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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북수사로 내려온 영린은 임명장을 토대로 의병들을 훈련을 지시하고 차포수를 훈련의 책임자로 임명을 하고 바로 평산 감영을 찾아가서. 임명장과 마패를 보여주고 서로 협조해 나가기로 했다.
거기서 또 한사람을 만났으니 판관 우병렬 이었다.
한편 단월에서는 치수가 혼자 돌아와 근호에게 잘 다녀왔다고, 절을 올리고 근호앞에 무릎을 꿇고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올렸다.
영린이 머리를 자르고 중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근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며느리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 어떻게 설명을 하라고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치수야.”
“예, 할아버지.”
“애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미에게 이야기 하지 말라라.”
“예, 할아버지.”
“그저 건강해 보이고 상감마마께서 의병장으로 임명을 해서 올 수가 없고, 차포수도 의병의 높은 자리를 주기 위해서 데리고 간 것으로 대답을 해라.”
“예 할아버지.”
근호의 입자에서는 영린이 입신을 한 기쁨과 중이 되었다는 절망이 교차하는 야릇한 심경이 되었다.
치수는 안채로 들어가 할머니 선민에게 인사를 하고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구경을 하면서 본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러나 연희가 자장 궁금한 것을 영린이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상감마마로 부터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이 되었고 그간이 노력과 마음속으로 빌었던 일이 성사된 것에 대하여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나를 위하여 전한 말이 있는가 궁금하여 치수를 방으로 불러서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특별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의암선생이 지어준 이름을 들은 근호는 이제부터 치수의 이름을 광국 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사람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차포수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을 없는 법, 근호의 근심어린 표정을 읽은 선민이 끈질기게 물었으나 별일이 아니라고 했으나, 선민이 광국을 불러서 몇 번에 채근을 해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 달도 숨기지 못하고 눈치를 챈 연희가 광국을 채근해서 알아내고야 말았다.
연희는 가슴에 병이 되어 몸 저 눕고 말았다.
그러나 연희는 드러내놓고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윗동서 선민과 차포수의 안 사람이 뿐이었다.
애가 타기는 차 포수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차 포수 부인은 강건한 사람인 반면 연희는 나약 했는지 점점 야위어 가기만 했다.
그리고 정국은 명성황후의 국장을 계기로 정국은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의암은 친러파가 득세를 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 다른 것을 깨달고 가경자로 낙향을 했지만, 다음해 결국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산두재에 들려서 영린과 재회를 한 뒤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영린과 함께 했던 의병들은 대부분 돌아가거나 관군에 편입되었다.
영린은 북수사와 평산 감영을 오가며 말을 타는 것도 익히고 책을 보면서 소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판관 우병렬의 집에 초대되어 대접을 받았는데. 새해가 되고나서 우판관이 지난해에 딸을 시집보냈고 정초라 새 사위가 인사를 왔는데 인사를 받았다.
“이분은 북수사에 계시는 승병장이시네.”
“인사 올립니다.”
하면서 절을 했다.
“저의 채객 입니다.”
“어유, 그러십니까. 서랑께서 인물이 출중하십니다.”
“어유, 과찬이십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이진용 이었다.
그리고 그해 일월에는 한성전기회사가 세워졌다.
그 무렵 3월 10일에 움트던 만민공동회의가 4월에 잎이 피고, 10월 27일 독립협회는 중추원관제개정안 결의를 위한 집회를 모든 국민이 바라보는 가운데 종로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각계각층·단체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종래의 관행으로 국정을 의논하는 자리에 승려, 부인, 백정까지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10월 28일 오후 1시에 개최된 종로 관민공동회에는 독립협회 회원들과 더불어 시민 4,000여 명이 참가하였고, 10월 29일에는 황제의 허락을 받은 대신들도 참석하여, 그 수는 1만 명이 넘었다.
이날 개회식에는 백정 출신 박성춘이 개회사를 하였으니 가희 민주주의의 씨앗이 제대로 움트고 있었다.
이 관민공동회에서 독립협회는 ‘11개조의 국정개혁 대강령’을 제안하였다.
이 중 6개조를 공개 결의하여 즉시 황제에게 제출하였다.
이 헌의 6조에 대해 광무황제께서는 소칙(紹勅) 5조로 화답하였다.
이를 통해 관민공동회에 대해 황제폐하가 지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또한 관민공동회는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를 만들어 황제에게 제출하고, 11월 3일 황제의 재가를 얻었다.
이로써 만민공동회는 충군애국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두가 하나 되는 축제의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에 8월 대한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경부철도합동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경부철도의 부설권과 영업권을 일본이 독점하고, 철도부지 또한 대한제국 정부가 무상으로 일본 측에 제공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01년 8월 20일과 9월 1일 각각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만큼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는데 영린은 잠에서 덜 깨어나 있었다.
한편 단월에 연희는 영린의 무사 귀환만 기도 하던 것이 머리를 자르고 중이 되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아픈 몸은 불면증 까지 왔다.
일어나 활동하는 시간보다 알아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급기야 혼절까지 하자 병의 심각성을 깨달은 선민을 근호에게 광국을 평산으로 보내어 영린을 불러 오라고 했다.
그러나 농사일이 바뿐 관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칠월에 접어든 어느 날 광국을 불러서 보현사에 다녀오라고 여비를 마련해 주어서 보냈다.
광국이 북수사에 도착해서 영린에게 연희가 많이 아프고 위독함을 알리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영린은 고민에 빠졌다.
아픈 아내를 생각하면 돌아가고 가야 하겠지만 이룬 것이 별로 없는 사십의 나이에 차마 아버지 근호 어머니 선민에게 머리를 깎은 중의 모습을 보여야 하나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이미 아비는 출가한 몸이다. 이런 모습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뵙는다는 게 불효가 아니냐.”
“그래도 이제 가서 보지 못하면 어머니가 너무 불상하지 않아요.”
하고 눈물로 몇 날을 호소 하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행여 하고 영린을 기다리던 연희는 실망이 컸는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다시 광국이 복수사를 찾았다.
이번에는 영린이는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길을 나섰다.
때는 팔월이라 선선해지기 시작했고 가을걷이가 한창이었고, 근호와 선민이 영린을 맞았다.
영린이 사랑방 앞에서 합장을 하고 들어가 근호에게 절을 올렸다.
정말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근호의 얼굴은 몇 년 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이지만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불초 소자 이제 돌아 왔습니다.”
근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어머니를 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을 나와 대문을 들어서 안방으로 향했다.
영린을 맞이한 선민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절을 받기도 전에 다가 앉은 선민은 영린의 등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아이고 이놈의 자식아, 이놈의 자식아,”
를 연발 하였고 무릎을 꿇고 앉은 영린은 한참을 눈물을 흘렸다.
한참만에야 눈물을 거둔 영린이 말문을 열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선민을 더는 뭐라 말을 하지 않고 눈물만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아들의 결정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기가 막혀서 인지 ..........
그리고 한참 후 자리에서 일어난 영린은 연희가 누워있는 집으로 갔다.
연희는 일어나 앉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깊어 있었다.
영린을 보자 아무 말 없이 누워서 눈물만 주르르 흘렸다.
원망과 야속함이 워낙 사무쳤는지 울음소리조차 내지를 못했다.
영린이 연희의 뼈만 남은 손을 살며시 잡고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연희의 한마디는
“야속 하옵니다, 야속 하옵니다.”
“부인 미안하오, 미안하오.”
영린도 미안함에 대한 반성의 눈물인지 몇 방울의 눈물이 연희의 잡은 손등위로 떨어졌다.
연희의 가슴에 맺혀있던 원망의 마음도 봄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고 연희의 얼굴은 잔잔한 미소가 번져 들었다.
그리고 추석준비가 한참이던 열 사흗날 아침 홀연히 연희는 행복한 미소를 띠우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른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광국이 하나만을 남겨두고 영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것이다.
장지는 몇 년 전 근호가 길연의 소개로 벗 고개에 사놓은 선산에 장지가 정해졌다.
연희의 산소 자리를 정하기 전에 근호 영준 그리고 영린이 묻힐 자리를 계멱의 동생이 잡아 주어서 연희의 산소 자리는 정해져 있었는데 산이 높아서 상두꾼들이 상여를 매고 올라가는데 뒤에서 밀어 가면서 산에 올라 장례를 치르느냐 무척 고생들을 해야 했다.
그리고 영린은 아내의 장례를 치루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 아내도 없다.
그리고 아들 광국이 걸리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지 않느냐 그리고 불혹이 넘도록 이뤄놓은 것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황제의 임명장 까지 받지 않았느냐 정국이 안정이 되고 있으니 조금만 고생을 하고 나라의 힘이 생기면 입신의 길이 열리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북수사에는 차포수를 비롯한 의병동지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장례식이 있고 보름이 지나서 영린은 근호에게 작심을 하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 저는 황제페하로 부터 승병장으로 임명된 사람이고, 몸은 북수사에 있지만 마패까지 받은 몸이어서 임지로 떠나야 하겠습니다.”
근호가 잘 알았다는 의사 표시인지 승낙의 의사표시인지 머리를 끄떡였다.
“아버지 그럼 소자 떠나겠습니다.”
절을 올리고 난 영린은 안방으로 들어가서 선민에게 절을 올리자 선민은 인사의 의미를 아는 지라 깜짝 놀라며
“너 진정 떠나려 하느냐.”
“예 어머니 황제폐하로 부터 임명장을 받아서 임지를 비워 둘 수가 없습니다.”
선민은 아들을 보고 차마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된 녀석이 풀이 죽어 지내는 것을 몇 칠 동안 보아오면서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어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떠나겠다는 말을 듣고 황제폐하로 부터 임명장을 받았다고 하니 뭔가 하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어머니 광국이를 잘 봐 주세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고 방문을 나서니 광국이 방문 앞에 있었다.
“광국아.”
“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큰아버지 큰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라.”
“네 아버지.”
영린을 그렇게 다시 북수사로 돌아왔으나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니 평산 감영을 오가며 병렬과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보내고 있었다.
광국은 가끔씩 근호의 허락을 받고 지평외가를 다녀오기도 했는데, 한번 외가에 가면 일주일 정도 묵어서 왔다.
그해 사월 초파일에는 전차가 개통되었고 5월 1일에는 미곡 수탈의 근거지가 되는 군산항이 개항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19일 최초로 경인선 건설 열차를 시험 운행했으며 드디어 9월18일 제물포(인천)∼노량진간 33.2km 구간의 영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추석을 앞두고 남편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여자는 삼년상을 치루지 않는 풍습에 의하여 연희가 죽은 지 일 년이 되자 탈상을 했다.
그렇게 그해에 광국은 혼자서 영준의 도움을 받으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총각 혼자서 살림을 하자니 여러모로 힘들었다.
그러니 끼니는 늘 금선이 챙기는데, 매번 사촌형수 효진이 차려 주어야 했고 주묵이가
“형님 식사하시래요.”
하면서 부르려 다녔다.
근호는 자그마한 살림이나마 혼자 잘 꾸려가기를 바랐으나 아직 결혼을 시키지 못한 것이 마음에 향상 걸렸다.
그렇게 한 여름에 접어들어 어정칠월이 되자 광국이 할아버지 근호에게 북수사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근호는 농사철이나 다 지나서 갔다 오라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민에게 북수사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으나 할아버지가 허락을 안 하시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초겨울 광국은 근호의 허락을 받고 북수사로 떠났다.
하루를 부지런히 걸어서 작은아버지가 사는 물골안에 깜깜해서 도착을 했다.
작은 할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할아버님의 안부를 전한다음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께도 절을 올렸다.
작은어머니는 작년에 막내 양묵을 낳아서 양묵이 돌을 지나 걸음마를 시작하여 뒤뚱거리며 뛰어다니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작은 아버지 영훈은 아들 사형제에 딸을 하나 두고 잘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루를 사촌들과 어울려 지내고 검단이 고개를 넘어 도고막골을 지나 가산은 지나서 왕방산 고개를 넘어 답거리에 도착하여 사촌 정묵의 집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어서 다음날 다시 출발을 하여 이틀 만에 북수사에 도착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강령하시냐?”
“예.”
“큰아버지 큰어머니도.”
“예.”
그리고 몇 칠 후 영린은 광국을 데리고 평산 산두재로 의암선생을 만나러 갔다
마침 의암은 의화단의 난을 만나서 귀국을 해서 산두재에 머물고 있었다.
광국이 의암에게 절을 올리자
“단월 아드님은 언제 온거요.”
“온지 나흘 전에 왔습니다.”
“아참 내가 깜빡 했는데 아들 나이가 올해 몇 이요.”
“스물 하나 되었습니다.”
“내 마침 가경자에 서신을 보낼 일이 있는데, 어렵더라도 그 일을 좀 해주었으면 하는데.”
“예 가야죠.”
“단월 그리고 내 광국을 중신을 할까 하오.”
“선생님께서 하신다면 저야 그저 감사하기 그지없지요.”
“가경자 에서 시오리 떨어진 간내월에 먼촌 종형제의 딸이 있는데 이번에 내 서신을 전하면 거기서 중신을 서게 될 것이오.”
“아이고 선생님 감사 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삼년 전에 상처를 하고 저 녀석 하나를 부모님 슬하에 남겨 놓았는데, 부모님도 연로하셔서 걱정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러시군요. 잘 되었네, 그럼 내일 모래 광국이가 가경자를 다녀서 단월로 가거라.”
그리고 이틀 후 의암 선생의 서신을 가지고 광국은 가경자로 향하여 떠났다.
올 때와는 역으로 물골안에 작은댁에 들려서 사흘을 묵고 출발을 해서 파위를 지날 무렵에 해가 뜨기 시작했다.
구진터에서 작은어머니가 싸준 주먹밥을 먹고 부지런히 강을 끼고 걸어서 조종천을 건너서 호명산 뒤 고개를 넘으면서 점심을 먹고 굴바위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간내월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서 개용개와 함바지를 지나 박암이를 지날 때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가경자에 도착한 광국은 물어, 물어서 의암선생의 서신을 전할 유제희 라는 분을 만나서 인사를 올리고 서신을 전했다.
광국은 거기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저것 소소한 것까지 물었다.
그리고 제희는 귀수는 내 종매로 십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계시고 위로 오빠가 두 분 게시고 나이차가 많아서 큰오빠 제동이 아버지 같이 훈육을 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예까지 왔으니 간내월로 가서 처남 될 분을 만나 보자고 했다.
다음날 광국은 제희라는 분을 따라서 간내월로 가서 처남이 될 분의 집에 도착하여 사랑방에서 절을 올리고 인사를 했는데 나이가 아버지 영린 보다 조금 젊어 보였다.
실상은 영린 보다 네 살 아래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연희와 동갑이었다.
“형님 이 젊은이는 인석아저씨 서신을 전하러 황해도 평산에서 온 사람인데요. 인석 아저씨가 적당한 규수가 있으면 중신을 서라고 서신을 보내와서 마침 동생 남순이가 떠올라서 데리고 왔어요. 이 젊은이 이름은 김광국이라고 하고요. 본관이 안동이고 아마 황골에 서너 집 있고 그건 중요 하지 않고 지난 정해년에 효자 정문을 받은 분의 작은집 둘째라고 하는데 이름도 인석 아저씨가 지어 주었고요. 집은 지평 단월이 이랍니다.”
“오 양반집 자제구만, 올해 몇 이요.”
“경진년 오월 십팔일 생입니다.”
“우리 남순이가 갑신년에 났으니까. 다섯 살 위니까 딱 좋구먼.”
“아버님은?”
“의암 선생님 과 함께 계십니다.”
“오 그래 아버님 뵈러 갔다가 심부름을 오게 됐구먼.”
“예.”
“집안도 괜찮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단월에 생존해 계시는데 단지 흠 이라면 삼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안계시답니다.”
순간, 제동은 시어머니가 없다면 시집살이는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괜찮은 혼처고 뼈대 있는 집안이고 해서 만족했다.
즉시 안채에 연락을 해서 점심을 준비하게 이르고, 이것저것 물었다.
“그래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고 있나?”
“넉넉하지는 못해도 큰댁의 도움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조부모님 춘추가 어떻게 되는가?”
“할아버님은 올해 일흔넷 이옵고 할머니는 예순다섯 이옵니다.”
“다복한 가정이로 구만.”
하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게 얼떨결에 선을 보이고 점심을 먹고 다시 저녁까지 먹여서 난감해 하는 광국을 제희는 자기 집에서 자고 내일 단월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제남이 만류를 하여 두 사람이 제남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실상 본관이 안동이라고 하면 60년 동안 세도정치로 유명한 가문으로 알고 있지만 그건 신안동 김 씨를 이르는 말이고 광국은 구 안동으로 조상이 통일신라 때부터 다르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몰랐다.
하기는 의암마저 몰라서 영린을 처음에 순조 때부터 권세를 누리던 안동김가의 먼촌 정도는 되겠구나, 해서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의암조차도 안동김문의 먼 일가붙이 정도로 생각하고 거리를 두고 조금은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페하가 들어서면서 여흥민씨 세력에 몰려서 몰락했거나 갑신정변을 주역 김옥균과도 먼촌쯤 되는 것으로 보았으니 의암이 서먹하게 대할 만도 했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대단한 가문으로 알고 있는데 영린이 굳이 신 안동 구 안동 을 따져가며 설명 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다.
남순의 어머니는 별안간 사윗감을 보게 되었고, 남순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설명을 했다.
“사람이 신장은 별로 크지 않으나 다부지게 생겼더라.”
남순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으나 어머니가 전해준 게 전부 이었다.
열여덟 남순은 몹시 궁금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이면 볼 수 있으려나 하고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사랑에서 전해온 전갈은 아침을 일찍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찍 떠나는 바람에 신랑감은 울타리 사이로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광국은 홍천강을 건너서 장락산을 넘어 동막 길곡을 지나 단월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근호에게 절을 올리고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전하고 간내월을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의암 선생이 큰일을 하셨구나, 의암선생이 주선한 자리라면 마다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서둘러 네 혼사를 서둘러야 하겠구나.”
그리고 선민에게도 절을 올리고 아버지 영린의 근황 이며 가경자로 해서 간내월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린이 혼자되고 광국이 혼자 집안을 꾸려가지 못해서 향상 마음에 걸렸던 선민으로서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전 해에 일본 풍범선(風帆船) 히노데마루(日出丸)가 장고도에 좌초, 난파하였는데. 이 때 섬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부서져 흩어진 선판 몇 조각을 습득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당시 조선인들이 배를 파손하였다고 주장하며 대한제국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정부는 섬 주민 10명을 서울로 압송하여 재판에 회부하였으나, 선주와 대질 결과 일본공사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이 드러나 이들을 무죄로 방면하였다.
그런데 1902년 6월 일본공사는 이 문제를 재론하며 3,000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렸다.
이를 조선정부가 거절하자 일본공사는 그들이 매년 납부하는 마산조계지 세금에서 손해배상금을 공제하겠다고 하였으며, 황제폐하를 알현하고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결국 황제폐하는 이들의 요구를 수락하고 탁지부에 지시, 3,000원을 일본정부에 지불하였다.
이 사건은 한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나타내주는 사건으로 중국에서는 의화단 사건의 신축조약의 승전국의 일원이 된 일제는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에는 봄에는 백두산 화산폭발이 있었다.
갑자기 무서운 광풍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백리 넘어서 까지 들렸고, 인근에 소나무 들이 쓰러지고 하늘을 피처럼 붉었고 수많은 불덩어리가 별처럼 쏟아졌고 화산재에 낮인데도 어두워졌고, 민심은 흉흉하고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단월에서는 근호가 가을에 광국의 결혼식을 올리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택일은 추석이 지나고 추수가 끝난 시월로 날을 잡았는데, 구월 중순 갑자기 선민이 병을 얻어 알아 눕더니 병세가 급격히 악화 되어 위독한 상태가 되더니 생전에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두 녀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광국이 북수사로 떠났고, 소식을 접한 영린은 급히 평산 감영에서 말을 빌려 타고 달려오고 광국은 오다가 답거리에 들려서 부음을 알리고 단월로 향하고 상훈이 물골안 영훈에게 부음을 전하고 형묵이 마일 영달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는 사이에 영린이 단월에 도착한 것은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이었다.
홑이불을 걷어내고 얼굴에 가려진 창호지를 벗겨내자. 선민의 시신은 습(襲)이 끝나서 곱게 빗은 머리에 검은 댕기를 하고 쪽을 찌고, 보랏빛 저고리 ·초록빛 곁마기 ·다홍치마 ·원삼(圓衫)을 입고 곱게 미소를 머금은 체 누워 있었다.
영린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한 동안 어깨가 들먹였다.
그날 저녁 소렴을 하고 다음날 대렴이 끝나고 영훈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영준이 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장례를 치렀다.
이번에는 연희의 장사 때 상여를 매는 상두꾼들이 고생을 한 것이 경험이 되어 상여에 줄을 매어 앞에서 끌어가면서 산에 올라 장사를 지냈다.
영린을 삼우제를 지내고 임지로 간다며 북수사로 떠났는데 마음은 먼저보다 더 무거웠다.
아버지 근호가 계시다고는 하나 어머니 선민이 있을 때보다는 아무래도 광국이 마음이 더 쓰였다.
결국 근호는 광국의 결혼식을 선민의 대상을 치루고 하자고 간내월 남순의 큰오빠 제동에게 통보를 했다.
그리고 그해에는 그러니까 1901년(광무 5년)에 대한제국은 세계적 조류에 따라 금본위제 채택을 내용으로 하는 ‘화폐조례’를 공포함과 동시에 1엔(圓=원) 은화의 유통을 금지시켰다.
일본 제일은행은 1884년 이래로 우리나라의 해관세(海關稅) 업무를 취급해왔는데, 일본이 1897년 금본위제를 채택함에 따라 1엔 은화의 공급이 두절되고 1엔 태환은행권도 일본으로 회수되는 등 곤란을 겪던 중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대한제국에서 ‘화폐조례’가 공포되어 일본 1엔 은화의 유통이 금지되자 더욱 격심한 화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대한제국의 ‘화폐조례’ 발표로 곤경에 처하게 된 일본 제일은행은, 은행권 발행이 그 나라 중앙은행의 고유 권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특허를 받아 1902년 5월 부산과 목포, 서울에서 1엔권 지폐를, 또한 같은 해 8월과 12월에도 5엔권과 10엔권을 연이어 발행했다.
이로서 대한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은행권은 불행하게도 우리 것이 아닌 일본의 제일은행권이었다.
일본 제일은행이 1902년 우리의 금융계를 장악할 목적에서 무단으로 발행해 강제로 유통시킨 1엔권과 5엔권, 10엔권 3종의 지폐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권인 것이다.
당시의 은행권 앞면에는 일본 제일은행 총재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일본 제일은행권이 발행되자 우리나라에서는 전 국민적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인천의 상인단체인 신상협회가 제일은행권을 여수(與受)하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황성신문 에서도 연일 이 문제를 논설로 다루면서 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서울과 인천 등 대도시를 비롯한 전국에서 제일은행권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자, 정부에서도 9월에 제일은행권의 여수를 금지하라는 훈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을 위협해 은행권 유통 금지령을 철회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는데 한 차례의 재 금지령과 철회가 이어지면서 일본은 2~3척의 군함을 인천에 입항시키는 무력시위를 전개한 끝에 금지령을 백지화시켰으며, 그동안 배척운동으로 발생한 피해액의 보상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로 말미암아 민간에서는 이전보다 치열한 제일은행권 배척운동이 전개되었다.
일본 제일은행권의 발행을 둘러싸고 일어난 국내의 배척운동과 일본의 강제 유통 등 일련의 사태로 대한제국은 중앙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첫댓글 왜 옆전도 있었잖아요?
경제 침략 다변화한 일제의 침략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