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마 신부 전기(二)
『경향잡지』 1949년 5월호 제43권 제5호(72〜74쪽)
이 「야당유적」이라는 책의 연조에 관하여는 아무런 표시가 없어 유감이었다. 내용인즉 옛어룬들이 울프던 시구(詩句)를 필기하여 둔것이오 옛날 지도가 몇장그려저있다.
나는야당유적에서 시 몇구를 수첩에 적었다
『耕牛無宿草 倉鼠有餘糧 萬事皆前定 浮生徒自忙. (의역) 밭가는소가 풀을못뜯고, 창고속쥐는 먹고남도다, 매사가모다 예정된것만, 덧없는인생 바삐하도다.
貧居鬧市無相識 富住深山有遠親 身賤言眞人不信 家興尙恨世無疑. (의역) 시가지에 가난뱅이, 아는이가 없건마는, 산속깊이 숨은부자, 먼족이라 찾어오네, 천만놈의 바른말을, 세상사람 않믿어도, 돈있아나 악한놈은, 세상이 다의심안네.
개인 날시는 흐려저 가랑비가 나린다. 도라올길을 생각하니 더오래 머무를수없다. 우리 일행은 다래꼴을 떠나기에 바뻤다. 비는 점점 악수로 변한다
우리의 태생지도 이후 누가 이렇게 수고드러 찾어줄까? 이는 우리 일행이 서루 주고받은 화제중 하나이다. 실로 우리의 밟는 땅이 勝地(승지)되게 살어야한다. 이는 귀로에 자전거를 달리며 깊이깊이 느낀바이다.
三, 다래꼴 경주최씨(慶州崔氏)중 가톨릭신자
다래꼴은 거금 三백六十여년간 경주최씨네가 살어온촌이다. 지금으로부터 二十五, 六년전까지도 이동리에 경주 최씨가 오십여호 거하였으나 이리저리 허터지고 현재는 겨우 열여덜집이 남어있다고 한다.
이 최씨중에 특히 출세하신분이 없고 오직 서울시 재동(齋洞)에서 개업하고계신 의사 최병두(崔炳斗)씨가 계시다한다. 이는 병훈씨의 바루 계씨다.
다래꼴동리에 천주교인들이 전에 많었던듯하다. 그중 대부분이 최씨중에 있었다고 믿는다. 대한천주교회사상에 나타나있는이만도 여럿이다.
一, 一八三九년 八월 二十三일 복자정신부님을 일시 그윽한 곳에 숨겨준 교우가 하나 있는데 그가 다래꼴사람이라 하였으나 그 이름은 명기되지않었다.(1, 달래 二, 176)
二, 최요안(양복). - 이는 최도마 신부의 친척이다. 그 조부께서 一八〇一년박해에 체포되여 배소에 있게됨으로 집안이 고향을 떠났고 그후 강원도 춘천 서지동살다가 포졸들에게 잡혀 원주읍에서 一八三九년 十월 六일 참수치명하였다.(2, 달래 二, 192-195)
三, 위에말한 최요안의 조부(3, 달래 二, 192)
四, 최비리시다(가다리나?).-이는 최요안의 고모요 자기 족하가 감옥에 있을때에 방문하러갔다가 잡혀 원주서 치명하였다(4, 달래 二, 195-196)
五, 최요셉(대총). -이 역시 최도마의 친척으로 다래꼴서 여러교우들과 표양답게 수계하다가 一八三九년 음 八월 유다스의 밀고로 관가에 잡혔고 무쌍한 고초를 九개월간 홍주옥중에서 받다가 一八四〇년음五월五일 주의 품에 안겼다(5, 달래 二, 247-248)
六, 최방지거(영옥 아명 진강)-이는 주신부(周神父)때 입교하여 무성산협중에 살었다고 서울로 시골로 다니다가 체포되여 一八一五년음八월 대구(大邱)옥중에서 장하(杖下)에 귀천하였다(6, 달래 二, 275-276)
七, 위에말한 최방거거의 모친.-그영세본명이나 성은모르나 아드님과함께 입교하였다고 기록되있고 그 외에 최방지거는 자기모친이 별세한후 여동생을 서울 정(丁)아오스딩집에 머물러두고 다녔다 하였으니 아마 교인이었고.(7, 달래 二, 275)
八, 최방지거의 부인.-방지거 독신생활을하기로 결심하였다가 그 친척의 권고로 대구서 치명한 서(徐)안드레아의 딸과 결혼하였다 하니 물론 교인이였다.(8, 달래 二, 275)
九, 복자 최방지거(훈) 회장.- 一八三九년九월四일 혹형 끝에 서울 옥중에서 별세승천하신 복자 최방지거는 도마신부님의 부친이시다. 다래꼴동리에서 수계타당이하시며 사시다가 아드님이 유학의길을 떠난다음 그동리에서 수계에 불편이 심하므로 서울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과천(果川) 수리산공소에 옴겨 살었고 기해년군난때 그공소 교우들과함께 서울로 잡혀와 치명하셨다.(9, 달래 二, 160-174)
十, 이마리아는 복자 최방지거의 부인이시오 따라서 최도마 신부님의 자당이시다. 남편을 따라 체포된후 눈앞에 어린자식들의 배고파하고 목말러하는 꼴을 모성으로서 보다못하여 일시 배교하였다가 즉시 회개하고 치명하였으나 그 일시적 실수로인하여 복자위에 오르지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10, 달래 二, 164)
十一, 복자 최방지거의 부모와 방지거의 다섯형 네식구들.-성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오매 모든교우중에 방지거의 온집안이 가장 먼저 입교하였다 하며(11, 달래 二, 160), 어려서부터 부모의 유훈을 입어 성교를 봉행하다가 고향에서 수계상 불편이 많으므로 여러형들을 권하여함께 이사하였다 한다.(12, 달래 二, 161)
十二, 최스테파노.-이는 최도마 신부의 막내동생이오 간난이로 모친품에 안겨 옥중에 있더니 혹형을 당한 모친의 유도가 귾어지매 어린 스테파노는 죽었다.(13, 달래 二, 165) 그 외에 최도마 신부님의 동생들이 넷이 있었다(14, 달래 二, 164). 그들은 다 철부지로 부모가 옥중에 있으매 천과같이 배불리 먹지못함을 못이겨 울며불며 어미의 애를 태웠다. 어미된자-눈앞에 두고볼 수 없어 어린자식들을 부지기처로 내여보내며 일렀다. 「너희들이 나가 항상 천주를 의지하여 열심히 공경하며 성모마리아를 극진이 사랑하며 서루 화목하여 어려운중에 항상 의지하여 서루 떠나지말고 지내다가 「마까오」에 있는 너히 형 오기를 기다리라」 이 말을 듣고 울며 떠나아간 그들은 어린뼈에 어미의 말이 깊이 사무처 그뜻그대루 실천하며 유학간 형의 도라오기를 기다렸다 한다. 그후 十二년만에 최도마신부 입국하여 그들이 한동리에 사는 것을 만났고, 그들과함께 二년간 머물러게섰다 하니 그들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15, 달래 二,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