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공안을 타파해서 확철대오 해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지만,
최초는,
그 깨달음에 들어가는 처음 단계가 무엇이냐 하며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거든.
아상, 인아상을 꺾음으로써 인아상을 굴복,
인아상을 굴복시킴으로 해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인아상이 무너지지 않고서는 천하 없이도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내다’ 헌 그 아상.
아상이 속에 꽉 차갖고 있어서는
천하 없이 용맹정진을 하고 밤잠을 안자고 그저
오후불식을 하고 묵언을 하고 헌다 하더라도
그 인아상이 꽉 차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깨달음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인아상을 무너뜨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선원에 법도
그 선원에 전통 그 선원에 가풍에
무조건 순응허는 것입니다.
그러자고 이 대중처소에 온 것입니다.
자기, 무엇이든지 자기 멋대로 하고
자기 편리헐 대로 하고
자기주장대로 헐라면
자기 절에 있거나
자기 혼자 토굴에 가서 살거나 이러면 되겠지마는,
이 대중처소에 와서 이렇게 방부를 들이고
지내는 것은 ‘이 대중의 그 경건하고 엄중한 그 법도에
인아상을 꺾고
거기에 순응험으로써
도에 일 단계(1단계)를 극복을 허자.’
그런 목적에서 이 결제를 허게 되는 것입니다.
대중처소에 와가지고 자기의 고집을 내세우고
남을 존중허지 못하고 대중법도에 순응허지 못하는
사람은 대중처소에 온 보람이, 본의가 무엇이냐
그 말이여.
대분심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고조사는
진즉 이 일대사문제를 해결을 했는데
나는 왜 금생에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을 허지를 못했는가?’ 이런 대분심을 가져야 돼.
그리고 대의심
자기 본참공안에 대한 대의심.
‘대관절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한 물견이 무엇이냐?
일대사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이 공안을 타파해야만 한다.
이 본참공안, 이 본참공안을 타파허지 못하고서는
일대사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이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이 크면 클수록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그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 밲에는
못하는 것이고,
의심이 없으며는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의지하에 필유대오요,
소의지하에 소오요, 무의지하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아주 고인이 그렇게 박어 놓았습니다.
의심이 커야 돼.
자기 마음속에만 의심이 있는 게 아니라
이 도량에도 가뜩 차고 이 우주법계에도 꽉 찰만큼
그렇게 의심이 커야 돼.
그래서
하늘을 봐도 의심이요
땅을 봐도 의심이요
나무를 봐도 의심이요
흐르는 물을 봐도 의심이요
새 소리를 들어도 의심이요
비행기 소리를 들어도 의심이고
차 소리를 들어도 의심이요
옆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어도 의심이요
누가 나를 욕허는 소리를 들어도 의심이요
나를 칭찬을 해도 의심이요,
일체 팔풍경계를 당함에 그 팔풍으로 인해서
흔들리지 아니해. 어떠헌 경계를 당허더라도
나는 의심이라 그 말이여.
‘이 뭣고?’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
지금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의심이 커야만 큰 깨달음을 얻는 거여.
망상일어나도, 일어난다고 해서 짜증을 내지 말고.
참선허는 사람이 어찌 망상이 없어.
망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망상, 그 망상을 없앨랴고 허지 말고 그 일어나는
망상,
망상이 일어나거든
즉각
그 망상 고대로 놓아두어버린 채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허는 거여.
이 대신심과 대분심 과 대의단
이것이 바로 ‘삼요라,
세 가지 요긴한 것’이다.
이 삼요는
세 발 달린 솥과 같애서
그 중에 하나만 없어도 그 솥이 기울어 넘어져버린 거여.
이 삼요를 갖추지 않고서는
정진(精進)이 제대로 가지를, 되지를 못하는 것이여.
이 삼요를 갖춘, 갖추어야 그래야
밥을 먹을 때도 ‘이 뭣고?’요,
세수를 헐 때도 ‘이 뭣고?’요,
양치질을 헐 때도 ‘이 뭣고?’요,
빨래를 헐 때도 ‘이 뭣고?’요,
변소를 가도 ‘이 뭣고?’요,
공양을 헐 때도 ‘이 뭣고
첫댓글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