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20-21.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돌아가니라.
히브리어 ‘슈브’이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구원은 ‘슈브’로부터 시작한다.
죄의 자리를 떠나야 한다.
육신의 종으로 살던 곳이다.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
헬라어 ‘스플랑크논’으로 ‘창자의 아픔’이다.
집 떠난 아들로 인해 창자가 끊어지는 통증이다.
달려오는 아버지,
돌아오는 자를 그토록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용서이다.
이 장면을 그린 명화가 있다.
바로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가?
기쁨이 너무도 크면 통증 또한 크기 마련이다.
오래전의 ‘이산가족 상봉’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이래저래 하나님은 아픔을 겪으신다.
아픔의 달인이시리라.
집 떠난 아들로 인한 아픔,
밤마다 대문 열어놓고 잠 못 이루는 아픔 말이다.
아들의 초라한 몰골,
눈물로 범벅이 된 아픔이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흘린 주님의 눈물이다.
더는 아픔을 드리지 않으리라.
오늘의 야무진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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