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PC업계에서 가장 활기를 띤 분야를 살펴보면 단연 그래픽카드다. 기존의 인기 온라인 게임 뿐만 아니라 <GTA 5>, <더 위쳐3>, <배트맨 : 아캄나이트> 같은 대작 시리즈 게임 최신작이 연이어 등장하는데다, 고화질 QHD, 4K(UHD) 모니터의 보급이 늘면서 고성능 그래픽카드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엔비디아는 지난 6월 초 ‘GTX 980Ti’라는 플래그십급 제품으로 독주 중인 시장에 쐐기를 박았고, AMD도 6월 말에 오랜 침묵을 깨고 차세대 제품인 ‘퓨리(Fury)’를 공개하며 반격의 기세를 올리는 중이다.
과연 엔비디아의 ‘수성’이 성공해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인지, 아니면 AMD의 ‘반격’이 성공해 시장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인지 그 결과에 따라 올해 하반기 그래픽카드 시장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도전자 AMD의 통렬한 반격… 하지만 2% 부족해
지난 6월 중순, 미국 E3 현장에서 열린 AMD의 행사장에선 모처럼 AMD의 CEO 리사 수 박사가 직접 등장해 밝은 얼굴로 새로운 그래픽카드를 공개했다. 이전까지 코드명 ‘피지(Fiji)’로만 알려졌었던 라데온 ‘퓨리’ 시리즈의 정식 공개였다.
▲E3에서 '피지' 기반 그래픽카드 'R9 나노'를 소개하고 있는 리사 수 AMD CEO (사진=AMD유튜브 채널)
오랜 침묵을 깨고 등장한 AMD의 라데온 ‘퓨리’ 시리즈는 그때까지 기다려왔던 팬들의 갈증을 상당부분 해소하는데 성공했다. 대표 제품인 ‘퓨리 X’는 기존 ‘하와이’ 기반 제품에 비해 대폭 늘어난 연산유닛의 수와, 그에 비례해 급증한 연산 성능, 차세대 메모리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채택해 얻게 된 엄청난 대역폭 등 기술적인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이슈를 제공했다.
특히 2.5D 설계 덕분에 메모리와 GPU가 하나로 패키징 되면서 2/3로 줄어든 크기와, 레퍼런스에 기본으로 탑재된 일체형 수랭 쿨러 등 외형적으로도 하드웨어 마니아들의 시선을 끄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결정타로 고작 150mm의 크기와 절반 수준의 전력 소모량에 하이엔드급 성능을 낸다는 피지 기반 라데온 R9 ‘나노(Nano)’와, 피지 GPU를 2개 장착한 시제품 그래픽카드, 그리고 이에 기반한 독자적인 고성능 미니PC 플랫폼 ‘프로젝트 퀀텀’까지 선보이자 지금껏 궁지에 몰렸던 AMD가 반격에 성공하고 시장 점유율을 상당부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이어졌다.
▲최신 기술과 파격적인 외형으로 시선을 모으는데 성공했으나, 경쟁 제품 대비 조금 떨어지는 성능과 부족한 공급량 및 그로 인한 높은 가격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라데온 '퓨리 X' (자료=AMD)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상황이 달라졌다. 정식 발표 전 일부 유출됐던 정보와 달리, 정식 출시 직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성능 테스트에서 예상 외로 경쟁 제품인 지포스 980Ti와 타이탄X에 못 미치는 성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에선 진 셈이다.
업계에선 이 같은 초기 성능이 떨어지는 이유로 최적화되지 못한 드라이버와 HBM 메모리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최신 기술을 듬뿍 집어넣은 만큼, 아직 100% 제 성능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낮은 수율로 인한 공급 부족 현상까지 벌어지면서 가격이 쉽게 떨어지지 않자 기껏 기대했던 AMD의 팬들 중에서도 실망한 이들이 적지 않다. 업계 전문가들은 ‘퓨리 X’의 수준급 4K/5K 성능과, VR 환경 등에서의 강점 등을 높이 평가하지만, 당장 게임 성능이 아쉬운 일반 소비자들의 발길을 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제 남은 숙제는 AMD가 최적화된 드라이버를 빠르게 내놓는 것과, 제품 수율을 끌어올려 공급량을 안정화시키는 것이다. 이전에도 AMD는 드라이버 교체만으로도 그래픽카드의 성능을 10% 가까이 향상시켰던 전력이 있으니 기대해 볼만 하다.
‘디펜딩 챔피언’ 엔비디아, 빈 틈 있는 라인업 확충에 주력
엔비디아는 각종 신기술과 위협적인 가격으로 무장한 경쟁사 AMD의 ‘퓨리’의 등장에 간담이 서늘했을 터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초기 성능이 좋지 않게 나오면서 일단 수성에는 성공한 모습이다.
특히 레퍼런스 제품에 이어 제조사별로 각종 부가기능이 들어간 지포스 GTX 980Ti의 비레퍼런스 제품들이 적당한 가격대에 연이어 출시되자 시장의 흐름은 엔비디아 쪽으로 흐르고 있다. AMD와는 반대로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선 이긴 셈이다.
▲준수한 성능으로 하이엔드 그래픽카드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선 지포스 GTX 980Ti (사진=엔비디아)
게다가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고삐를 놓치지 않고 가격 인하 카드를 꺼내들어 ‘엔비디아 천하’를 더 공고하게 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렇다고 엔비디아에게 마냥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시급한 것이 판매량이 높은 ‘엔트리’ 및 ‘메인스트림급’ 제품 라인업의 확충이다.
현재 엔비디아가 ‘대박’을 터뜨리게 된 원동력인 지포스 900시리즈는 GTX 970과 980, 980Ti, 타이탄X 등 모두 고가의 하이엔드급 제품이다. 국내 기준으로 가격이 최소 30만 원 후반부터 시작해, 가장 수요가 많은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부담스럽다. GTX 960이 있긴 하지만 가격이 20만 원 중반대로, 역시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고민되는 가격이다.
반면 경쟁사 AMD는 기존 라인업을 ‘라데온 300시리즈’로 새롭게 리뉴얼함과 동시에 가격을 조정해 중저가 제품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기존 라인업과 동급의 제품을 한 단계 아래 가격대로 출시해 결과적으로 가장 판매량이 높은 10만~20만 원대 시장에서 ‘가격 대비 성능’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10만원~20만원대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현재 엔비디아의 대응 제품은 GTX 960 뿐이다. (자료=엔비디아)
엔비디아의 약점 또한 여기에 있다. GTX 960외에는 20만 원대 이하에서 AMD 제품들을 상대할 제품이 없다. 그나마 ‘1세대’ 맥스웰 기반 GTX 750/750Ti 제품이 10만 원대 시장에서 버티고 있지만, AMD의 하위 라인업에 서서히 밀리는 분위기다.
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지포스 GTX 950, 960Ti(가칭) 등 중간중간 빈 구멍을 막을 제품들을 투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상반기 AMD의 ‘라데온 200시리즈’ 때 비슷한 경험으로 쓴 맛을 봤던 터라 서두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엔비디아가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또 있다. 바로 ‘가격 인하’를 통한 맞불 작전이다. 지금까지는 AMD가 조금 못 미치는 성능을 가격 경쟁력으로 커버하면서 치고 올라오면, 엔비디아가 더 강력한 신제품을 선보여 만회하는 패턴이 지속됐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다르다. 엔비디아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격 결정권도 충분히 쥐고 있다. 새로운 제조 공정과 기술 도입으로 수율 확보가 어려운 경쟁사와 달리 이미 안정화된 공정에 기반해 원하는 만큼의 물량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게다가 엔비디아의 차세대 제품으로 꼽히는 ‘파스칼’은 빨라야 2016년에나 등장할 예정이다. 지금 당장은 2세대 맥스웰 기반 ‘지포스 900 시리즈’로 버텨야 한다. 벌써 900시리즈의 첫 스타트를 끊은 지포스 GTX 970과 980도 출시된 지 거진 1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보다 확실한 라인업 확충과 유동적인 가격 정책만 고수하면 충분히 내년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이렉트X 12와 ‘VR’ 등 차세대 그래픽 시장이 변수
하지만 변수도 있다. 곧 정식 출시를 앞둔 마이크로소프트의 새 운영체제 윈도 10과, 이에 기본 탑재된 최신 API ‘다이렉트X 12’의 존재다. 엔비디아도 나름 긴밀하게 협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AMD는 그 이상으로 다이렉트X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AMD의 ‘맨틀’ API와 유사한 기술이 다이렉트X 12에 적용되고, 멀티코어 및 ‘비동기식 셰이더’ 기술을 활용해 전반적인 그래픽 성능까지 높이는 등 현재로선 AMD가 윈도10 및 다이렉트X 12 환경에 더 최적화된 것으로 보인다.
▲다이렉트X 12가 적용된 윈도 10의 등장은 그래픽카드 시장에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서서히 시장이 커지고 있는 VR(가상현실) 분야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재의 기술로 더 미려하고 깨끗한 가상현실 그래픽을 구현하려면 단순히 3D 그래픽 성능뿐만 아니라 4K/5K급 고해상도에서의 처리 성능도 요구된다. AMD의 퓨리 X는 경쟁사 엔비디아의 지포스 GTX 980Ti와 타이탄 X보다 적은 메모리 용량으로도 4K/5K 환경에서 꽤 준수한 성능을 보여준다.
예상보다 낮은 그래픽 성능 테스트 결과에도 불구하고 업계 전문가들이 AMD의 퓨리 X시리즈에 상당한 의미와 점수를 부여하고 있는 이유도 퓨리 X를 포함한 AMD의 신제품들이 기술적인 부분이나 성능적인 면에서 윈도10과 다이렉트X 12, VR 등과 같은 ‘차세대 기술’에 더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 당장은 엔비디아의 방어가 성공적이지만, 윈도 10과 다이렉트X 12가 도입되는 올해 하반기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해 PC방을 중심으로 엔비디아 지포스의 강세가 유난히 높은 국내 시장은 하반기에 들어서서도 AMD가 여전히 기를 펴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전체 PC 시장 기준으로 올해 하반기 그래픽카드 시장은 매우 뜨겁고 흥미로운 대결이 펼쳐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