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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그럼 출발한다.”
“응.”
보조석에 앉아있는 메이의 대답과 함께 엑셀을 밟자 핵전지를 탑재한 연구소의 전기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슌이 운전하는 차량은 비좁은 주차장을 빠져나와 매장의 넓은 출입구 쪽 큰 도로로 향했다.
앞으로 이어진 2차선 도로를 빠져나가 넓은 주차장을 연상시키는 6차선 도로로 진입하는 차량.
넓은 6차선 도로에는 수십 대의 버려진 차량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각각의 차량들 사이에는 신기하게도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빈공간이 남아있어 그렇게까지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
도로 곳곳에 새워진 차량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계속해서 좌우로 핸들을 돌리는 슌이었지만 창문 밖 정신없이 움직이는 풍경과는 달리 차량의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연구소의 외부연구차량 ‘NP50’은 전기차량인데다가 최신식 방음 설계까지 되어있어 차량의 내부에 있으면 집중해서 듣지 않는 이상 전기차량의 유일한 소음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모터 특유의 얇은 전자음마저 들리지가 않는다.
때문에 NP50에 타고 있으면 가끔씩 다른 차량이었다면 들리지도 않을,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법한 작은 소리들마저 들려오곤 한다.
부스럭.. 부스럭..
..지금 옆 좌석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처럼 말이다.
운전을 하며 곁눈질로 바라본 보조석에는 두툼한 오리털이불을 뒤집어쓰고 의자를 뒤로 넘겨 엎드린 채 보조석의 뒤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메이가 있었다.
“뭐 찾고 있어?”
“으... 응..”
고양이자세로 분주하게 보조석의 뒤를 뒤적거리며 답하는 메이의 상체가 보조석의 뒤쪽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부스럭.. 부스럭..
“..아.”
그리곤 무언가를 찾았는지 움직임을 멈춘 메이가 짐 속 깊숙이 들어가 있던 상체를 들어 올렸고 그것에 맞춰 슌이 다시 곁눈질로 보조석을 바라봤다.
?
메이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정사각형에 두꺼운 표지가 인상적인 낡은 동화책.
그것은 연구소에서 많이 본 물건이었다.
“그거.. 가져왔던 거야?”
슌이 동화책을 가리키며 질문하자 메이는,
“응, 소중한 거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동화책을 끌어안은 채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소중한 것’..인가.
침묵도 잠시.
“도착이야.”
순식간에 차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천천히 걸어서 가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기 때문에 당연히 차로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창문 밖을 바라본 메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녹색의 식물로 둘러싸인 거대한 건물.
위층보다 넓게 설계된 아래의 3층~4층 정도를 제외하곤 사면이 유리로 덮여있는 고층건물은 외관상 한자 ‘凸’(볼록할 철)을 연상시켰다.
고층건물의 1층 정원 안쪽까지 차를 몰고 들어간다.
덜컹!
“으!”
슌의 그 목소리와 함께 메이도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울퉁불퉁한 길에 요동치는 차량.
원래 차로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만 아무도 없는 지금 불법주차 같은 것을 신경 쓸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NP50을 주차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렇게 고층건물의 1층 정원 안쪽 적당한 곳에 불법주차를 끝낸 뒤 차량의 전원을 파킹모드로 전환했다.
“......”
이미 정원으로써의 기능을 잃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풀과 나무들로 가득한 공간.
창문 밖은 정원사 없는 정원이었다.
“그럼 내릴까.”
“응.”
텁.
말하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차량의 밖으로 나가려는 메이를 슌이 붙잡는다.
순간 한쪽 팔을 붙잡힌 메이가 이쪽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머리 위에 ‘?’를 띄었다.
“이불이랑 동화책은 두고 말이야.”
잠시 뒤 가벼워져 밖으로 나온 메이는 처음 급하게 뛰쳐나가려던 모습과는 달리 지면에 발을 디딘 뒤 그 자리에 그저 가만히 서서 풀과 나무로 울창한 정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
..마치 뭔가를 그리워하듯이 말이다.
?
그렇게 메이의 시선을 따라 정원을 살펴보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뭐지?
이상한 점.
그것은 너무나도 울퉁불퉁한 지면이었다.
포장된 길 주변의 토지에는 볼록 튀어나온 지면이 가득했고 그 볼록 튀어나온 각각의 지면 위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돌멩이 하나가 가지런히 올라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울퉁불퉁한 지면 위에 발 디딜 틈 없이 자란 풀들의 상태로 봐선 만들어진 이후 꽤나 많은 시간이 경과한 듯 했다.
“...메이.”
약간의 불안감이 섞인 슌의 목소리에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고 있던 메이가 한 박자 늦게 슌이 서있는 쪽을 바라봤다.
“가자.”
“..응.”
포장된 길 군데군데 금이 가있는 곳에 자라있는 잡초들을 피해 슌이 앞장서 걷는다.
“......”
농도계의 수치는 90안팎.
개방적인 공간이여서인지 풀과 나무로 울창한 정원의 공기 중 top농도는 100을 넘기지 않았다.
“아, 기다..”
귀에 흘러들어온 소녀의 목소리에 농도계를 보고 있던 슌이 뒤를 돌아봤다.
“자.. 잠까안..”
뒤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길 여기저기 자라있는 억센 잡초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메이.
잡초라고는 해도 top바이러스에 감염된 식물들로 대부분이 족히 1미터는 넘게 자라 몸집이 작은 메이가 무시하면서 지나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나보다.
그렇게 길게 자란 잡초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해하는 메이의 모습에,
“자.”
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
길게 자란 잡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손에 의지해 뒤쳐져있던 메이가 발 디딜 곳은 찾아 잡초의 벽을 겨우 빠져나온다.
“..고마워.”
“천만에.”
그런 식으로 정원의 잡초들로부터 해방된 슌과 메이는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올라 닫혀있던 유리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뒤쪽 먼지로 흐릿한 유리문에서 들어오는 일광에 옅게 비치는 건물의 내부.
넓은 로비, 높은 천장, 2층으로 이어진 에스컬레이터, 그리고 1,2층에 걸쳐 빼곡히 들어차있는 가게들은 과거 이곳이 얼마나 인적이 많았던 곳인지를 짐작케 했다.
..역시 이런 대형건물의 안까지는 들어올 수가 없었던 건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부분의 건물 안에는 어느 정도 식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건물의 넓은 내부에서 식물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메이.”
“응?”
그렇게 넓은 건물의 내부를 살피던 슌이 메이의 손을 잡고 로비 가장자리에 위치한 벤치로 갔다.
“잠깐만 여기 앉아있을래?”
“..어디 갈 거야?”
눈을 치뜨며 시선을 맞추는 메이.
“잠시 비상용 전원이 살아있는지만 보고 올게.”
“......”
그 말에 메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끝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금방 다녀올 테니까.”
“응, 다녀와.”
메이의 소심한 손짓을 뒤로 슌은 건물의 1층을 돌아다니며 계단을 찾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승강장에서 어렵지 않게 비상계단으로 가는 철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끼이..
손잡이를 잡는 일도 없이 슌은 조금 열려있던 문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밀어 열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철문의 차가움과 함께 시야에 들어온 비상계단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계단의 넓은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은 비록 직사광선은 아니었지만 손전등 없이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였다.
..비록 색의 구별은 힘들지만 전에 있던 매장의 계단과 비교하면 굉장히 양호한 편이다.
슌이 바로 옆, 벽에 붙여져 있는 층별 안내도에 손전등을 비췄다.
관리실이 위치한 곳은.... 지하 2층인가.
목적지를 확인한 슌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손전등을 비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창문이 없어 지상에 위치한 계단에 비해 어두웠고 밑으로 갈수록 그 정도는 점점 심해졌다.
슌이 망설임 없이 어둠으로 이어진 계단에 발을 내딛었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 햇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쯤 지하 1층의 주차장에 도달했다.
열려있는 계단의 철문 너머로 손전등을 비추자 건물의 크기에 비례해 굉장히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
아무런 소리도, 인기척도 없는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 또 다시 계단에는 발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도착한 지하 2층에는 예상대로 지하 1층과 같은 구조에 넓은 주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정도면 찾는데 시간 좀 걸리겠는데.
뛰어서 찾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에 슌이 종종걸음으로 열려있는 철문을 통과했을 때였다.
?
‘제1관리실.’
손전등의 빛에 비친 것은 제1관리실의 철문.
“......”
생각보다 금방.. 아니, 생각할 틈도 없이 발견되어버린 목적지에 발걸음을 늦추며 가까이 다가간다.
...찰칵.
다행히 문은 열려있었고 슌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돌려진 손잡이를 앞으로 밀었다.
끼이..
..손전등에 비춰진 것은 CCTV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 개의 모니터와 뭔가 복잡해 보이는 버튼이 잔뜩 달린 기계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emergency.. emergency...
좁은 공간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비춰가며 비상용 전원에 관련된 버튼을 찾기 시작하는 슌.
15층을 넘는 모든 대형건물은 의무적으로 태양광발전시설을 설치해야 되기 때문에 분명 어딘가에 관련된 비상용 전원시설이 있을 것이다.
...찾았다.
‘비상용 전원’
그곳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있었다.
너무나도 수월하게 풀리는 일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슌은 희망을 품고 버튼을 눌렀다.
지잉--
전자음과 함께 관리실의 led전구에 빛이 들어온다.
..다행히 태양광발전시설은 정상작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87%’
기계에 표기되어있는 남은 전류량도 충분했다.
이 정도라면 엘리베이터를 사용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전 층 운행이 가능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찾아 작동시킨 뒤 이걸로 된 건가?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 관리실의 밖으로 나간 슌이 불이 들어온 비상구의 초록색 led전등을 따라 다시 1층으로 올라갔다.
관리실에는 계단 쪽 전등의 스위치도 있었지만 어차피 손전등이 있기 때문에 쓸데없이 전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다.
끼이..
1층에 도착한 슌이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
문을 나와 바로 앞, 엘리베이터 앞에서 뭔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메이가 보였다.
“메이.”
!?
“슌? 아.. 응... 어서와.”
순간 뒤를 돌아본 메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잠깐 사이를 못 참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건가.
“..뭐 찾는 거라도 있어?”
“별로.”
“......”
메이의 물어보지 말아달라는 얼굴에 크게 신경을 쓰는 일도 없이 슌은 벽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뒤 전원이 들어와 있던 엘리베이터 하나가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왔고,
띵~
갑자기 열리는 문에 경계하는 메이를 뒤로 엘리베이터의 안으로 들어가 상태를 확인한 슌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메이.”
“응?”
이거.. 타는 거야? 라는 얼굴이다.
“..자.”
경계심 가득한 메이의 모습에 슌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민 손을 작게 흔들며 재촉했다.
“......”
메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결국 슌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쿵.
“슌, 이곳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불안한 듯 엘리베이터 내부의 여기저기를 살피는 메이를 보면서 슌이 38층의 버튼을 눌렀다.
덜컹.
“꺅!”
갑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에 메이가 놀란 듯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슌, 이거.. 움직이고.. 저기.. 슌?”
당황한 메이는 무서운 듯 바짝 달라붙어 ‘슌’이라는 말에 맞춰 옷을 잡아당겼고 그런 메이의 모습에 슌이 작게 웃음을 띄었다.
“아아, 위로 올라가는 거야.”
“위로?”
“응, 위로.”
그때.
“꺄!”
3층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눈부신 일광에 메이가 또 다시 짧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았다.
“뭐.. 뭐야...”
..메이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땐 엘리베이터 안쪽을 통째로 차지한 넓은 유리에 건물 밖 풍경이 비추고 있었다.
“......”
그렇게 말을 잃은 메이는 슌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천천히 힘을 빼더니 엘리베이터의 유리 가까이 다가갔다.
..폐허가 된 건물로 빼곡한 도시의 풍경.
건물의 밖에선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안쪽에선 쌓인 먼지로 시야가 조금 뿌연 것을 제외하곤 어느 정도 밖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
계속해서 높아지는 풍경.
엘리베이터가 10층을 지났을 쯤 흐릿한 유리에 가까이 다가가 있던 메이가 다시 슌에게 돌아왔다.
“이거.. 안 떨어져?”
메이가 다시 슌의 옷자락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하하하 안 떨어져 안 떨어져.”
...아마.
관리실에서도,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도 점검이 필요하다는 신호는 없었기 때문에 고장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층이 올라갈수록 옷을 잡고 있는 메이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30층을 지나자 흐릿한 유리에 넓은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고 옷깃을 잡고 있는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메이는 유리에 비추는 폐허가 된 도시의 풍경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띵~
38층에 도착한 엘이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들어왔을 때와 반대로 이번엔 메이가 앞장서 밖으로 나갔고 메이에게 옷자락을 잡혀있던 슌도 끌리듯 엘리베이터의 밖으로 나왔다.
...쿵.
“..무서웠어?”
“...조금.”
돌아온 것은 의외로 솔직한 대답이었다.
“걱정하지 마,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떨어지진 않으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안전장치가 있어서 괜찮을거야.”
그 말에 메이가 천천히 슌의 옷을 놓았고 해방된 흰색 와이셔츠의 옷자락에는 구겨진 자국이 선명했다.
“..조금 무서웠지만, 예뻤어.”
“......”
처음 경험하는 높은 곳에서의 경치는 무서웠지만 예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음에는 든 모양이다.
“그래, 다행이야. ..그럼 다음에는 혼자서도 탈 수 있겠네?”
“에? 그.. 그건...”
당황하는 메이.
아마 메이의 머릿속에서는 높은 곳에서 느끼는 공포심과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경치의 아름다움이 격하게 저울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뻔한 반응에 슌은 목소리에 웃음기를 숨길 수가 없었다.
“미안 메이, 농담이야 농담.”
“......”
무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메이.
“아.”
그 순간 웃음기 가득했던 슌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보통, 사람들은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면 분해하던지 무시하던지 돌려주던지 무엇이든 특정 반응을 하지만 메이는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면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무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
그리고 그렇게 이쪽을 바라보는 메이는 정말 말 그대로 ‘무표정’이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
몇 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도 지금까지 그 무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 낼 수가 없었다.
“........”
..어쩌면 메이 특유의 분노 표출법일지도, 또 어쩌면 그저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
어쨌든 무섭다.
“그.. 그럼 가볼까.”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는 슌을 잠시 동안 바라보고 있던 메이가 겨우 시선을 떨구었다.
“응.”
*
너무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은 공간.
건물 사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탓인지 해가 떠있는 시간의 38층은 전기가 들어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이다.
“......”
38층의 엘리베이터 승강장을 나와서 메이와 함께 걷다가 처음 눈에 띈 것은 X자로 교차된 포크와 나이프가 그려져 있는 간판이었다.
레스토랑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가까이 가보니 역시나 입구에 멋들어진 필기체로 작성된 ‘restaurant’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늦추는 슌을 따라 메이도 걸음을 늦춘다.
레스토랑 문의 팻말에는 ‘close’라고 적혀있지만 문은 반쯤 열려있다.
“..잠깐 들어가 볼까?”
“응.”
그렇게 대답하는 메이와 함께 슌이 문을 완전히 열고 레스토랑의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문에서 흘러나오는 일광을 보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38층에서 레스토랑이 위치해있는 곳은 도심의 야경을 보면서 로맨틱한 디너를 즐길 수 있는 창가 쪽 공간이었다.
그때 메이가 갑자기 종종걸음으로 슌을 앞서 간다.
“아.”
자신의 품을 벋어나 신기한 듯 레스토랑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메이의 모습에,
“......”
슌도 수긍한 듯 어정쩡하게 들려있는 손을 내렸다.
매끈한 대리석과 곳곳에 반짝이는 철제 조형물을 사용한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들게 했지만 가계 내 전체 테이블의 개수는 6~7개 정도로 의외로 규모가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 내부의 흰색 식탁보로 덮여있는 테이블 위에는 포크와 나이프 등의 식기구가 먼지가 잔뜩 쌓인 채로 가지런히 세팅되어있었고 키친에서도 포크와 나이프가 조리기구로 변했을 뿐 상황은 비슷했다.
하긴..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신선도가 떨어지는 보존식 같은 것을 사용 할 리가 없나.
슌이 들고 있던 비싸 보이는 식칼 한 자루를 원래 자리에 꽂아놓으며 손에 묻은 먼지를 옷에 닦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볼일은 없다.
“메이.”
키친에서 나와 메이에게 말을 건네자 레스토랑의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흐릿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메이가 반응했다.
“가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메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원피스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다가왔고 슌은 그런 메이와 함께 레스토랑을 나갔다.
*
레스토랑을 지나 비교적 밝은 창가를 따라 걷는 도중이었다.
..?
저 멀리 창가 쪽의 넓고 개방적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밖을 잘 내다볼 수 있는 넓은 창가 쪽에 위치한 탁 트인 공간.
...전망대인가.
슌은 그곳이 전망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슌.”
“응?”
“저건 뭐야?”
전망대쪽을 가리키는 메이.
“아아, 쌍안경이야.”
“쌍..안경?”
“응, 쉽게 말하자면 멀리 있는 걸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하는 도구 같은 거랄까.”
“헤에..”
흥미가 있는지 좀 전과 같은 종종걸음으로 쌍안경으로 다가간 메이가 자신과 비슷한 크기에 쌍안경을 여기저기 살폈다.
“..볼 수 있어?”
“물론이지. 잠깐만...”
슌이 손에 들고 있던 손전등을 주머니에 넣은 뒤 메이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슌의 갑작스런 행동에도 메이는 당황하지 않는다.
..옛날에 비해 조금 무거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메이는 가벼웠다.
들어 올린 메이의 눈을 쌍안경에 맞추는 슌.
“어때? 보여?”
“...슌.”
“응?”
“아무 것도 안보여.”
?
그 말에 메이를 내려놓은 슌이 쌍안경의 렌즈에 자신의 눈을 맞췄다.
검정.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아.”
눈을 때고 쌍안경을 살피던 슌이 쌍안경 오른쪽에 동전을 넣는 구멍을 발견한다.
..돈을 넣지 않으면 볼 수가 없는 건가.
“음..”
동전은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지만 어차피 건물의 주전원이 죽어있어 동전을 넣어도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안 메이. 아무래도 지금은 쓸 수 없는 것 같아.”
“..그래..”
“......”
말없이 쌍안경을 바라보는 메이의 무표정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지, 지금은 안 되지만 주전원을 넣으면 어쩌면 될지도...”
“..정말?”
메이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
조이는 심장.
“..잠깐 여기서 기다려봐.”
타닷!
“아..!”
뜀걸음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슌의 모습에 아쉬운 듯 메이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슌이 그런 메이의 손짓을 보는 일은 없었다.
*
“제3관리실.. 제3관리실...”
그것은 빠른 걸음으로 38층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슌이 내뱉던 혼잣말이었다.
?
그렇게 손전등을 비춰가며 38층의 층별 안내도에 적혀있던 제3관리실을 찾던 중, 슌이 어떤 공간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긴..
소파와 테이블, 책이 가득한 책장과 TV 등이 구비되어있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편의시설.
눈에 들어온 공간은 창가에 위치한 ‘휴게실’이었다.
공간 자체만 보자면 다른 건물에도 있을 법한 뭐하나 특별한 것 없는 곳이었지만 슌이 멈춰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
가스버너와 냄비, 반쯤 물이 담긴 물통, 열려있는 텐트와 기둥과 기둥사이를 연결해 만들어 놓은 빨랫줄에 바닥에 펼쳐져 있는 동계침낭, 거기에 테이블 위 탁상시계와 잔뜩 흩어져 있는 책들까지... 휴게실에는 누군가의 생활에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멈춘 발걸음을 움직여 슌이 휴게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쌓여있지 않다.
순간 머릿속에 매장의 지하에서 봤던 시체가 떠올랐고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메이.
당장 38층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생존자가 있었다는 흔적을 발견한 이상 메이를 혼자 둘 수는 없다.
빨리 관리실을 찾아 주전원을 넣은 다음 메이에게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슌은 휴게실을 나와 뜀걸음으로 관리실을 찾기 시작했고 그 사이 정신없이 달리는 슌의 발소리가 38층을 가득 채웠다.
“관리실... 관리실.., ..있다!”
층의 중앙, 창가의 햇빛이 잘 비치지 않는 복도의 안쪽에 위치한 철문에는 분명 ‘제3관리실’이라고 적혀있었다.
“하아... 하..”
문의 앞에 서서 숨을 가다듬는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문이 잠겨있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되는데.. 라는 근심을 품으며 슌이 문고리를 돌렸고,
찰칵.
..다행이다.
돌아가는 손잡이에 근심은 해소되었다.
그렇게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슌이 손잡이를 민 순간이었다.
덜컥.
?
문 뒤에 무언가가 걸려 문이 3분의 1정도 밖에 열리지 않는다.
뭐지?
슌은 무심히 문 사이로 손전등을 비췄다.
..머리카락.
그곳에는 검정색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
깜짝 놀란 슌이 순간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
자신의 달아오른 심장박동을 실감하며 조심스럽게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문틈에 다시 손전등을 비췄다.
3분의 1정도 열린 문 사이에 여전히 검정색의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다.
..꿀꺽.
말없이 침을 삼킨 슌이 문 사이로 보이는 검정색의 머리카락을 주시하며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움직임도, 소리도 없다.
“......”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슌은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착용했다.
“후우..”
그렇게 한번 크게 숨을 쉰 뒤, 3분의 1쯤 열린 문틈에 몸을 걸쳐 ‘문 뒤에 걸린 무언가’에 손전등을 비췄다.
그곳에 있던 것은,
?
어린 소녀였다.
흰색의 티셔츠와 7보청바지를 입고 있는 단발머리에 소녀는 낡은 인형 하나를 끓어 안은 채 차가운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침묵.
시체...인가?
그것은 쓰러져있는 처음 소녀에게서 받은 첫인상이었지만,
아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발견한 슌이 다급히 소녀를 정자세로 눕혀 상태를 확인했다.
!
살아있다.
다 꺼져가는, 아니, 당장이라도 꺼질 것만 같은 불씨처럼 소녀는 작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몸 전체가 차가운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꽤나 오랜 시간 방치된 것 같다.
벌컥, 쿵!
다급히 소녀를 끌어안은 슌이 벽에 문이 부딪치는 소리를 뒤로 제3관리실을 빠져나왔고 또 다시 복도에 슌의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어두운 복도를 달리면서 적당한 장소를 생각하던 슌은 결정을 했는지 어두운 복도를 빠져나온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하..! 하..! 하아..!”
숨이 차기 시작할 무렵, 일광이 들어오는 창가의 휴게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속도를 줄이는 일도 없이 달리면서 휴게실의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슌?!”
?!
슌은 메이와 마주쳤다.
“뭐, 뭐야? 그 애..”
여자아이를 본 메이는 놀란 듯 했다.
“하아.. 하아..”
발소리 소리를 듣고 나온 건가? ...어쨌든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메이, 잠깐 도와줘.”
당황한 메이의 모습에도 슌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급히 중앙에 위치한 3인용 소파 위에 여자아이를 눕힌 뒤 빛이 잘 드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여자아이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다.
“......”
..외상은 없지만 저체온증과 심각한 탈수 증세를 보이고 있다.
정신없이 요동치는 심장에 아직 가시지 않은 숨을 고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슌이 텐트 주변에 굴러다니던 깨끗한 페트병을 하나 주워 그 안에 든 물을 조금씩 여자아이의 입에 부었다.
“쿠, 쿨럭.”
들어간 소량의 물에 기도가 막혔는지 작게 기침을 하는 소녀.
물을 마실 기력조차 없는지 여자아이의 입에 부어진 물에 대부분이 소파로 흘러내렸다.
..이대론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슌은 바닥에 너부러진 침낭을 여자아이에게 덮어준 뒤 당황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메이에게 말했다.
“메이, 잠깐만 이 애를 보고 있어줘.”
“으.. 응, 알겠어..”
불안한 메이의 대답에 뒤를 돌아보는 일도 없이 휴게실을 나와 승강장으로 간 슌이 38층에 서있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버튼과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37, ...36, ...35, ...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의 속도가 다른 것일까.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빠르게 느껴졌던 엘리베이터가 지금은 굉장히 느리게 느껴진다.
띵~
1층.
그런 초조함 속에서 엘리베이터의 속도에 대한 아무래도 좋은 감상을 하고 있던 사이 엘리베이터는 금세 1층에 도착했고 슌은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좁은 틈 사이를 옆으로 지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타 타 타 타 타 타..
뜀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넓은 로비를 지난 슌이 정원으로 나가는 유리문에 손을 짚었다.
확!
바뀐 공기와 함께 울창한 풀들이 눈앞에 들어왔고 저 멀리 길게 자란 잡초사이로 희미하게 NP50의 흰색에 차체가 보였다.
몇 개 안되는 계단을 한걸음에 내려와 긴 잡초를 뿌리치며 앞으로 나아간 슌은 망설임 없이 앞에 나타난 흰색차량의 보조석문을 열어 보조석 사물함에서 구급함을 챙겼다.
탁!
숨 돌릴 틈도 없이 차량의 문을 닫은 슌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정원, 로비를 지나 굼벵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띵~
벨소리와 동시에 1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느리게 열렸고 또 다시 엘리베이터의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슌이 38층의 버튼과 ‘닫기’ 버튼을 차례대로 눌렀다.
웅--
올라가기 시작하는 숫자.
“하아.. 하아..”
..슌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침묵 속에 엘리베이터의 작동음 만이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난 슌이 빠른 속도로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렀다.
“허억.. 헉.. 메이!”
슌이 휴게실로 들어오자 손수건으로 여자아이의 입가를 닦고 있던 메이가 뒤를 돌아봤다.
“하.. 하.., ..하아-”
달리는 것을 멈춘 슌이 숨을 가다듬으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메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마워, 다음은 맡겨줘.”
“으..응.”
자리를 비켜주는 메이와 교대로 소파 옆에 쭈그려 앉은 슌은 테이블에 구급함을 두고 다시 여자아이의 상태를 체크했다.
..미미하지만 아직 숨은 쉬고 있다.
슌은 구급함을 열어 그 안에서 큰 주사기 하나를 꺼내더니 소녀가 마시지 못한 페트병 안의 물을 주사기에 넣고 주사기에 주사바늘을 끼운 뒤 소녀의 팔 정맥에 그것을 천천히 주사했다.
“......”
그렇게 한번 주사를 끝낸 슌이 다시 주사기에 물을 채워 소녀의 얇은 팔뚝에 굵은 주사바늘을 꽂아 넣자 슌의 뒤에서 메이가 눈을 찡긋 감으며 몸을 움찔거렸다.
..통증에 반응할만한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그 뒤로도 주사기의 두꺼운 바늘은 팔에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몇 번씩이나 소녀의 팔뚝을 쑤셔댔지만 힘없이 축 쳐져있는 소녀는 인상하나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네 번째 주사를 놓고 있을 때,
“하... 하....”
여자아이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다섯 번째 주사를 놓으면서 소녀의 이마를 만진다.
..체온이 상승하고 있다.
다섯 번째 주사를 끝으로 슌이 구급함에서 꺼낸 항생제와 소염제를 소녀의 팔에 주사했다.
“......”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 뿐.
슌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괜찮아?”
옆에서 이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메이가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어? 어.. 아아.”
수분공급은 끝났고 체온도 조금씩 오르고 있는 상태.
이대로라면 ‘당장’의 고비는 넘길 것 같았다.
“..이제 괜찮을 거야.”
한숨 덜은 듯한 슌의 그 목소리에는 안도감을 동반한 약간의 고심이 섞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