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종연은 꿈을 꾸었다.
그것은 커다란 유리관에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유리관 속에서 그는 눈을 뜬 채 힘겹게 주위를 보고 있었다. 고갯짓조차 하기 힘들어 눈동자만을 굴리며 주위를 보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는 의사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들이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각자 무언가를 쓰고, 말하고, 보고, 자르고, 찢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수 십 개의 유리관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유리관 속에는 아기들이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입을 오물거리는 갓난아기들의 입에 긴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수십 개의 전선이 아이들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고, 유리관 밑에 있는 기계에서 끊임없이 삑삑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종연은 간신히 힘을 내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호스 때문에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을 꺽꺽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없었던 것이다. 머리 아래로는 자신의 몸이.
그리고 종연은 눈을 떴다. 턱은 아직도 시큰거렸고, 가슴의 통증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의식은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섣불리 눈을 뜨지는 않았다. 저들은 지금 자신이 의식을 차렸다는 걸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대로 기절한 척하고 기회를 엿본다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으리라. 그것보다는 궁금했다. 그들이 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종연은 여전히 기절한 척, 가만히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식스, 근데 이 녀석, 방금 뒤척인 것 같은데?”
그의 옆에 있던 희진의 얼굴을 한 소녀가 말했다. 소녀는 의심섞인 눈초리로 자신의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종연을 쳐다보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검은 양복의 시선도 종연을 향했다. 식스도 몸을 돌려 종연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종연의 콧등에 땀방울이 맺혔다. 종연을 노려보던 식스도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트리니티, 우리는 프로야.”
식스의 말에 소녀, 트리니티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 거리며 말했다.
“스페어 수집하는 것도 지겨워. 이런 일이나 하려고 내가 식스한테 온 것 같아? 블러디 크로스라는 이름 치고는 너무 심심해.”
트리니티의 불만에 반응을 보인 것은 식스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도 눈썹 끝을 씰룩인 것뿐이었고, 양복을 입은 두 남자는 각자의 할 일을 계속했다. 운전을 하는 것과 창밖을 쳐다보는 것. 그들에게 있어서 트리니티의 불평은 언제나 있었던 것이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연은 달랐다. 스페어라는 단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어. 그리고 블러디 크로스. 인터넷 게시판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쓸데없는 괴기, 괴담들이 올라오는 게시판이었는데 거기서 읽었던 내용이 기억 난 것이다. 이 나라에는 정치가와 사회 지도층인사들에게 장기를 제공해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클론이 있다고. 그 클론들을 스페어라고 부르고, 그 스페어들을 모으는 탈법적인 단체의 이름이 바로 블러디 크로스. 종연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클론이었단 말인가? 자신이 태어난 이유가 장기를 제공하기 위한 가축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종연은 냉철했다. 격심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기로 말했다. 틈은, 기회는 언젠가 찾아올 것이다. 종연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기다렸고, 그 기회는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저것들은 뭐야?!”
식스가 고함을 질렀다. 갑자기 도로 복판에서 그들 앞으로 끼어든 벤이 멈춰선 것이다. 끼이익, 타이어가 찢어지는것 같은 엄청난 마찰음이 나며 차가 급정거했다. 그 반동으로 차에 타고 있던 식스와, 검은 양복들, 그리고 트리니티와 종연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 순간이었다. 짧은 찰나, 종연은 오른 주먹으로 자신의 옆에 있던 검은 양복의 머리를 쳤고, 그대로 발로 문을 찼다. 덜컹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고, 종연은 그대로 문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 순간, 당황한 트리니티가 그의 오른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종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왼발로 그녀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고, 차 밖으로 나온 종연은 검은 벤을 향해 뛰어갔다. 종연을 마중하려는 듯, 검은 벤의 뒷문이 열리더니 검은 방탄복과 헬멧, 고글을 쓴 자들이 일제히 뛰어내렸다. 그들은 뛰어내리자마자 MP8기관단총의 안전걸쇠를 풀더니 일제히 식스일행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이 새끼가!”
“엎드려!”
식스와 벤에서 내린 자들 중에 선두에 서있던 자가 동시에 종연을 향해 고함을 쳤다. 당연히 검은 벤에서 내린 남자의 말대로 종연은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엎드렸다.
[탕타타탕.]
그리고 총성이 연달아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고막이 터질 것만 같은 엄청난 총성 속에서 종연은 앞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검은 벤의 정체도 알순 없었지만, 적어도 저 블러디크로스라는 괴물들을 따라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눈감아!”
검은 벤에서 내린 남자가 다시 종연을 향해 고함쳤다. 종연이 눈을 감는 순간 그는 허리춤에서 섬광탄을 꺼내 식스일행을 향해 던졌다. 곧 엄청난 빛이 도로를 뒤덮었고,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은 식스들도 당황해서 고함만 지를 뿐이었다.
“이봐, 얼른 일어나!”
종연은 대답도 하기 전에 누군가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의 손에 이끌려 벤에 올라탔다. 그리고 쾅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출발해요. 모두 꽉 잡아요!”
종연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종연은 운전석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곧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밴이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엔진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출발해버린 것이었다.
30년 전 인류 최초로 여성의 자궁을 빌리지 않고 인공적인 배양만으로 복제인간을 만드는데 성공한 유인하 박사가 새운 인하병원. 국내외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하병원이었지만, 이 병원에 지하 7층이 존재한다는 것은 네오코리아의 극소수 지도층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 지하 7층의 6번째 방. 인공호흡기와 각종 전자기기에 의지하고 겨우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윤태균 국무총리의 병실이었다. 그 윤태균 국무총리의 침대 앞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있었다. 말쑥한 회색 양복과 검은 뿔테 안경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뽐내고 있는 남자와 스킨헤드를 하고 있는 흑인이었다. 검은색 피부에 검은 선글라스, 거기다 검은 양복을 입은 온통 검은색인 남자였지만, 입술은 루즈를 바른 것처럼 붉은 색이었다.
“블랙. 아직 스페어를 데려오지 못했다더군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대학생이라던데. 블러디크로스라는 명사 앞에 실망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블러디 크로스의 한국지부장이자, 식스의 직속상관인 블랙의 입술꼬리가 살짝 치켜올라갔다. 미소와 조소의 중간쯤인 그것을 보고, 윤태균 국무총리의 비서인 김성우의 양미간에 일순간 주름이 잡혔다. 감히 자신을 비웃어?
“뭐라도 말을 해봐야 할 것 아니요? 국무총리께서나 나나 변명정도는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돼는데?”
“비서관께서는 소탐대실이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지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나는 통신스쿨에서 소인배라고 배웠는데. 후후.”
“뭐야?”
김성우의 두 손이 블랙의 멱살을 잡았다. 부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보고서도 블랙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분을 참지 못한 김성우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블랙의 멱살을 잡고 있는 두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블랙의 입에서 나온 단어 때문이었다.
“지저스를 아십니까?”
지저스. 과학문명을 멸절시키려는 기독교를 믿는 광신도들의 테러집단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부 수뇌부에서는 그들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바로 스페어들의 연합이라는 것. 전 세계에 흩어진 각종 지도층과 엘리트들의 클론인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과 폭탄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들의 리더인 한때 유인하박사의 제자이자 딸이었던 유은혜를 필두로.
“그 지저스의 본거지를 알 기회입니다. 비서관께서도 국무총리님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실례했군요. 하지만 스페어를 잡는 게 늦어져서 국무총리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절대로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겠소.”
“나랑 내기하겠소? 내일 언론사들의 톱기사가 뭐가 될지? 나는 지저스의 소탕에 걸겠소. 당신은 당연히 윤태균 국무총리가 의식을 차렸다는 것에 걸겠지? 하하하.”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블랙은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찾았나?”
핸드폰 안에서는 아직 변성기가 갓 지난 것 같은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이나 게토A-13구역입니다. 작은 중국식 술집이더군요. 그 지하입니다.”
목소리의 주인공, 식스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블랙의 입가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건 알겠지? 다른 요원들의 지원도 받도록.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소각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말도록.”
“예. 지부장님.”
핸드폰의 폴더를 닫으며 블랙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는 얼핏 왼손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세시 십오 분. 마감시간인 열시까지는 일곱 시간이 남았다. 벌레를 잡는 데는 너무나 긴 시간인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사이로 한가롭게 하품을 하고 있는 블랙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
가이아 컴퍼니의 네오 서울지부. 33층에 달하는 거대한 건물의 꼭대기에 가이아컴퍼니의 상징인 거대한 지구본이 조각되어 있었다. 자애, 자유, 자비를 추구한다는 모토를 가진 가이아 컴퍼니. 하지만 그들의 건물 33층은 그들이 지원하고 있지만 모토는 전혀 다른 단체가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블러디 크로스였다.
문패에 33-D라고 쓰여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한 네 번째 방. 그 방 안에는 수십 개
의 모니터들이 각자 다른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사원, 호스티스, 운동선수에서부터 깡
패들과 거지에 이르기까지 직업, 성별, 나이 모든 것이 가지각색인 사람들의 생활이 보여
지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스페어였던 것이다. 네오서울에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식스의 시
선이 항한 곳은 어린아이의 머리만한 레이더였는데, 그 앞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바쁘
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띠. 띠. 띠.
모니터에서는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스페어가 살아서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리라. 식스는 그 모니터의 점과 구석에 나타나 있는 주소를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지저스의 공격을 예상했고, 미끼까지 확실하게 준비를 했지만 이렇게 쉽게 걸려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작 쓰지 못했던 게 안타까울 만큼.
“호출신호 다 보냈어?”
자신의 옆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트리니티에게 식스가 말했다. 그녀는 새까만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이 매력적인 가수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을 보고 식스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가짜니까. 그녀가 아무리 예쁜 인피면구를 얼굴에 갖다 붙이더라도 가짜인 것이다. 자신을 외면하는 식스를 보고 트리니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살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얼굴 없이 태어난-그 이유는 알고 있다. 정부의 실험 때문이리라-자신을 괴물로 보지 않은 그가 유일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좋아하는 것이다. 그를.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식스는 모니터 책상에 설치되어 있는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대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실내에 있는 블러디 크로스의 모든 실전요원들에게 알린다. 작전명 지저스 말살. 지금 시작한다. 무장 후, 30분 이내로 작전지역으로 출동하도록.”
그 마이크를 타고 식스의 목소리가 블러디크로스의 33명의 실전요원들의 오른쪽 귀에 부착되어 있는 소형 마이크로폰에 울려퍼졌다. 한가하게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있던 요원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사냥을 앞둔 늑대의 그것처럼 사납고 날카로운 눈빛. 33명의 요원, 아니 블러디크로스의 늑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댓글 재밌겠군요. 블러디크로스라~ 흠~기대해보겠습니다.
재밌네요..+_+
오~ 초반부터 흥미진진~ 스케일이 크네여~재밌어여~ ㅋ
진짜 대형스릴러네요!!! 기대가 커요 !!! 재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