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3186043551
관련글
대한민국의 권력 3인자, 황태자가 경주에 나타났다(하)
꼬꼬무 2024.02.22 116회
황태자와 찰리채플린 편에 잠깐 나온
자신의 아들인 대한민국의 황태자 이강석에게 총살당한 이기붕 아내 이야기
드라마 야인시대 중
전형적인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생역전을 이루었던 박마리아
전형적인 엘리트 지식인 그것도 여성기독교 지식인의 모습을 보려했던 인물이지만 그녀의 실상은 탐욕과 욕심이 너무 많아서 수많은 사람들을 짓밟더니
스스로는 결국 자신과 자신이 그리도 사랑햇던 가족들마저 파멸시킨 여인이었다. 4.19 혁명 당시 남편인 이기붕과 아들인 이강욱과 함께 시골 집으로 피신해있다가
간신히 서울로 다시 돌아왔지만 경무대 별관에서 이강욱에게 ‘힘들었으니 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결국 자신의 아들인 이강석의 총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자신이 지난날 지은 죄를 남편 이기붕에게 용서를 청하며 죽기전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에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햤던 이기붕은 ‘그런 소리하지 말라. 누가 뭐래도 당신은 내 아내다’ 라고 말하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그녀에게 신앙과 믿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가난했던 그녀의 어린시절의 과거로 인한 것인지 박마리아의 성격이 대단히 인색했고 자존심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녀의 비서를 지낸 한 인물은 박마리아에 대해 굉장한 에고이스트 이고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했으며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했다고 평을 했다.
즉 인색했었고 남에게 자기 것은 쌀 1톨도 주는 법이 없으면서도 남이 주는 것은 주는대로 받았다 한다. 그리고 이 후 현대사의 대표적인 악녀로 그녀를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1. 지독한 가난이 만든 한국의 마녀 ‘박마리아’
나름은(?)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평가하고 싶은 박마리아, 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결국 '마녀' 이다.
190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 박명삼(朴明三)을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랐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총명했던 그녀를 그 지역 목사가 도움을 주어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었고
이 후 당시 여성들의 최고의 학교인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을 한다.
그리고 이화여대 재학 중 공창(公娼)제의 폐지와 금주 및 금연 등 시회계몽적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여성인권과 페미니즘의 선두의 역할을 맡았었다.
2. 자수성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를 위해 남편 이기붕을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만들다.
그녀도 처음부터 친일과 독재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겟지만...
그 뒤 미국 기독교 단체의 후원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서 1932년에는 미국 명문인 밴더빌트 대학교 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한다.
당시만 해도 유학이 엄청난 재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가난한 박마리아가 그것도 여성이 미국 최고의 대학으로 유학을 간 것 자체가 사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기붕을 만든것은 박마리아 그녀 였었다.
그렜기에 그녀는 식민지 조선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었고 그런 그녀가 나이차이도 많은 이기붕과 결혼을 했기에 세상은 ‘이기붕은 사실상 박마리아가 만들었다'는 평가를 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박마리아는 철저히 프란체스카의 마음에 들려고 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나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밀접한 관계는 사실 박마리아의 역할을 대단했고 그랬기에 이기붕은 이승만 정권의 2인자가 될 수 있었다.
3. 신앙과 민족을 버리는 그녀!(그녀의 기독교 신앙은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한때는 행복해 보이던 이기붕과 김활란의 가족들
유학을 마친 뒤에 귀국한 후에 박마리아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지만 그녀의 삶은 전혀 윤리적이지 못했다.
1935년 이기붕과 결혼함과 동시에 이 때부터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총무로 10년간 황동했고 당시 이강석, 이강욱을 낳았다고 한다.
그녀는 같은 이름은 가진 김마리아와는 달리 1942년부터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 단체를 만드면서 친일파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내선일체와 신사참대를 했던 이화여대의 그녀들
박마리아는 황국신민과 내선일체를 외치면서 국방헌금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역시 가장 최악은 자신의 제자들을 정신대와 위안부로 보낸 것이다.
활란 즉 헬렌 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게 신사참배를 한 김활란
당연히 이와 같은 박마리아의 노골적인 친일행적으로 독재자의 와이프 말고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는 등 역사의 어두운 부분에 족적을 남기게 된다,
신앙심이 그리 강했던 그녀였기에 4.19 혁명이 일어나자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험하고 나쁜 일이다’ 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가 분노만 자극했다.
즉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일제의 신사참배 앞에 버렸고 권력을 위해 이용하다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4. 이승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남편을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만드는 박마리아
이승만과의 인연으로 권력을 누린 이기붕과 박마리아
그러던 중 해방이 되자 박마리아는 살기위해 이승만과 연을 맺으려고 했었고 이기붕과 이승만이 가까워지게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한다.
툭히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이승만 대통령의 부인)가
당시 통역을 해 주던 임영신(중앙대학교 설립자)와 불화가 있자 곧바로 임영신 자리에 박마리아가 대신한다.
이승만(우)와 상공부 장관 임영신
특히 박마리아는 독신인 임영신이 이승만과 불륜 관계하며 말하며 프란체스카와 임영신의 관계를 파탄을 낸 것으로 유명한다.
이 후 임영신은 이승만의 자택인 돈암장(이화장 이전에 거처하던) 출입을 금지되었고 대신 박마리이라가 그녀의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프란체스카 와의 친목을 무기로 하여 사실 당시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그다지 별 볼일 없었던 이기붕을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만드는데 성공을 한다.
박마리아의 내조(?) 덕분에 이기붕은 대통령비서실장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냈고
나름 국방부장관으로 신성모가 개판친 ‘국민방위군 사건’을 나름 깨끗하게 처리하면서 자유당 의장이 된다.
박마리아 역시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기반으로 이화여대 부총장 및 YWCA 회장이 되었다.(이대 총장은 같은 친일대모 김활란이 차고 앉아있았으니...)
5. 이기붕을 부통령에 앉히고 대통령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승만과 이기붕의 모습
이 후 박마리아는 남편을 부통령 자리에 앉혀 고령인 이승만 이후 대통령을 노린다. 하지만 이기붕은 1956년 장면에게 패하며 부통령이 되지 못한다.
그러자 박마리아는 황당하게 1957년 자신의 장남인 이강석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결국 1960년 다시 남편을 부통령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친 이승만 계열 여성 단체들을 총동원하는 등 별 짓을 다했지만 이기붕은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얻지를 못하다.
결국 이승만이 노환으로 죽으면 부통령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박마리아는 결국 지옥행 열차인 ‘3.15 부정선거’를 감행한다.
결국 대통령 이승만이 아니라 부통령 이기붕에 대한 부정선거가 4.19 혁명으로 이어진다.(사실 이승만에 대항한 야당인사들은 계속해서 죽음을 당했기에...신익희 등)
4.19 이 후 이승만은 결국 사태의 책임을 지고 1960년 4월 26일에 하야를 선언했고 결국 3.15 부정선거의 중심에 서있던 이기붕 일가가 모든 지탄을 받게된다.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큰아들 이강석
그러던 중 1960년 4월 28일 아들이었던 이강석(이승만의 양자)였던 당시 육군 소위가 자괴감과 죄책감에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는 사건을 일으킨다.
가족을 모두 죽인 이강석 또한 자살하면서 이 박마리아 가족의 비극과 영욕의 삶은 끝이난다.
■ 당시 박마리와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들
이기붕 일가의 비참한 죽음(드라마 야인시대 중)
물론 당시 대통령 경호 책임자이자 또다른 권력자 였던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 서장(경무관)이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이승만 대통령에 쏠린 적대적인 국민 여론을 달래려고 이강석이 이기붕 가족을 모두 죽이게 사건을 꾸몄다는 말도 있기는 하다.
드라마 야인시대 중
즉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위해 그리고 이승만을 반대하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하지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박마리아와는 다른 인생을 살았던 김마리아
앞서 언급한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이 박마리아를 혼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김마리아는 한국독립군의 이범석의 아내였고 애국지사 였는데 반해서 박마리아는 전형적인 친일 부역자 였고
이기붕과 이범석은 상당히 사이가 안좋았기에 김마리아와 박마리아 살아생전 에서도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인물이었다.
관련글
대한민국의 권력 3인자, 황태자가 경주에 나타났다(하)
|
첫댓글 뭐 저때 친일파 한 둘 아니었을건데 여자한테만 마녀라 부르는게 새삼빡치네.
친일파라 비판하고 싶었다면 그냥 친일파라고만했어야.
페미니즘 공부했으면 뭐해 친일짓하기 바빴는데
자신의 제자들을 정신대와 위안부로 보낸 것이다 <- 와 미친... 이대잖아 거기서 제자들을 저렇게...
사람이 똑똑하면 뭐해. 나라 팔아먹고 제자들 팔아 먹는데. 진짜 역겨운 사람이었네.
와 너무나도 흥미돋... 여샤 고마워🫶💙
진짜 친일과 페미니즘은 같이 갈 수 없는거같다...
어떻게 제자들을 사지로 보내.....
그냥 지 잘살고싶어서 한 선택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왔다갔다한거 같아
어휴 노답 개같은 삶을 사느니 독립운동하다가 정의롭게 죽는게 낫지
헐 본인이가르치던 제자들을 위안부로보냈다니
제자를 위안부로 보내는게 사람이야??? 하느님은 지랄 이 사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