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요한복음(19장~21장) 묵상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한복음 19장)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6-27)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 모친께 대한 주님의 친절한 염려와 걱정을 본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도리와 은혜의 계명에 따라
자녀가 부모에게 어떻게 효도를 다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바 모든 자녀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손가락으로 두 돌판에 새겨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의 말씀을 결코 폐지된 일이 없다.
그 계명들은 이 땅이 있는 한, 그 효력을 잃지 아니할 것이다.
이 모든 계명들은 신약의 가르침 속에 낱낱이 다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기 20장 12절 말씀은 에베소서 6장 1-3절의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하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공경하라”는 말은
비록 순종이 가장 중요한 것이긴 하나
순종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자녀들은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난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게 되며
부모의 다스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은
부모를 공경할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완전하신 모범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그 순종과 존경심을 둘 다 찾아볼 수 있다.
첫 사람 아담 - 그는 곧 바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성숙한 어른으로 창조되어
인간이 지녀야 할 모든 영광스런 속성들을 처음부터 다 지니고 있었다 -
과는 달리 마지막 아담이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을 거쳐 자라나서
비로소 어른이 되셨다는 사실은 제5계명에 비추어 볼 때
말할 수 없는 중요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에 소년 예수는 그의 모친 마리아와
그의 법적인 부친 요셉의 감독하에 있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그 부모는
소년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요셉과 마리아는 이웃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자기들과 함께 있겠거니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일행 중에 있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룻길을 간 후에야 예수가 없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즉시 부모는 오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에 가보니 예수는 성전에 있었다.
그 어머니는 예수에게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고 말하였다.
마리아가 예수를 그처럼 “근심하여” 찾았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그 모친 마리아의 보호구역 밖에 나가신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강력히 지지하여 주고 있다.
즉시 곁에서 예수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마리아에게 있어서 하나의 생소하고 이상스런 경험이었다.
요셉의 도움을 받아 마리아가 “근심하여” 예수를 찾았다는 사실은
나사렛의 가정에서 이들 식구들 사이의
아름답고 화목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어머니의 질문을 곧 알아듣고 예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또한 그가 어머니를 얼마나 순종하며 섬겼는지를 나타내어 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그 모친 마리아를
비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의 일 외에는 나를 이처럼 지체하게 만들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시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나를 잘 알고 계시지요!’ 하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그 뒤의 결과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다.
우리는 누가복음 2장 51절에서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하는 말씀을 본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자녀들에게 그들의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어
효도할 것을 가르치는 완전한 모범을 남겨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다 자라셔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할” 나이는 지났다 하더라도
그 부모를 “공경할” 나이는 평생토록 지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지상 생애의 막이 내려지는 저 끔찍한 순간,
견딜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주 예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시던,
또 주께서 그처럼 공경하시던 모친 마리아를 생각하셨다.
그 처참한 순간에서도 주께서는
그 모친께 당장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장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그 모친의 장래를,
자기의 사랑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그 제자(요한)에게 부탁하셨다.
주께서 그 모친께 하신 말씀 중에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말이 하나 있다.
주께서는 그 모친 마리아를 부르실 때,
“여자여”라는 호칭을 사용하셨다.
네 복음서들 가운데서 주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르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현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신 지혜로
수 세기 앞을 내어다 보셨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나온 교회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오직 그의 아들에게만 돌려야 할 존귀와 영광을
마리아에게 돌리며 또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경배한 우상숭배자들의 무리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끔찍한 마리아 숭배가 자행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일을 미리 내어다 보시고
이 어리석은 일을 막기 위하여 “어머니” 대신에
“여자여”라는 호칭을 사용하셨던 것이다.
공관복음 저자들은 구주를 인간적인 관계에서 진술하고 있으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렇지 아니하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모든 인간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주 예수께서 마리아를
“여자여”로 부르신 것으로 말하고 있는 요한의 설명은
그 사실과 완전한 조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 모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부탁하신 일은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복음서들이 특별히 주님의 부친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지는 아니하나
요셉이 주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얼마 전에 죽었다는 점에는 거의 의심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12세 되던 해의 사건을 말하여 주고 있는
누가복음 2장의 기록 이후로는
마리아의 남편에 관한 구절이 전혀 보이지 아니한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도 마리아는 보이나
그의 남편이 잔치에 참석하였다는 암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주님은 창조주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자신의 육신의 부친이 죽을 때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살리시지 않았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결코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때를 따라 순종하며 사역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었다면
아들 예수를 빙자하여 큰 영광을 얻으려 시도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찍 죽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면서 헛된 세상 영광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
그저 잠시라도 주를 섬길 수 있는
그 자체가 영광인줄 알아야 한다. 아멘.
- 꿀송이 보약 큐티, 365일 성경 통독
남아공 노록수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