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창세 32,23-33
복 음 : 마태 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영적 전쟁
-기도의 전사, 주님의 전사戰士, 주님의 일꾼, 영적 이스라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삶은 영적 전쟁이고 우리는 영적 전우요 서로간의 전우애戰友愛입니다.
예로부터 수도영성의 중요한 주제가 영적전쟁입니다. 평화가 이상이라면 전쟁은 현실입니다.
아마 인류가 시작된 이래 전쟁이 없었던 적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들이 말하는바 영적전쟁입니다.
우리 삶은 영적 전쟁이고, 우리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고 우리는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입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는 영적훈련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수덕생활이 바로 영적훈련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단련하고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로 무장토록 하는 영적훈련이
바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수행들입니다.
하여 제가 늘 강조하는바 기본에 충실한 삶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소 기본에 충실하면서 영적 삶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단기전으로 끝나는 영적전쟁이 아니라 죽어야 끝나는 장기전의 영적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수도영성생활의 기본이 기도와 말씀공부, 그리고 노동입니다.
뿌리 없이는 꽃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수행생활의 기초 없이는 신비생활도 없습니다.
부단한 자기훈련의 주님의 전사로 수행생활에 충실할 때,
이런 수행생활의 기초 위에 공동체의 형제애兄弟愛도 꽃피어 납니다. 결코 값싼 형제애는 없습니다.
영성생활은 매일 훈련된 식별을 요하는 참 신비로운 전쟁입니다.
하느님과의 싸움은, 기도의 싸움은 값진 은총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신적인 것들과 인간적이 것들의 싸움이 계속되는 어둔 밤을 뜻합니다.
하여 영적전쟁의 요체는 주님과 기도의 싸움입니다.
주님과 기도의 싸움은 밑져도 본전이 아니라 이익입니다.
주님과의 싸움은 동시에 나와의 싸움을 뜻합니다. 남한테는 져도 나한테는 이겨야 합니다.
유명한 체조 선수였던 김연아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바로 넘어서야 할 경쟁상대는 남도 아닌 바로 자기라는 고백입니다.
결국 영적전쟁의 핵심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야곱이, 마태복음의 예수님이 영적전사의 모범입니다.
성서의 모든 인물들이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어제는 에사우를 피해 달아나 유랑 길에 오른 참으로 심신이 고단했던 야곱이
꿈 중에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그처럼 야곱의 내면에서 영적전투가 치열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투쟁 중에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입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고 결론 부분만 나옵니다.
그가 얼마나 오랜 동안 라반의 사위가 되어 단련기간을 겪었는지 생략되었습니다만,
마침내 보속과도 같은 시련과 시험의 기간을 마치고 귀가할 때는 금의환향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서두는 긴장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그 무렵 야곱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
야곱은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았다.”
어제 제1독서에서처럼 역시 밤에 일어난 일입니다.
혼자 남은 야곱은 얼마나 고독했고 외로웠겠는지요.
에사오 형과의 대면에 앞서 불안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는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하여 하느님과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을 함축하는 기도의 싸움에 돌입한 야곱입니다.
주님의 천사와의 싸움이 상징하는바 바로 하느님과의 싸움입니다.
야곱이 참으로 절박한 생사를 건 밤샘 기도의 싸움이요, 싸움에 패한 하느님의 사정입니다.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다오.”
야곱은 얼마나 집요한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 단호히 대답합니다.
기도의 싸움은 이처럼 항구하고 한결같아야 합니다.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 하느님의 전사, 기도의 전사 야곱인지요!
이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야곱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주님의 승리의 전사로서 영예스런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로 내 목숨을 건졌구나!”
목숨을 건 하느님과 기도의 싸움에 승리한 야곱, 아니 이스라엘입니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살려고 도모하는 자는 죽고 죽을 각오로 노력하는 자는 산다는 말입니다.
죽을 각오로 목숨을 건 하느님과 싸움, 나와의 싸움, 바로 기도의 싸움에 승리한 주님의 전사 야곱입니다.
하느님과 싸움에, 나와의 싸움에 기도로 승리한 이스라엘은 내적 힘이 충만한 상태로
이제 에사오 형과의 영적 싸움을 위해 출전합니다.
다음 하느님과, 또 나와의 밤샘 기도의 싸움에 승리한 후
다시 출전하는 모습은 얼마나 숙연한 아름다움인지요!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 수십 년 전이 지난 지금도
감리교 신학대학의 민영진 교수님의 설명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답고 멋진 장면은 없다는 것입니다.
밤샘 하느님과의 영적전투에 승리한 이스라엘을 경축하는 듯 그의 머리위에 찬연히 빛나는 태양입니다.
태양 빛의 축하를 받으며 절뚝거리며 걷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지요.
날마다 이렇게 하느님과, 또 나와 밤샘 기도의 싸움에 승리한 후 시작되는 하루라면 얼마나 멋지겠는지요!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불세출의 하느님의 전사, 이스라엘입니다.
밤마다 외딴곳에서 밤샘기도로 하느님과,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셨기에
천하무적 하느님의 전사가 된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모습이,
흡사 각자 주님의 전사로서 이스라엘 이름을 회복시켜 주시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예수님 성심이 잘 드러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전사로서 특징적인 자질은 이런 예수님 성심의 가엾이 여기는 측은지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그러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할 것 없이 우리부터 먼저 수확할 밭의 일꾼들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기도의 전사,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그 이름 이스라엘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의 전사, 이스라엘이 되어,
또 수확할 밭에 주님의 일꾼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몸은 잠시 빌린 것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빌린 몸 안에 이런 성격을 가진 내가 있을 뿐입니다.
내 것이라고 한다면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다보니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뜻밖의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내 몸이 또 내 생각이 따르지 않아서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때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면서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빌린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이해가 됩니다.
솔직히 빌린 물건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렌터카를 생각해보십시오. 렌터카를 타면서 평소에 타던 내 차와 다르다고 실망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냥 빌린 차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우리 몸 역시 주님께서 잠시 빌려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빌렸다고 해서 막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렌터카가 내 차가 아니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조심하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만약 차에 상처라도 낸다면 배상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 역시 주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면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막 사용해도 될까요?
다시 되돌려 드릴 그 때를 대비해서 잘 사용하고, 삶의 마지막 날에 주님과 셈을 하게 될 때
자랑스럽게 주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빌려준 것에 대한 어떤 비용을 청구합니다.
그래서 귀한 것일수록 빌리는 가격은 더욱 더 높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빌려 주시면서도 아무것도 청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의 뜻에 맞게 살아갈 것을,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꾼이 많아지도록 청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꾼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성직자, 수도자만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되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몸을 최대로 활용하는 사람,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스스로가 그러한 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노력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라는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데 한 몫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측은지심,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엾은 마음!',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아나는 아픔으로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면 바로 그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
참된 일꾼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됩니다.
참된 일꾼이 필요한
우리들 시대입니다.
참된 일꾼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삶으로 기쁘게 실천합니다.
실천은
믿음을 지향합니다.
믿음은
순명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
먼저 계시기에
일꾼인 우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련 속에서
일꾼은 일꾼다워집니다.
시련마저도
주님을 드러내는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일꾼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일꾼의 뜻을 비우고 내려놓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분명 기도입니다.
기도는
일꾼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주님의 참된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도 안에서
일꾼은
주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일꾼의 진정한 길임을 믿습니다.
추수꾼은 ‘기(氣)’를 살려주는 이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리지널스’의 저자 애덤 그랜트가 인터넷 안경 사업 공룡이 되어버린 ‘와비파커’ 설립자들에게
투자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왔던 이들이 학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업에 실패하면 취직할 곳들을 이미 마련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오프라 윈프리까지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일에 뛰어든 것에 비해 열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와비파커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인 닐은 애덤 그랜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안을 마련해놓았어요. 잘 안될 경우를 대비해서 졸업 후에 일할 직장을 구해놓았어요.
제프도요. 데이브도 대안으로 여름 동안 인턴십 두 개를 확보해놓았고,
전에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가는 얘기도 진행되고 있어요.”
실패할 것을 예상해서 뒷일까지도 다 준비해 놓은 이들에게 누구도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애덤 그랜트도 열정이 없는 이들에게 투자하지 않았고,
이것이 평생의 가장 큰 후회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재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덤 그랜트는 이때 깡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덤비는 이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氣)’입니다.
“창업할 때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만두는 게 나을까?”
경영 연구자 조지프 라피와 지에 펭은 5,000명을 추적 조사한 결과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던 위험 회피적 사람들, 그러니까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이 직장을 바로 그만두고 창업한 이들보다
실패할 확률이 33%나 낮게 나왔습니다.
와비파커 창립자들과 더불어 ‘패스트컴퍼니’가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 목록에 오른
기업들을 운영하는 창업자들은 창업을 한 뒤에도 어느 정도는 계속 직장을 다녔다고 합니다.
나이키 공동 창업자인 필 나이트는 신발을 팔기 시작한 이후에도 5년 동안 회계사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첫 번째 애플 컴퓨터를 발명한 스티브 위즈니악은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창업한 이후에도
본래 다니던 휴렛팩커드에서 일하며 1년간 겹벌이(투잡)를 하였습니다.
구글 창업자들은 사업이 성공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봐 헐값에 구글을 팔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사실 빌 게이츠도 하버드를 중퇴하고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자신의 프로그램을 팔았고
그 사업으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을 때 휴학을 한 것이었습니다.
“기가 살았네!”라고 말할 때, 이 ‘기’는 열정을 내가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입니다. 이 기가 살아있어야 무엇을 해도 성공할 확률이 큽니다.
워런 버핏은 항상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고 10년 이상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에 투자합니다.
그래야 기가 살기 때문입니다.
백종원씨는 우리나라 소규모 식당을 창업하는 사람이 인구에 비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상태로 창업하기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창업을 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은 직장을 가진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잃거나 직장이 없어서 생계수단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꼭 성공해야만 하니 사람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당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태로 장사를 하니 사람들은 좋은 ‘기분’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 가게에 가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가 없이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실패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아야 기가 삽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은 이미 빠져나갈 굴을 파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감옥 생활이 감옥 생활이 아니고 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탈출하지 못하게 잡을 정도로
그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빠져나갈 구멍’이 ‘기(氣)’인 것입니다.
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거나 실패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마치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고아처럼 이 일이 실패하면 인생이 끝이라고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기가 꺾이면 불안해지고 그러면 무엇을 해도 안 됩니다.
작은 방에 아기를 혼자 놓아두면 아무리 장난감이 많아도 아기는 엄마를 찾으며 웁니다.
그러나 엄마가 들어가면 아기는 엄마는 본척만척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바쁩니다.
엄마가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기가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말하는 ‘수확할 밭의 일꾼들’은 바로 이 기를 살려주는 이들입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하느님께서 우리 등 뒤에서 지켜주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믿음을 주는 이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마태오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분(예수님)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일꾼들은
바로 기가 꺾인 이들에게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해줄 수 있는 목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해지면 안 되고, 자녀가 실패하면 안 되고, 가족이 병에 걸리면 안 되니
기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목자는 좋은 추수꾼이 아닙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면 기가 꺾입니다.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참 추수꾼은 이 세상에서 다 잃어도 괜찮다는 믿음을 주는 목자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목자여야 합니다.
이 믿음이 신자들에게 기를 북돋아 줍니다.
기가 꺾인 신자들이 없도록 기를 살려주는 목자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명동에 다니던 치과가 있습니다.
늘 하얀 가운을 입던 원장님을 보다가, 사복을 입은 원장님을 보았습니다.
사복을 입은 원장님의 모습은 가운을 입던 원장님과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복장은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교복을 입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가서는 안 될 곳이 많았습니다.
교복에는 학년과 이름이 표시되었습니다. 교복을 입고는 안 될 행동이 있었습니다.
불편하기도 했지만 교복이 저를 보호 해 주기도 했습니다.
의사의 흰색 가운은 의사의 권위와 의사의 품격을 드러냅니다.
비자 신청 때문에 대사관엘 갔습니다. 사제 복장을 하고 갔습니다.
직원이 신자라고 하면서 인사 하였습니다. 저도 신자인 직원을 만나니 긴장했던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몸과 함께 있습니다.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몸은 마음을 제약하지만 몸은 마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엉킨 매듭을 풀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격이 급해서 엉킨 매듭을 천천히 풀지 못하는 편입니다.
종교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
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생기는 엉킨 매듭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은 외면한다고 해서, 덮어버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지하게 내면을 들여다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것은 어쩌면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황님께서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많은 유혹을 받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신앙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유혹 5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완고함에 빠지는 유혹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처럼 많이 아는 것으로 남을 심판하고, 비난하려는 유혹입니다.
교회에 있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잘못한 이들을
하느님께로부터 심판받아야 하는 사람들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둘째는 상처를 치유하기 전에 붕대부터 감으려는 유혹입니다.
붕대를 감으면 상처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것으로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민주와 자유는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묘약은 없습니다. 오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돌을 빵으로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물질과 자본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물질과 자본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모두 영적인 형제요 자매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는 유혹입니다.
십자가는 차에 걸어 놓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목에 거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무겁지만 우리가 묵묵히 지고가야 하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와 함께 지냈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아팠던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는 교회의 유산을 포기하려는 유혹입니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회는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버려야 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버리는 사람들은 없듯이, 교회의 전통과 정신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추수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일구어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