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80년대 초중반의 대중가요
1. 대중가요계의 제 3의 안정기와 수퍼스타 조용필
⑴ 가요계의 천하통일, 조용필
70년대는 포크의 등장으로 기존 가요계의 주된 흐름인 트로트와 스탠다드와는 분리된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나가고, 70년대 후반 록이 거기에 또 하나의경향을 보태는 등 새로운 경향들이 어느 것 하나도 뚜렷한 주도성을 잡지 못한 채 솟아오르는 시기이다.
79년에 조용필은 이전까지의 가요의 성과를 종합하고 총괄함은 물론 그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면서 수퍼스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창 밖의 여자>, <비련>, <못찾겠다 꾀꼬리>, <촛불>, <물망초>, <꽃바람> 등 그의 재기를 성공시킨 노래들은 모든 계층에 고루 대중적이면서 선율적이며 느낌이 풍부한 단조스탠다드와 강한 리듬·음색의 록을 결합시킨 노래들이다.
또한 조용필은 다양한 쟝르의 곡을 통해 거의 전연령층·전계층에 호소력을 발휘한다. 조용필의 노래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다양한 쟝르에걸쳐 분포되어 있음을 볼 수있다.
# 록에 가까운 노래들 : <단발머리>, <나는 너 좋아> 등
# 정통 스태다드 :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꽃순이를 아시나요>, <정> 등
# 정통 트로트 : 데뷔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에야> 등# 포크적·가곡적 분위기 노래 : <친구여>
# 민요 : <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 등
이렇게 다양한 쟝르를 소화한 가수가 소화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스탠다드와 록을 결합한 노래들을 성공시킴으로써 80년대 전반 가요계의 판도를 결정지었고, 이러한 경향에 따라 김수철, 전영록, 윤시내, 이은하, 이선희 등 가요계의 대중적 히트곡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80년대 가요계는 70년대와는 달리 수퍼스타 조용필을 중심으로 일정한 안정기를 맞게 된다.
⑵ 최고의 상품으로서의 조용필
거의 전 연령층, 전 계층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구매자를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용필은 가요계에서 최대이윤을 창출하는 가장 우수한 상품이며, 그 상품적 우수성을 확보하기 위해 작위적인 노력이 가해진다.
즉 계획적인 매니지먼트에 의해 그다양성이 유지된다. 한 가수가 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경향을 가지게되거나,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경향과 이미지가 최대 이윤창출이라는 원리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다.
다양한 경향의 노래가 동시에 실린 음반이 기획되고 (1집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3집 <고추잠자리>와 <물망초>, <미워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가 동시에 실림), 다양한 이미지로 부를 작품의 경향과 그 무대, 관객의 취향에 따라 의상 등을 선택하여 변신해가며 적재적소에 등장한다.
또한 대중가요의 경향 변화에 따라 작품의 경향을 바꾸어 나간다. 예를들어 장조트로트가 유행할 때에는 <허공>, 발라드가 유행할 때에는 <그대 발길이 머무는 것에>,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유행할 때는 <꿈> 등을 발표한다.
팬클럽의 결성 등을 통해 인기의 조직적 관리를 시도하는 등 본격적인 가요산업의 시대를 열어나가게 된다. 그 뒤를 이어 전영록, 이선희가 나타난다.
⑶ 가요 수용층으로서의 10대
조용필의 등장이 확인시켜준 것은 10대 -대학생이 아닌 중고등학생 - 특히중학생이 매우 중요한 가요수용층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극성스러운10대 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 (70년대 어니언스나 이수만에 대한 호응과는그 질이 다르다).- 10대가 가요의 주요 구매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소형 오디오의 대중적 보급과 경제적 여유로 10대의 음반 구매
가 가능해졌다는 것과관련이 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80년대부터 텔레비젼을 중심으로 하는 가요계의 중심적흐름은 10대를 겨냥한 작품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10대들은 대중음악의 주요한 소비자, 음반 구매층이며, 팬클럽과 박수부대 등으로 '이것이 대세다'라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 오피니언리더의 구실을 하는 계층이 된다.
가요계의 흐름이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게 되면서 전영록, 구창모, 김수철,이선희 등 10대를 겨냥한 가수들의 대거 등장한다. 이시기 가사를 살펴보면 수용층인 10대를 겨냥하여 유아적 발상과 표현이많이 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깨끗이 지워야 하니까','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못 찾겠다 꾀꼬리',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내 사랑 울보', '만나 사랑한게 잘못이었나봐', '그대 우나봐','...했잖아','...했어요' 등
⑷ 록의 제2세대의 전성기와 록의 대중화
조용필의 등장은 록의 대중화를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대학가요제 출신을 비롯한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대거 등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록의 제2세대가 전성기를 맞게 된다. - 당시 {영 11} 같은 청소년 쇼프로그램은 이들이 빠지면 이루어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송골배 <어쩌다 마주친 그대>,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김수철 <못다핀 꽃 한송이>, <왜 모르시나>, <나두야 간다>, <젊은 그대>등
2. 록의 대중화 시대의 인간형과 세계 인식
포크와는 달리 록은 반문화적 분위기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고 처음부터 대중가요의 내용적 관행을 따르면서 대중적으로 시작하였다. 록의 제2세대에 이르러서도 록 특유의 세계인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비극적 사랑노래의 내용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특히 가사를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는음악양식과 질감, 기법을 중심으로 노래를 발전시
킨다.
록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절규'이다. 여태까지의 가요에서는 없었던 남성의 고음과 째지는 듯한 전자악기의 음향, 폭발적인 드럼, 강한 리듬들이 사용된다. 대개 고음부와 저음부가 나뉘며, 클라이맥스인 고음부는 맨 앞의 저음부보다는 완전히 한 옥타브 높은 음높이에서 진행된다.
김수철의 <못 다핀 꽃한송이>, <모르시나>,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 등을 보면 한 옥타브 위로의도발적인 절규와 같은 상승이 있다. 저음부와 고음부의 분리와 고음부의 절규는 이 시기부터는 대중화되어서 <잊혀진 계절> 같은 팝발라드 계열의 작품에서도 흔히 드러난다. 조용필의 <촛불>, <비련> 등은 아예 고음부의 절규부터시작하는 강렬함을 보인다.
이러한 노래들의 표현을 보면 이성적이지 않고,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다가온다. 지적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대중적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도볼 수 있다.
슬픔의 표현이 직설적이며 도발적이다. (직설적이라는 점에서는 트로트와일치하며 도발적이라는 점에서는 다름) 비극의 원인을 자신의 탓(운명이든 못난 탓이든 여자이기 때문이든)으로 돌리는 자학적 심리와, 그 비극으로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트로트와 흡사하다.
그러나 록의 인간형은 자폐적이며,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는 그것을 말해준다. 자신과 세계 사이에 일정한 벽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세계가 세상 전체보다도 중요하며 자신의내적 세계에 의해 세상 전체를 규정되고 좌지우지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록에서의 자신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것은 곧 세상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같은 극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창밖의 여자>
그 파괴적이고 도발적이며 극단적 분위기의 절규는 자신을 가장 절절하게드러내는 것이며, 록의 아름다움의 핵심이 된다. 도저히 절규하지 않고서는견딜 수 없는 인간의 자기 회복, 인간성의 발현과 같은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그만큼 이 세계가 절규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어둡고 힘든 곳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성의 발현이 파괴적일 정도로 극단적이라는 것에 그 비극성과 불건강성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가사에 드러나는 경우는 그리 흔치않고, 악곡과의 결합을 통한 정서, 질감으로 드러난다.
가사 내용은 복잡한 내면심리를 드러낸다. 특히 팝발라드의 산문적이고 서술적인 가사들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떠나가서 슬프다' 정도의 단순한 논리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랑이든 이별이든 사람의 움직임이나 외적 사물로의 정서의 응집 (가을의 풍경이라든지, 새의 울음이라든지)보다는 한 순간의 느낌이나 분위기,감각의 포착, 복잡한 내면 심리의 포착으로 기울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 어저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희나리>
(추제호 작사·작곡, 구창모 노래)
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 그래도 우리는 좋아 좋아
알 수 없는 너의 고백이 / 내 마음을 뛰게 하지만
그런 것은 너무 어려워 싫어 (후략)
<나는 너 좋아>
(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노래)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말로 가면 갈수록 강화된다.
3. 팝발라드, 댄스뮤직, 트로트의 세 양식의 태동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가요의 양식은 팝발라드, 댄스뮤직,트로트의 세 양식으로 정리·정립된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80년대 초반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그 정립이 거의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⑴ 팝발라드의 태동
스탠다드의 전영을 가지고 있으면서 포크와 블루스의 세련된 분위기를 수용하는 작품도 많다. 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화성을 구사하면서 주로 피아노가 주도하는 반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장조가 주도적이고, 가사는 체언으로 시상을 응축하기보다는 용언으로 서술적으로 마무리하여 말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주는 경향이 주도한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로부터 시작하여(박건호,이범희 콤비의 신선함), 이선희 <J에게>,
최성수 <남남>, 이광조<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문세<난아직 모르잖아요>, <그녀
의 웃음소리뿐> 등으로 이어진다.
⑵ 댄스뮤직의 본격화
가창력보다는 용모와 춤을 중심으로 하는 비디오형 가수가 등장하게 된다. 남자가수는 10대를 겨냥, 여자가수는 20대 이상 성인을 겨냥한다. 록의 대중화와 고고, 디스코로 이어지는 대중춤의 유행이 바탕이 된다. 나미 <빙글빙글>,<유혹하지 말아요>,<보이네> 등 건반주자 김명곤의 세련된편곡이 돋보임. 뒤를 이어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등의 등장.
⑶ 트로트의 유지와 장조 트로트의 부활
주로 여자 트로트가수가 주도한다. 정통 트로트 분위기의 김연자, 스탠다드와 결합한 특이한 창법의 김수희, 심수봉등이 등장하게 된다. 퇴행적 비극성을 보다 직설적인 어법으로 노래하면서 목이 메는 듯한 창법이나 휴성의 호흡을 심하게 섞어 간드러지면서도 애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창법으로 노래한다. 뒤를 이어 주현미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같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다.
첫째, {쌍쌍파티}라는 뽕짝메들리의 대중적 인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뽕짝메들리는 익숙한 노래를 매우 단순하고 일률적인 기계적 편곡에 담아서, 동일한 템포의 리듬으로 끊임없이 들려주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노래 하나하나가 아니라 쉬지 않고 동일한 기계적 리듬의 노래가 흘러나와 시간을 채운다는 점이다.
주로 운전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일을 하면서 노래를 듣는 성인층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성인용 춤곡의 구실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부르는 '쌍쌍파티'라는 발상 자체가 이러한 성인용 춤곡의 분위기를 만들어 냄)
둘째, 장조 트로트의 부활.
{쌍쌍파티}의 성공으로 데뷔한 주현미의 첫 신곡 <비 내리는 영동교>를 통해 단조트로트가 주도한 흐름을 깨고 장조 트로트의 시대를 열고, 이러한 흐름은 <신사동 그 사람>, <잠깐만>으로 이어진다.
셋째, 나훈아식 창법을 계승한 꺽는 목을 남용하는 목소리를 트로트의 대표적 창법으로 굳히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현철, 문희옥 등으로 이어지면서 두드러진다.(김수희,심수봉을 거치면서 주현미에 이르기가지 트로트는 주로 과장된 창법, 목소리 사운드의 변화로 신선함을 유지함)
넷째, 이전의 트로트보다 단순해지고 표현은 유치해졌으며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 현철<사랑은 나비인가 봐>,문희옥의 {사투리 디스코}등), 훨씬 중년의 향락적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 문희옥<사랑의 거리> 등
즉, 이는 더이상 트로트에 진지한 삶의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4. 가요계의 다양화와 언더그라운드
텔레비젼에 연연하지 않고 한때의 인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면서,개성있는작품세계를 추구하는 대중음악인이 늘어난다. 70년대 초 포크와 록의 후예들이지만 70년대의 작품세계와 많이 다르다.
팝 세대가 40대에 이르면서 그만큼 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가요인들이 양적, 질적으로 축적되고, 수용층의 취향도 다양해진 것이다. 이들은 가요계의 중심적 흐름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콘서트와 음반판매를 통해 자신의음악세계를 고집하면서 소수의 고정수용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한다.
혹은 한때 텔레비젼에 출연하는 인기가수였으나 그 유행이 지나가버린 싱어송라이터들이 그 창작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계속 변화시키면서 언더그라운드로, 혹은 영화음악 등으로 음악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⑴ 포크 계열
가사를 중시하는 특성 때문에 대개 이 계열의 언더그라운들들은 '음유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포크 계열의 언더그라운드는 80년대에 들어서서는이미 그 나이가 모두 30대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포크 특유의 지적이고 맑고순수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70년대 초반과 같은 철없을 정도의 순수함은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으로 칩거하여 세상을 관조하는 소극적분위기를 풍기거나(입을 게으르게 움직이는 창법이 일반적이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거나 대중가요의 일반적 관행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하는 경향을 보인다.
* 조동진 : 72년 데뷔 후 7년만에 1집 음반을 냄. (79년) <작은 배>, <행복한 사람>, <나뭇잎 사이로> 도시적 세련미와 사색적인 분위기.
* 정태춘 : <촛불>,<시인의 마을>이 실린 1집 이후에는 거의 음반으로만 활동을 해옴. 포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스탠다드를 많이 이어받고 있음. 투박함 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함.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서망부가> 등
* 해바라기 : 대중적 음악어법을 구사. 트로트적 분위기가 나는 스탠다드와결합한 <모두가 사랑이예요> 등으로부터 록의 분위기를 내는 <어서 말을 해>까지. 내용도 사랑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다.
* 신형원 (?돌) : 민중가요권의 작곡자 ?돌의 작품.88년 이전까지는 민중가요와의 관계
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었고 그저 특색있는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로 알려져 있었음.
<불씨>, <유리벽>, <개똥벌레>
* 송창식 : 대곡 분위기의 작품까지 소화했던 최전성기를 넘어서고, 80년대초 작곡자로서 <밀양 머슴 아리랑>, 김연자의 <당신은> 같은 대중적인 곡을만드는 경험을 하면서, 87년 <참새의 하루>,<담배가게 아가씨> 등에서 보통사람의 일상을 낙관적으로 긍정하 는 작품을 발표. 국악에 대한 관심도 보임(진보성보다는 국악의 음색을 연구하는 정도).
⑵ 블루스, 록 계열, 록의 제 3세대
* 김창완 : 동요를 비롯하여 명랑하고 순진하면서도 참신한 작품을 발표.초기 산울림보다는 대중의 취향을 파악한 듯 참신함을 강조하면서도 대중적임.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청춘>, <안녕>* 김수철의 영화음악, 춤음악. 국악과의 결합 시도
* 신촌블루스 : 이정선을 중심으로 함. 이정선은 포크4인조 해바라기로부터 시작하여 한영애를 데리고 블루스로 변화하였고,블루스를 중심으로한 그룹 풍선을 만들어서 이광조, 엄인호 등과 활동한 성과를 바탕으로 이정선, 한영애,김현식, 엄인호, 정서용, 60년대말 소울가수 박인수 등과 신촌블루스로 활동. 정통 블루스.
* 들국화 : 전인권을 중심으로함. 우리나라 록의 최고 단계를 보여줌 음악적 세련됨. 가사에서도 록적인 인식태도도 이미 체질화된 듯, 이전보다 강하게 록적인 세계인식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자폐적인 인간형, 주관적 세계의 절대화. <오후만 있던 일요일>,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순간의 시간을 중시하는 상대적 시간관념 등.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난 세상을 모르나 봐 /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 그것만이 내세상
하지만 후횐 없지 찾아 헤맨 모든 꿈 / 그것만이 내세상 /
그것만이 내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최성원 작사·작곡)
기나긴 하루 지나고 대지 위에 어둠
이 오늘 오늘은 끝남을 말해주는데
오늘의 공허를 메우지 못해 또 내일
로 미뤄야겠네 (후략)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조덕환 작사·작곡)
* 하드록·헤비메탈 그룹 : 백두산, 시나위, 부활, H2O등.
이들 언더그라운드는 우리나라 가요를 다양화하며 과감한 시도를 통해 가요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하는 구실을 하지만, 반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가요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와 우리나라 대중의 음악적 감수성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미국문화 추종적인 분위기를 가장 짙게 가지고 있는 부류이
기도 하다.
5. 가요의 미국화 경향의 강화와 우리말 파괴
조용필에 이르러 기존의 가요의 흐름과 록의 결합이 안정적이며, 신촌블루스나 들국화에 이르면 미국의 이른바 정통 블루스, 정통 록의 정착과 재생산이 완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트로트에서 단조스탠다드로 내려왔던 한국가요티가 전혀 나지 않는 완전한 미국화가 이루어진다.
이들에 이르면 3화음체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미국식 재즈, 블루스,록에서 사용하는 불협류의 화음들이 자유자재로 구사된다. 또한 발음이 미국식 음운으로 교체되고, 우리말의 억양과는 다른 액센트와 우리말의 흐흡을 고려하지 않은 악곡을 많이 사용한다. 심지어 일부러 우리말 가사를 들이지 않게 발음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혜은이의 <작은숙녀>)
이런 현상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이런 것을 쓰는 것이 오히려 세련된 것이라는 느낌까지 주기도 한다. (마치 영어나 독불어의 직역투 문장이 지적인 문장인 것같은 느낌을 주는 것처럼)
예) / 날 기억 / 하는 사람 / 들을 지금 모두
나중에는 아예 영어로 된 가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우리말 파괴는 비단 대중음악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8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음악과의 동질화가 진행될수록, 포크보다는 록이,
미국음악과 더욱 동질적인 세련된 언더그라운드일수록 더욱 심하다.
12. 80년대 말 노동가요
1. 87년 항쟁과 80년대말 민중가요의 급성장
87·88년부터 시작하여 90·91년 경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의 두개의 대중화가 실현되는데 하나는 대학생·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화 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예 :노찾사,노래마을) 또한 음악운동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다는 점도이 시기의 성과로써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90년 {민족음악협의회}의 창립이가능해지게 되었다.
2. 노동가요의 의의
⑴ 근대 음악사, 노래사 이래 최초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진보적 노래문화, 노래운동(음악운동)을 기층민중으로 대중화하는 데 성공. - 물론 여기에는 7·8·9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의 각 계급계층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에 크게 힘 입은 것이다. - 이 시기 이러한 기층민중으로의 대중화를 성공시킨 것은 노래와 연극으로민족예술운동의 중요한 성과로 이야기될 수 있다.
⑵ 노동자 대중의 경험과 인식, 정서 등을 담은 작품적 성과를 남김으로써민중가요의 자
산을 풍성하게 함.
3.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기간의 노래
⑴ 이 시기 주로 불렸던 노래들의 경향
87년 이전까지는 노동자 대중이 대중적으로 노래를 부를 공간이 없었고 작품의 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등 노동가요라는 독자적인 노래문화가만들어질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노동자대투쟁에서 광범위한 투쟁공간에서 불려질 노동가요가 제대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민중가요는 학생과 지식인 중심의 민중가요였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도 소시민적 지식인적 티를 벗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이 시기 노동자대중에게 대중화될 만한 작품이 되지 못했다.
이 시기 불렸던 노래들은 주로 행진곡풍의 노래들로는 <임을 위한 행진곡>,<늙은 군인의 노래>,<노동해방가>,<광주출전가>,<진군가>,<동지> 등이 있다.
그 외에 대중가요들이 재해석되어 불리기도 하고, 개사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고자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택시노조에서는 <노란 샤스의 사나이>, 광산노조에서는 군가인 <전선을 간다>를 개사한 <막장을간다>등이 있었다.
또한가지 이시기는 투쟁기였으므로 <사노라면>,<불나비>와 같은 일상적인분위기의 노래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불리워지지 않았다.
⑵ 이 시기에 광주 지역의 노래가 많이 불려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대학생의 노래들 중에서도 주로 서울지역에서 만들어졌던 <껍데기를벗고서>,<전진하는 새벽>,<선봉에 서서>,<선봉에서>,<민족해방가>등은 상대적으로 많이 불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는 이들 노래들이 가지는 인식의 태도나 정서의 미묘한 질적 차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서울지역에서 만들어진 대학생 작품들의 경향을 보면 대중보다 앞서나가는 사람, 선봉, 전위의 인식을 주로 담고 있다. 그래서 전위적 분위기를 경쟁적으로 만들어내었고 ('가자 가자 가자 혁명의 전사들아 /가자 가자 가자 피의 전선으로' 등의 관념적 과격성)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위가 가지는 남다른 부담감 때문에 생기는 자기부정의 괴로움이나 피 토하며 통곡하는 듯한 특유의 비극적 정서가 있다.
즉 이러한 정서는 역사의 당위적 흐름과 자신의 약심에 따라 어려운 삶을살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갖게 되는 치열함의 소산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불건강한 복합심리를 포함한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노동자들에게 불려졌던 노래들은 이와는 달리, 투쟁적이면서도 전위적이지 않고, 지식인 전위가 만들어내는 관념적 과격성이나 자기부정의 불필요한 긴장감 같은 것이 없고, 감정의 표현이 외향적이며 편안하다.
그리고 광주의 작품들에 이러한 대중적 특성이 일찍이 있었다.
4. <파업가>,<노동조합가> 노동가요의 시작
⑴ 88년 가을 김호철 <파업가>,<노동조합가>의 발표
발표와 함께 전국적인 빠른 확산과 호응으로 88년 말, 89년 초부터는 새로운 노동가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동지여 내가 있다>(마산),<딸들아 일어나라>,<단결투쟁가>,<진짜노동자2>,<해방역에 닿을 때까지>,<노조연대가>,<총파업가>(이상 김호철) 등등
⑵ 이전과는 다른 작품의 질
이 시기의 노래들은 80년이래 민중가요의 단조행진곡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87년 이래의 노동자의 대중투쟁의 경험과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투쟁을 관념속의 당위가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구체적이며 생생한 표현하고 있다. (전 시대의 작품들과 비교해보자)
'피 묻은 작업복은 파업의 깃발이다',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쪽되도 지킨다',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이러한 표현들 속에는 지식인의 관념적 과격성이나 지식인적 기반의 허약함을 부정하고자 하는 복잡한 비극적 정서가 없고 투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낙관성과 역동성, 자신에 대한 건강한 자긍심이 담겨있다. 또한 좀 더 살펴보면 투쟁으로 자신의 몫을 찾아야 하며, 그것은 역사적 당위라는 초보적계급의식의 형성에 뒷받침되는 것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는 80년대 중반의 섬세함이 사라지고 마치 80년대 초반의 행진곡을 연상시키는 선 굵고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음악적인 퇴보가 아니라 오히려 음악적인 단순화와 더불어 새로운 질의 내용성을 담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질적 변화를 이루어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⑶ 행진곡의 주도
이 시기에 노동가요가 행진곡풍의 투쟁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80년대 중반의 노동자 소재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연민주의 극복한 <단순조립공>,<짤린 손가락>,<공장 가는 길>(이상 김호철),<나의 이야기>,<친구야>,<서울에서 살꺼야>(이상 안혜경)등의 일상가요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당시 민주노조가 없는 상태에서 노동조건 개선투쟁, 임금인상투쟁, 민주노조설립투쟁 등 투쟁이 막바로 벌어졌기 때문에,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투쟁공간밖에 없었다는 것이 행진곡풍의 가요들이 주로 불렸던 큰 이유일 것이다.
⑷ [혜성같이 나타난 김호철]의 존재가 말해주는 몇 가지 사실
아쉽게도 이전까지의 노래운동 집단들이 새로운 노동가요의 생산에 완전히무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은 빨리 메워지지않았고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시켰다. 마산 등에서 몇 편의 작품이 만들어졌으나 그렇게 그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되었다.
지식인인 김호철이 당시 노동자 대중에게 호응을 받는 노동가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이 많이 작용했다. 즉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체험·인식·정서·인식태도·예술적 관행 등을 익힐 수 있었다.
이후 89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노동자 대상의 활동(창작,공연과 노래교육)을전담하는 노동
가요 전문패가 만들어지게 된다. (노동자노래단, 예울림, 소리새벽)
5. 89년 하반기부터 90년까지의 변화
⑴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의 시작.
아직까지는 행진곡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출되었고,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필요해
졌다.
⑵ 일상가요
<포장마차>,<사랑과 행복>,<진짜 노동자3>,<참사랑>,<부모님께>(이상 김호철),<내가 왕이다>,<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거꾸로 돌아가는 세상>,<달동네 부푼 꿈>(이상 이건),<내 사랑 민주노조>,<우리들의 사랑은> (이상 조민하) 등.
이들 노래들은 노동자의 일상 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역동성을 획득한 것들이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역동성과 상호 전화하고 변증법적 상생하는 관계를 갖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노래들은 여태까지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이를 민중가요 안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이들 노래들이 통속적대중가요의 관행을 빌어오고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데, 이는 '익숙함의 대중성'에 기대어 대중가요의 불건강성에 말려들어간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는 여태까지 민중가요가 어떻게 기존의 음악양식들을 계승·혁신해왔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기 때문인듯 하다
대중가요 어법을문제삼고 있지만 실상 지식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의 어법 (예를 들어 포크), 역시 불건강한 고급음악의 어법으로 쓰여진 작품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오로지 저학력의 대중들이 향유해 왔던 노래들에 대해서만 비판하는 것은지식인의 노래적 취향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며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사용하는 노래 중 성공한 것(민중음악의 자산으로 획득하게 된 것)과 실패한것의 구분없이 모두 비판하는 것 역시 그 비판이 원칙없는 취향에 근거하고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⑶ 서정가요
<끝내 살리라>,<열사의 그 뜻대로>,<꽃다지>,<골리앗의 그림자>(이상 김호철),<열사가 전사에게>(최준 작사,김성민 작곡)
주로 단조 스탠다드를 받아들인 단조 서정가요의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이전의 민중가요에 비해 훨씬 통속적 가요의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 많다.
⑷ 행진곡(투쟁가)의 다양화 - 전술적 투쟁가의 등장
전술가요란 그 시기 투쟁과제를 담은 노래로 대표적으로 <전노협 진군가>,<구속동지 구출가>,<무노동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연대투쟁가>(윤민석)등이 있다.
6. 91년부터의 변화와 새로운 모색
⑴ 91년 상반기 노동가요의 약화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없고 행진곡의 퇴조가 두드러진다.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인기가 떨어지고 일상가요도 시들해진다.
공권력투입, 대량구속, 자본철수, 공장이전, 생산감축과 감원 등 노동운동 탄압으로노조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등 대중운동의 정체 내지는 침체가 뚜렷해지면서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럴 때 '단결','투쟁','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굵은 투쟁가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운시기였다.
이 시기 상대적으로 노래들은 <철의 노동자>,<단결주쟁가>,<진짜노동자2>등 투쟁의 주장보다는 '멋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는 노래들이 많이 불렸고, 선율적이고 선이 가는 노래로 이례적으로 <나의 사랑 전노협>이 많이 불렸다.
⑵ 91년 하반기부터의 의도적 생산
①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지나간 2·3년동안의투쟁을 반추하며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습을부각시키는 노래 - <희망의 노래>, <누가 나에게 이길을>, <다시 한번 투사가 되어>, <사람이 태어나>
② 이전의 투쟁가를 2·3년간의 투쟁을 담은 느낌으로 편곡하는 시도
- <단결투쟁가> (꽃다지)
③ 이전보다 더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을 깊숙이 표현한 섬세한 감정의 노래들이 이후 큰 호응을 얻게됨
- <민들레처럼>, <동지들앞에 나의 삶은>, <전화카드 한장>(이상 조민하),<편지3> (윤민석 작사, 김신애 작곡),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유인혁) 등.
13. 80년대말 대중문화공간의 민중가요
1. 대중문화공간으로의 대중화
⑴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모임 새벽에서 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들게 되는데, 이는 노래팀으로서의 모임이 따로 생기거나 대중 문화공간에서의 장기적인 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일과성 음반취입이었다. 민중가요 중 심의를 통과하면서 음반을 내는 것이 중요했고, <그루터기>,<바람씽씽>,<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 70년대 메아리의 창작곡을 중심으로 만들게된다.
[노.찾.사]라는 팀이 만들어진 때는 87년이다. 87년 6월 투쟁을 겪으면서 합법적인 공개공연이 가능하리라는 판단 속에서, 당시 새벽을 중심으로 노래운동 선배들이 모여 대중문화 공간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을 전담하는 팀을 만들기로 하고 의도적으로 [새벽]에서 분리시켜 10월 공연이후 팀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노.찾.사]는 기간 축적되어온 민중가요 중 대중문화 공간으로의 확산이 가능한 작품을 선별하여 재편곡·발표하는데, 대표적으로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그날이 오면>같은 당시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의 인기곡들,
예전에 발표되었으나 당시 민중가요의 주요한 작품경향에서는 좀 벗어나 있어서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공연용으로서 좋은 노래들, [한소리] [메아리] 등 대학노래패의 창작곡들, 새벽의 <사계> <귀례이야기> <대결> <이 산하에>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평등의 땅에>
<뒤돌아 보아도>, 그 밖에 <녹두꽃> <진달래> <작업장> <오월 이야기><제발제발> 등 기간의 풍부한 노래운동의 자산을 바탕으로 활발한 공연활동과음반제작을 통해 민중가요의 성과를 대중문화공간을 통해 발표하여 공식화시키고, 미조직 중간계급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초기의 [노.찾.사]는 10여년동안 쌓아온 민중가요의 성과, 거기에 담겨있는 대학생·노동자 등 조직대중의 진보성, 그들의 인식과 정서·질감등을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도 그것을 따라잡는 것이 중요한 활동의 근거이자 과제였다.
대체로 성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때로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소시민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또 종종 대중문화적 소시민적 특성,기교주의,감상주의,정태적이고 나른하며 소적인 분위기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90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감상주의적이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해졌으나 [노.찾.사]의 신곡중심(<그리운 이름>,<사랑노래>,<영원한노동자> 등)으로 공연이 운영되어 민중가요 일반, 특히 80년대 후반 당시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하는 역할, 민중가요 전체의 대중문화의 창구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⑵ 노래마을
대중가요 작곡자 출신인 백창우를 중심으로 하여 84년 [노래마을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낸후 성남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활동을 하다가 [노.찾.사]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90년 이후 대중문화 공간에서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주로 백창우의 창작곡과 [노.찾.사]에서 소홀히했던 어린이들의 노래들 그리고 80년대 말 민중가요의 인기곡 등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게된다. 대표곡으로는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줌 될 수 있다면>, 아기염소>,<백두산>,<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등이 있다.
⑶ 개인가수들
[노.찾.사]의 성공으로 진보적인 대중가요 가수들이 [노.찾.사]가 확보해 놓은 공간 주변에 포진하게 되면서 대중가요권의 진보진영으로 나름의 영역을확보하게된다.
이전까지는 좀 특이한 가수로만 알려져 있던 신형원, ?돌, 서유석, 김광석등이 진보적인 가수로서의 색깔을 가지게 되었고, {겨레의 노래}와 같은 행사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또한 노래운동권 출신으로 안치환, 정세현, 권진원 등이 개인가수로의 진출을 이루어내기도 한다. 이들은 노래운동권으로부터 대중가요권 사이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게 되는데 아쉬운 것은 아직 노래운동권 출신자들은 대중문화권에서 완전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정태춘의 경우 인기가수급의 대중가요 가수로부터 완전히 음악운동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는 작품이 대중과의 적극적인 접촉으로 얼마나 급격하게 자기극복을 하며 예술적 경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보여준다.
정태춘은 자신의 작품 세계의 특성을 살리면서 민중가요에서는 보기 드문 음유시와도 같은 긴 가사의 노래들을 만들어내어 민중가요의 자산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아 대한민국>,<배반의 병아리>, <우리들 세상>,<일어나라 열사여> 등
2. [새벽]의 변화와 고민
87년까지 많은 창작과 비합법테이프 제작 등으로 민중가요의 흐름에 발맞춰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던 [새벽]은 88년에 들어오면서 작품의 경향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너를 위하여>,<선언1·2>,<오월의 노래3>,<노동자의 노래>,<불꽃이 되어> (이상 88년),<철의 기지>(89년),<바리케이트를 치며>(90년) 등의 작품을 보면 알 수있듯이 유럽 고급음악적 분위기와 유럽 혁명가의 질감이 많이 나타난다
. 이러한 변화의 동기는 취미써클 출신인 노래운동 모임의 뿌리깊은 아마추어성의 극복과 음악적 전문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게된다. 그러나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인류의 보편적 문화유산을 계승해야 한다는 취지의이러한 전문성의 획득이 새로운 형태의 전문성의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기존의 고급음악적 전문성으로의 경도로 귀결된다.
[새벽]은 80년대 말이 이전까지의 민중가요의 경향으로부터 또 한단계의 변화·발전이 요구되는 시기이며, 그 발전의 방향은 노동자계급의 낙관성과 과학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작품의 경향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80년대 중반까지의 나약함과 비극성은 청산되었으나 현실적인노동자들이 질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관념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상을 만들어내면서 고급음악의 숭고한 낙관적 분위기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민중가요의 폭을 넓힌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노동자대중, 학생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는 민중가요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따라부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서 현실의 투쟁하는 노동자대중의 인식과 정서·질감이 담겨있지 않고 먼 나라 노동자들의 느낌,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의 느낌, 먼 미래의 낙관적 지향 등이 두드러졌다는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까지 유일한 노래운동집단으로서 맡아야 할87년 이래 노동가요의 창작·보급을 하지 못하고, 그 결과 김호철의 노래가나오는 88년 말까지 노동가요는 거의 완전한 공백으로 있어야 했고, 그 후90년까지 김호철 한사람에게만 노동가요의 창작의존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이 시기 [새벽]은 우리 민중가요·노동가요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1920년대∼30년대 Hans Eisler등의 유럽 혁명가요의 전통을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사회적 맥락에 맞게 수용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한 악곡의 전통이 유럽의 문화적 맥락에서는 진보적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문화적 맥락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급음악적 맥락은 식민지시대 이래 소시민적인 유학파 지식인들에 의해 유입·이식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의 혁명가요가 유럽에서 가졌던 진보성과는무관하게 우리나라의 고급음악이 가지는 비민중성·관념성·정태성·엘리트주의적인 영향을 받게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새벽]은 우리 현실의 노동자들의 삶의 구체적 현실성과 역동성등의 긍정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그 양식의 한계를 극복해내고 그 의미를 새롭게 소화해내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90년에 들어 노동가요가 자리를 잡게되면서 [새벽]은 <해방을 향한 진군>,<다시 또 다시>등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바리케이트를 치며>,<노동자 전진이다> 등 이전의 작품경향을 따른 작품을 발표하기도한다.
당시 가장 중심적이며 역량있는 집단인 [새벽]의 활동을 일면 부정적으로평가할 수 있겠지만, 작품의 성과로서만 본다면 이들 노래가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부하게 만든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꾸준히 불리면서 이제 우리 대중의 정서로 많이 색깔이 덮씌워진 <선언2>같은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3. 고급음악인들의 변화
노래운동과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의 만남은 80년대 중반 기존 음악계에 대한비판의식을 가지고 그러한 문제들이 일종의 사회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작곡자, 평론가들 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이 두진영의 만남은 상호충격과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노래운동은 자신들이변화시키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 비단 노래뿐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문화전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은 아마추어 출신의 젊은이들이 음악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새로운 노래문화를 만들어온것에 비해 정작 고급음악인들은 대부분 미자각 상태에 있다는 데에 자책감과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조직화와 운동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고 민족예술운동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86년경 이들의 제자 세대,80년대 민중가요의 확산기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졸업을 하면서 조직화가 시작되어 88년
[민족음악연구회]가 만들어지고, 87년에는 오페라연출가 문호근을 중심으로 [한국음악극연구소] 가 만들어진다.
⑴ 비평·음악사 연구
: 이건용, 노동은 등
⑵ [한국음악극연구소]
: 87년 오페라 소극장운동을 시작했고, 음악극 페스티발 등의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주요공연작품으로는 87년 가을 <우리들의 사랑>, 88년 <구로동연가> 등 창작 노래극 공연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시와 노래가 어우러진 <우리아이들의 나라>를 공연했다.
⑶ 민족음악연구회
: 음악대학을 졸업한 진보적 음악인들의 느슨한 협의체의 성격이 강하다. (회원수는 많으나 중심활동가는 적음) 이건용, 노동은 등의 선생님들과 80학번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는 여름과 겨울에 [민족음악 캠프]를 개최하여 고급음악인들에게 변화의 계기를 주는 것이다. 그동안 가창·연주분과에서 여러차례 공연을 했고, 비합법음반 {하나되는 땅},{백두산}, 합법음반 {하나되는 땅}을 만들었다. 창립직후에는 주로 일반 대중을 겨냥한 활동을 많이 했으나, 최근에는 고급음악계 내부를 겨냥한 작업에열중하고 있다.
이건용 <그렇지요>, 전경숙 <하나되는 땅>, 이민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임을 위한 행진곡]>등은 민중가요와 고급음악을 잇는 성과로서 평가할 수있다.
전통음악인들의 독자적 조직화는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90년대에 들어와서 [해오름] [다스름]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일반 대중을대상으로 국악적 감수성의 근저를 넓히며 국악의 진보적 현대화에 기여한 민요연구회나 풍물운동과 상호 보족적인 활동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있다.
4. 지방의 노래운동과 그 성과
87년 이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활동을 하고 있지만 서울에 비해 양적 역량이 떨어지고 지역적인 편차가 존재한다.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산 [노래야 나오너라] [희망새], 인천 [노래선언] 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창작곡으로는 김봉철<들어나 봤나>, 이건 <달동네 부푼 꿈> 등이 있다.
광주에서는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을 통해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는 성과를 내기도 한다. 국악도로 변신한 정세현을 중심으로 [친구]가 활동을 하게되고, 90년 정세현이 독립하여 [우리소리 연구회]을 만들어합법음반 {통일은 언제일까}를 내기도 한다.
첫댓글 초등학교때 언니가 여의도에 근무해서 케비에스 녹화방송에 자주 갔던 기억이 있어요
방송도 보고 언니한테 맛난거랑 선물도 ...
특히 조용필님이 '기도하면~~~그후 소녀팬들의 악!!! 했던 생각이 납니다.
소녀팬의 기원이었죠 아마 ~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