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상당히 귀여운 아이였다.
어릴 적 내가 동네 구판장에 가면 나는 동네 형들과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더욱이 형제들이 많다보니 동네의 웬만한 형들이나 누나들은 모두 형들이나 누나들의 친구였다.
그리고 아버지형제들 역시 많다 보니 동네 어르신들 역시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의 친구 분 들이셨다.
내가 이따금 동네에 놀다 있으면 지나가는 형들이나 어르신들이 나를 붙들어 놓곤
인사를 시키곤 했다. 그 당시 나는 인사를 잘한다고 많은 귀여움을 받았었다.
내가 어느 정도 어린 날의 기억을 기억할 나이가 됐을 때 내가 살던 집은
지금의 시골집이었다.
아버지가 처음에 손수 집을 지으셨던....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되기 전까지 집에는 둘째형과 막내형 그리고 누나가 있었다.
누나가 초등학교를 졸업을 할 때 졸업사진에
파마머리의 둘째형과 스포츠머리의 종국이형 사진이 걸려 있었으니.........
하지만 어릴 적 기억에 형들과 내가 놀던 기억들은 또렷이 남아 있지 않다.
형들을 따라 산에 가서 건불(소나무낙엽)을 긁고 소캥이(나무 썩은것)를 캐던 기억,
형들을 따라 삐라를 주우러 다니던 기억,
종국이 형과 종현이 형이 많이 따서 모아 두었던 딱지와 구슬,
이따금 싸우던 둘째형과 막내형의 모습,
사랑방 종현이 형의 방에서 들려오던 라디오의 통기타음악소리(아마도 정태춘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불쑥 들어갔을 때 창가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둘째형의 모습,
그리곤 나를 달래기 위해 서랍에서 꺼내주던 앙꼬 빵,
(그리고는 나한테 엄마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켰고)
늘 형 친구들로 북적 되던 우리 집,
그리고 막내누나 초등학교 졸업식 후 처음으로 가졌던 중국집에서의 중국요리,
그때 아마도 종국이 형은 울면을 시켰던 것 같다. 맛이 별로 없다고 했던 것 같던데.....
그렇게 형들과의 추억은 필름 한 장면 한 장면 기억에 남아 있다.
이것들이 내가 형들의 추억에서 남은 기억들이다.
나는 어릴 적 동네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우리집근처의 아랫마을에서만 놀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그때 인기를 처음 보았다.
인기는 우리 마을에서 좀 위쪽에 살고 있었다.
그 전 까지 나는 바로 윗집의 용익 이와 앞집의 창교 형 이렇게만 놀았다.
지금도 어릴 적 형들과 놀던 집 앞의 조그만 숲과 논, 밭,
그 당시의 고향이 그립다.
특히 나는 유난히 앞집의 창교 형과 친했었다.
중학교를 들어가고 나서는 그런 시간들이 줄었지만......
형과 나는 사고도 많이 쳤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와 형은 숙제를 안 하거나 아니면 비가 오거나
그냥 학교 가기 싫을 때는 학교 앞 하수구에 숨어 땡땡이를 치곤 했었다.
9시 음악소리가 들리고 나면 우리는 하수구에 나와 동네 개울가에 가서
서로의 도시락을 까먹곤 했다. 물장구를 치며........
그 때 형의 도시락은 늘 뻔했다.
지금도 호프집에서 이따금 마른안주에 나오는 낱장으로 밀봉되어있는 김,
그런 김 열 댓 개와 김치였다.
어쩌다 내가 도시락이 없을 때면 형과 나는 주위의 나무를 꺽어 젓가락을 만들곤 했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을 하면 입안에 가득히 침이 고인다.....
또 하루는 형과 나는 가출 아닌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형과 우리 집 바로 위에 사는 용익 이네는 여름만 되면 복숭아나무에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렸었다.
용익 이네는 여름만 되면 아이들의 서리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어느 날 형과 나는 용익 이네의 복숭아밭에 들어가 복숭아를 한참을 따고있었다.
그 순간
" 이놈들! 종환이, 창교! 이놈들! 너희들 집에다 다 이를 줄 알어! "
용익 이네 할머니가 우리의 서리를 목격한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시골에 가면 할머니를 찾아뵙는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는
잘 지내는지, 식구들은 어떤지, 그리고 다음에 또 꼭 오라며 울곤 하신다.
순간, 형과 나는 무조건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형과 나는 동네의 논두렁에 숨었다.
그리고는 지금 생각해도 우습지만 집에 들어가지 말자고 우리는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날 해가 지고 나서 집에 들어갔고 용익 이네 할머니는
형과 우리의 집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었다.
또 한번은 형과 나는 정말로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집 앞의 쪼그만 숲에서 형과 나는 불장난을 하고 말았다.
그 당시는 가을이었다.
바람도 무지 불었었다.
형과 나는 쪼그만 깡통에 전기 줄을 메달아 놓고는
그 안에 건불과 종이를 넣었다
그리고 불을 지폈다.
우리는 그냥 아무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바람에 불은 삽시간에 산을 태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소나무가지를 꺽어 불을 끄고 난리가 났었다.
형과 나는 어린 마음에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그 사고로 형과 우리 집의 부모님들이 구속이 될 뻔했으나
동네어르신들의 탄원과 만류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창교 형과의 마지막 기억은
종국이형이 고등학교인지 중학교인지를 졸업을 할 때
둘이 자전거를 타고 형의 만년필을 산다고
설악산입군가 속초인가를 갔다 왔던 기억이다.
우리는 서로 후레쉬를 하나씩 들고는 출발을 했다.
그 당시 만년필을 살만한 곳은 주위에 없었다.
기억으로는 우리는 만년필을 샀던 것 같다.
집으로 오는 길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밤 12시 정도가 돼서야 집에 도착을 했다.
물론 집은 난리가 났었다.
형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면서부터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릴 적 유난히 몸이 약했다.
체구도 작았고, 코피도 유난히 쏟았다.
내가 갓 태어나서 걸음마도 못하고 있을 때
하루는 어머니가 논에서 남의 집 못자리를 해주고 있을 때
큰누나가 나를 안고 논두렁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불솜에 쌓여있는 나를 큰누나가 잠시 내려놓고
한눈을 팔고 있었는데 내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도랑에 빠져 있었다.
도랑에 빠진 나를 누나가 건졌는데 경기를 너무 심하게 했었다 한다.
지금도 큰누나는 우스게 소리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 그때 너가 물에 빠져 경기를 심하게 하니까 누가 코를 빨아주면 산다고 해서
내가 그때 코를 얼마나 빨았는지 아냐?
임마! 지금 니가 코가 그 정도 오똑 한 것도 다 누나 때문 인줄이나 알고 있어! "
나는 어릴 적 좀 개구쟁이 기질도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방학 때 놀러온 옆집의 용기와 나는 도랑에서 얼음 뒤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놀고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위험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순간, 별을 보고 말았다.
이 녀석이 나한테 엄청 큰 얼음 덩어리를 던진 것이었다.
그 일로 나는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엉엉 울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바지와 옷에는 뻘건 피가 잔뜩 묻어 있었고 피는 아직도 나오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니 막내형이 있었다.
" 이 새끼야? 몰골이 그게 뭐야? 어? 누가 그랬어? "
나는 순간 엉엉 울고 말았다.
" 뭐 잘했다고 울어? "
형의 그 말이 그 당시는 왜 그리 서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형의 손에 이끌려 집 앞의 국군동해병원으로 갔다.
형과 군인이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수술이라는 것을 받았다.
군의관은 나에게 수건을 한 장 입에 물리고는 마취를 하지도 않고
낚시바늘 같은 것으로 나의 찢어진 입술을 꿰매어 주었다.
그때 그 군의관이 왜이리 밉던지 어린 나이에 마취를 안하고 수술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군의관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형은 나한테 꿀밤을 먹였다.
" 또 해보지 그래? 이번엔 어딜 꿰맬래? "
막내누나는 나를 볼 사람이 없어 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그런데 유독 내 기억에 나와 누나는 어릴 적 무지 싸웠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손아래 위 사이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하지만 나는 늘 누나에게 맞았다. 엎드려 뻐쳐를 시켜놓고는 빗자루로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내가 중학교를 들어가고 나면서부터 상황은 역전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4학년이 되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싶으면 우리형제들은 용익 이네 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이따금 나는 잠이 들곤 했다.
그러다 오줌이 내려 워 새벽에 눈을 뜨면 형들은 그곳에 없었다.
용익 이네와 우리 집은 뛰어가면 1분 거리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집으로 가고 싶었다.
숨을 꾹 참고 집까지 뛰어가서는
"엄마" 하곤 엄마 품에 안겼었다.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교실에는 처음 보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날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고 그때 하루종일 나와 있었다는 것에
무지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날 그전에는 몰랐던
아버지라는 사람의 빈자리를 처음 알았다.
교실의 대부분의 아이들 옆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
유독 어머니의 비어있는 아버지 자리가 그렇게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지금도 만나는 벗들을 사귈 수 있었다.
인기, 장우, 만희, 현복이...........
초등학교 시절 나는 유독 인기와 친했다.
인기는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다. 등교 길이나 하교 길에 우리는 늘 같이 다녔다.
인기는 어린 나의 눈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인기의 아버지는 속초공항에 다니시는 공무원 이셨고, 어머니는 삼거리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계셨고.....
무엇보다 인기네 가정은 잘 살았고 화목해 보였다.
우리 집엔 없는...........
인기는 자전거가 있었다.
나는 그 자전거가 한없이 부러웠다.
그때 나는 자전거를 탈 줄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인기의 그 자전거를 타보고 싶었다.
그러다 몇 번은 논두렁이나 도랑으로 굴러 떨어 진 적도 있었다.
결국 나는 인기의 자전거를 통해 자전거를 배울 수 있었다.
인기는 늘 용돈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인기가 사주는 군것질은 늘 고마웠다.
그런 인기와 나도 한때 싸운 적이 있다.
아주 어릴 때.......
하루는 인기의 집에서 나는 인기와 함께 컴퓨터에 연결한 오락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와 같이 먹던 라면 때문에 싸움이 생겼다.
내용은 아주 유치했다. 서로 좀더 먹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그 라면이 누구거니 하는 그런 싸움이었다.
나는 그렇게 인기와 싸우고 나서 집으로 왔다.
토라진 나에게 어머니가 물으셨다.
" 왜? 인기랑 싸웠니? "
" 그 자식이 라면 먹는데 지네 라면이라고 날 얕보잖아? "
어머니는 그 날 인기네 집엘 갔다 오셨다.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는 서러운 이야기들을 하셨던 것으로 안다.
그 날 이후 나는 어머니를 한동안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아무튼 나와 인기는 어린 시절 누가 뭐래도 절친한 친구였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파출부생활을 많이 다니셨다.
주로 어머니는 근처의 군인관사에서 파출부를 많이 다니셨다.
언젠가 한번은 어머니가 다니던 집에서 한 아저씨가 보리쌀 몇 가마니를 갖다 준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강한 생활력에 나는 그나마 고생을 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때까지도 어머니의 그런 고생을 잘 몰랐다.
한때 우리 반의 아이 중에 어머니가 다니던 파출부 집의 아이가 전학을 왔었다.
나는 그 아이만 보면 늘 피하고 싶었다.
혹여 우리어머니가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할 것이 두려워.........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친해진 친구가 장우다.
장우는 나의 가정형편을 많이 이해했고 그리고 늘 나를 감싸줬다.
어느 날 내가 많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때 어머니는 홀로 집 앞에 군부대 땅을 얻어 벼를 키우셨다.
마침 추수가 한참일 때였다.
물론 학교에서는 반 아이들도 그렇고 우리 집이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날 아픈 나를 업고 장우는 우리 집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반 아이들 몇 명과 함께.......
그리고는 장우와 아이들은 어머니가 혼자 추수하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와 함께 벼를 베어 주었다.
나는 그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장우와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더욱 친해졌다.
어느 날 어머니가 군부대에서 유통이 지나 폐기 처분한 음료캔들을 몇 푸데를 가지고 오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아니 어머니가 그렇게 산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어머니는 녹슨 그 캔들을 일일이 씻고 해서 정리를 하셨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다.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나는 하루는 그 캔들 중에 괜찮은 것을 몇 개 골라 학교로 가져갔다.
그리고 장우를 몰래 화장실 뒤로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웃으며 그 캔을 마셨었다.
어머니는 파출부 생활을 하시며 이것저것 그 집에서 버리거나 안 쓰는 물건을
집으로 가져 오셨다. 옷, 그릇 등등......
어머니는 그렇게 없는 살림을 그런 식으로 하나 둘 채워 나가셨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한번도 소풍을 가보지 못했다.
이따금 친구들의 초등학교 사진을 볼 때 면 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친구들이 소풍을 가면 나는 아프다거나 집안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있어야 했다.
이따금 어머니에게 때를 썼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랬다,,,,,, 종환아...나중에 가렴......
초등학교 시절 명절 때면 큰형이나 누나가 오면 나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형이나 누나는 멋진 학용품을 사오곤 했다.
나는 큰형이나 큰누나가 어떻게 벌어온 돈인지 몰랐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 가면 일부러 그것들을 꺼내 놓고 자랑을 하기도 했었다.
나는 학교에서 그렇게 튀게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나는 전교 30 -40등 안에 있었다.
방학기간이 되면 학교에서 나는 여러 물품을 받았었다.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겨울에는 주로 두툼한 잠바와 내복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교무실로 오라는 방송이 나올 때면 그렇게 가기가 싫었었다.
모든 선생님들이 지켜보는데서 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자존심이라는 것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공부보다는 작문 쪽에 실력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시나 표어 글짓기를 해서 여러 번의 상을 타기도 했었다.
물론 막내누나 역시 작문에 소질이 있었다.
누나와 나는 초등학교 시절 4년을 같이 보냈었는데 누나는 나보다 더 많은 상을 탔었다.
그리고 공부 또한 잘했다.
누나의 담임선생님은 누나를 선생님의 길로 안내하려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누나는 임용고시도 봤었다.
지금은 입시학원의 국어강사를 하고 있지만.......
나의 유년시절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한사람이 있다.
은실이!
우리학년은 내가 졸업을 할 때까지 2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졸업을 할 때쯤 되면 웬만한 친구와는 서로 친해 질 수 있었다.
나는 입학을 하면서부터 은실이를 좋아했다.
물론 이 감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은실이는 착했고 참 이뻤다. 노래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왜 그토록 은실이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어쩜 나는 아버지에 대한 빈자리와
삶의 고단함을 은실이를 통해서 잊으려 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나는 중학교를 들어가고 졸업을 할 때까지도
나의 감정을 한번도 표현하지 못했다.
바보 같게도.........
나는 여름보다는 겨울이 좋다.
왜냐하면 추위에 대한 면역이 생겨 어느 정도의 추위는 잘 견딘다.
초등학교시절 우리는 엄마, 누나, 나 셋이서 한겨울에 두꺼운 이불만을 의지한 채
겨울을 나기가 일수였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우리 집엔 연탄이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집엔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대충 깐 연탄보일러는 영 엉망이었다.
아랫목근처만 따뜻하고 윗목은 여전히 시베리아였다.
한때 속초에 태풍이 엄청 불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부엌문을 연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집 부엌은 옛날 식 부엌이라 지대가 낮았다.
그 날 내린 비가 부엌아궁이로 흘러 들어와 부엌을 잠기고 있었다.
이런 일은 여름만 되면 늘 겪는 연례행사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다름이 아닌 녹은 연탄 때문이었다.
겨울에 쓰려고 부엌한쪽에 차곡차곡 세워둔 연탄들이 빗물에 모두 녹아 버린 것이었다.
순간 나의 눈엔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서글픔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추석이 머지 않았었다.
우리는 추석 내내 그런 부엌에서 명절을 보내야만 했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파출부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한때 우리는 어머니와 몇 달 간 떨어져 지내야 했기도 했다.
어머니가 설악산인근의 여관에서 파출부생활을 했기에.....
우리시골은 밤 7시가 되면 버스가 끊겼다.
7시가 넘어서 집에 올 때면 걸어서 와야만 했다.
아니면 지나가는 자가용을 얻어 타거나......
이따금 어머니가 늦게 오실 때면 나와 누나는 어머니를 맞으러
두 손잡고 마중을 나가곤 했다.
늦은 밤 한참을 걸어가다 저 먼 치서 한 손에 무언가 들고 오시는 어머니를 보면
나는 단숨에 달려가 어머니 품에 안기곤 했었다.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다고 나는 장담한다. 어머니 품이 느껴지던 그 시절이.......
어머니는 파출부를 다니시면서 늘 집에 오실 때면 무언가를 들고 오셨다.
그것이 빵일 때도 있었고 사이다나 환타 같은 음료수였을 때도 있고, 누군가 먹다 남은 돈까스나
어묵이었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매일매일 어머니 손에 들려오는 그 무언가를 어머니보다도
기다렸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해서 돈까스와 어묵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먹어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이런 것들을 드시지는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볼뿐..........
내가 아주 어릴 적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있었다.
" 종환아! 니 엄마 다른 아저씨한테 시집가면 어떻게 할래?"
동네 아주머니들은 어린 나에게 이따금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절대 안 된다고 우기곤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머니 말대로 어머니가 그렇게 했으면 좀더 행복하고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는다.
너무 늦게 철이 든 지금에야 그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쯤 어머니는 진짜로 재혼을 생각해봤던 것 같다.
어느 날 어머니가 양양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었다.
그리고 그 집까지도 가르쳐 주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그 후로 아무 말도 없었고 그냥 그렇게 그 일은 잊혀졌다.
어머니가 언젠가 내방에 들어오셔서 나에게 들려주시던 이야기들을 듣기 전까지
나는 한번도 어머니를 여자로 보지를 못했다. 아니 그러기 싫었을 것이다.
속초와 양양일대는 겨울이 되면 눈이 엄청 많이 왔다 보통 몇 십cm는 기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런 겨울에도 버스를 타고 다니시지 않으셨다.
그렇게 눈이 와도 어머니는 걸어 다니셨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해 어머니에게 큰소리를 치기도 했었지만
어머니의 고집은 절대 꺾을 수 없었다. 몇 백 원을 아끼려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내가 중학교를 들어가고 얼마 안 되 큰누나가 돌아 왔다.
나는 누나가 없는 동안 늘 누나를 그리워하곤 했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려니 좀 간지럽기도 하고 쑥스럽지만 그 당시 나의 눈에 누나는 또 하나의 어머니였다.
그만큼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져 가는 것들이 있나보다. 지금 누나에게선 왜 그때의 느낌들과 행동들이 안 되는지...
나는 어릴 적 유난히 형들이나 엄마의 뱃속에 손을 넣고 자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냥 그렇게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있자면 저절로 곤히 잠이 들곤 했었다.
누나는 돌아와서 얼마 후 매형과 결혼을 했고 누나는 시집가기 전 집에 수도와 냉장고 전화기 등을 놓아주었다.
이렇게 누나의 뒷바라지에 집은 좀더 구색을 갖출 수 가 있었다.
수도가 놓이기 전 까지 나의 일과는 늘 뒷집에서 수돗물을 나르는 것이었다.
특히 명절 때가 되면 형들은 집에 오자마자 하는 일이 명절 준비를 위해 손수레 한가득 큰 고무 다라에 수돗물을 나르는 거였다. 다행히 우리 뒷집은 인심이 좋았다. 우리는 수도가 놓이기 전까지 그곳에 수돗물을 길어다 썼다.
하지만 그렇게 인심 좋던 아저씨가 얼마 전 고향에 갔을 때는 풍을 맞아 거동을 제대로 못하고 계셨었다.
지금 이 자리를 비러 건강의 쾌유와 그때의 고마움을 감사 드리고 싶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일하러 다녔기 때문에 나는 일찍 요리를 배우게 되었다.
이따금 누나와 나는 밀가루로 호떡이나 부침개를 만들어 먹곤 했다.
어릴 적 우리는 유난히 감자를 많이 먹었었다.
특히 여름이면 집 앞의 도랑 가에 누나와 앉아 숟가락으로 감자를 까곤 했었다.
마당 앞 큰솥에 한가득 감자를 삶아 어머니와 누나와 멍석을 깔곤 먹곤 했었다.
지금도 가득 침이 고인다. 그때 그 맛과 그 기억에........
어릴 적 아버지의 빈자리는 동네 인척들이 채워 주셨다.
특히 집안의 대소사나 일이 있을 경우 그 분들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 주셨다.
순심이 누나네, 창원이 형네, 뒷집,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어머니와 할머니는 먼 인척으로 아재관계였다.
어려서 우리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라 부르며 자랐다)
누가 그랬던가 먼 친척 보다 이웃사촌이 났다고......
아버지의 형제는 많았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 크기 전 까지 그렇게 왕래는 없었다.
물론 그 당시 모두가 먹고살기가 바빠서였으리라 생각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나 그리고 우리형제들은 아직도
그 아쉬움과 원망이 남아 있다.
명절 때라고 이따금 찾아오면 그 날은 작은아버지들간에 기필코 큰 싸움이 나고 말았다.
결국 어느 날 보다 못한 큰형이 다시는 오지 말라며 큰 소리를 쳤고 그 후로 모든 작은 아버지들이 명절 때
한자리에 모인 일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어머니는 동네 땅과 인근 군부대 땅을 약간 얻어 논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조금이라고 해도 어머니에게 그 일은 힘에 부친 일이었다.
어릴 적 나는 어머니와 논에서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하기도 했었다.
가을에는 직접 낫으로 벼를 베기도 했고 쌓인 볏단을 일일이 절단기로 잘라 논에 뿌리기도 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다.
중학교는 시골 대부분의 학교가 그러했듯 조그마했다.
우리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2반밖에 되지 않았다.
더욱이 초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이곳에 진학을 했기 때문에 늘 보던 친구들을 계속 볼 수 있었다.
중학교 생활은 나에게 있어 값진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절친한 벗 정이, 흥수, 상규, 주용이, 순구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특히 나의 이야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정이를 나는 이곳에서 만났다.
입학 초 우리친구들은 아침에 수업이 시작되기 전 운동장에서 늘 공을 찼다.
그때 정이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공을 한참 차고 있는데 갑자기 정이의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모두 당황하고 있을 때 나는 정이의 팔을 수건으로 삼각붕대를 하여 우리동네의 국군동해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동네와 학교는 걸어서 한 30분쯤 걸어야 했다.
그때부터 나와 정이는 유독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정이의 동네는 우리 집에서도 한 40분 정도 더 가야 되는 말 그대로 산골짜기에 있었다.
더욱이 정이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와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며 입시준비를 하였었다.
결국 정이와 나는 모두 같은 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여전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일을 다니셨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