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하고 선언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7,25-31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잊는 유일한 행복의 요건
'금쪽같은 내새끼' 112회 ‘부모의 이혼과 재혼을 겪는 금쪽이, 불안과 구토증세의 이유는?’에서 심하게 분리불안을 겪는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집에 들어와 엄마가 없으면 심하게 불안해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무조건 들어오라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펑펑 서럽게 웁니다. 그러다 먹을 것을 생각하면 금세 울음을 그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폭식합니다. 엄마를 찾는 행위가 분명 생존본능 때문임을 입증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음식이 떨어져 갈 때 아이는 다시 급히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합니다. 결국 음식으로는 엄마를 대체할 수 없음을 몸이 아는 것입니다. 아이는 잠을 혼자 자지 못합니다. 옆에서 엄마가 손을 잡아주고 같이 자야만 잠이 듭니다. 안 그러면 기침하다가 또 구토합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아닌 아이와 같이 잠을 자야만 합니다.
금쪽이가 이렇게 엄마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아빠가 자신에게 신체접촉도 안 해주고 놀아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금쪽이가 네 살 때 엄마와 결혼하였습니다. 엄마는 재혼이었지만 아빠는 초혼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남의 자식이라 야단도 칠 수 없고 신체접촉도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아빠를 이상하게 여길까 봐 주저합니다.
금쪽 처방으로 아빠는 금쪽이를 하루 세 번 안아주어야 하고 자주 놀아주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빠는 피곤하지만, 아빠의 역할을 다해줍니다. 그러니까 금쪽이가 너무 좋아합니다. 급기야 폭식 성향도 줄어들고 잠도 혼자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잠을 잘 때 부모가 지켜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압니다. 참 행복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부모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가 나의 참 생존을 책임져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아니면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지나고 어른이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았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게 됩니다. 자신은 인간이며 진화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존재로 믿습니다. 이제 자기 생존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과 먹는 것과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게 됩니다. 행복이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부모를 믿는 것이 아닌 부모가 알아서 챙겨주어야 할 것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진복팔단과는 다르게 루카복음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쌓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곧 세속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육신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마귀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로 극복됩니다. 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모욕받고 중상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따르면 불행하고, 청빈-정결-순명을 추구하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복음이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돈을 행복이라 여기고 배부름을 행복이라 여기고 명예를 행복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요? 어린이 때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자신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들보다는 부모를 행복으로 여깁니다. 부모가 생존까지 책임져주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부모를 바랍니다. 아기가 음식을 씹어서 식물인간이 된 엄마에게 먹이는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자신도 창조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다는 교만함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더는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신으로서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목적이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를 생존시켜 줄 대상들로 바뀌게 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아기들은 아는데 어른은 모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 생존을 책임지려 하는 게 고통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일은 고통스럽게 보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부재를 잊기 위해 먹고 토하고 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삽니다. 그렇게 탈진해버립니다. 정 안 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어렸을 때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물론 생존에 관련된 것들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 더 공허하고 배고프고 행복에서 멀어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결국 그런 것들을 추구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신을 창조자로 믿는 방법뿐입니다. 나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의 출처인 창조자 하느님을 찾아냅니다. 그분이 아니면 결코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봅시다.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이 철학적인 작품은 초월의 경지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이 이 작품을 그릴 때,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고갱은 타히티라는 낯선 곳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했지만, 그곳에서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습니다. 타히티에 온 지 6년째 되는 해, 딸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 무렵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그가 자살 결심 후 그린 대작입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다 밧줄을 메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엄습해 옵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이 작품은 오른쪽의 탄생을 시작으로 왼쪽은 죽음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고갱은 늦은 나이가 되어서 그가 죽고 싶은 이유는 실제로는 돈 때문도, 건강 때문도 아닌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존재의 행복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고 내 영혼의 창조자를 믿으려 노력합시다. 그래야 세속-육신-마귀의 집착에서 멀어져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집착이 사라져서 그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기반이 바로 그분이 참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요한복음의 이 문장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3-5)
https://youtu.be/oGuqT9md7yk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하늘 높이 날던 제비가 땅에 가깝게 비행하는 것을 보게 되면, 곧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제비가 날씨를 예측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재주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곤충 때문이지요.
제비는 곤충을 잡아 먹기 위해 날아다니는데, 비가 오기 전에 습도가 높아지면 곤충의 날개도 습기 때문에 무거워져 높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낮게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곤충을 잡으려는 제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곤충이 많은 땅에 가깝게 비행해야 할까요? 아니면 곤충이 전혀 없는 하늘 높이 날아야 할까요?
비가 오기 전, 습한 날에 땅 가깝게 비행하는 이유는 이렇게 ‘곤충’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단지 곤충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제비가 날씨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사람의 능력에 대해 과대평가합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능력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자기의 힘만으로 얻었다는 착각 속에,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4가지 행복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입니다. 뒤이어 오는 불행은 4가지 행복을 뒤집은 것으로,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이를 듣고 어떻게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것보다 주님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가난할 수 있고, 굶주릴 수 있고, 울 수 있으며, 세상의 반대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능력과 재주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덕분에 이루어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서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과 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과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노자).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