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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되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이 축일을 지내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한 것이다.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는 예언대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다(복음).
제1독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복음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1,1-16.18-23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모님께서 평생 동정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 성체 영할 때 한 번만 ‘아멘!’하면 끝일까?
ENA 병영 드라마 ‘신병’은 군생활을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신병 박민석 이병은 사단장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최일구 상병은 그에게 신병 놀이를 하며 괴롭힙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는 아닙니다. 장난 수준입니다. 박민석 이병은 사단장 아들임에도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소속된 부대에서 전역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단장인 아버지는 그를 육군 본부로 보내고 싶어 합니다. 박민석 이병은 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부대원들에게 정이 들어 그들과 끝까지 가기로 합니다.
얼마 후 박민석 이병과는 반대되는 신병이 들어옵니다. 성윤모 이병입니다. 그는 밖에서 불법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다 도피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고문관인 척하며 자기를 괴롭히는 이들을 일일이 적어서 밤에 중대장실에 넣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욕이라도 하는 선배가 있다면 영창을 갑니다.
그러다 우연히 박 이병이 그가 전화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가 일부러 자해까지 하며 군 생활을 편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박민석 이병은 일부러 그를 불러내어 따끔하게 혼을 냅니다. 그가 사단장 아들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윤모는 또 쪽지를 써서 중대장실에 넣습니다. 하지만 중대장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만큼 참아줬으면 됐다고 하며 심하게 그를 야단칩니다. 또 부대원들은 전화부스에 휴대전화를 놓고 그가 통화하는 것을 녹음시켜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한 그를 재판받게 합니다.
군에 머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군대에서 요구하는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몸만 머무는 것이지 진짜 군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군에 들어가겠다고 받아들였다면 그 군에서 요구하는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군대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데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 탄생 축일입니다. 성모님을 부를 때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서 동정이신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왜 평생 동정이시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개신교 측에서는 한결같이 예수님의 친동생들이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사촌들도 당시 다 형제라고 했었음에도 예수님의 형제들을 굳이 친형제라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모 마리아를 보통의 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평생 동정이라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낳으시기까지 동정이심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여기서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동정성이 없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동정성은 남편을 받아들일 때 사라집니다. 남편을 받아들임은 남편의 ‘뜻’을 받아들임입니다. 결혼하면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는 신부는 없습니다. 그러면 순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동정성은 한 남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자기 비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하느님의 뜻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집인 에덴동산에서 살게 됩니다.
성모님은 기계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는 도구가 아니셨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떠나갔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나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동정성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뜻을 봉헌한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낳으면 더는 동정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까요? 아이를 낳고 끝내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모기와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는 부모는 자녀를 계속해서 낳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번 따르기로 했다면 계속 따라야 옳은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르면 그 누군가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누군가 안에 들어가 삽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잉태하시게 된 것은 곧 하느님 안에 사시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곧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10)
이것이 아버지 앞에서 그리스도의 동정성입니다. 순결함입니다. 이 순결함이 아버지 품 안에 머물게 함인데 그 순결함을 잃으면 동시에 아버지 품 안에서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은 곧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되셨음을 의미하는데, 이 동정성이 깨지면 또한 하느님 품에서 떠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남편을 받아들여 그의 뜻 안에 머물러야 옳겠습니까?
내가 누군가의 뜻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번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에덴동산에 살게 된 순결한 성모 마리아는 에덴동산에 머물기 위해 그 순결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럴 분이셨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셔서 당신 품에 살게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실수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군생활이 끝나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군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를 영할 때 한 번만 ‘아멘’하면 끝일까요? 끊임없이 자신 안의 성체에 '아멘'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나라에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아멘 한 것은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곧 에덴동산에 살게 됨이었습니다. 들어가면 끝일까요? 성모님의 아멘, 곧 동정성은 그 이후로도 영원히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정성, 곧 아멘은 혼인 서약과 같이 계속 이어져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평생 동정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성체를 영할 때 하느님의 뜻인 성체가 나를 계속 지배할 수 있도록 평생 동정의 마음으로 아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 쓰는 방법을 배운다, 책을 열심히 읽는다, 일상의 삶을 잘 관찰한다 등등의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직접 쓰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이 어떻게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완벽하게 하겠다고, 책만 읽고 글 쓰는 방법만 배우고, 일상 삶을 관찰만 하다 보면 그냥 그 모습에 멈출 뿐입니다. 알면 알수록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습니다.
글을 정말로 잘 쓰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강론을 위해 쓰는 원고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평소에 많은 책을 읽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일상의 삶을 잘 관찰하십니다. 여기에 깊은 묵상도 하니 깊이 있는 글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글을 혼자만 간직하지 마시고, 출판해서 신자들에게 나눠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일에 앞서 잘 준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실 ‘준비’라는 이름으로 ‘두려움’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서 계속 미루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이는 준비가 아니라 두려워서 고백하지 못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종종 두려워하지 말라고, 또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맞이합니다. 성경에 성모님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던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공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출생 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족보를 제시합니다. 그 역사가 영광과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함께 공존하는 역사이지요. 그 모든 시간이 지나야 메시아가 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잘 따라야 합니다. 파혼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예수님 잉태 때의 많은 일들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두려워하지 않고, 또 걱정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성모님 탄생 축일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라. 그대 앞에 떨어지는 한 가닥 빗줄기조차도 그대가 모든 것을 사랑하면 그 속에 담긴 신비도 보리라(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