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 콩쿠링 만년필
박주병
멋을 부린 남성 정장을 보면은 왼쪽 가슴 포켓에 포켓치프가 고개를 쳐들고 있다. 나는 그 자리에 만년필 두 자루를 꽂는다. 하나면 퍽 사무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 같고 둘보다 많으면 너주레해 보일 것 같다.
어쩌자고, 구십이 내일모래인 늙은이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너주레한 아주 비싼 만년필을 한 자루 샀다. 뚜껑에 클립이 없어 꽂을 수는 없지만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너주레한 호사다.
스위스의 까렌다쉬 브랜드의 피닉스(phoenix)라는 만년필인데 『現代文學』네 권이 빠듯이 들어가는, 검은 피아노처럼 반질반질한 고급 목제함에 담겨 있다. 750 18k 수공 백금촉이다. 제조된 연도는 확인하지 않았으나 여든여덟 자루 한정판이다. 국내에 수입된 것은 두 자루뿐이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내 것은 뚜껑에 일련번호 86이 씌어 있다. 몸통 안에 탈부착이 가능한 컨버터가 내장되어 있고 몸통 밖에 별도로 카트리지가 있는데 오래 되어 잉크가 말라붙었다. 이 만년필은 얼른 보면 만년필인 줄 모른다. 클립이 없기 때문이다. 꽂고 다니기에는 무겁다고 생각한 것 같다. 스위스 공법을 생각하게 하는 이 만년필은 봉황새의 문양을 조각하여 뚜껑과 몸통을 죄다 그물처럼 덮어씌웠는데 뚜껑에는 鳳 자가, 몸통에는 凰 자가 있다. 문양이든 글자든 그 소재 전체가 80 퍼센트의 은이 함유된 무슨 금속이라고 하니 무거울 수밖에 없다.
만년필 동호회를 살펴보면 나의 봉황 만년필은 소꿉놀이감이다. 만년필과 더불어 사는 마니아들 중에는 보석이 수두룩이 박힌 초호화 만년필을 갖고 있는 사람도 더러 보이고 상인이 아니면서 수백 자루를 모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지금이 어느 땐데 만년필 타령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워드프로세서는 제쳐놓고라도 볼펜한테 만년필이 필기구의 왕좌를 빼앗긴 지는 오래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만년필을 애호하는 사람은 의외로 퍽 많다. 만년필과 더불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 같은 사람들은 만년필에 대해 향수 같은, 그리움 같은 것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너도나도 연필 대신에 주로 철필을 쓰던 시절이었다. 나는 만년필을 썼는데 잉크가 질질 새어나왔다. 그때 아버지가 일제 때부터 갖고 계시던 만년필을 주셨다. 몸통 자체가 컨버터 방식인 것은 국산과 같지만 잉크가 새지 않았다. 노란 국화가 새카만 뚜껑과 몸통에 그려져 있었다. 그 만년필을 중학에 들어가자마자 잃어 버렸다. 두 팔을 들고 서 있도록 선생님은 반 전체 아이들을 벌을 세웠지만 끝내 자백은 나오지 않았다.
대학입시에 합격하자 한 친구가 선물과 쪽지를 주고는 얼른 가버렸다. 쪽지부터 봤다. “육년 전 만년필 도둑놈은 나야. 만년필이 자꾸 날 쳐다보는 것 같아 깨뚜드려 버렸어.”라고 했다. 선물은 말만 들었던 파카 51 만년필이었다.
대학 당국에서, 입학금을 서울의 시중은행에 납부하라고 했다. 나는 은행 문 앞에도 가본 적이 없는, 금융기능을 전혀 이용할 줄 모르는 촌뜨기였다. 난생 처음 그 큰 현금을 갖고 중앙선 밤열차를 탔다. 돈뭉치를 선반에 던져두고 실눈을 뜬 채 일곱 시간 넘게 걸려서 이튿날 아침에 청량리역에 내렸다. 입학금을 종로의 어느 은행에 납부한 뒤 됐다 하고 전차를 탔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어쩐지 왼쪽 가슴이 서늘했다.
입학식도 하기 전에,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만년필을 화신백화점에서 샀다. 2학년 때 군에 가게 되었다. ‘학적보유병’은 예외 없이 일선 소대에 배치할 때였는데 우리 소대에 대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심술이 뚝뚝 듣는, 속칭 말뚝 박은 직업 군인인 선임하사한테 단체로 ‘원산폭격’이란 기합을 받을 때 나만 틀렸다면서 두 번 세 번 다시 시키는가 하면 다 같이 손바닥을 맞아도 내 손바닥만 피가 터지곤 했다. 말이 단체기합이지 나 하나를 해코지하려는 심보였다. “돈이 많아 대학 갔지?”라고 하며 자꾸 식식거렸다. 만년필 때문이란 걸 내가 왜 몰았겠나?
차차 ‘학적보유병’ 제도가 느슨해지자 나는 대대본부 작전과로 발령이 나더니 얼마 후 사단본부 법무참모부로 발령이 났다.
“아, 훗날의 인과를 알고 싶거든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곧 그것이며 응보는 내세보다 더 빨리 오는 것이다.”라고 한 사람이 중국 청나라 때의 포송령(蒲松齡)이었던가. 선임하사는 끝내 사고를 크게 치고 법무참모부로 끌려 왔다. 검찰관 중위 곁에 내가 배석했다. 선임하사는 고개를 숙였다.
어느 날 그 중위가 만년필을 보더니 눈이 둥그레졌다. 나를 데려온 사람은 바로 그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 나는, 가진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극구 사양하는 그에게 이 만년필을 떠맡기다시피 드렸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자마자, 파카 51보다는 훨씬 저렴한 새카만 서독제 만년필을 샀다. 무슨 브랜드인지는 모른다. 오직 공부뿐 그런 것엔 관심이 없을 때였다. 몸통 자체가 컨버터 식이지만 잉크가 새지 않았다. 공무원이 되어 직장에 나가니 책상마다 잉크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모나미 볼펜이 막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일반화되진 않았을 무렵이었는데 동료들은 철필과 볼펜을 겸용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쩐지 볼펜이 싫고 밉기까지 해서 철필을 쓰다가 슬그머니 만년필을 꺼내었다. 동료들이 보고는 “촉이 돼지발톱 같네.” “손타겠는데.”라고들 했다. 정말 손을 탔는지 잃어버렸다.
어느 날 한 행상인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의 가방에는 여러 가지 남성 액세서리가 있었지만 금빛 만년필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제 파카75 금장이라 했다. 촉은 14k, 뚜껑과 몸통은 여느 도금과는 다르게 14K 금을 한 꺼풀 입힌 거라고 했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돼지발톱 만년필을 잃어버리고 울적해 있던 중이라 할부로 준다기에 중값에 얼른 샀다. 뒷날 어린 딸아이가 촉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부산의 어느 백화점에서 촉을 갈아 끼웠다. 14K 금촉인지 아닌지 이제 와서 부쩍 궁금증이 나서 돋보기를 쓰고 봐도 14K라든가 585라든가 하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잉크를 넣는 장치도 은장으로 덮인 고무 튜브인데 고장이 나서 대구 중앙통 북성로 입구의 어느 노점 장인에게 수리를 맡겨 며칠 뒤에 찾았다. 지금 같으면 금촉인지 아닌지 확인도 않고 촉을 갈고 노점의 장인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울역에서 시간이 많았다. 만년필 가게에서, 잃어버린 돼지발톱 만년필을 빼닮은 만년필을 발견하고서는 얼른 샀다. 펠리칸이란 브랜드이다. 퇴직을 하고 대학원에 다닐 때 잃어버렸다. 똑 같은 걸 다시 샀다.
잃고 나면 허전하고 마음 아파서 인젠 더 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만년필 가게를 보게 되면 그냥 못 간다. 그러다 보니 수집가처럼 몽블랑 워터맨 등 수십 자루를 갖게 되었다.
학창시절에는 왼쪽 가슴에서 별처럼 빛났던, 사회에 나와서는 안 포켓에서, 가끔은 포켓치프 자리에서 나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며 숨죽여 기다렸던, 지금은 서재에서 하루 종일 퍼질러 있는 만년필들. 나와 함께한 부침(浮沈) 표박(漂泊)의 그 세월은 만년필마다 다르지만 울고 웃던 정분이야 어찌 다르랴! 그러나 헛된 일이 여기 있지. 어차피 내가 먼저 이승을 하직하게 될 텐데 그러고 나면 여태껏 남아 있는 이 만년필들 또한 언젠가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겠지. 그 끝없는 유전(流轉)을 생각해 보면 어찌하여 인간의 일과 하나도 다른 데가 없단 말인가!
오늘따라 국화 만년필이 왜 이리도 생각날까. 가만히 아버지를 불러 본다. “아부지요!”
콩쿠링 만년필
김소운의 「외투」라는 수필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불란서제 ‘콩쿠링’-, 요즈음 ‘파카’니 ‘오터맨’ 따위는 명함도 못 들여 놓을 초 고급 만년필이다. 당시 육 원圓하는 이 만년필은 일본 안에도 열 자루가 없다고 했다.” 소운의 이 말은 만년필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브랜드에 따라 일률적으로 만년필의 우열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콩쿠링이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고급인지는 모르겠으나 파카와 워터맨 브랜드의 만년필이 콩쿠링 브랜드의 만년필보다 고급이 있을 수도 있다. 예컨대 파카에도 보석이 수두룩이 박힌, 지금 시세로 4천만 원이 넘는 만년필이 있다.
1970년대 중엽 소운의 이 글을 읽을 당시 나는 파카75 만년필을 갖고 있었다. 14k 금촉에다가 몸통 전체가 금도금이로되 일반 도금과는 달리 금을 한 꺼풀 입힌 거라고 했다. 내 형편에 과분한 줄 알지만 만년필을 안 포켓에 꽂고 있으면 행복했다. 중앙에서 시도 간부 회의가 있을 때면 버젓이 왼쪽 가슴에 꽂고 회의장에 나가곤 했다. 그런데 김소운의 이 글을 읽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유럽에 출장 갔을 때 시간을 내서 가이드를 앞세우고 만년필 가게를 두루 탐색해 보았으나 가게 사람들은 콩쿠링이라는 브랜드 이름조차 아는 자가 없었다.
퇴직을 하고 나니 만년필 쓸 일이 거지반 줄었다. 원고를 워드프로세서로 하고부터는 만년필 쓸 일이 더욱 없어졌다. 낙서나 한다. 그러나 만년필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 나의 이 파카로는 콩쿠링을 이길지 비길지 모른다. 참패할지도 모른다. 소운의 말이 자꾸 생각나서 서울에 있는 유명한 만년필 가게에 물어 봤으나 외국의 만년필 상인처럼 고게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러나 소운의 「외투 」 와 겨룰 만한 글이 없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