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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plnetkorea/100011625159 8.70년대 후반의 대중가요와 민중가요 1.대중가요계의 변화
앞에서 미국의 모돈포크의 진보적 사회작 측면이 상당히 약화되거나 제거된채 이식된 포크는 그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청년문화가 미국식 히피이즘을 모방한 대마초흡연이나 스트리킹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번쯤>,<왜불러>등에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송창식은 뽕짝과의결합을 시도하면서 가요계의 중심부로 진입했고, 김정호, 정종숙도 기성가요계로 진입하였다. 더 이상 김민기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양희은은 <내 꿈을 펼처라>,<한 사람>등 이주원의 작품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70년대 초반의 싱싱한 분위기는 많이 거세되면서, 포크 역시 대중화되어 쇼 프로그램에서통키타가 아닌 밴드의 반주에 맞추어 불리워졌고 기성가요와 결합한 속화된 포크, 포크록이 생산되었다.
송창식<토함산>,<그대 있음에>, 이정선<섬소년>,<뭉게구름>, 정태춘<시인의 마을>,<촛불>, 조동진 <행복한 사람>,<작은 배>등 몇몇이 그나마포크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필두로 그동안 포크의 열기로 주춤했던 트로트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트로트적인 노래를 록그룹사운드식으로 연주하는 트로트고고가 유행하였고, 전자악기의 사용이 늘어갔다. 최헌<오동잎>,<앵두>, 김씨네<연안부두>등
작품수준은 초기 포크보다 저열했고 사회적 적극성은 고사하고 초기 포크가 가진 반문화적 분위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운 실험보다는 대중적 인기를 고려하여 수상작이 결정되었고, 회가 거듭할수록 '가수등용문' 같은 상업적 경향은 더더욱 강화되었다.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그나마 새로운 경향은 '록'이었다. 영사운드, 히식스, 신중현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이들 대학생 록그룹들은 상당한 인기를 모으며 청소년 문화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페블즈<나 어떡해>, 활주로<탈춤>, 이명훈<그대로 그렇게>, 옥슨80<불놀이야>등. 또한 김창완 3형제의 산울림은 70년대 후반까지의 록 1세대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탈피하고 이장희 등의 포크록과도 구별을 짖는 감각적파격과 지적인 이미지를 몰고 왔다. <아니벌써>,<내마음에 주단을 깔고>,<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빨간 풍선>등 그러나 아직 록은 70년대 포크가 해냈던 정도의 새로운 인식이나 정서를 담아내지는 못하였고, 단지 질감과 양식의 변화로서만 받아들여졌다.
폭발적인정서의 표출, 강한 리듬과 음량, 전자악기의 금속적 질감의 사이키델릭한분위기 등 록 고유의 질감과 정서가 돋보일 뿐이었고, 가사의 중요성은 줄어들엇다. 이러한 록의 열풍은 록의 제2세대라고 부를만하며, 80년대 초반으로이어진다.
이들은 대중가요에 대해서도 비판적관점을 가지면서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노래문화를 반성하였으며,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였다. 민중가요는 즉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하였다. 대중가요에 대한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향유층, 별도의 존재 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자생적인 노래문화였으며 이러한 민중가요를 주도하는 집단, 즉 노래운동집단은 존재하지 않앗다. (노래운동, 음악운동이 본격화되는 것은 84년경에 이르러서이다.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중가요는 음악운동에 비해 선행하며, 대중 스스로 만들어 놓은 민중가요문화에 의해 노래운동의 성립과 발전이 추동되어 나아가는 식이었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한 개인일 따름이었을 뿐이고, 노래운동집단의 산실인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는 아직 취미 써클차원의 모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대중가요 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아니라, 기존의 노래를 대중 스스로 선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구전하는 방식으로형성되었다.
또한 노래에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고 재해석 되었다. <친구>,<아침이슬>등.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결단 등으로 해석되었다. 김민기의 작품의 경향은 74년군입대와 제대, 야학의 체험, 유신말기 상황을 거치면서 변화한다. 또한 작품의 수가 거의 줄어들게 된다. 지식인적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되는 작품이 거의 생산되지 않고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외된 계층, 노동자, 농민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 발전된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또 미래에대한 밝은 지향을 담은 노래가 늘어나고 국악풍의 실험도 늘어난다. <식구생각>,<소곰땀 흘리흘리>,<상록수>,,천리길>,<밤뱃놀이>,<늙은 군인의 노래> 그의 민중지향성의 최고 수준인 노래무용극 <공장의 불빛>(78)은 동일 방직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민족극운동의 맥락에 있다. 마당극 운동에서 보자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지만 민중가요에 있어서는 거의 파격적인 것이었다.
거의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록 뮤지컬과같은 작품이었다. 노동자의 삶과 투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이에 따른 가사와 악곡의 사용도 파격적이고 다양하다. 그러나 역시 투쟁장면의 형상화보다는 개인적인 장면에 많은 할애가 되어있고 형상화도 잘 되어있다.
이종구, 김영동, 김구한 등은 당시 연극반이었던 김민기와함께 연행예술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종구의 <마라데스>( 소리굿아구 삽입음악),<빈산>(김지하 시),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윤동주 시),개구리 소리>(이오덕 시)등등의 작품이 있다. 그 밖에 국내 음악인들의 사회성 있는 내용의 노래들이 민중가요로 흡수된다.
<진달래>(이영도 작시, 한태근 작곡),<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작시, 변규백 작곡),<녹두꽃>(김지하 작시, 조념 작곡)등과 한대수, 양병집, 이연실 등의 사랑노래가 아닌 포크송들인 <행복의 나라로>,<서울하늘>,<타박네>,<한중가>등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러기>, 동요 <우리의 소원>, 60년대대중가요 <아다다>, 민요<아리랑>,<진주난봉가>등도 민중가요의 목록에 올라있었다.
양식적으로도 동요, 포크,스텐다드에서 찬송가,민요,군가까지에 이른다. 내용으로서도 사람살이의 다양한 모습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다. 이러한 다양함은 새로운 노래가 들어지기보다는 기존의 노래 중의 몇몇을 선택함으로써 생긴 현상인면도 있으나 이와함께 대중가요의 사랑타령에 대한 명확한 거부의 산물이기도하다.따라서 사랑타령으로의 획일성이 사라지면서 그 체제순응성도 극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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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창식님의 '가나다라마바사'노래 참 신선한 실험정신이 돋보였던것 같고 국악을 접목했던 시도도 독특했던 것 같아요.
또다른 뒷 이야기는 송 창식 씨가 일본공연을 할때 교포들이 한글을 너무 몰라 ...만든 노래가 이 노래라고 알고 있고 아뭏든 자료 감사히 읽고 갑니다 멀리 미국에서 감사드립니다.
작사의 비하인드스토리가 있었네요 ^&^
관심보여주심에 감사 (꾸벅!)
건강하세요
노래사냥님 잘 읽었습니다.
근데, 바탕색이 초록색이고 글씨색이 군청색이다보니 글씨가 잘 안보입니다...
허향선배님 수정하였습니다.
글씨크기와 여백을 좀 많이 두었습니다.
보시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시는지 말씀해주시면 다시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