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훌륭한 그릇이었으나 간통과 살인자로 다윗의 그릇은 산산조각이 나고 더러운 그릇이 되었고 사나운 그릇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그릇을 버리지 않고 새로 지으셨다. 마가라는 일꾼도 사도 바울에게 불신임받는 버림받은 그릇이었다. 그러나 그 그릇은 다시 회복되었다. 하나님은 죄인이라고 버리지 않는다. 성도가 죄를 지었다고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손길을 확신하라.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나를 손대고 있다는 것과 깨어진 그릇도 사용하신다는 사랑을 믿으라. 우리는 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내 부서진 그릇을 고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그 태도가 사실은 절망적이다. 그 토기장이의 손에 내 깨어진 그릇을 맡기라. 이것을 못하면 우린 영영 깨어진 채로 버려지는 것이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도 산산조각 난 그릇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깨어진 그릇을 안고 맡길 때 주님은 그를 새롭게 지어주셨다. 가룟 유다 역시 베드로와 같이 깨어진 그릇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깨어진 그릇을 주님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그래서 영영히 깨어진 그릇으로 종말을 맺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그릇인가?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는 그릇인가? 깨어졌는가? 그렇다면 다시 지음받기 위해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내 부서진 것 그대로 받으소서’라고 회개해야 한다.
당신의 깨어진 그릇을 주님께 맡기며 새로 지음을 받고 있는가 ?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 본문 : 창2:7
G. 지멜은 말하기를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러나 이와는 반댈 인간의 불가능성도 역시 무한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가능성과 더불어 한계성을 지닌 복합적 숙명의 존재임을 시사해 주는 말입니다. 본문은 우리 인간들이 원래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말은 우리 인간이 상대적이며 한계적인 존재임을 나타내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흙으로 빚어 지으신 존재하는 말씀 속에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와 가치는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욥33:6)
1)하나님의 작품인 인간 우리는 인간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경의 증언 속에 내포된 진리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즉 인간은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실 때 마치 예술가가 조형물을 만들 듯 '흙을 뭉쳐'(욥10:9) 만들고 "가죽과 살로…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주셨다(욥10:11)고 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최고의 조형물인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인체의 구조와 기능은 영원한 최첨단의 기술의 결과요 예술적으로도 우리 인체는 최고의 걸작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이 부여받은 이성과 인격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신적인 작품입니다. '하나님께 지으심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2)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인간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의미는 단지 지음 받은 존재라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음 받은 존재'는 무엇이든 그 지음 받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절대적 존재가 아닌 '…을 위해 있는' 상대적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때는 단순히 감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건축물의 중심 장식물로 조형물을 만듭니다. 그래서 뭇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예술성을 인정받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도 사람을 창조 세계의 중심 작품으로 세워 놓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창조 세계의 중심이요, 꽃이요, 열매입니다. 이에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배해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선과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고 관리하여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지음받은 인간 본연의 의무입니다. 이와 같은 의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닫게 되고 또 행하는 것이 성도로서의 삶이요, 청지기적 삶입니다.
2. 한계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창3:19)
1)한계를 지닌 인간 그 다음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뜻은 인간이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흙처럼 영원하지 못하고 변질, 변형되는 것이 우리 인간과 그 삶입니다. 바위나 쇠도 언젠가는 부스러져 티끌로 변하고, 녹슬고, 퇴화되듯 인간 육체의 강건함에도 그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티끌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 희망과 의지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의와 선에 대한 행동 능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악과 싸우다 궁극적으로 승리한 자연인은 없습니다. 죄요, 불법이요, 불의하며 추한 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이길 능력의 한계로 인해 악에 굴복하는 것이 인간입니다(롬7:19)
2)나약한 인간 또 흙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흙처럼 환경에 나약합니다. 쉽게 부서지고 상하고 오염됩니다.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욥4:19). 또한 소시적에 품었던 기백과 순수함도 환경에 의해 오염되고 파괴당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몸과 정신은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한계성으로 인해 인간은 영원한 대상자를 찾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지으시고 보호하시고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찾아 의지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3.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딤후2:20,21)
1)질그릇 같은 인간 바울은 자신을 '질그릇'으로 비유합니다(고후4:7). 깨지기 쉽고, 천한 흙으로 만든 그릇이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으니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내용물에 의해 가치가 결정됩니다. 보물을 담은 그릇은 '보배함'이 됩니다. 체호프는 '인간만이 인간 자신의 행복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한계를 지닌 존재이나 그 삶의 내용에 의해 고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먹고, 자고, 생식하고, 일하고, 즐기며 사는 삶은 동물들보다도 못한 삶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 나라의 '그릇'이 되어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 진리와 사랑을 소유한 삶은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는 그릇이 되도록 자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2)천국 보물과 같은 성도들 인간은 그 사명적 가치의 가능성만 무한한 것이 아니라 존재적 가치의 가능성도 무한합니다. 여러분 국보급 도자기는 애초에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입니까? 바로 흙으로 조형된 것입니다. 다만 도공이 유약을 입히고 무늬를 넣고 몇 천도나 되는 화덕에서 구워낸 결과 나라의 보물로 그 가치가 승화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보물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진리로 연단 받아 옛 사람 아담 안에 있던 '흙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15:50)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4:24)을 입은 것입니다. 흙으로 만든 조형물이 국보급 보물로 변화되듯 하나님은 죄인을 택하사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성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한계를 지닌 질그릇 같은 운명과 가치에서 벗어난 존재입니다. 창조의 예술가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걸작품이요 보물이 된 것입니다.
결론 흙의 가치는 다양하고 무한합니다.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인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도 그 스스로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무한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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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영광과 복음과 선교와 설교와 목회와 치유와 상담과 지혜와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고 성경의 도구로 쓰임받고 제자양육의 도구로 쓰임받고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귀하신 말씀주심에 너무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길이 형통하시길 기도합니다
주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지오메딕스 회원님, 만경강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