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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Father’s only-begotten Son,
full of grace and truth.
말씀의 초대
‘그리스도의 적’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진리이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제1독서). 요한복음의 서두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고 완성시킨다. 곧 역사의 예수님과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은 태초부터 함께 계셨던 분으로 하느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증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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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원로 조각가 최종태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 작품에 미완성이 많은 게 이해가 돼요. 예술 작품에 완성이란 없는 겁니다. 다만 어느 시점에서 작업을 멈출 따름이지요.” “더는 손댈 수 없다고 느껴지는 시점이 있어요. 영감이기도 하고 욕심을 버리는 때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미완성이 곧 완성이지요.”
원로 조각가의 표현처럼 예술이라는 것이 완성이 없는 미완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미완성은 아직 못 다한 말이 있고, 못 다한 표현이 있어, 들리지 않는 언어와 보이지 않는 형상을 더 채워야 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는 뜻입니다. 작가가 더 채워야 하지만 더 채울 수 없고, 더 표현해야 하지만 더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는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넘는 신의 영역으로 남아 있기에 미완성은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 우리 인생도 예술이라고 했지요. 예술가가 미완성의 작품을 두고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합니다.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지고 싶지만 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이 모양으로 주님께 갈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미완성의 삶을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하고, 이루고 싶지만 이루지 못한 우리 인생의 미완성의 자리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자리입니다. 약함과 결점, 결핍, 한계를 가진 가장 불완전한 우리를 ‘가장 완전하신 분’께서 채워 주십니다. 못나고 죄스러운 삶을 살아도 여전히 우리 인생이 예술이고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한 처음 ‘흙의 먼지’로 우리를 만드신 말씀이신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창조 때 그 본래의 완성된 모습으로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미완성은 그분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완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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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多事多難〕 2010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 각 성당에서는 송년 미사를 봉헌할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는 한 해, 마지막, 송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분께는 언제나 ‘오늘, 지금 그리고 여기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설정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그분의 말씀, 생명,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고, 그분께 속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분께 감사드릴 수 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생명과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한 해를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자주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리 자신을 내세웠는지요?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 금전 따위에 대한 욕심은 주님을 등지고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 어리석은 욕심으로 생명을 경시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 빌붙어서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자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는지 모릅니다.
이제 한 해를 보내면서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진리, 정의, 평화, 사랑, 생명, 구원이신 분의 뜻에 따라 살기를 결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 땅은 날이 갈수록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혼탁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주님의 참된 자녀로서 마땅히 선포해야 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새로운 용기와 지혜를 주십사고 청원드립시다. 올 한 해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새해에도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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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벤허’는 1959년 작품으로 예수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벤허는 예루살렘의 부호입니다. 새 총독과 로마 주둔군 사령관이 행군하는 날, 묘하게도 벤허의 집에서 기와 한 장이 떨어져 나가 총독의 머리를 맞힙니다. 이 돌발 사건으로 벤허 일가는 반역죄로 몰리고, 벤허는 노예선의 노예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주둔군 사령관 ‘멧살라’는 벤허가 어렸을 때의 친구입니다. 그는 벤허 일가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권력에 취해 모른 척합니다. 하지만 운명은 벤허를 도와줍니다. 노예선이 해적과 싸울 때, 벤허는 선장의 도움으로 전투에 참가합니다. 이후 선장을 구해 주었고, 그 인연으로 그의 양자가 되어 자유를 되찾습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벤허의 복수입니다. 전차 경주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됩니다. 하지만 당당하던 멧살라의 몰락을 보면서, 벤허는 인생의 짙은 허무를 느낍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진정으로 이기는 길은 ‘용서와 사랑’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올해에도 우리에게는 억울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분을 따르면 모르는 새에 ‘밝은 기운’이 찾아듭니다. ‘감사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거침없이 ‘빛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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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주님의 허락 없이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이 말씀은 더욱 실감납니다. 많은 사건을 겪었습니다. 위험한 순간도 많았고, 어려운 고비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를 가만히 돌아보면 ‘분명 은총이었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지나고 나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한 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빛에 비유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영성체를 하면서 그때마다 빛이신 그분을 모셨습니다. 올 한 해 얼마만큼 빛의 생활을 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어둠을 없애는 것은 빛뿐입니다. 삶이 어둡다면 빛의 생활을 하면 됩니다. 생활 속의 어두움은 빛이 들어오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빛의 생활은 밝은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러니 긍정적인 생각과 따듯한 말로 먼저 가족과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서 시작해도 금방 큰 힘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해와 같으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 안용태 신부-
한 해가 다 지나갔습니다. 1년을 한 해라고 부르는 것은,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한 바퀴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딱 1년이라서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우리의 ‘해님’으로 모시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이를 비추는 참빛이라고
소개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결심만 가지고는 내년을 더 나은 한 해로 바꿀 수 없습니다.
결심을 도울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옵니다(요한 1,16 참조). 우리의 새해가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을 중심으로 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이제 실천할 것들을 정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에는 잘 지키지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오늘은 이것만을
실천하며 지내도록 주님께 다시 한 번 도움을 청하는 하루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문상을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었습니다. 슬퍼하고 있을 그 친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친구의 집으로 가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내가 해야 할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울고 있는 친구를 보자 제가 준비했던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값싼 동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고, 슬퍼하는 사람의 슬픔을 함께하지 않으면서 하는 말과 행동은 자칫 상대의 마음에 위로가 아닌 상처를 남깁니다. 어릴 때 제가 생각했던 하느님은 못하시는 것이 없는 분으로 저를 도와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힘들고 아프다고 해서 저와 함께 힘들어하고 아파해 주시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아갈수록 하느님의 능력보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요한복음의 짧은 구절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 줍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죄인의 처형대인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신 하느님,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하는 사랑으로 우리도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삶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디딤돌이었던 걸림돌들
-김찬선신부-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한 해의 끝자락인 어제와 오늘 비교적 조용히 보내며
지난 한 해를 돌아봤습니다.
어떤 한 해였던가?
끔찍한 한 해였는가?
아니면 은혜로운 한 해였는가?
흔히 다사다난했다고 하는데 그저 그런 한 해였는가?
그런데 그 전에 어떤 해였으면 좋겠는지 자문을 하였습니다.
억지 같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총을 받는 것이 싫은지
‘당신은 올 한 해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 안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 것이 은총을 안 받았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안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만일 사실이라면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만 은총을 안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묻게 되지요.
“당신은 하느님께서 유독 당신에게만 은총을 아니 주셨기를 바랍니까?”
“당신은 하느님께서 은총을 아니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이제 똑같은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합니다.
그때 저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저도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고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줄 수 없을 정도로 은총이 부족한 분 아니기에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은총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받은 모든 게 은총입니다.
공기와 물이 은총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이 은총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올 한 해 제가 먹은 1095 끼니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주를 사 주신 분들이 몸에 안 좋은 거 사줬으니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 늘 함께 하면서 칭찬과 격려를 하는 밖의 사람들이
솔깃한 말로 저를 유혹하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제가 싫어하는 소리를 하였다고 쓴 소리가 은총이 아니고
쓴 소리 하는 공동체 형제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지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은 지지와 격려로 저를 돕고,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판과 반대로 저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올 해 은총 체험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다면
주신 은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받는 제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게 은총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은총으로 느끼지 못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모든 걸 은총으로 바꾸지 못하는
나의 감수성이 문제였을 뿐입니다.
걸림돌은 그대로 디딤돌이라고 하지요.
나의 감수성을 세련되게만 하면
올 해는 걸림돌이었던 것이
내년에는 얼마든지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의 끝 날,
은총은 물론 디딤돌이었던 걸림돌들에 대해서도 감사하며
내년에는 걸림돌들이 디딤돌 되기를 우리 모두 희망합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양승국신부-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사제서품이나 서원 은경축, 금경축 같은 곳에 가보면 주인공들께서 꼭 빼놓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지나온 세월,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한해의 마지막 날, 우리 역시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온 한해, 돌아보니 모든 것이 다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듬뿍 받았던 요한복음 사가 역시 2010년 마지막 날 복음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에 ‘은총’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우리가 받은 은총 이면에는 지난 한해 우리가 되풀이했던 실패와 좌절,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와 고민거리들, 근심걱정, 죄와 후회거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오늘 이 한해의 마지막 날은 우리 모두 한 가지 밀린 숙제를 해결하는 날입니다. 그 숙제는 이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의 어두움들, 아직 처리되지 않은 약점들, 부정적인 측면들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미성숙으로 인해 생긴 부산물들을 모두 당신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더불어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지니고 왔던 모든 근심걱정, 불평거리들, 실패의 쓰린 기억들, 뒤집어썼던 재들을 송두리째 당신 앞에 내려놓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한해를 마무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당신께 내어맡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머리에 빛나는 화관을 하나씩 선물로 씌워주실 것입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어린 자녀들을 키워보신 분들 생생히 기억나실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 조금 자라 기어 다니던 아기들, 까르르 웃으며 홀로 서던 아기들을 바라보던 마음이 어땠습니까?
아기에게 무슨 사고나 생기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너무나 작고 귀엽습니다. 부모로서 잘 양육해야겠다는 부담감과 동시에 자연스런 보호본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늘 끼고 다니지요. 늘 품에 안고 있습니다. 잠시라도 밖에 나갈 때면 등에 업고 다닙니다. 한 인간으로 당당히 설 때 까지 잘 돌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마음도 비슷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어른이어도, 우리가 덩치가 산만한 장정이어도, 하느님 그분 앞에는 갓난아기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끔찍이도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 앞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친히, 당신 손으로 우리 각자를 돌보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범적이고 자상한 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아기가 부모의 돌봄을 거부하고 계속 어깃장을 놓거나 울어대고 그 사랑을 거부한다면 부모로서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돌봄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분 앞에 우리의 모든 근심걱정을 맡겨드린 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어도, 비록 우리가 실패했어도, 비록 우리가 불효자이어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애지중지하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재를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랑을 주고받습니까? 존재 자체로 사랑합니다. 그가 실직해도 사랑합니다. 그가 암에 걸려도 사랑합니다.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처참한 모습이어도 그를 사랑합니다. 큰 화상을 입어 그의 옛날 모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도 그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우리가 죄인이어도, 우리가 당신을 백번 천 번씩이나 배반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 자체로 사랑합니다.
이 한해의 마지막 날 우리가 어떠해도 상관없이 우리 존재 자체로 기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갖은 우리의 죄와 상처와 방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머리 위에 빛나는 화관을 씌워주시기 원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로고스 찬가와 감사
-이병우 신부-
오늘 복음은 일명 ‘말씀의 찬가’라고 불리는 ‘로고스 찬가’입니다. 이미 주님과
함께 살았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요한은 주님이야말로 진정한
말씀이라고 신앙을 고백하면서 복음의 첫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철학 개념으로 ‘모든 사물과 사상의 근본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해 본다면 아마도 창세기의
말씀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생겨라.” “궁창이 생겨라.” “온갖 생물들이
생겨라.” 말씀하시자 그렇게 됐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로고스’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 근본인 이 말씀 안에서 한 해를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한 해의 마지막을 잘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기쁘게 맞이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이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행복하게 한 해를 보내고, 축복 받는 새해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 김혜경-
오늘 복음에서 내게 와 닿는 구절은 12절,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요건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 과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 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둘은 두 가지 의미가 아니라 한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분을 믿지 않고서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분이 참되다는 것을 확신하고 은총과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그분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이웃의 아픔에 기꺼이 동참하며 그들과 하나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올해 교회 안팎에서 일어난 최고의 휴먼스토리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故 이태석 신부님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자신의 온 존재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의사이자 사제인 그의 짧고도 굵고 뜨거운 삶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느님 사랑의 징표를 만날 수 있었다.
한 주간에 같은 복음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이어 오늘도 반복해서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태초부터 준비한 ‘하느님 사랑’ 을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사랑의 길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척도로 그 길에 들어서지는 않는다. 육화의 엄청난 사건에 가슴이 먹먹하고 감동적인 휴먼스토리에 눈시울을 적시지만, 정작 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은 어디에 목적을 두고 가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모두 은총을 관상하자!
-김찬선신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요한복음은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 “모두”라는 말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은총을 받았다면,
그러면 저도 은총을 받은 것이겠지요.
그런가?
자문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올 해 저는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몇 해가 지난 다음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지금 저는 은총을 받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은총을 주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 모두에게 은총을 주셨기에 저도 은총을 받은 것이 틀림없지만
은총을 느끼는 나를 중심으로 보면
제 탓으로 저는 은총을 받았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성탄을 앞두고 고백성사를 보면서
저는 한 시도 하느님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지만
그 하느님 앞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한 시도 하느님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고 감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T.V를 보는 그 순간에도,
누구를 만나는 그 순간에도,
잠자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를 못마땅해 하며 속으로 욕을 퍼붓는 그 순간에도,
심지어 욕정이 고개를 드는 그 순간에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런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은총은 주시지 않고 저와 함께 계시고
저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이 사랑 없이 저를 감시만 하시겠습니까?
하늘의 태양이 빛을 비추지 않고 내 위에 있을 수 없듯이
은총의 하느님도 은총을 베푸심 없이 함께 계실 수 없습니다.
방안의 난로가 꺼지지만 않았다면 있는 것만으로 온기를 전하듯
사랑의 하느님은 함께 계심이 곧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함께 계심을 한 시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
어찌 하느님의 은총은 느끼지 못하였던 건가요?
추운 데 있다가 들어오면 난로의 따듯함을 느꼈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쐬면 빛을 느낄 텐데
그러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넘치는 주의 은총, 한량없는 주의 사랑이 저로 하여금
은총을 감지하지 못하게 하고
사랑을 흘려버리게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불감증은 제 탓이 아니고
너무 큰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탓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이제는 난로 곁에 앉아서 난로 불을 쬐어야겠습니다.
하던 일 멈추고 그저 난로 곁에 하릴없이 앉아 있어봐야겠습니다.
너무 일이 바빠 온기만 누리고 난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
하던 일 멈추고 그저 난로 곁에 하릴없이 앉아 불을 쫴야겠습니다.
관상은 그래서 일의 멈춤이고
부러 곁에 있음이고 부러 쳐다봄입니다.
그러니, 한 해의 마지막 날만이라도
하던 일 멈추고 은총을 좀 관상해 볼까요, 우리?
참만남
- 김혜림 수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몇십 년을 해마다 맞이한 마지막 날인데 어째서 이 날이 돌아올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성탄대축일의 복음과 같다. 주님의 성탄은 새 생명의 시작이고 구원 역사의 출발점이 되는 선물이 아니던가. 그것은 분명 희망이다. 한 해를 보내며 후회 속에서 가슴만 치거나 아쉬워하기보다는 새 새명이 태어나는 환희처럼 그렇게 2010년을 맞이하고 싶은 용기가 생기는 듯하다.
내가 일하는 센터를 중심으로 우리는 ‘건강한 가족공동체 프로그램(이하 건가공)’?을 전개하고 있다. 이미 많은 본당에서도 건가공 교육이수 후에 가족 모임을 활발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건가공은 ‘가족 살리기 운동’?이라 부르고 싶다. 기존의 많은 부모교육 프로그램과 차별화하는 것은 자녀들에 대한 이해와 함께, 아니 그보다 부모 자신의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이다. 때로 부모들은 자신들의 정서나 감정을 헤아리지 않고 온통 자녀들의 행동에만 초점과 관심을 두기도 한다.
그 시선을 느끼는 자녀들은 부자유스러운 감정을 갖게 되고 부모 앞에서는 옴짝달싹 못하는 묘한 긴장과 부정적인 소속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건가공에서는 인간의 이해를 깊이 다룸과 동시에 부모와 자녀의 이원화된 관계가 아닌 가족을 한 단위로 보고 함께 성장하고 자유롭게 가족 안에 소속되기를 지향한다.
그래서 건가공의 마지막 장에서는 ‘참만남’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그것은 가족이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가족으로 인해 받은 상처를 그대로 억압시키지 않고 표현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픈 자리’?가 있다. 어떤 부분은 꺼내놓기가 두렵고 싫어서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두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의식할 수 있는데도 살짝 뒤편으로 숨겨두는 것도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내가 마음이 아픈지, 힘든지도 모를 정도로 교묘히 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경험한 마음의 상처는 외부 사람들이나 외부 세계에서 온 것보다는 가족과 주고받은 아픔이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참만남은 가족이 서로에게 받은 상처를 직접 표현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를 주고받는 성숙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고 작게 마음에 걸리는 가족에 대한 힘들었던 사건이나 일을 적어도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마음을 풀어놓고 함께 깨끗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맞이하기를 권하고 싶다. 이것은 사랑의 공동체에서만 할 수 있으며 그 은총은 생각보다 훨씬 귀하게 체험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고 부모와 자녀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느님 안에서 용기 내어 서로에게 주고받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 가족 간에 진실한 대화의 장을 열어 새로운 새해를 더욱 사랑하면서 맞이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손영순 수녀-
삼중장애를 지닌 맹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어떤
청년은 7살에 기차에서 떨어지면서 맹인이 되고 청각장애가 되고 지적능력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된 그때까지도 자신이 맹인이라는
것에 대한 적응이 덜 되어서인지 아니면 빛과 어둠만을 감지할 수 있는 아주
미약한 시력이 남아 있어서인지 방에 불을 켤 때나 사진을 찍을 때나 번개가
칠 때에는 자신의 눈이 보인다고 착각하여 빛 방향으로 뛰쳐나가곤 합니다.
물론 몇 걸음 가지 못해 벽에 부딪히거나 넘어지기 일쑤여서 항상 그의 얼굴과
몸에는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착각이 착각으로 끝나면
또 일상으로 돌아와 결코 알아듣지 못할 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루를 기쁘게
살아갑니다. 마흔 살이 훌쩍 넘어버린 그는 아직도 빛을 향해 달려갑니다. 여전히
얼굴과 몸에 상처를 남기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생명의
빛으로 걸어갈 수 있지만 맹인인 그에게서 단순하고 심오한 교훈 하나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건 빛을 향해 나아가라는, 우리가 빛을 향해 나아가다가 어떠한
역경을 당할지라도 멈추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그 사람은 우리를 구원하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끝 날에 '한 처음'을
-김찬선신부-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런데 한 해의 마지막 날의 복음은 ‘한 처음’으로 시작하고
‘한 처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날, 즉 내일 1월 1일에
‘한 처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의미가 맞을 것 같은데
한 해를 마감하는 날, 즉 12월 31일에 교회 전례는
‘한 처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끝을 달리면 어디로 갈까?
윤회처럼 다시 처음으로 갈까?
달력처럼 다시 처음으로 갈까?
시간이 끝날 때 이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또 다른 시간의 처음일까,
시간 없는 영원의 처음일까?
그런데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 영원인데
어떻게 영원의 처음이 있을 것인가?
그래도 이 시간적인 인간이 시간을 끝내고 영원으로 들어간다면
이것이 영원의 시작이요, 처음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한 처음’ 아니겠는가?
모든 시작이 있기에 앞서 있는 처음
모든 끝들이 끝을 내고 시작되는 처음.
그래서 ‘한 처음’은 지금이 아니다.
그래서 ‘한 처음’은 또한 지금이다.
한 해를 끝내는 오늘 나는
시시하게 또 다른 2009년인 2010년의 처음을 시작하지 않으련다!
한 해를 끝내는 오늘 나는 ‘한 처음’을 시작하련다!
빛을 향하여
-전삼용신부-
저는 아일랜드에 세 번 갔었습니다. 한 번은 겨울에, 두 번은 여름에 갔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의 겨울과 여름의 느낌은 천국과 지옥처럼 달랐습니다.
겨울은 춥고 비오고 바람 불고 항상 어둡습니다. 그래서 우울증과 정신질환자가 많다고 합니다. 반면에 여름은 밤 11시까지 환하고 날씨는 시원하고 겨울에 비해선 맑은 날이 많습니다. 겨울엔 ‘저주받은 곳이다.’라는 말을 하고 떠나왔고 여름엔 ‘살기 참 좋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날씨가 이렇다보니 정신질환자들도 많고 그 치료방법도 매우 발달되어 있어서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도 더블린에서 치료를 받고 갔다고 합니다.
그 치료 방법 중 하나를 텔레비전에서 잠깐 보았습니다. 특별히 북유럽은 날이 흐리고 비가 많이 와서 우울증 환자가 많다고 합니다. 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방법 중 하나는 환자들이 있는 방에 평소보다 몇 배나 밝게 전등을 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낮의 길이를 늘려줌으로써 우울증이 많이 치료된다고 합니다.
저는 빛이 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도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음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오늘 복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기쁨과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빛은 당신의 백성에게 배척을 당합니다.
저는 군 생활을 동해바다가 보이는 전방에서 했습니다. 금강산 바로 밑자락이었습니다. 오징어잡이 철에 밤에 바다를 보면 커다란 도시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빛이 바다에 가득합니다. 오징어잡이 배들인데 한 배가 밝히는 빛이 한 도시를 환하게 할 수 있을 만큼 밝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 빛을 보고 대부분의 물고기는 그 빛이 싫어 더 깊숙한 어둠으로 들어가지만 오징어는 그 빛을 보고 빛을 향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징어는 빛을 좋아하는 덕분에 그물에 걸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사람과 그 빛을 싫어할 사람으로 이미 나뉘어져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빛을 보내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즉, 빛은 세상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실이 악한 사람은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을 받아들임은 무엇일까요? 바로 ‘진리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사실 ‘빛’이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을 사람만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 버려야 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빛보다는 어둠으로 깊이 숨어 들어갑니다. 십자가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보기를 원치 않아서 장님이 됩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삶의 ‘두려움’입니다. 어둠은 두려움을 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빛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일랜드에서 평생 본 것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훨씬 아름다운 광경들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무지개’입니다. 구름사이로 비치는 빛은 물방울을 통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빛을 받아들이면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게 변하게 됩니다.
빛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과거의 어두웠던 삶을 벗어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추한 모양으로 대낮에 활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빛을 바라는 이들은 그 분께로 향하면서 저절로 물처럼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양승국신부-
<행복했던 한해>
벌써 한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지나온 한해,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러움만이 앞섭니다. 여느 해처럼 사도 바오로의 한탄을 똑같이 되풀이했던 한해였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서 7장 참조).
무엇보다도 뒷전에서 묵묵히 수고하는 형제들에게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싸구려 약장수처럼 책임지지 못할 말들, 별 의미 없는 말들을 숱하게도 토해냈던 한해를 진심으로 반성합니다. 최소한의 주어진 기도도 제대로 못 드리면서 침까지 튀겨가며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제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지경입니다. 고백성사를 본지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똑같은 죄에 빠져듭니다.
"내가 이러다가 하느님을 어떻게 뵙지?"하는 걱정이 은근히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끝도 없이 따라 다니며 괴롭히는 이 질긴 악습을 죽기 전에 고치기나 할 것인가?"하는 걱정을 수시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희망을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 모든 것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지만 또 다시 새 출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때문입니다.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나 부족함으로 인해 일상적으로 겪는 비참함과 좌절감들 참으로 큰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다니!" "고백성사 본지가 바로 엊그제인데 또 다시 똑같은 죄에 떨어졌구나" 하며 괴로워들 합니다.
우리의 나약함, 그로 인한 악습의 반복, 거기에서 오는 죄책감과 수치심, 좌절감,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한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고통의 날들은 참으로 큰 은총의 날들입니다. 고통을 잘 소화시키는 사람들은 고통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생생히 체험하는 은총을 부여받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샅샅이 알고 계시는 하느님은 십자가란 당신 사랑의 도구를 통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또 다시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견딜 수 없었던 좌절의 순간도 마치 죽을 것만 같았던 고통의 순간도 이제 모두 주님께서 거두어 가시고 우리는 또 다시 한해의 끝에 서있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살아서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진정 감사할 일입니다.
지난 한해 비록 부족하고 부끄러운 한해였지만 하느님 자비로 인해 행복했던 한해였습니다. 돌아보면 진정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내가 될 것을 다짐하는 한 해 마지막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복음을 살아가기
-심종민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책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혹은 TV 속의 드라마나
연속극을 보면서 그곳에 빠져듭니다. 때로는 주인공과 함께 아파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그 속의 가상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의 감정을 그곳에
삽입시켜 놓곤 합니다. 하지만 그 여운을 몇 달, 몇 년 동안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득문득 떠오르기는 하겠죠. 하지만 항상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내 그 삶이 내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겠죠!
신앙도 이런 관점에서 돌아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감상하려고 신앙을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살아가기 위해 택한 것입니다. 위대한 성인들의 이야기나
복음 말씀, 온갖 좋은 것들을 보고, 듣고, 거기에서 그쳐버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영화감상처럼 취미생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참 신앙인으로서
복음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실천되지 않은 말씀은 감상용일 뿐입니다.
세모에(II)
-김찬선신부-
한 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며 우리는 한 해를 돌아봅니다.
그런데 왜 돌아봅니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는데,
앞만 보고 가기도 바쁜데 왜 돌아봅니까?
잘한 것은 무엇이고 잘못한 것은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서 돌아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한 해의 잘못을
후회하고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지난 한 해의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과거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즉 잘못한 것은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잘한 것은 계속 잘하기 위해섭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풀 것은 풀기위해서 되돌아봅니다.
한 해 동안 우리는 혼자 산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무엇을 혼자 해낸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산 것이고 더불어 무엇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성공에 대해서 이웃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성공에 아무런 기여를 한 것 같이 보이지 않아도
심지어 나에게 짐만 되었던 것 같이 보여도
내 옆에 같이 있어준 이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일과 성공의 관점에서 감사를 하는데
그럴 경우 성공에 일조를 한 사람은 고마운 사람이 되지만
성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고마움도 없거나
실패에 일조를 한 사람은 심지어 원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 옆에 살아 있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차원에서
감사도 하고 화해도 해야 합니다.
큰 수술을 한 우리 형제가 건강을 회복하고 우리와 같이 산 것만으로도
말썽꾸러기 우리 형제가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같이 산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시원을 돌아보기 위해서 한 해를 돌아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복음은 “한 처음”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왕 한 해를 돌아보면 한 처음도 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용들은
“하느님께서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내셨다.”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한 해 한 모든 것은 이런 하느님의 업적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프란치스코가 일생을 돌아보며 유언을 쓸 때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셨고,
주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셨고,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고,
주님께서 나에게 할 것을 알려 주셨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언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올 한 해도 늘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이
올 한 해를 마감하는 오늘 우리가 제일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에도
내가 가장 외로웠을 때에도
내가 정말 막막했을 때에도
내가 혼자 감당했을 때에도
주님은 성공과 기쁨의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오늘은 이런 믿음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언제나 함께하시며
- 황지원 신부-
종신서원을 앞두고 한 달 동안 개인 피정을 했습니다. 구룡공소라는 아주 작고 외진 곳에서 혼자 지내며 피정을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서 부족하고 게으른 모습, 교만하고 미흡한 저의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몇 주간을 그렇게 성찰하면서 과연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하고, 과연 내가 가야 할 길이 이것이 맞는가 하는 물음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럽고 어려운 여정을 걷고 있는 중에 하느님께서 ‘내가 너를 불렀다.’라고 답해 주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비록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그 가운데 언제나 함께하시며 다독여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오히려 제 부족함을 통해서 더 큰 사랑을 보여주시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피정 중의 혼란함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하며, 마치 과부의 헌금처럼 보잘것없는 몫이지만 하느님께 제 자신을 기꺼이 봉헌하는 삶으로 나아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면서 흐뭇하게 웃음 짓기보다 부족하고 모자란 모습을 보며 반성하는 시간을 보내게 될지라도 그 가운데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모습을 찾는다면 그분의 충만함에서 더 큰 사랑과 은총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
-박태정신부-
유태인 제자 한 사람이 랍비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서로 도우며 살려고 노력하는데, 저는 왜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걸까요?" 랍비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엄마가 자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차 한 대가 한가롭게 달려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벽에 걸린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제 모습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창이나 거울 모두 유리로 만들어졌지만 유리에는 칠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모습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지."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 18.)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창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 보다는 그 창으로 아버지 하느님을 바라보게 해주셨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발버둥친 한 해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을 들어높이기 보다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처럼 다가오는 새해에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우리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 해에도 하느님 축복 가득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요즘 연말이어서 그런지 계속해서 술자리입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안마시던 술을 마시다보니 새벽마다 갈등입니다.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피곤함을 느끼는 상태에서 ‘새벽 묵상 글을 써야 하는가? 아니면 피곤한데 오늘은 하루 그냥 재껴버릴까?’라는 갈등이 생깁니다. 오늘 새벽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어제는 바쁜 주일을 마치고 청년들과 함께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답니다. 그리고 밤 11시나 되어서야 술자리가 끝났지요. 그 전날도 늦게까지 술을 마셨었기에 더욱 피곤하였습니다. 또 다시 갈등이 생깁니다.
‘일어날까? 말까?’
억지로 눈을 비비고 일어나 책상 위에 앉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려고 하니 졸음만 옵니다. 머리는 무거워서 도저히 써지지 않습니다. 1시간만 더 잘까? 하지만 잠시 뒤에 새벽미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자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컴퓨터를 켜고 새벽 묵상 글의 제목이라도 써두려고 ‘2007년 새벽을 열며’라는 문서 파일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하단에 표시되는 이 문서의 쪽 수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468쪽. 2007년 한 해 동안 썼던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의 페이지 수가 자그마치 468페이지나 된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소설책을 읽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때, 부족하기만 한 내 자신이 한 해 동안 4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썼다는 자체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이 묵상 글이 2001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까지 쓴 글이 모두 2,600페이지가 넘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2001년에 처음 시작할 때에는 과연 얼마나 갈까 했었지요. 부족하고 끈기 없는 내가 과연 얼마나 쓸까 싶었습니다. 한 100페이지 정도 쓰면 이제 더 이상 쓸 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한 장, 두 장 쓴 것이 이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매수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나아간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2007년의 마지막에 서있는 오늘, 요한 복음사가는 한 처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바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고, 처음이라는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작을 해야 내가 원하던 것들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12월 31일. 2007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아쉬움도 많고 후회되는 일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거에 연연하는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새로운 한해를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빠다킹신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오늘
-조명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한처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선 지금, 한처음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한처음과 그 끝은 매우 연관이 깊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마침과 시작은
같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을 완전히 끝마쳤습니다.
그러고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실제로 가만히 누워만 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어요?
아마 “너 왜 이래?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미쳤냐?” 등의 말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은 쉴 수도 있겠지만, 곧바로 또 다른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정상이니까요. 이렇게 시작에서 마침을, 또 마침에서 시작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바로 이것이 마침과 시작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생활하라는 주님의 뜻이 아닐까요? 한 해가 저물어가는 오늘,
우리는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여봅니다.
“한 해 동안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도 당신의 사랑을 많이 느끼는 은총의 한 해가 되게 하소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허영엽 신부-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것이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듯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 <설날 아침에>-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 꼭 한 번 읽어보는 시다. 각박한 현실에도 착하고 슬기롭게 살자는 시인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 한 해의 마지막 날, 2007년이 오늘로 끝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는 의미가 없고 마침과 시작이라는 시간이 서로 맞닿아 있다. 하느님께는 천년도 하루 같다. 이처럼 하느님과 인간의 시간 계산법은 전혀 다르다.
하느님의 시간은 사랑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하느님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말씀이신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과 영원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에게 절망과 좌절은 있을 수 없다. 희망과 꿈만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시간은 사랑만 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하다. 그런데 그 시간을 미움과 증오로 얼룩지게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용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이제 다시 한 번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내고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하자. ●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양승국신부-
<내 인생을 바꿔놓은 당신>
"선생님의 사랑이 제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교육계에 종사하거나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제자들로부터 듣고 싶어하는 말일 것입니다.
교육부는 "올해의 스승"으로 신영순(56 경기도 평촌정보산업고) 선생님을 선정했습니다. 선생님의 극진한 제자 사랑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제때 공부못한 것에 한이 맺히 제자들이 교무실로 찾아올 때마다 신교사는 언제나 환한 얼굴로 맞이했습니다. 신교사는 “힘껏 도와줄테니 염려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제자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습니다. 신 교사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많은 제자들은 비록 늦었지만 새출발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신 교사는 주경야독하는 많은 제자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돌봤습니다.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의 학비를 대신 내 주는 것은 물론, 제자들이 다니던 공장이 부도로 문을 닫게 되면 제자들의 일자리를 구해주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기업체에서 수출 물량이 밀려 학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회사까지 직접 찾아가 졸업할수 있게 협조해달리고 설득했습니다.주말이면 빵과 라면을 사들고 제자들이 사는 경기도 안양과 안산의 "벌집"을 찾아 밤 늦게까지 "인생 상담"을 했습니다.
한 제자는 "IMF 때 일시적으로 사업이 어려웠을 때 선생님께 어려움을 호소하자 은행에서 2,000여만원을 대출받아 자금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했다"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대한매일 12월 30일자 참조).
한 교사가 한 제자에게 좋은 모범을 보인다는 것, 한 교사가 한 학급의 학생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것, 특별한 일이 아닌 것 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사 한 명의 그런 헌신은 제자들을 통해 급속한 속도로 핵분열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 제자들의 자녀들, 제자들을 만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그 선생님의 사랑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빛이 급속한 속도로 만방을 향해 퍼져가듯이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둠속의 한줄기 빛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죽음의 그늘 속에 앉아있는 백성들을 생명에로 구출해내는 빛"으로 말입니다.
한해를 마무리짓는 오늘, 각자 새해를 위한 한가지씩의 원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어둠의 그늘 밑에 앉아있는 형제들을 찾아가겠다는 원, 그들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 신선함을 가져다 주는 빛으로 살겠다는 원을 말입니다.
새로운 한 해,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감미로운 노래가 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곳, 중환자실, 차가운 감방, 고통스런 삶의 현장으로 울려퍼지기를 기대합니다.
고통도 많았던 한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은총안의 머물렀던 축복의 한해였습니다. 진심으로 그 모든 주님 손길에 감사드립시다.
새로운 한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깊은 곳"으로 나아가 "주님의 그물"을 치는 충실한 주님 제자로서의 나날 엮어가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말씀의 힘과 능력으로 오신 주님
-경규봉 신부-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 장엄하게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신 말씀이시다. 그 말씀은 우주의 원리이며 법칙인 동시에 하느님의 권능과 계시로서 곧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악하고 어두운 세상에 오시어 끊임없이 세상을 비추신다. 그런데 악하고 어두운 세상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강생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러나 어두움의 세력은 결코 빛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 또한 어둠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은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말씀은 참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고, 종말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묵시 21,9-27). 세상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부패되어 어두움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각 사람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시지만, 세상은 창조주이며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 그리스도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당신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까지도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제 그 특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로 넘어갔다. 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원하다(묵시 20,6). 그분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믿고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는 혈연이나 인간의 욕망 또는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이미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며,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 하느님을 완전하게 계시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여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넘쳐흘렀다. 율법은 피조물인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로마 3,20), 후견인(갈라 3,24)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은총과 진리는 하느님과 동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으며,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신 외 아드님이시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
말씀은 곧 힘이며 능력이다. 인간사에서도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의 말은 가진 만큼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인간이 그럴진대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을 가지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은총을 베푸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강생하셨다.
그 은총을 받고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해야 한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참으로 쉽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고 고백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은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우리 모두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오늘로서 저의 부족한 강론을 마칩니다. 그동안 강론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처음부터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함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김정용 신부-
박갑조신부-
오늘은 한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누구도 어제로 돌아 갈수 없는 한해 마지막날입니다.
아쉬움도 돌이켜 돌아 갈수 없고 성취감도 그때 그 장면과 똑같이 그때로 돌아 갈수 없는 현재이며 주어진 전부입니다. 이 주어진 전부는 일년 중 하루를 뺀 모든날이 뒷받침 되어 준 오늘입니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한 처음입니다. 이 처음은 우리 인간이 손수 만들어서 발아래 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 위에 역사가 출발을 할수 있는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이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늘상 시작이 있기에 마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한 처음
전에도 지금도 내일도 계시는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