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각 - 하늘을 우러러

[느티나무]

 2011.1.24
 일요일 오후 현관에서 얼핏 들으니 밖 계단에서 물 쫄쫄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런가 보다 하다가 아차, 누가 계단에서 오줌을 누나? 딱 그 소리다. 누가 술 담뿍 마시고 취해서 주정을 하나 하고 문 열고 나갔더니 4층 계단에서 물 뚝뚝 떨어진다. 종일 눈 연신 날리더니 혹시 누가 옥상 문 열어놓아서 눈이 계단으로 들이쳤나, 이렇게 물 떨어져 흐르면 계단이 다 얼 텐데, 옥상 문 열렸으면 닫으려고 올라갔더니 5층은 말끔하다. 4층도 말끔하긴 한데 딱 3층 천정에서만 물이 떨어진다. 수도 계량기가 얼어서 터졌나 하고 봐도 계단에는 수도 계량기 없다. 이상하다 하고 내려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밖이 웅성웅성하다. 나가봤더니 경찰 오고 119 오고 옆집 사람들 다 나와 있다. 옆집 천정에서 물이 흘러 현관이고 거실이고 방이고 난리란다. 혹시나 하고 봤더니 우리 집도 현관 천정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소영이 방 벽에 물이 흐른다. 침대를 당겨 벽에서 떼고 수건을 깔았다.
 404호에서 새는 것 같은데 사람도 없고 연락처도 모르고 결국 옥상에서 줄을 내려 119대원이 내려가 창을 열고 문을 열었는데 온 집안이 다 물바다고 어찌나 물이 많은지 구두 잠길 정도로 찰랑거린다. 보일러실에 온수 수도꼭지가 열려있고 배수구는 수건으로 막혀있다. 수도 잠그고 우선 집주인 연락처는 경찰이 찾고 옆집 부부, 남매, 위층 옆집 아줌마, 나도 건희 불러 모두 함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다가 물을 퍼냈다. 얼른 퍼내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다 흘러내리겠기에 물 퍼내는 게 급하다. 여럿이 쓸고 퍼내기를 몇 시간.
 
 세금영수증 전화 고지서, 주일학교 명찰, 아무리 신상정보 찾고 연락을 해도 전화 안 받거나 다른 사람이 받아서 잘못 걸었다고 하고 교회 주일학교니 자격증에 적힌 연락처니 다 해봐도 연락 두절. 나중에는 택배 봉투에 적힌 전화번호도 보고, 동네 슈퍼마켓 영수증이 있는데 포인트 점수가 있기에 고객정보 누르면 전화번호 나올까 하고 연락해도 이미 밤 11시 반이라 문 닫고 전화 받지 않는다. 그렇게 물 다 퍼내고 경찰관이 현관문 잠그고 내려오니 밤 열두시 넘었다.
 
 판소리 선생님이 돌발성난청으로 왼쪽 귀가 갑자기 안 들려 입원하셨다고 해서 오늘 수업 못하고 대신 병원에 문병 다녀오다가 연락했더니 위층 사람이 전화 받는다. 멀리 있다고 내일 온다고 한다. 1년 가야 보일러실 수도꼭지 한 번 건들지도 않고 열어놓지도 않았는데 이상하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 없고 하도 이상하고 억울하다고 해서 수도꼭지 내가 열어놓은 거 아니라고 할 뻔했다.

   
 2011.1.27
 건희가 내 생일선물로 1권을 사와 읽게 된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신을 5권까지 다 읽어서 어제 도서관 갔더니 6권이 없다. 그냥 왔다. 어제 없던 게 오늘은 설마 있을까 싶지만 혹시 몰라 가봤다. 혹 오늘 없더라도 대여중인 책 반납일이 언제인지 보지 못하고 와서 오늘 갔다가 혹 없더라도 반납일이나 보자하고 갔다. 가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가면 6권 빌려갔던 사람이 책을 가져오고, 그걸 내가 받아오는 그림이 그려지며 아, 정말 그러면 좋을 텐데 싶다.  
 
 도서관 가서 컴퓨터 도서 검색대에 앉아 보니 역시 없다. 반납예정일은 2월 4일이다. 2월 4일에 다시 와야지 하고 나오려다가 안내하는 이에게 물었다. 대여 예약을 할 수 있느냐고. 예약제도가 있다고 한다. 회원증 내고 예약 접수하는데 누가 책 여섯 권을 가져와 반납하는데 거기 신 6권이 있다고 옆 직원이 준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군.' 예약 접수하던 직원이 혼잣말로 감탄한다.
 
 즐거운 예감도 맞는 수가 있군. 돗자리 깔까 보다.
 
   
  2011.2.6
 건희가 오늘 개학이다. 어제 교복 와이셔츠며 타이며 상하의 다 빨아 말려놓았다.
 방학동안 늦잠을 자도 내버려뒀다. 내버려두면 어떤 날은 낮 2시 넘어서야 일어나기도 했다. 나 어릴 때 남의 집 아이들 늦잠 늘어지게 자도록 내버려두는 게 부러웠고, 늦잠 자는 게 소원인 적 있었다. 아버지는 일요일이건 방학이건 늦잠 자는 꼴을 못 견디고 처음에는 조용하게 이르다가 나중에는 음정이 점점 높아지셨다.
 건희는 어제까지만 해도 애벌레처럼 이불 둘둘 말고 늦도록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꼼지락거리며 자더니 오늘은 개학이라고 잠들기 전부터 걱정이더니 새벽부터 잠 못 자고 앉았다 누웠다 하더니 꼭두새벽에 일어나 학교 갔다.
 나도 덩달아 이제 부지런을 떨어야 할 것이다.
 
 
 2011.2.10
 어제부터 옷장을 뒤져 헌옷을 정리했다. 작아져서 안 입는 아이들 옷이 많다. 세 봉지나 수거함에 버렸다. 정리할 옷들이 아직 더 많다.
 
 고향 갔다. 내려가기 전에 책을 정리해서 백과사전 두 질, 서각 연감 몇 권, 출판미술 연감 몇 권, 예전에 그림 작업해서 출판된 책 등 책 여덟 묶음을 싸 고향 집으로 가져갔다. 지난겨울부터 고향 갈 때마다 하는 일이다. 가끔 꺼내 읽는 것도 아니면서 그동안 모인 책이 다 짐이다. 거실, 안방, 아이들 방까지 이 집에 책이 주인인 듯 곳곳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그 중 세계 화집 한 질, 현대문학, 계간 미술, 세계 박물관 화집 등은 30년 가까이 끌어안고 지낸 것인데 다시 꺼내 보는 일도 몇 번 없으면서 참 질기게 미련을 떨며 가지고 살았다. 앞으로도 더 덜어내 비워야 할 일이다.
 
 고향 시청 가서 아는 형 만나 인사하고 시장을 봐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께 큰절하고 안부 여쭙고 우선 닭죽 끓이고 생굴 씻어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밀린 설거지며 청소를 하고 저녁 먹은 후 종친회 일 보는 친척 형네 가게 가서 소영이 장학금 신청 서류를 내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 자려고 누웠는데 잠은 안 오고 머리 빙 돌고 정신은 말끔해진다. 담배 피우러 마당에 나갔더니 양철지붕 위로 북두칠성 떴다. 국자 손잡이는 지붕 끄트머리에 붙고 국자는 왼쪽 위로 엎어졌다. 겨울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은 그런 건가 보다. 가만히 별 보는데 문득 처량하고 쓸쓸하고, 살갗 찌르는 겨울 밤공기처럼 생이 처참하다. 밤 12시가 되었지만, 동무에게 문자를 보냈다. '양철지붕위북두칠성이엎어졌네' 답장 왔다. '오매누가엎었냐'
 
 문자 서로 몇 번 나누고 방에 들어와 불 끄고 누웠는데 내가 누구고 여기는 대체 어디인가, 내가 어디서부터 어떤 경로를 거쳐 여기 있게 된 건가 싶다. 시간을 거슬러 되짚어도 어제 일도, 그제 일도, 일년 전 일도, 십년 전 일도, 통 생각나지 않고 이번 생이 마치 전생처럼 아득하고 까마득하고 흐리다. 내가 여기 이 집에 어떻게 오게 되어 누워있는 것일까. 나는 과연 나이기는 한 것인가. 이번 생이 만약 꿈이면 깨도 괜찮겠다.

하늘을 우러러
고재 소나무 음각
세로 21.5Cm 가로 39Cm 두께 3.5Cm

[sangky]

블로그 너무 잘 되어 있어 감탄...!

[느티나무]

아이고, 블로그 보셨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갓 만들었어요. 아직 한 달도 안 되어서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

[이상교]

살아가는 일이 꿈만 같은지라.... ㅡㅡ

[느티나무]

그러게요. 어떤 때는 사는 일이 완연히 꿈 같기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