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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일본은 청일전쟁 결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요동반도(遼東半島) 영유를 확정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 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 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 하려 하였다.
러시아는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러 정권이 수립되고 조선으로부터 수많은 이권을 챙겨간 러시아는 1896년(건양 1) 압록강 유역의 삼림벌채권을 손에 넣고,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의 타협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
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러·일이 1896~1898년 사이에 맺은 베베르·고무라(Weber·小村)각서, 로바노프·야마가타(Lobanov·山縣)협정 및 로젠·니시(Rosen·西)협정 등이 바로 이것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북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란(義和團亂)이 만주로 파급되자(1900),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난이 진압된 뒤에도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내각에서는 영일동맹론과 러일 협상론으로 대응 방안이 갈렸으나, 결국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러시아는 러불동맹의 적용 범위를 아시아로 확대시키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이 해 4월 러청철병협정(露淸撤兵協定)을 맺어 스스로의 약세를 드러내었으나, 제1차 철병까지만 이행했을 뿐, 2차 철병 약속을 저버리고 봉천성(奉天省) 남부와 길림성(吉林省)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가 동아시아정책을 밀고나간 것은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얻은 베조브라조프(Bezobrazov, A.M.)를 비롯한 강경파가 실권을 장악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이처럼 만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1903년 5월에는 삼림벌채권과 그 종업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약 100명의 군대를 보내 한·만국경의 요지인 용암포를 점령했다.
이어 5월에는 자국민 40명을 거주하게 하고 포대를 설치한 다음, 대한제국정부에 러시아 삼림회사에 용암포를 조차해줄 것을 강요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압록강 유역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뒤 압록강 삼림 채벌권 실행을 명목으로 용암포(龍巖浦)를 군사기지화 함으로써 한국에 대해서까지 야욕을 노골화하였다.
이에 팽창을 두려워한 일본·영국·미국은 용암포점령의 불법을 내세워 개항을 요구함으로써 한국정부는 다시 조차를 취소하고 개항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어 8월 위테(Witte, S.Y.)가 해임되고 여순에 극동총독부가 신설되는 등 이른바 신노선(New Course)에 의한 대일적극정책이 전개 하였다.
베조브라조프 일파의 이와 같은 모험주의노선이 전쟁을 촉발시켰다는 견해는 일본의 북진정책,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견해와 함께 러일전쟁의 원인에 대한 전통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아시아로 돌리려는 독일외교를 비롯한 국제역학 관계와, 혁명이 우려되던 국내 위기를 밖의 문제로 희석시키려 했던 차르(tzar)의 계략이 전쟁의 원인으로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1903년 8월부터 개전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여러 차례 만주와 한국 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인 교섭을 가졌다.
일본의 기본입장은 한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하는 대신,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권은 인정하되, 기회균등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자국의 만주독점권과 아울러 중립지대(한국의 39° 이북) 설정 및 한국령의 전략적 사용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일본의 8월 제1차 협상안은 청·한 양국의 독립 보전과 상업상의 기회 균등, 한·만에 있어서의 러·일의 상호 이익보장 등을 골자로 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10월에 만주를 일본의 세력 범위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에서의 일본의 군사활동 제한 및 39° 이북의 중립지대 설정을 주장하였다.
고무라(小村壽太郞) 외상은 10월 1차 수정안에서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을 더욱 분명히 하여, 일본의 대한 파병권(對韓派兵權)은 물론 한·만 국경에 중립지대 설치를 요구하였다.
12월 중순에야 제시된 러시아의 반대 제안은 청나라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한국 북부의 중립지대 설정 및 한국 영토의 전략적 사용 불가 등 한국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일본과 러시아가 우리나라에 침을 흘리고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리고 영린은 북수사와 평산 감영을 오가거나 가끔씩 의암선생을 만나고 있었는데, 돌연 의암이 제천으로 귀향을 했다.
그런 가운데 12월 하순 일본의 2차 수정안과 1904년 1월 초 러시아의 회답 에서도 다 같이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함으로써 양자의 타협 여지는 거의 없어졌다.
1904년 1월 일본의 어전회의에서는 개전 론이 유력하였고, 최후 제안에 대한 러시아의 회답이 알려지기도 전인 2월 임시각의를 통해 개전이 결정되었다.
러일전쟁은 2월 8일 밤 여순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고, 일본은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군함을 격침시킨 다음날인 10일에야 선전을 포고하였다.
여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平八郞)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고,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였다.
그 무렵 평산 감영에는 평양으로 부터 급한 파발이 왔다.
장산곳에서 일본군함을 발견 했는데, 얼마 후 남포항에 입항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다시 파주 감영에 알려야 하는데,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영린에게 평산군수가 영린을 적임자로 보고 말을 내주었다.
영린이 말을 달려 개성을 지날 때에는 비가 장대가 같이 쏟아지고 있었고 임진강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눈을 뜰 수가 없게 쏟아지고 있었다.
영린은 건너편 강가에 있는 나루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생리 현상을 처리하겠다는데 영린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비가 그칠 무렵 배가 건너와 강가에 배를 댔다.
“네 이놈 나라의 화급을 요하는 일이 있어서 급히 가는데 미적거려서 일을 그르치게 하느냐, 빨리 건너자.”
서둘러 노를 짓지도 않았고 속 타는 영린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천천히 노를 젓고 있었고, 나리 잘못했습니다.
송도 관아로 향하는 영린은 말의 속도를 사공이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속도로 송도 관아 까지 갔으니 말꼬리에 매달려 끌려온 사공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하나 아직도 뱃사공인 상민을 대우해주지 못할 정도로 영린은 보수적 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말이 나왔는데, 대답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러나 위에서는 아무런 초치를 취하라는 명령이 없었다.
일본군은 6월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총병력이 15개 사단에 이르렀고 9월에는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
노기(乃木希典) 대장 지휘하의 제3부대는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고. 이어 3월의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전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전시 약 120만 명의 일본군은 3개 보병단과 13개 예비여단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사상자는 68만 9000명(전사자 13만 5000명)이었다.
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8척, 경순양함 17척, 구축함 19척, 어뢰정 28척, 포함 11척을 보유하였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함정이 여순에 기항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4척, 어뢰정 37척, 포함 7척으로 이루어졌다.
개전 직전 러시아 극동군의 배치 상황은 정규군 9만 8000명과 총 148정의 기관총 대포8문 이였다.
철도수비대 2만 4000명은 동청철도 연변의 광활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고, 전쟁 초기 시베리아 철도의 군 수송은 하루 6량에 불과하였다.
만주로 이동한 120만의 병력은 대부분 1905년에 이동한 것으로, 총 40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일본은 재정 면에서 1년간의 전비를 4억 5000만 원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년 동안 19억 원을 지출하였다.
또, 전선의 확대로 보급로가 길어져 전술상의 취약점이 노출됨으로써 러시아의 주력부대가 하얼빈에 집결, 반격할 기회를 노리는 형세였다.
그리고 일본 토건회사는 철도부설공사에 필요한 역부를 모집해 달라고 경기도 시흥군에 독촉을 하였고, 이에 7월 9일 수천 명의 주민들은 군청에 모여 이를 거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관련 벼슬아치들이 뇌물을 받거나 임금을 착취하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다.
군민들은 일단 해산하였으나, 민용훈 등은 9월 6일 광명리에서 다시 집회를 열고 43개동 집강의 연서로 군수의 죄상을 열거한 소장을 만들어 관찰부에 올렸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순사를 파견하고 9월 16일 안종덕을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하여 자초지종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공사관에서는 동대문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중 1개 소대를 급파하고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헌병 주재소에 수감하였다.
9월 20일부터 10월 8일까지 계속된 안핵사의 조사 결과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민용훈, 성우경, 하주명, 민대개 등 1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수감 되었다.
이에 일본은 결정적인 승기(勝機)를 잡은 뒤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전투가 바로 리바우(Libau)항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느라 전력과 전의가 극도로 떨어진 발틱함대와의 대마도해전(對馬島海戰)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고, 보급도 비교적 원활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일본은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공사를 빨리 마무리 하려고 서둘러야 했다.
러시아와의 대결에 있어 일본을 적극 지원한 세력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이 점에서 구 소련학자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영국과 미국의 전쟁을 일본이 대리로 수행했다고 주장하였다.
1904년 4월과 1905년 5월 사이에 영·미가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게 제공한 총 4억 1000만 달러의 차관 중 약 40%가 일본의 전비로 충당되었다.
영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러시아에 대한 제3국의 석탄 공급 및 원조제공을 저지하는 등 일본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면 중립을 지키겠다고 공언했던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루스벨트(Roosevelt, T.)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가 만일 삼국간섭 당시처럼 일본에 간섭할 경우, 즉각 일본편에 가담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또한 당사국인 러·일에 대해서는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키지 말며, 북중국을 포함한 전중국의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기득권을 부정하였다.
이는 일본이 개전과 동시에 루스벨트의 하버드 동창생인 가네코(金子堅太郞)를 미국특사로 파견, 미국의 친일여론을 주도하게 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한편,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는 전쟁으로 인한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프랑스는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하고 4월 8일 영·불협약(Entente Cordiale)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로서는 발틱 함대에 대한 석탄 공급 등 동맹국으로서의 편의제공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면서도 1904년 1월 일본 쪽에는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으며, 실제로 개전과 더불어 중립을 표방하였다.
독일의 이러한 태도가 러일전쟁을 부추긴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더욱이, 발틱 함대에 대한 연료보급이라든가, 도거뱅크(Dogger Bank)사건 때 보인 독일의 노골적인 대러시아 지지 등은 열강의 불신을 가중시켰다.
결국, 러일전쟁은 영·불협상과 영·러협상을 맺게 하여 대독포위망(對獨包圍網)을 구축, 마침내 제1차세계대전에 이르는 과도적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1904년 8월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한일협정은 재정과 외교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일본인 고문과 일본이 추천하는 서방국 고문에게 일임한다는 내용으로, 사실상의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끝에 일본 제일은행권이 법화로서 정식 공인되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어서 경제권이 속박 되었다.
8월 9일에는 한참 전쟁 중인 일본과 러시아가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회담을 시작했다.
같은 달 눈치 빠르게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가진 송병준 윤시병 등 친일파가 유신회를 일진회로 개칭을 했고. 22일에는 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두 달 뒤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러일전쟁의 참전하기 위에 에스토니아탈린을 떠나 중국의 뤼순으로 출항을 했다.
그리고 단월에서는 러일전쟁 중인 갑진년 12월 15일 근호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영준은 광국을 물골안을 들려서 영훈에게 알리고 북수사에 가서 영린을 불러오라고 하면서 보냈다.
근호는 감겨오는 눈은 다시 한 번 뜨고 보았으나 영린은 보이지 않았다.
영준도 근호가 영린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선민이 세상을 떠난 지 삼년이 안 되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서 조금 덜 감긴 눈을 쓸어서 감기게 했다.
그리고 장포수가 근호가 입고 다니던 도포를 들고 동쪽에서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 북쪽을 향해 서서 왼손으로는 옷의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그리고 대문 앞 채반에는 저승사자가 먹고 가라고 밥을 지어 세 접시 담아 놓고 술 석잔 창호지 한권 북어 세 마리 집신 세 켤레 동전 몇 개를 얹어 놓고 촛불을 켜서 놓여졌다.
그리고 얼굴에 창호지를 덥고, 홑이불을 덮고 병풍을 둘러 쳤다.
지금에 동두천 답거리에서 젊은 나이에 단월로 와서 집안을 부흥시키고, 증손 까지 보았으니 호상이라고 했다.
복(服): 영준과 금선 등은 모두 머리를 풀고 남자들은 맨발로 백색의 홑두루마기를 입되 왼쪽은 소매에 팔은 넣지 않아서 왼쪽 어깨를 드러냈다.
신(神)이 의빙(依憑): 근호가 생시에 쓰던 그릇에 술 미음 과일 등을 소반에 놓아 근호의 시체 동쪽으로 어깨 닿는 곳에 놓았다.
고묘(告廟): 장포수를 시켜 사당 밖에서 ‘근호질불기감고(某疾不起敢告)’라고 말로 사당에 고하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영린이 어두워진 동내 입구 산모롱이를 돌아서니 멀리 화톳불이 보였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마당가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화톳불 가에 서있던 몇 사람이 알아보고 영류가 왔네 했다.
근호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영린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확 쏟아져 나왔다.
뒤 따라 들어온 광국도 무릎을 꿇고 한참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전이 차려지고 올 사람이 다 왔으니 다음날 습에 들어갔다,
옷깃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여미고, 고름은 감기만 할 뿐 매듭은 짓지 않았다.
다음날 목수를 불러서 관을 만드는 치관(治棺): 을 시작했다
개영역(開塋域)이라고 영준이 (執事者) 박진사와 함께 젊은 산역꾼 20여명을 데리고 벗고개 선산으로 갔다.
선산은 근호가 자신과 후손을 위하여 몇 년 전에 사 놓았는데 사기전에 박길연이 미리 산세를 살펴보고 괜찮다는 의견이 있어서 산 것이었다.
선산을 내려오면서 영준은 산위를 여러 번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광목을 여러 필 준비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는 어머니 장사 때에는 줄을 걸어 상여를 당겼으나 이번엔 광목을 걸어서 당겨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새로 주과포혜(酒果脯醯)로 상을 차려 제(祭)를 올리고 나서 소렴을 시작했다.
눈은 명목(瞑目)으로 싸맨 다음 머리는 두건(頭巾)·복건·망건(網巾)으로 쌌다.
영좌를 꾸미는데 교의에는 명주실 세 가닥으로 사람이 이불을 덮고 있는 형상의 혼백(魂帛)을 호상을 맡은 박진사가 접어서 얹고 명정(銘旌)도 만들어 세워 놓았다.
먼저 굄목을 들여다 놓고 그 위에 널을 올려놓고 마른 수건으로 널의 안쪽을 닦아내고 숯가루를 고루 펴고 창호지를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칠성판(칠성판(七星板) 송판으로 만들되 5푼이면 적당하고 판면에 구멍을 뚫어 북두칠성 모양을 표시한다)을 깔고 지요를 편 다음 베개를 놓았다.
중목(中木) 3개를 상 ·중 ·하로 널 위에 걸쳐 놓고, 홑이불을 깔고, 먼저 횡교 2폭 반을 중목 위에 안배하고 다시 종교를 폈다.
대렴금을 깔고 도포를 놓고 시신을 모셔놓고 발을 가린 다음 머리를 가리고 왼쪽을 여미고 다시 오른쪽을 여민 다음 종교 양 끝을 셋으로 쪼개어 묶었다.
영준을 비롯한 자손들이 손을 씻고 제물을 차려놓고 곡을 하고 홑이불 자락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시신을 들고 중목을 빼고 서서히 늦추어서 시신을 관안에 안치했다.
그리고 모두 곡을 하는 가운데 천개(관뚜껑)를 덮고 은정(나무못)을 박고 노끈 오십 발로 내 결관(관을 묶는)을 한 다음 초석으로 관을 감싸고 다시 동아줄로 외 결관을 하였다.
천금(안쪽을 흰색 밖은 검은색)을 덮고, 명정을 덮은 다음 구의(柩衣:관을 덮는 것으로 무명베로 만든, 겉은 검정색, 안은 붉은색의 관을 덮는) 를 덮고 병풍으로 가렸다.
짚 베개 앞에는 소 방석(素方席)을 놓아 문상객의 조석(弔席) 하는데, 쓰였다.
대렴 후에는 대곡(代哭)을 그치고 일출시와 황혼에 곡하는데 이때는 배례(拜禮)는 하지 않고 다만 입곡(立哭)을 했다
※성복 전에는 손님이 와도 빈소 밖에서 입곡(立哭)하고 상제와의 정식 조문은 하고 있지 않다가 성복 후에 비로소 조례(弔禮)가 이루어진다.
영준 영린을 비롯한 남자들을 동쪽으로 늘어섰고, 금선을 비롯한 여자들을 서쪽에 늘어섰다.
행전을 쳤는데 굴관에서 제복 행전까지 거칠고 다듬지 아니한 극추생마포(極麤生麻布)를 사용했다.
상장이라고 대나무 지팡이를 거꾸로 집고, 왕골로 삼은 관구를 신었다.
손주 며느리 효진은 포총을 하고 개암나무비녀인 진계(榛筓)를 꽂고 백목으로 만들어 베로 싼 소(素)족두리를 쓰고 수질 산수가 없는 요질 교대 소구(집신)를 신었다
기호에게로 입양 간 영훈은 한 단계 낮은 상복을 입었고 하묵과 광국도 상복을 입고
영준 형제는 “망극 합니다” 또는 “애감(哀感)합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이런 절차가 끝난 뒤에 손이 일어서면 영린 형제는 일어나서 다시 재배하고, 손은 답배한 뒤에 영준 형제는 여막에서 곡을 하면서 보내고 손이 문을 나간 뒤에야 그쳤다.
그날 사람을 시켜서 장을 보아오게 하였고, 산에는 생회를 사다가 흙과 섞어서 내일 장사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를 했다.
사당에 고하는 절차를 끝내고 상여를 꾸미고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매고 동내를 한 바퀴 도는 댓 돌이를 하고 나서 저녁 신시(申時)에 조전(祖奠)을 거행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등에 업힌 어린아이 까지 한 그릇씩 나누워 주었다.
그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해 근동에 모든 아이들이 손에 보자기를 들고 모였다.
죽은 사람이야 어찌 되었건 아이들에겐 떡 받아먹는 즐거운 날이었다.
11살 먹은 재홍이도 중단 앞자락에 떡을 받아가지고 싱글거리며 효진 에게 로 왔다.
다음날 아침상식이 끝나고 건을 쓴 먼촌 친척들이 절관 한 끈을 좌우와 뒤 아홉이 들어서 영구를 옮겼다.
영준과 영린 이하 줄줄이 곡을 하며 뒤따랐고, 빈소에서 나올 때는 문 밖에 놓은 바가지를 발로 밟아 깨뜨렸다.
혼백상자를 의자 위에 봉안하고 음식을 진설한 다음 발인제를 지내고 제물을 상두꾼에게 먹였다.
요령잡이 까지 스물일곱이나 되는 상두꾼들에게는 광목으로 만든 중단을 입히고 행전을 치고 건까지 씌웠다.
요령잡이가 요령을 흔들어 상두꾼을 세우는데 작은 사람은 앞쪽에 큰사람은 뒤쪽에 세웠다.
그리고 딸랑딸랑 요령을 한 번 더 흔들자 모두 상여를 멨고, 요령잡이가
“어 호, 어 호, 너 우리 넘자 어 호.” 상두꾼 들은 발을 좌우로 제자리걸음을 하며 상여를 좌우로 흔들 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어 호, 어 호, 너 우리 넘자 어 호.” 요령잡이가 다시 한 번 선창을 해도 제자리에서 발을 맞추어 몸을 좌우로 흔들어서 상여를 흔들었다.
“어 호, 어 호, 너 우리 넘자 어 호.” 이번에는 상여 앞쪽을 맨 상두꾼들이 무릎을 굽혀 상여가 집을 향해 인사를 했다.
“저승길이 멀다드니.” “어 호, 어 호, 너 우리 넘자 어 호.” “대문 앞이 저승 일세.”
사설은 대개 회심곡에 나오는 걸 두서없이 요령잡이가 선소리를 매겼다.
무당 불러 굿을 한들, 굿 덕이나 있을 소냐. 맹인 불러 경 읽어도, 경 덕이나 있을 소냐. 이도저도 소용없어, 부천님 전 찾아간다. 공양미를 씻어 담고, 향촉과일 마련하고,
양친부모 모셔놓고, 천년만년 살렸더니, 인간운명 장난인가, 황천으로 날 부르네.
염라대왕 명을 받은, 일직 사자 월직 사자, 쇠방망이 둘러매고, 오랏줄을 움켜쥐고, 대문간을 들어서며, 어서가자 재촉 하네. 여보시오, 사자님 네, 내말잠시 들어보소.
염라대왕 명령이라, 지체할 수 없다지만, 그 아무리 엄중해도, 잠시조금 앉으시오.
허기지고 시장한데, 요기라도 하시지오. 입던 옷도 갈아입고, 신발이나 고처신고, 부모처자 하직하고, 이웃친구 작별하고, 황천으로 가는 길로, 뒤따라서 가오리다.
부모처자 이별하고, 형제자매 뒤에 두고, 일가친척 헤어지고, 이웃친구 작별하고,
정든 내 집 하직하고, 살 든 마을 멀리하고, 까막까치 지저귀는, 북망산천 나는 가네. 허탈하고 허망하여, 시름없이 돌아와서, 집안으로 돌아오니, 저승차사 기다리네.
저승차서 인도받아, 대문 밖을 썩 나서니, 곡소리가 진동하고, 애통지통 통곡 하네.삼혼칠백 떠나가고, 육신만을 남겼더니, 향수에다 목욕시켜, 황천수의 갈아입혀,
입도 막고 코도 막고, 귀도 막고 눈도 막고, 악수 면포 덮은 뒤에, 온필 베로 감싼 뒤에, 속 매끼로 스물한 번, 겉 매끼로 다섯 매끼, 서른두 매끼 묶어, 칠성판에 눕혀놓고.
뚜껑 닫고 은정박아, 동아줄로 결박 지어, 꽃상여에 올려놓고 발인제를 올리누나.
서른셋의 상두꾼이, 요령소리 발맞추어, 가내 가네, 나는 가네. 북망산천 찾아 가네. 어화세상 벗님네야, 꽃 진다고 서러마라. 꽃은 지어 낙화 되도, 명년 봄에 다시피고.
강남 갔던 제비들도, 명년삼월 오련 만은, 우리인생 죽어지면, 어느 시절 다시 오리.
부모형제 있다지만. 어느 누가 대신 가며, 처자식이 있다지만, 대신갈이 그 누구며,
일가친척 많다지만, 어느 누가 대신 가며, 이웃친구 많다지만 대신갈이 그 누구며,
슬프고도 원통하다, 인생무상 허무해라, 마지막에 떠나는 길, 노자나마 보테주소.
잘 있어라 잘 있어라, 북망산천 나는 가네, 어화세상 벗님네야 백발보고 웃지 마소.
금잔디를 이불삼고, 송백 숲을 울을 삼고, 푸른 하늘 지붕삼고, 산새소리 노래삼아,
자는 듯이 누었더니, 살은 썩어 물이 되고, 뼈 는 썩어 흙이 되어, 사후청산 일 분토라. 인간세상 태어나서, 희로애락 고해 속에, 한평생을 마친 후에, 마지막에 가는 길에,
이다지도 허무할까, 무상할 사 일장춘몽, 어화세상 벗님네야, 아귀다툼 아예 말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고. 부부간에 화합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어지소서 착하소서, 베풀면서 살아가소. 아귀다툼 하지 말고, 정답게 살아가소.
그렇게 출발한 상여는 두 번을 쉬면서 노제(路祭)를 지내고, 그때 마다 상두꾼들은 술을 한잔씩 마셨다.
벗고개 아래에 도착하여 세 번째를 쉴 적에는 조금 더 오래 쉬면서 상여 앞에다 광목으로 된 뱃줄을 매고 산을 오를 준비를 하였다.
한편으로는 혼백을 교의(交椅)에 모시고 제물을 진설 했다.
하관시간을 오시로 모두 다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지관이 큰소리로 말했다.
“을미 생, 정미 생, 기미 생, 신미 생, 계미 생, 즉 양 띠들은 하관을 보지 마시오.
영린도 양띠어서 하관을 보지 못하고 멀리 물러나 있어야 했다.
그리고 회를 섞은 흙을 영준을 필두로 한 삽씩 횡대위에 뿌려졌다.
한자 가량의 흙이 덮이고 회를 닫기 위해 여섯 명이 상두꾼들이 상여 맬 때 썼던 연추대나 대나무를 하나 씩 가지고 들어섰다.
선소리를 하는 사람이 가장 늘어진 소리로 선소리를 했는데 대답이 없다
“에 허리 달 궁.” 연추대나 긴 막대를 두 손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다 내리면서 회를 닫기 시작했다.
“여보시오 벗님네들.” “에 허리 달 궁.” “이내 말씀 들어 보소.” “에 허리 달 궁.”
“아버님의 뼈를 모고.” “에 허리 달 궁.” “어머님이 살을 빌어.” “에 허리 달 궁.”
그렇게 회심곡 사설을 선소리로 매기는데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영좌의 동남쪽에 제상을 마련하고 그 서쪽에는 벼루와 필묵을 마련한 다음 제상의 맞은편에는 대야와 수건을 놓고, 영준이 그 앞에 북향을 향해 섰다.
維 歲次 甲辰 十二月 丁丑朔 二十六 乙巳日 幼學 金榮準 敢昭告于 土地之神 今爲 學生
유 세차 갑진 십이월 정축삭 이십육 을사일 유학 김영준 감소고우 토지지신 금위 학생
安東金公 窆玆幽宅 神其保佑 俾無後艱 謹以 凊酌庶羞 祗薦于神 尙 饗
반우(反虞)라고 영달이 신주를 영좌에 모시고 곡을 하면서 앞장서서 집으로 향하고 영준을 비롯한 상제들이 뒤를 따르며 개울을 건너거나 갈림길에서 크게 곡을 하였다.
바로 상을 차리고 초우(初虞)제를 지내는데, 영달이 초우 축을 읽었다.
維 歲次 甲辰 十二月 丁丑朔 二十六 乙巳日 孤哀子 榮準 敢昭告于 日月不居 奄及初虞
유 세차 갑진 십이월 정축삭 이십육 을사일 고애자 영준 감소고우 일월불거 엄급초우
숙흥야처 애모불령 근이 청작서수 애천협사 상 향 곡이 끝으로 철상을 하고 바로 여기저기 누워서 골아 떨어졌다.
닷 세 동안 장사를 지내느냐고 모두 지처서 편한 자리를 찾아 잠이 들었고 간간히 코고는 소리도 들렸다.
다음날 상식을 올리고 재우(再虞)는 강일(剛日)이어서 다음날인 유일(柔日)일에 재우를 지내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그동안 고생을 해준 것에 대한 답례로 대접을 했다.
그리고 광국의 결혼도 다시 할아버지의 삼년상 후로 미루어 졌다.
첫댓글 왠 장례식이 복잡해요 요즘 같으면 질식 할것 같네요. 하기야 요줌도 장례식이 제일 길고 복잡하긴 하지만요.