가 왕으로 하여금 조비만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도록 저주를 행한다는 내용의 편지
를 원나라 조정에 보냈다. 이에 원나라에서는 충선왕을 원나라로 들어오게 하고,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하였다.
[주D-019]고려 왕 …… 하였다 : 충선왕이 원나라의 명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로 들어간 뒤에도 충선왕에 대해
원한을 품은 오기(吳祈)ㆍ송린(宋璘)ㆍ송방영(宋邦英) 등이 계속해서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를 이간
시켜 귀국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에게 개가(改嫁)시켜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사되기 직전에 원나라 내부에 모반 사건이 일어나 충렬왕 34년(1308)에
원나라 인종(仁宗)이 즉위함에 따라 충렬왕과 충선왕의 불화가 풀려 좌절되어 송인ㆍ송방영 등의 일파와 서흥후 왕전은
피살되었다.
[주D-020]10월 …… 하였다 : 이 기사가 《원사》 권21에는 성종 대덕(大德) 8년의 기사로 되어 있는바,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듯하다.
[주D-021]보탑공주(寶塔公主) : 계국대장공주를 말한다.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이다.
[주D-022]심양왕(瀋陽王) : 고려 때 원나라로부터 받은 봉작(封爵)의 하나이다.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을 추대한
공으로 처음으로 심양왕의 봉작을 받았다. 이는 그 당시에 심양 즉 지금의 봉천(奉天) 등지가 고려인의 전쟁 포로나 유민
(流民)들이 많이 살면서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상 경제상으로도 아주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이
지방을 맡아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D-023]충선왕이 …… 옹립하였다 : 원나라의 성종이 붕어하자 승상인 아홀대(阿忽臺) 등이 반란을 꾀하였는데,
원나라에 가 있던 충선왕이 뒤에 인종(仁宗)이 된 애육려발력팔달(愛育黎拔力八達)과 함께 아홀대를 잡아 죽이고 회령왕
해산을 맞이하여 와 황제로 옹립하였는데, 이가 바로 무종이다. 애육려발력팔달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충선왕과 함께
생활하여 아주 친하였었다.
[주D-024]왕장(王璋) : 충선왕의 고친 이름이다. 충선왕의 원 이름은 왕원(王謜)이다. 《원사》에는 왕장(王章)으로
되어 있으나 왕장(王璋)이 맞으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5]상도(上都) : 원나라는 이때 연경(燕京)을 대도(大都)라 하고 개평(開平)을 상도(上都)라 하여 여름에는
황제가 대도에 있고 겨울에는 상도에 있었다.
[주D-026]충선왕 5년 …… 안치하였다 : 《신원사》 권249 외국열전(外國列傳)에는, “연우(延祐) 6년(1319, 충숙왕6)에
왕원(王謜)이 강남(江南)에 강향(降香)하러 가는데, 강소성(江蘇省) 단사현(丹徙縣) 서북쪽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을 적에 영종(英宗)이 갑자기 불러들였다. 왕원이 복명(復命)하자, 갑사(甲士)들이 갑자기 그를 에워싸 데려가자
시종하던 신하들이 모두 달아났다. 왕원이 대도(大都)에 이르렀을 때 중서성에 명하여 왕원을 고려로 호송하게 하였는데,
왕원이 머뭇거리며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 이에 10월에 왕원을 형부의 옥에 수금하였다가 얼마 뒤 그의 머리를 깎고
석불사(石佛寺)에 안치시켰다.” 하였으며,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3하 충숙왕 6년 조에는, “3월에 상왕(上王) 즉,
충선왕이 강절(江浙)에서 강향(降香)하였다.” 하였다. 이상에 근거하여 보면 이 기사가 충선왕 5년 조에 들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다.
[주D-027]태정제(泰定帝) : 태정(泰定)은 원나라 진종(晉宗)의 연호이다.
[주D-028]고려의 …… 완자독(完者禿) : 완택독(完澤禿). 완자독은 심양왕 왕고(王暠)의 몽고식 이름이다. 왕고는 심양왕
으로 있으면서 원나라 양왕(梁王)의 사위가 되어 충선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고려의 왕위를 노려 여러 차례 충숙왕을
모함하였다.
[주D-029]팔독마타아지(八禿麻朶兒只) : 충목왕의 몽고식 이름으로,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팔사마타아지
(八沙麻朶阿只)로 표기되어 있다.
[주D-030]게양현(揭陽縣) :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주(潮州)이다.
[주D-031]악양(岳陽)에 …… 훙하였다 : 이때 충혜왕은 단신으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유배지로 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었는데, 짐독(鴆毒)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고 귤(橘)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여 사인(死因)이 분명치 않다.《東史綱目
第14上》
[주D-032]보탑실련왕(寶塔實憐王) : 충혜왕을 가리킨다. 보탑실련은 충혜왕의 몽고식 이름이다. 부답실리(不答失里)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33]충헌왕(忠憲王) : 고종(高宗)을 가리킨다.
[주D-034]거란장(契丹場) : 고려에 귀속(歸屬)한 거란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고종 6년(1219)에 강동성(江東城)의
거란인들을 토벌할 때 잡은 포로들을 각도(各道)에 나누어 보내 인구가 적은 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고 땅을 주어
농사짓게 하였다.
[주D-035]충경왕(忠敬王) : 원종(元宗)을 가리킨다.
[주D-036]수달달(水達達) : 흑룡강(黑龍江)ㆍ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수초(水草)를 따라 다니며 사는 달단(達靼)을
가리킨다.《新元史 地理志 2》
[주D-037]익지례불화왕(益知禮不花王) : 익지례불화는 충선왕의 몽고식 이름이다. 익지례보화(益知禮普花)로 표기하
기도 한다.
[주D-038]홀독겁미사공주(忽篤怯迷思公主) :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가리킨다.
[주D-039]부답실리의 …… 폐위시켰다 : 부답실리의 아들은 충정왕(忠定王)이다. 충정왕이 충목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
였으나 정세가 좋지 못하였다. 이때 충혜왕의 동생으로 충정왕의 숙부인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가 원나라 위왕
(魏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와 결혼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었다. 그러자 원나라에서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 왕기를 왕으로 삼았는데, 이가 바로 공민왕이다. 충정왕은 폐위된 뒤 강화도로 물러나 있다가 짐독(鴆毒)을
먹고 죽었다.
[주D-040]관선생(關先生) …… 이르렀다 :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말한다. 홍건적은 한림아(韓林兒)를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宋)이라고 한 다음 중국 각지를 노략질하다가 만주로 침입하여 요양(遼陽)을 함락시켰으나, 원나라 군사들
에게 쫓겨 고려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공민왕 8년(1359)에 1차로 침입하였다가 이방실(李芳實)이 거느린 고려
군사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 뒤 공민왕 10년(1361)에 반성(潘城)ㆍ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ㆍ
파두반(破頭潘) 등이 10여 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침입, 자비령(慈悲嶺)을 넘어 개경(開京)을 함락하였다.
공민왕은 안동(安東)으로 피란하여 있으면서 정세운(鄭世雲) 등으로 하여금 홍건적을 토벌하게 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주D-041]탐라(耽羅)로 도망쳤다 : 이 기사는 잘못되었다. 이때 공민왕은 복주(福州) 즉, 지금의 안동(安東)으로 피란
하였다.
[주D-042]왕전(王顓) : 공민왕의 고친 이름이다. 공민왕의 원 이름은 왕기(王祺)이다.
[주D-043]성유득(成惟得) :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성준득(成准得)으로 되어 있다.
[주D-044]김갑량(金甲兩) : 《고려사》와 《동사강목》에는 김갑우(金甲雨)로 되어 있다.
[주D-045]다음 해에 …… 되돌려 보냈다 : 명나라 황제가 고려의 향시에 합격한 자를 경사(京師)의 회시에 응시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 박실(朴實)ㆍ김도(金濤)ㆍ유백유(柳伯濡) 세 사람이 응시하여 그 가운데 김도가 급제하였다.
명나라에서 동창부(東昌府) 구현(丘縣)의 승(丞)을 제수하였으나, 중국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사직하고서 되돌아왔다.
《東史綱目 第15下》
[주D-046]난수산(蘭秀山) : 절강성(浙江省) 정해현(定海縣) 바다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수산도(壽山島)라고도 한다.
[주D-047]정료위(定遼衛) : 명나라에서 요동 지방에 둔 관부(官府)이다. 명나라에서 중ㆍ좌ㆍ우ㆍ전ㆍ후 오위(五衛)를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봉천(奉天) 요양현(遼陽縣)이다.
[주D-048]전후(甸侯)나 수복(綏服) : 전후는 전복(甸服)을 맡아 다스리는 제후를 말하는데, 전복은 주(周)나라 시대의
제도인 오복(五服)의 하나로, 왕기(王畿)로부터 5백 리 이내의 지역을 말한다. 수복은 왕기에서 1천 리에서 1천 5백 리
떨어진 지역을 가리킨다.
[주D-049]신우(辛禑) : 우왕(禑王)의 성씨(姓氏)에 대해서는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설과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정인지(鄭麟趾)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신돈의 첩의 아들 모니노(牟尼奴)를 자기
의 자식이라 사칭하여 궁중에 들인 것이다.”고 하여 이를 왕씨세가편(王氏世家編)에 넣지 않고 열전반역편(列傳反逆編)
에 넣었다. 그러나 선유(先儒)들 가운데는 왕왕 신씨가 아니라 공민왕의 실제 아들이라 하였으며, 근래 학자 대부분은
이 설을 따라 “우(禑)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는 것은 이씨조선을 두호(斗護)하고 고려 왕실을 필연적 쇠락에 붙이기 위한
곡필(曲筆)에서 나온 것이다.”고 한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670~671쪽》
[주D-050]공사(貢使) …… 몰수하였다 : 우왕이 즉위하고 몇 달 뒤에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이 고려로
왔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개주참(開州站)에서 호송관(護送官) 김의에게 살해당하고, 김의는 임밀을 잡아 가지고 북원
(北元)으로 달아났다. 《고려사》에는 이 사건이 이인임(李仁任)이 전왕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명나라로부터 추궁당할
것이 두려워 김의를 시켜서 살해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676쪽》
[주D-051]요왕(遼王) 식(植) : 명나라 태조의 열다섯째 아들로 요왕에 봉해졌다.
[주D-052]응창(應昌) : 열하성(熱河省) 경붕현(經棚縣)의 서쪽, 찰합이(察哈爾) 북부에 있는 지명으로, 원나라 순제
(順帝)가 이곳에서 죽었다.
[주D-053]궁인(宮人)의 일 : 궁인은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벼슬하여 환관으로 있다가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간
뒤에 그대로 남아 명나라의 환관으로 있던 손 내시(孫內侍)를 말한다. 손 내시가 공민왕 21년 5월에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들고 고려로 와서 채단(綵緞)과 사라(紗羅)를 바친 뒤 아무런 이유 없이 불은사(佛恩寺) 뒤편의 소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살해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高麗史 世家43》
[주D-054]철령(鐵嶺) :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에 있는 관문(關門)이다. 고려 말기에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철령위
(鐵嶺衛)의 귀속 문제가 있었다. 1387년 1월에 명나라에 다녀온 설장수(偰長壽)가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라는 이유로 명나라에서 이 지역을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려 한다고 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 문제로 5도(道)에
명을 내려 성을 수축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북방에 보내어 대비케 한 다음 박선중(朴宣中)을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ㆍ고원(高原)ㆍ영흥(永興)ㆍ정평(定平)ㆍ함흥(咸興) 등과 공험진(公險鎭)까지 고려의 영토임을 밝
히면서 철령위의 설치를 중지해 달라고 교섭하는 한편, 최영(崔瑩)은 중신 회의를 열고 정료위(定遼衛) 정벌을 논의한
결과 모두 화의(和議)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최영은 왕과 비밀회의를 열어 요동을 정벌하기로 하고 최영이 팔도도
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출군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786쪽 주》
[주D-055]개원로(開元路) : 요양성(遼陽城)에 소속된 지명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원사》 권59 지리지(地理志)에, “을미년(몽고 태종7)에 개원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
하고 치소(治所)를 황룡부(黃龍府) 즉,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농안(農安)에 두었다. 지원(至元) 4년에 다시 요동로총
관부(遼東路摠管府)로 바꾸었다가 23년에 개원로(開元路)로 바꾼 다음 함평부(咸平府) 즉 지금의 봉천(奉天) 개원현
(開原縣)으로 치소를 옮겼다.” 하였다.
[주D-056]8월에 …… 항복하였다 : 명나라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명나라
에서 거절하자, 최영(崔瑩)ㆍ조민수(曺敏修)ㆍ이성계(李成桂) 등게 명하여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그때 진경이
예주(乂州)에 주둔해 있다가 군량이 떨어지자 군사를 후퇴시켰다. 그 뒤 이성계가 회군(回軍)하여 우왕과 최영을
가두자, 진경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중국으로 도망쳤다.《明史 卷320 朝鮮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