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말까지 대학가에는 좌익이론의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지금이야 그 모든 공산주의 이론이 허구였다는 것이 모든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입증이 되었고, 추억거리도 되지 못할 구시대의 낡은 유물 정도로 치부가 된다.
막시즘, 네오막시즘, 종속이론, 매판자본론, 뉴레프트, 해방신학, 주체사상 등등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공산주의 이론에 당시의 지성 대학생들이 열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열광도 젊은날의 추억 정도로 치부해도 될 정도로 공산주의 이론은 조잡했다. 당시 유행병처럼 퍼지던 공산주의 이론에 대하여 재미 있는 풍자가 있었다. 대학가를 휩쓸던 공산주의 이론에 대하여 "보고도 빠져들지 않으면 바보, 3주이상 공산주의 책을 보아도 바보, 3년이상 빠져 있어도 바보"이라는 말이 있었다.
유행하던 공산주의 이론은 너무도 완벽하게 인간적 평등이나 자유를 구현할 수 있게 감언이설로 도배를 했고, 감언이설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갖은 좋은 이론과 말을 베껴다 누더기 옷처럼 조합하여 단순하고 조잡스러웠고 학문적 깊이가 없었으며 , 그 이론 자체가 인간이 실현할 수 없다는 환상 이라는 것을 빗대어 쓰리 바보론으로 조롱을 하기도 하였다.
건국 후 가장 교육이 팽창되고 질이 높아지던 시기인 1980년대 과거보다는 많은 지적성숙을 이룬 80년대에도 공산주의 이론의 달콤함의 유혹을 벗을 수 없었고, 허구성을 쉽게 간파 할 수 없었다.
하물며 건국 후 신생독립국의 무질서와 가난과 기아에 시달렸고, 높은 문맹률과 지적, 학문적 성숙도가 낮은 해방 후의 시절에 달콤했던 공산주의 이론에 당시의 지성으로서는 빠져들기에 충분 했을 것이다.
수 많은 당시 지식인이나 지성이 공산주의 이론에 빠져 들었다. 공산주의의 허구와 폭력성을 알아 채기에는 해방후의 시절이 80년대보다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공산주의 전파 역사를 보면 공산주의의 달콤한 이론을 앞세워 공산주의 국가건설과 지상낙원으로 가난하고 배고픈 그 사회의 소외층을 끌어 들이고 착취와 피착취의 계급이론으로 소외층의 기득권 층에 대한 증오를 키워 내부적으로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혼란을 틈타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대부분 공산주의 혁명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이 되고 한 사회의 모순점과 소외층을 물고 늘어져 내부적 붕괴를 통하여 공산주의 전파 및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 되었다. 그러한 특성으로 인해 한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면 이웃나라도 같은 방식으로 공산화 되게 된다. 동구라파가 그랬고 베트남 주변 국가 들이 그랬다. 그래서 도미노 이론이 공산주의 팽창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그와 같은 내부적인 선동과 소요, 숙청을 통한 공산화가 불가능해지자 전쟁을 통하여 공산화를 시도했던 최초의 국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한 공산주의 폭력성은 400만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케 하고 부모와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중공과 소련에 이웃하고 절반의 땅덩어리가 공산화된 가난하고 혼돈의 신생독립국에서 필연적 공산화 과정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막아낸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도 일면 평가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나라가 공산화 되어 지금 북한과 같은 사회로 사는 것 보다 지금의 자유대한민국의 수천만배 현명한것이라는 것은 재삼 떠들 필요도 없은 진실이다.
신생독립국의 가난, 혼란과 부조리, 봉건시대 악습이 잔재하던 해방 직후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던 것은 당연한지 모르겠다. 그러한 시절 의식있는 박정희도 그의 형 박상희도 공산주의에 빠져 들었던 것이고 공산주의 허구와 전쟁을 통하여 공산주의 폭력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박정희와 대한민국 국민은 반공을 선택이 아닌 숙명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 어떤 반박이든, 변명이든 간에 남한만이라도 북한과 같은 독재공산화 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자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북한보다는 남한이 인간의 존엄성이 높고, 인간적인 삶을 살며 인간이 지향하여야 할 선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남로당은 당시 폭력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건설과는 다른 사회개혁의 사회주의쪽 색채가 짙었으며, 이러한 박헌영의 노선이 김일성과 달라 훗날 김일성은 박헌형을 무자비하게 죽여 버린다.
박정희는 그의 형 박상희가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고 박정희의 형과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인해 박정희의 동의 없이 남로당 명단에 등재가 되기도 하였다.
설혹 박정희의 한때 남로당 전력이 있다하여도 해방후 극심한 혼란기 공산주의에 대하여 무지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사회상으로 잠시 관심을 가졌던 정도이며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은 변절이 아닌 깨달음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박정희의 공산주의에 대한 경험은 공산주의의 극단적 폭력의 잔인성을 깨닫게 하여 주었고 공산주의 최 강대국 소련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토대를 마련하여 주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